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기행] 사적 제147호, 문경새재 조령관문(鳥嶺關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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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기행] 사적 제147호, 문경새재 조령관문(鳥嶺關門)..

by 정산 돌구름 2010. 7. 11.
문경새재 조령관문(鳥嶺關門)...

 

○ 탐방일 : 2010년 7월 10일

○ 소재지 : 경북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 주흘산

○ 조련관문 소개

  1966년3월22일 사적 제147호로 지정되었으며, 제1·제2·제3관문 및 부속성벽이다.

  옛날에 영남에서 서울로 가려면 문경에서 주흘산(主屹山)을 넘는 것이 보통이었다.

  신라 때는 주흘산의 한 갈래인 대촉산(黛蜀山)을 넘어 계립령(鷄立嶺)으로 다녔고 조선 전기부터는 조령이 개척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남으로써 이곳에 중국의 산해관(山海關)과 같은 방위시설을 축조해야 한다는 논의를 낳았다.

  현지 실측(實測)이 시행되고, 1594년(선조 27) 영의정 류성룡(柳成龍)이 구체적 방안을 제시하였다.

  충주 사람으로 수문장(守門將) 출신인 신충원(辛忠元)이 조정의 결정에 앞서 조령에 머물면서 단독으로 설관(設關)에 착수하였다.

  그가 이루어놓은 첫번째 시설이 지금의 중성(中城)이다. 중성은 1708년(숙종 34) 크게 중창(重創)되었는데, 이것이 곧 제2관문이다.

  숙종 때 제2관문에서 3km 떨어진 곳의 남적(南賊)을 방비할 제1관문을 세우고 초곡성(草谷城, 主屹關)이라 하였다.

  이들은 1890년대에 다시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육축(陸築)에는 홍예문(紅霓門)을 열고, 성벽에는 총구멍이 있는 성가퀴를 돌리고, 한쪽에 큼직한 수구문(水口門)을 뚫었다.

  숙종 때 조령 재 위에 북적(北賊)을 막기 위하여 조령산성을 쌓았다. 이것이 곧 제3관문으로 현재 경북과 충북의 경계에 위치한다.

  제3관문은 육축만 남겨 놓은 채 불타버려 1977년 복원하였다.

  제1·제2·제3관문은 양쪽 산의 골짜기에 위치하며 관문 좌우의 성벽은 능선을 따라 우회한다.

  높은 봉우리 6분선(分線)에서 끝났다가 다음 골짜기에서 다시 이어져 초곡·중성·조령산성의 성벽을 이룬다. 동화원(桐華院)을 비롯하여

  진(鎭)과 군창(軍倉)의 터가 있고, 경상감사(慶尙監司) 신임·후임자가 서로 교인(交印)했다는 교구정(交龜亭)의 터도 남아 있다.

  조령관문은 고려 태조가 경주를 순행차 고사갈이성을 지날 때 성주 흥달이 세아들을 차례로 보내어 귀순하였다는 전설이 서려 있다.

  삼국시대는 이보다 동쪽의 계립령이 중요한 곳이었는데  고려초부터는 이곳 초참을 혹은 새재라 하므로 조령이라 이름하고 중요한

  교통로로 이용하였다.

  선조25년(1592년) 임진왜란 때 왜장 「고니시 유끼니가」가 경주에서 북상해 오는 「카토오 키요마사」의 군사와 이곳 조령에서 합류

  했을 정도로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점이었다.

  이 때 조정에서는 이곳을 지킬 것이라 생각하였지만 신립장군은 때가 늦었으므로 충주로 후퇴하였다.

  문경에서 충주로 통하는 제1관문을 「주흘관」, 제2관문을 「조동관」 혹은 「조곡관」, 제3관문을 「조령관」이라 이름한다.

  또 이곳 「문경새재 과거길」은 예부터 많은 선비들이 청운의 뜻을 품고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향하였다.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은

  남쪽의 추풍령과 북쪽의 죽령, 그리고 가운데 새재가 있는데 영남의 선비들은 문경새재를 넘었다고 한다.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고 죽령을 넘으면 미끄러진다는 선비들의 금기가 있어 영남의 선비들의 과거급제를 위하여 넘던

  과거길이기도 하다..

