[장수여행] 장수 방화동가족휴가촌과 마실길, 그리고 역사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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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따라 트레킹/발길 머무는 곳에

[장수여행] 장수 방화동가족휴가촌과 마실길, 그리고 역사탐방..

by 정산 돌구름 2012. 8. 20.
[장수여행] 장수 방화동가족휴가촌과 마실길, 그리고 역사탐방..

 

여행일 : 2012년 8월 17일 ~ 8월 19일

소재지 : 전북 장수군 번암면 사암리(방화동로)

여행코스 : 방화동가족휴가촌~의암사~의암송~장수향교~창계서원~팔성사~수분령~장수마실길~물빛공원~죽림정사(백용성성지)

방화동가족휴가촌

   전국 8대 종산에 속하는 장안산 기슭에 조성되어 있으며, 덕산용소에서는 방화동계곡으로 연계되는 코스에 자연학습장, 모험놀이장

   등의 산림욕장 시설이 자리하며 깨끗한 계곡을 따라 기암절벽, 다양한 수목 등의 수려한 자연경관으로 가족단위 주말 또는 단기체류형

   으로 최적의 조건을 갖춘 매력적인 휴양처이다.

   특히 방화동 계곡은 주변 자연수림과 길게 굽이쳐 흐르는 물길이 어우러져 천혜의 경관을 이루고 있다.

   지역의 특성상 지형적으로 해발 500m이상의 고지대에 위치해 기온이 낮고, 1,000m가 넘는 큰 산들로 둘러쌓인 전국 최초 국민가족

   휴양지이기도 한 방화동가족휴가촌은 웰빙시대에 맞춰 자동차 야영장, 일반 야영장, 가족 놀이장, 수변피크닉장과 취사장을 비롯한

   각종 편익시설을 갖춘 전국 최고의 오토캠핑 시설 등이 방화동 계곡을 끼고 있다.

   - 위 치 : 전북 장수군 번암면 방화동로 778번지(사암리 625) 일원

   - 조성 면적 : 25ha, 건물 - 관리사 1동 (117.28㎡) 

   - 개 장 일 : 1992. 7. 1(국내최초, 교통부령)

   -  특징

      전국 8대 종산에 속하는 장안산의 울창한 수림과 수려한 계곡을 따라 넓고 아늑한 조성

      여름에는 피서지, 가을에는 억새와 단풍으로 유명한 4계절 아름다운 휴양지

      맑고 깨끗한 계곡을 끼고 조성된 세련되고 깨끗한 숙박시설과 부대시설, 고속도로와 인접한 편리한 교통

      울창한 숲속의 산책로를 따라 삼림욕을 하면서 만나는 기암괴석과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영화 '남부군' 촬영지 덕산용소에 다다름

   - 시설물 : 관리사무실(1동 117.28㎡), 전망대(1동 15㎡), 공중화장실(5동 374.1㎡), 가족놀이장(1개소 1,230㎡), 취사장(3동 195㎡),

     수변피크닉장(1개소 1,590㎡), 자동차야영장(1개소 11,130㎡), 청소년야영장(1개소), 상가(식당,매점 167㎡), 수도시설(1식 45㎡)

   - 휴양림 입장료 : 2,000원(청소년, 군인 1,500원, 어린이 1,000원, 65세 이상 면제)

   - 시설사용료 : 소형텐트(5인용 이하) 5,000원, 대형텐트(6인용 이상) 10,000원, 평상(09:00~익일 08:00) 10,000원

     * 예약은 받지 않으며 당일 선착순 사용 가능

 

방화동가족휴가촌의 초입.. 

 

밤8시30분이 다되어 도착하였다..

한 살림을 옮겨 놓은 듯, 텐트 2개동에 냉장고와 선풍기까지...

 

충분히 준비한 술과 안주로 늦은 밤까지 술파티는 계속된다..

 

이른 아침 장수관광을 위해 장수로 넘어가는 길목... 당재..

 

멀리 장안산에서 이어지는 긴 산줄기..

 

장수로 넘어가는 당재터널...

 

19번도로를 따라 의암 주논개사당이 있는 의암공원에 이른다..

