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기행] 유희춘의 사당, 미암사당(眉巖祠堂)-전남 민속자료 제3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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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기행] 유희춘의 사당, 미암사당(眉巖祠堂)-전남 민속자료 제36호..

by 정산 돌구름 2012. 6. 28.
[담양기행] 유희춘의 사당, 미암사당(眉巖祠堂)-전남 민속자료 제36호..

 

탐방일 : 2012년 6월 28일

소재지 : 전남 담양군 대덕면 장산리

미암사당 소개

  미암(眉巖) 사당(祠堂)은 조선 광해군 때 세워진 유희춘의 사당으로 2001년9월27일 전남 민속자료 제36호로 지정되었다.

  이 사당은 <미암일기(판본포함)(眉巖日記)>를 소장하고 있는 모현관의 뒤편에 있는데 미암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이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목조건물로 맞배지붕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종가댁의 동북편에 위치하고 있다.

  지면에서 2자 높이의 막돌허튼층 쌓기의 기단 위에 건축하였으며, 정면 퇴간의 처마단이 비교적 넓어 비바람을 막기에 좋도록 하였다.

  덤벙주초 위에 두리기증을 세우고, 주심포 형식의 가미된 초익공을 얹었다. 두공첨차는 경사부분을 쌍화두형으로 다듬었으며 그 위에

  소로와 주두를 얹었다. 주두 위에는 퇴보를 얹어 겨루하였는데 끝에 봉두형식으로 조식하였다.

  가구형식은 1고주 5량으로 양쪽의변주는 낮은 펴주를 세우고 몸체는 높은 고주를 세워 대들보 위의 동자주와 같은 높이를 이루었다.

  동자주와 고주 위에는 마루보를 얹어 포대공과 파련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지지하고 있다.

  지붕은 정면은 겹처마, 배면은 홑처마로 견실한 서까래를 설치하고 부연을 얹었다. 박공면에는 풍판을 대었다.

  정면 3칸 모두 출입문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가운데 칸의 문을 사용하고 있다.

  문틀 상단 외벽에 칸별로 6자×2자의 벽화가 3폭 그려져 있고, 건물 내외부 모두 단청이 되어있다.

  바닥에서 5자 높이에 3면 모두 신위단을 설치하였다. 신위단에는 미암이 1577년 치사하향(致仕下鄕) 하면서 선조가 친히 입혀주셨던

  방한복이 채상에 보관되어 있으며, 건물 서쪽 외벽에 미암이 친히 탔던 초헌의 틀이 매달려 있다.

  사면 모두 흙담장으로 둘러쌓여 있으며, 은행나무 한 쌍이 식재되어 있다. 출입문은 일주문으로 되어 있다.

  건물의 건축년대를 단적으로 알려주는 상량문이 상량에 없다. 기와를 깔아 끼우면서 명문이 있는 암막새 기와가 발견되었다.

  엄지 굵기의 양안이 솟아있고 양각으로 7행이 종서되어 있는데 추월산 진경사(辰慶寺)에서 만력 36년(1608)에 만든 기와임이 확인되어

  건축연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현종 10년(1669) 미암을 배향하는 백천사가 의암서원으로 사액되면서 미암사는 영구불천묘로 지정되었으며 현종은 예조전랑 강운규를

  내려보내 첫 제향을 지내게 된다.

  원래 사당에는 미암 유희춘의 미암일기(보물 제260호) 11책과 미암문집 목판(396판), 유품과 고문서, 전적 등이 함께 보관되어 있었다.

  1959년 미암사 앞 방죽호를 석조건물인 모현관이 지어지면서 이관되었다.

  1608년 사당이 지어진 후 현재에 이르면서 많이 쇠락되어 뒤쪽으로 물러나 틀이 일부 어긋났으나 전체적으로 튼튼하게 결구된 편이다.

  1991년 기와를 전면 갈아 끼웠으며, 내부의 바닥과 바깥 토방의 누습을 막기 위하여 시멘트로 보수하였다.

  미암사의 정면 외벽 문틀 상단에 그려져 있는 3개소의 벽화와 건물내부의 벽화는 미술사적으로 그 가치가 높다고 하겠다.

  외부벽화는 왼쪽에 백학도(白鶴圖), 가운데가 등룡도(登龍圖), 오른쪽이 봉황도(鳳凰圖)가 보인다

  백학도는 미암의 고고한 절의를 나타내고 있으며, 등룡도는 마침내 뜻을 얻어 현관으로 등용되는 화려한 관도를 상징하며,

  봉황도는 일가의 화려한 출세도를 상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흙벽 위에 흙회로 단장한 후 색채로 그렸으나 바깥에 오랫동안 노출되어 오른쪽의 봉황도는 일부가 떨어져 나가 있다.