 

 

주차장 옆 성조각전시관..

 

1981년4월25일 경북유형문화재 제145호로 지정된 신길원현감 충렬비(忠烈碑)..

임진왜란 때 문경 현감으로 있던 신길원은 일본군이 공격해 오자 관군을 거느리고 끝까지 싸웠으나 부상을 입고 순국하였다.

사후에 좌승지로 추증되었으며 그 충절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1706년(숙종 32) 충렬비를 세웠다.

표충사(表忠祠)에 배향하였고, 문경 향교 앞에는 충렬사를 건립하여 그의 충절을 기리고 있다.

충렬비는 원래 문경의 비석 거리에 세워져 있었다고 전하나, 문경읍 상리 문경초등학교 교문 옆에 충렬각을 세우고 그 안에 보관되어

오다가 비각은 허물어지고 비석만 남아 있었다. 1976년10월 문경시에서 제1관문(주흘관) 뒤에 비각을 건립하고, 비석을 옮겨 세웠다.

화강석으로 비부 높이 77㎝, 세로 86㎝, 비신 높이 190㎝, 너비 89㎝, 두께 27㎝이며 비개는 높이 77㎝, 가로 122㎝, 세로 63㎝이다.

1981년 비석을 다시 지금의 자리로 이건하고 보호각을 세우고 국역비를 다시 세웠다..

 

1991년 착공하여 1997년4월27일 개관한 옛길박물관..

부지 12,000㎡, 연건평 1,150㎡에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로, 3개 전시실과 1, 2층 중앙홀, 수장고, 영상실 등을 갖추고 있고,

야외전시장도 조성되어 있다. 총 4,200여 점의 유물을 전시한다.

관람시간은 오전 9시~오후 6시(동절기 오후 5시)이고, 1월1일과 매주 화요일에는 휴관한다..

 

제1전시실(주흘실)에는 문경관문, 영남대로, 문경의 전투, 경상감사 도임행차, 제2전시실(조곡실)에는 문경의 문화와 의·식·주생활,

집과 모둠살이, 신앙과 의례, 생업기술 등에 관한 소장품 및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제3전시실(조령실)에서는 굽다리접시·토기항아리 등 신라 토기가 주를 이루는 매장문화재, 1724년(경종 4) 도화서 화원 이치(李治)가

그린 옥소(玉所) 권섭(權燮) 영정(影幀), 선조(宣祖)가 홍인걸(洪仁傑)에게 하사하였다고 전해지는 어필(御筆) 및 홍인걸의 유품인 투구,

김승주 삼공신(三功臣) 회맹록(會盟錄) 판본(板本), 주두업(周斗業) 지석(誌石) 등에 관한 전시가 이루어진다.

야외에는 금학사지삼층석탑, 서낭당, 연자방아, 옹기와 장독대 등이 있다.

 

「문경새재 과거길」...

예부터 많은 선비들이 청운의 뜻을 품고 과거를 보러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은 남쪽의 추풍령과 북쪽의 죽령, 그리고 가운데 새재가

있는데 영남의 선비들은 문경새재를 넘었다고 한다.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고 죽령을 넘으면 미끄러진다는 선비들의

금기가 있어 영남의 선비들의 과거급제를 위하여 넘던 과거길이기도 하다.. 

 

문경새재 3관문중 영남제일관인 주흘관은 사적 제174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문은 남쪽의 적을 막기 위해 숙종34년(1708년) 축조되었고 구한말 항일의병 전쟁때에 일본군이 불태웠던 궁문을

1922년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흘관을 지나면 좌측에 옆 전나무 그루터기가 있고 "경북 100주년 타임캡슐광장"...

경북 개도 100주년을 기념하여 경북인의 생활풍습과 사회,문화등을 대표하는 자료와 물품 등 100개 품목 457종을 특수캡슐에 수장해

놓은 타임캡슐이 매설되어 있다. 개도 500주년이 되는 2396년에 개봉 400년전의 경북의 모습을 후손들에게 재조명해 보는 문화유산

전수사업으로 수장품을 화면으로 볼 수 있도록 영상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KBS 문경촬영장..