 

수변데크 산책로... 충혼탑과 의암사가 바라보인다..

 

문화마당 야외무대 너머로 다목적체육관...

 

의암사 입구...

 

논개사당 의암사(義岩祠)

1981년4월1일 전북기념물 제46호로 지정되었으며, 남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논개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장수삼절(長水三節)로 알려진 논개는 조선 중기의 의기(義妓)로, 진주병사 최경회의 사랑을 받았다 한다.

임진왜란 때 끝까지 저항하던 진주성이 함락되자 왜장들은 촉석루(矗石樓)에서 주연을 베풀었다.

기생으로서 그 자리에 참석한 논개는 성의 함락과 군관민의 죽음에 대한 울분을 참지 못하고 왜장 게야무라 후미스케(毛谷村文助)를

바위 위로 유혹해 껴안은 채 남강 아래로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그가 뛰어내린 바위를 훗날 의암이라 하였다. 

 

논개생향비(論介生鄕碑)..

헌종12년(1846년)에 현감으로 장수에 온 정주석은 이 곳이 논개가 자란 고장임을 기념하여 이 비를 세웠는데,

사당 건립 당시 발굴되어 경내에 옮겨져 있다. 비문에는 "矗石義妓論介生長鄕竪名碑"라고 씌어 있다.

장수군에서는 매년 9월 9일에 논개를 추모하기 위해 논개제전(論介祭典)을 열고 있다..

 

 

 

논개(論介)..

성은 주씨(朱氏)이고, 본관은 신안(新安)으로 전북 장수군 임내면 주촌마을 태생으로 전해지는데 출생일에 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논개에 대한 기록은 광해군 때인 1621년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於于野談)>에 전하는데 "진주의 관기이며 왜장을 안고 순국했다"는

간단한 기록만 남아 전한다. 그때문에 논개는 기생이었다고 알려지게 되었다.

구전에 의하면 원래 양반가의 딸이었으나 부친 주달문이 사망하고 집안에 어려움이 겹쳐 가산을 탕진하자 장수현감 최경회(崔慶會)의

후처가 되었다고 전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5월 4일에 이미 서울을 빼앗기고 전라도 지역에서 고경명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우다 전사하자 최경회가 의병장으로 나서 싸우게 되었다.

경상도에서 진주성만이 남아 왜적과 싸우고 있었는데 최경회는 의병을 이끌고 제1차 진주성 싸움을 지원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1593년 최경회는 경상우병사로 임명되어 싸웠으나 수많은 군관민이 전사 또는 자결하고 28일만에 진주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이를 제2차 진주성 싸움이라고 하는데 이때 최경회는 남강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1593년 7월 일본군 왜장들은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촉석루(矗石樓)에서 주연을 벌이는데 논개는 최경회의 원수를 갚기위해 기생으로

위장하여 참석하게 된다. 이 자리에 있던 그녀는 계획대로 열손가락 마디마디에 가락지를 끼고 술에 취한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

(毛谷村六助)를 꾀어 벽류(碧流) 속에 있는 바위에 올라 껴안고 남강(南江)에 떨어져 적장과 함께 죽었다.

훗날 이 바위를 의암(義岩)이라 불렀으며, 사당(祠堂)을 세워 나라에서 제사를 지냈다...

 

의암사를 둘러보고..

 

바로 옆 충혼비..

한국전쟁시 향토를 지키다가 전사한 528위의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하여 장수군민의 성금으로 이 비를 건립하였다고 한다..

 

충혼비에서 바라본 의암공원 두산제의 수변데크 산책로와 다목적체육관...

 

의암루...

 

장수군청 현관 주출입구의 의암송..

1998년12월23일 천연기념물 제397호로 지정된 장수군청 현관 바로 앞에서 자라고 있는 의암송은 나이가 약 400살 정도로 추정된다.

높이 9m, 가슴높이의 둘레 3.22m의 크기로 줄기는 한 줄기이며, 땅으로부터 1m부분에서 줄기가 시계방향으로 뒤틀어져 나선형을

이루고 있어 용이 몸을 비틀고 있는 모양과 비슷하다. 나무 윗부분은 줄기가 여러 개로 갈라져 우산 모양을 하고 있어 매우 아름답다.