  사찰의 외벽벽화는 많이 있으나 유교적 건축물인 사당에 벽화가 그려져 있기는 매우 드문 사례로 작품성보다는 희귀성이나 상징미가

  돋보여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유희춘이 후학을 양성하였던 연계정은 모현관 입구 왼쪽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유희춘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인중(仁仲), 호는 미암 또는 인재(寅齋)이고, 본관은 선산(善山),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순천에서 해남으로 이거한 유계린(柳桂麟)의 차남이며, 금남 최부(錦南 崔溥)의 외손이다.

  최산두(崔山斗)와 김안국(金安國)에게 배웠으며, 중종6년(1537)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다음해인 1538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성균관 학유, 예문관 검열, 홍문관 수찬, 무장현감 등을 지내다가 을사사화 때 파직되었다.

  명종2년(1547)에 일어난 정미사화(丁未士禍, 양재역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함경도 종성으로 이배되어

  19년의 유배생활을 보내게 되었다. 1667년 유배에서 돌아와 성균관 대사성·부제학·전라도관찰사·사헌부 대사헌·이조참판 등을 지냈다.

  담양의 의암서원(義巖書院), 무장(茂長)의 충현사(忠賢祠), 종성(鍾城)의 종산서원(鍾山書院)에 제향되었다.

  미암일기는 유희춘의 일기초(日記草) 11책으로 보물 제260호로 지정되어 있다.

  행·초서체로 책의 크기는 39.5 * 31.5cm이며, 원래는 14책이었으나 11책만이 남아 있다.

  그 일기의 일부는 필자의 문집인 <미암집>에 초록, 기재되어 있다. 지금 남아 있는 것은 1567년(선조 1년)10월1일부터 1577년5월13일

  그가 죽기 전일까지 약10년 동안의 친필로 쓴 일기인데, 약자·속자가 간혹 사용되었고, 오탈(誤脫)과 연문(衍文)이 간혹 개재해 있으며,

  중간에 파손, 마멸된 자구와 약간 빠진 것도 있다. 명종말 선조초의 여러가지 사건, 관아의 기능, 관리들의 내면생활, 본인이 홍문관·

  전라도감사·사헌부관원 등을 역임하면서 겪은 사실들을 비롯하여 당시의 정치·사회·경제상태와 풍속 등을 기록하였다.

  각 책의 기재 내용을 살펴보면, 제1책은 1567년10월1일~1568년3월29일, 제2책은 1568년3월29일~12월5일, 제3책은 1569년5월22일~

  12월30일, 제4책은 1570년4월24일~7월8일, 제5책은 7월9일~12월25일, 제6책은 12월26일~1571년12월3일, 제7책은 1572년9월1일~

  1573년5월26일, 제8책은 1573년6월1일~12월30일, 제9책은 1574년1월1일~9월26일, 제10책은 1575년10월27일~1576년7월29일,

  제11책은 부록으로서 저자와 그 부인 송씨의 시문과 잡록이 각각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조선시대의 개인일기로는 가장 방대한 것으로 사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크며, 이이(李珥)의 <경연일기(經筵日記)>와 함께

  <선조실록>의 기사사료가 되었다. 특히 동서분당전의 정계의 동향과 사림의 동태, 감사의 임체(任遞)와 순력(巡歷)및 감사의 직무 수행,

  경재소(京在所)와 유향소(留鄕所)의 조직과 운영, 중앙관료와 지방관과의 관계에 관한 중요한 자료가 많이 실려 있다.

  1936~1938년에 5책으로 조선사편수회에서 <조선사료총간(朝鮮史料叢刊)> 제8로 두주(頭注)·방주(旁注)를 곁들여 간행되었다.

 

최근에 건립된 미암유물전시관..

 

좌측의 쪽문..

 

모현관..

 

 

 

 

 

 

연계정..

 

유희춘이 후학을 양성하였던 곳으로 입구 연못 옆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방죽호의 석조건물 모현관..

 

1959년에 건축된 건물로 미암일기 11책과 미암문집 목판(396판), 유품과 고문서, 전적 등이 함께 이관하여 보관되어 있었다..

 

최근에 미암유물전시관에 모현관이 새롭게 건축되어 모두 이관하여 보관중에 있다..

 

미암사당 입구...

 

담장 너머 뒤편에 사당이 보인다..

 

전남 민족자료 제36호인 미암사당...

 

1608년 사당이 지어진 후 많이 쇠락되어 뒤쪽으로 물러나 틀이 일부 어긋나 있으나 전체적으로 튼튼하게 결구된 편이다..

 

1991년 기와를 전면 갈아 끼웠으며, 내부의 바닥과 바깥 토방의 누습을 막기 위하여 시멘트로 보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