지상 3.5m되는 부분에서는 두개의 큰 가지가 남북방향으로 발달되어 있는데, 북쪽가지의 직경은 80㎝, 남쪽가지는 50㎝정도이다.

의암송이라는 이름은 임진왜란(1592년) 때 의암 논개가 심었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라 하나 확실한 것은 아니며, 지역 주민들이 예전의

장수 관아 뜰에서 자라는 이 나무에 논개를 추모하는 뜻에서 붙여놓은 이름으로 추정된다...

 

군청 민원실 앞 보호수인 은행나무..

1577년경 장수현감 최경회가 부임당시 현재의 군청사 뒤에 있던 옹달샘의 물이 청결하고 시원하여 샘의 주변을 정비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식재하였다고 전해진다.. 나무높이 22m, 둘레 7m, 수령 430여년으로 추정한다..

 

군청 뒤편의 장수향교..

태종7년(1407년)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配享)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장수면 선창리에 건립되었던 것을

35년후인 세종23년(1441년) 지금의 위치로 옮겨 세워 현재까지 창건 당시의 건물 양식대로 보존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향교로

건물의 구조가 다포형이라는 특수성을 지니고 있다.

고종14년(1877년)에 현감 홍우정(洪佑鼎)이 중수하였으며, 1935년에 중수하고, 1970년·1973년·1975년에 각각 보수하였다..

 

보물 제272호로 지정된 대성전은 조선시대 향교 건축의 대표적 건물의 하나로 보존되고 있다.

낮은 석축 기단 위에 세운 맞배지붕으로 정면 3칸, 측면 4칸으로 되어 있다.

주초석은 화강암을 다듬어 원형 2단두로 만들었고, 그 위에 두리기둥을 세웠다.

대성전의 좌우에는 양합각에 방풍판을 달았으며 처마는 정면을 겹처마로 후면을 홑처마로 처리하였다.

다포집 계통의 포작형식이며, 2출목의 구성으로 되어 있다.

쇠서에는 연꽃무늬를 새기고 그 상부는 봉두로 처리하였다. 공포와 공포 사이에는 화반 2개씩을 올려놓았다.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4현(宋朝四賢),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명륜당 향교는 지방 국립학교로서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하여 우리나라와 중국의 성현을 모시고 그의 학덕을 숭모하였으며,

명륜당에서는 그의 학덕과 인격을 교학했다. 장수향교 명륜당은 대성전과 함께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

명륜당은 전북 문화재자료 제28호, 정충복비는 전북 문화재자료 제38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 1명이 정원 3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 공자에게 지내는 제사)을 봉행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하고 있다..

 

정충복비각..

임진왜란 때 정경손의 투철한 책임감과 향교를 지킨 의행을 기리기 위해 헌종12년(1846) 3월 장수현감 정주석이 비를 세웠다.

이 비석은 장수향교 입구 우측에 정면과 측면 각1칸의 팔작지붕으로 된 보호각 안에 있다.

임진왜란 때 왜장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의 부장 안코쿠시(安國寺惠瓊)가 장수에 침입하였을 때, 원노인 정경손(丁敬孫)이 교복을

입고 문묘 앞에 꿇어앉아 경서를 외우며 말하기를 “만약 향교에 들어오려거든 먼저 내 목을 베고 들라.”고 하였다.

이에 왜군들도 그의 기개에 감복하여 ‘본성역물범(本聖域勿犯)’이라는 신표 즉, “이곳은 성전이니 침범하지 말라.”는 쪽지를 주고 물러가

왜군 후속부대의 피해를 당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비석의 전면에는 "호성충복정경손수명비(護聖忠僕丁敬孫竪名碑)"라는 명문이 음각되어 있다.

이 비석은 장수향교 입구 우측에 정면과 측면 각1칸의 팔작지붕으로 된 보호각 안에 있다.

매년 음력 3월15일 그의 얼을 기리는 제례를 지니고 있는데, 이 비는 장수의 삼절(三絶)로 이름나 있다...

 

창계서원..

장수군에서 가장 오래된 서원으로 1984년4월1일 전북 문화재자료 제36호로 지정되었다.

숙종21년(1695년)에 황희(黃喜)를 배향하기 위해 창건하였다.

고종5년(1868년)에 철폐되었으나, 1955년 복원하고 지방 유림의 공의로 황희, 황희의 아들 황수신(黃守身), 유호인(兪好仁),

송탄(松灘) 장응두(張應斗)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배향하였다.

1968년에 무명재(無名齋) 강백진(康伯珍)을 추가 배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는 옛 서원터에 1948년에 세운 비와 상현재(尙賢齋)가 남아 있다. 상현재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이다.

매년 7월10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은 4변(籩)4두(豆)이다. 유물로는 황희의 영정 등이 남아 있다.

창계사(創溪祠)는 정면 3칸, 측면2칸 맞배지붕으로 안에는 익성공(翼成公) 방촌(尨村) 황희(黃喜)를 주벽으로 하여 열성공(烈成公) 나부

(懦夫) 황수신(黃守身), 뇌계(雷溪) 유호인(兪好仁), 송탄(松灘) 장응두(張應斗), 무명재(無名齋) 강백진(康伯珍) 등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창계사 바로 앞 왼쪽에는 창계서원의 유지비가 세워져 있다..

 

팔성사(八聖寺)..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의 말사로 신라 진평왕 24년, 백제 무왕 3년(603년)에 신라 해공대사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진평왕 말엽 원효 의상 거주 당시 진평왕이 중수하였고, 세종 때 성주스님에 의해 재중수 되었다.

<신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장수에는 빼어난 명산이 많으며 그중에서도 성적산, 영취산, 백화산, 덕유산을 들 수 있는데 산의 위치는

덕유산이 현의 북쪽 50리에 영취산은 현의 동쪽 10리 성적산은 현의 서남방 15리에 있으며 백화산은 장계현에 있고 육십현(六十峴)은

현의 북쪽 40리, 수분현(水分峴)은 현의 남쪽 25리라 했으니 현재 팔공산(八公山) 팔성사(八聖寺)는 정확하게 현의 서남쪽 15리 성적산

운점사 터에 자리하고 있다.

<신동국여지승람>의 운점사 기록에는 “운점사는 성적산에 있다. 신라 진평왕이 중수하였으며 원효(元曉)의 도량이었다.

만향점(萬香岾)이 있으니 원효와 의상이 이곳에서 강법을 하면 기이(奇異)한 향기가 남북에 가득하니 만향점이라 이름하였다한다.

본조 세종 때 승(僧) 성주(省珠)에 의해 다시 한번 중수되었다”라고 되어 있다.

팔성사를 중심으로 7명의 제자들이 각각 1개씩 암자를 세워 7개의 부속암자가 있었으나, 조선시대에 이르러 원래의 팔성사는 폐허가

되고, 부속암자 중 하나가 현재의 팔성사가 되었으며, 7개 암자 중에서는 성불암(成佛庵)만이 현존한다.

이후 조선 초기와 중기에 정심(正心)·영관(靈觀)·선수(善修) 등 큰 스님이 머물렀다.

1974년 혜전스님이 대웅전을 복원하였고, 1991년부터 비구니 법륜(法輪)스님이 극락전(極樂殿), 성적선원(聖跡禪院), 삼성각(三聖閣),

운점루(蕓岾樓), 만향대(萬香臺) 등 복원 대작불사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물로는 대웅전과 삼성각·극락전·성적선원·운점루·망향대·요사 등이 있다

 

최근에 조성한 석불입상, 그 옆에는 윤장대라 불리는 황금마니차...

 

극락전(極樂殿)은 1991년에 세웠으며 정면 5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지은 목조 기와집이다...

인공 기단 위에 원형주초를 놓고 원형기둥을 세우고 주심포형식으로 지었다. 주련은 걸려 있지 않으며, 내외부에는 단청이 그려져 있다.

인법당을 해체할 때 1438년(세종20) 성주(省珠)가 중건하였다는 상량문이 발굴되었다..

 

두 강줄기가 나눠지는 수분령(水分嶺)..

장수읍에서 남원 방향 19번 도로로 약 8㎞ 정도 가면 소백산맥에서 노령산맥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보인다.

이 줄기를 수분재(水分峙)라 하며 재 옆에 마을을 수분마을 또는 물뿌랭이 마을이라고 부른다.

예전엔 재의 중앙에 외딴집이 한 채 있었는데, 비가 오면 용마루를 경계로 남쪽으로 떨어지는 지붕 물은 섬진강으로 흐르고,

북쪽으로 떨어지는 지붕 물은 금강으로 흘렀다고 한다...

 

수분마을 밑에는 장수읍과 번암면 경계지점인 해발 600m의 수분령이 있는데 여기에서 섬진강과 금강의 두 강줄기로 나눠진다.

예전에 여기는 남원 등지를 통하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주막이 많아 지나는 길손들의 애환이 서린 휴식처였다.

이 주막터는 계속 명맥을 유지해 오다가 1990년대 들어 헐렸는데, 1996년 그 자리에 가든과 주유소가 들어앉아 휴게소가 되었다.

수분마을 뒷산 계곡을 따라 2.5㎞ 올라가면 금강의 발원처인 뜬봉샘(飛鳳泉)이 있는데, 차가 한 대 정도 겨우 지나갈 만큼 길이 좁다.

산 중턱 임도에 차를 세워놓고 걸어 올라가야 하는데, 최근에 마을부터 샘까지 나무계단을 깔고, 군데군데 조망대를 설치 중이다...

 

뜬봉샘에는 조선 태조 이성계와 얽힌 설화가 있다.

이성계가 천지신명의 계시를 받으려 이곳에 단을 쌓고 백일기도에 들어갔는데 100일째 되는 날 봉황새가 무지개를 타고 나타났다.

황급히 봉황새가 뜬 곳을 가보니 풀숲으로 가려진 옹달샘이 있었다. 이후 봉황새가 떴다고 해서 샘 이름을 뜬봉샘으로 지었다고 한다...

 

다시 돌아온 방화동..

 

잠시 휴식을 취하고..

 

점심식사 후 오후 일정..

 

오토캠핑장 뒤편을 따라가면..

 

다리를 건너고..

 

장수마실길 1코스...

 

용소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오른다..

 

백두대간길..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길..

 

산림문화휴양관..

 

숲속의 집...

 

산림욕장..

 

계속 이어지는 계곡..

 

어아 니티니는 거대한 방화폭포..

 

그 위용이 대단하다..

 

110m의 높이..

 

방화동의 전설...

 

 

 

 

산림욕장 나무데크에서 바라본 폭포..

 

 

 

수준점이 있는 용림교를 건너고..

 

임도가 끝나는 지점...

 

임도를 지나 계곡을 따라 1.2km를 더 가야 용소..

 

계곡을 옆에 두고 부드러운 오름은 계속된다..

 

잘 단장된 나무데크..

 

그 옆으로 흐르는 맑은 계곡의 풍경은 참으로 아름답다..

 

거대한 포말을 내며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아랫용소..

 

참으로 웅장하다..

 

아랫용소를 지나 잠시 오르면 윗용소..

 

그리고 널따란 암반위에는 바둑판..

 

용소 위로는 맑은 계곡이 계속 이어진다..

 

용소계곡을 따라 100m가량 오르면 정자 갈림길..

 

부드러운 산길을 따라 계속 오르면 덕산계곡..

 

밀목치에서 이어지는 덕산로인 742번 지방도의 종점...

 

바로 위에는 덕산저수지..

 

둑 높이기 사업이 한창이다..

 

지나온 용소계곡..

 

공사중인 덕산저수지...

 

강변길을 따라 한참을 가다가 되돌아왔다..

 

하봉으로 이어지는 장안산 줄기는 운무에 잠겨 보이지 않고..

 

다시 용소계곡을 따라 내려선다..

 

덕산계곡의 물놀이장.. 평상을 설치하고는 4~6만원의 사용료를 받고 있다..

 

내려서는 길목의 돌탑..

 

용소계곡을 건너 100여m 거리의 팔각정에 오른다..

 

잡목이 우거져 조망은 별로이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다시 오던 길로 내려선다..

 

다시 윗용소..

 

풍수한 수량..

 

아랫용소..

 

역시 거대한 물살..

 

용소를 지나 내려선다..

 

임도 종점..

 

산림욕장으로 이어지는 나무데크..

 

방화동 산림욕장 치유의 숲..

 

방화폭포가 바라보이고..

 

여전히 웅장한 폭포...

 

숲속의 집이 가까워지고..

 

다시 돌아온 오토캠핑장..

 

텐트에 돌아와 휴식..

 

하룻밤을 보내고 이른 아침, 7시가 채 못되어 나홀로 휴가촌을 빠져 나온다..

 

특산물인 사과와 한우..

 

한우랑 사과랑으로 표현되어 있다..

 

큰길로 빠져나와 번암면소재지 방향으로..

 

2010년8월19일에 개장한 장수군 번암면 동화댐 아래의 작은 공원인 물빛공원...

 

이른 아침이어서인지 조용하기만.. 

 

물레방아도 있고..

 

작은 시설물들..

 

바로 아래에는 백용성조사 탄생성지..

 

백용성의 탄생 유적지이자 사찰인 장안산 죽림정사..

백용성조사기념사업회와 백용성유훈실현후원회의 주도로 승려이자 독립운동가인 백용성의 유지를 기리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용성(1864~1940)은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불교계의 대표로 활동하였고, 불교의 대중화·생활화·지성화 운동을 전개하는

등 일제의 친일 불교화정책에 저항하였다.

1985년 백용성조사기념사업회가 백용성의 생가터와 주변토지를 매입하였고, 그 뒤 국비 및 지방비와 백용성유훈실현후원회 후원금 등을

모아 생가를 복원하고 여러 건물을 세워 성역화작업을 시행하였다.

경내에는 목조로 지은 생가를 비롯하여 7여래탱화와 69조사탱화 등을 봉안한 용성교육관, 3존불보살상과 5탱화를 봉안한 대웅보전,

백용성조사의 유품을 소장한 용성기념관, 충의원통문과 범종법고루 등이 있다.

백용성조사는 1864년5월8일(음) 번암면 죽림리에서 탄생 1940년2월23일 77세(법랍 61세)로 입적하였다.

1919년 기미년 3.1 독립운동에 불교계 대표로 참여하여 1년6개월 옥고를 치루었고, 10만여권의 경전과 어록을 발간하였다.

14세 남원 지리산 교룡산성 덕밀암으로 출가한 후, 19세 해인사에 화월스님을 은사로, 예율조사를 계사로 정식 출가하였다.

1911년 48세 선종교단 창건으로 대중불교 전파하였으며, 1927년「대각교의식」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찬불가를 도입하여 불교음악

현대화에 기여하였다. 경남 함양 백운산에 30정보의 화과원을 조성 선농일치사상 주창하였다.

일제의 일선(日鮮)동화정책과 민족문화말살책에 항거하여 비구승들과 함께 1926년5월과 9월 두차례에 걸쳐 건백서(建白書)를 제출하여

조선총독부의 불교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불교계의 정화운동을 전개함으로써 한국불교의 전통을 사수하고자 하였다.

또한, 조국과 민족에서 동떨어진 산중(山中) 불교가 아니라, 그와 아픔을 같이 하는 현실 불교를 추구하였다.

대각교를 개창, 한국 전통불교의 맥을 계승 고수하고, 민족문제의 해결을 모색한 민족 문화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로 일생을 시종하였다.

940년2월24일 목욕재계 한 뒤, 제자들을 불러 놓고 “그 동안 수고했다. 나는 간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77세(법랍 61세)에 입적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죽림정사 대웅보전..

 

생가..

 

불계연원비..

 

죽림정사의 전경..

 

도로가의 죽림정사 표지석..

 티파니에서 아침을(Breakfast at Tiffany'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