한국방송이 2000년에 특별기획 대하드라마 <태조왕건>의 제작을 위해 설치한 것으로 문경새재 제1관문인 주흘관 안쪽에 있다...

 

65,755㎡의 부지에 왕궁 2동, 기와집 42동, 초가 40동 등을 지은 국내 최초의 야외 촬영장이다.

문경새재에 촬영장을 설치한 이유는 촬영장을 병풍처럼 감싸는 조령산이 고려의 수도인 개성의 송악산과 흡사하고

후백제의 왕 견훤이 문경 가은에서 출생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태조왕건>, <제국의 아침>, <무인시대>, <대조영> 등의 드라마를 이곳에서 촬영하였으며,

2008년 <대왕세종>의 촬영을 위해 고려시대 건물을 헐고 조선시대의 건물로 개축하였다.

70,000㎡ 부지에 광화문, 경복궁, 동궁, 서운관, 궐내각사, 양반집, 초가 등 4구역에 130여 동의 세트 건물이 있다..

 

조령원(鳥嶺院)터...

고려시대에는 초점원(草岾院), 조선시대에는 조령원이라 하였는데 원(院)이란 지금의 여관과 같은 것으로 나그네들을 위한 것이다.

나라에서 파발을 두어 사명을 전하게 하고 원을 두고 상인과 여행자에게 혜택을 주었다.

그러나 공과 사의 구별, 상과 하의 구별을 분명하여 파발에는 각각 관리가 있어 그 직책에 힘썼으나 원에는 다만 밭을 주고

사람을 모집하여 그것을 주관케 했을 뿐이다. 평원이나 기름진 땅에 있는 원에도 주관하는 사람이 없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

하물며 산골의 험하고 메마른 곳에 있는 원에는 주관하는 사람이 없는 곳이 많았을 것이다.

사람이 상주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곳을 이용하는 여행객들은 많은 불편이 있었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이곳에 떡이나

식량을 가져다 놓으면 여행객들이 알아서 음식을 해 먹고 돈을 꼭 내고 갈 정도로 인심이 좋았다.' 라 한다..

 

조령산성 안에 조령원(鳥嶺院)과 동화원(桐華院)이 있고 현의 서쪽 15리인 이화령 아래에 요광원(要光院)이 있었으며,

지름재 밑에 관음원(觀音院)이 있고 현의 북쪽 4리에는 화봉원(華封院)이 있었다고 한다.

원터는 1977년8월과 12월 두차례에 걸쳐 발굴되었다.

이 발굴에서 고려시대 온돌 유지(遺址)가 나와 북방에서 시작된 온돌이 남점(南漸)하는 자료로 건축사에 중요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이외에도 와편(瓦片), 토기편(土器片), 자기편(磁器片) 어망추, 사름파리어음, 숫돌 수정편(水晶片), 철재 화살촉, 청동머리꽂이, 철재가위,

담배대, 부시, 손칼, 엽전마령(馬鈴), 말발급쇠징, 자갈마제도구, 화금, 문고리 등이 출토되었..

 

새재주막은 조령원에서 용추로 오르다 보면 왼편에 있는 초가집으로 지금은 건물만 남아 있지만 지난 93년까지 장사를 했던 곳이다..

 

조선시대 영남에서 청운의 꿈을 품고 한양을 오르던 선비와 전국을 누비던 상인들 그리고 갖가지 사연을 품고

새재길을 넘나들던 사람들이 여행의 피로를 풀고 정분을 나누던 곳이다..

 

교구정지(交龜亭址)는 조선시대 새로 도임하는 경상 관찰사와 이임하는 관찰사가 관인을 인계하던 곳으로 교구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교구정은 문경관문보다 약200년이 앞선 1484년 성종때 문경현감이던 신승명(愼承命)이 구전으로 내려오는 팔왕폭포 위쪽에 건립했으나

오랜 세월 속에 훼손되어 지금은 건물의 형태와 규모는 알 수 없고 주춧돌만 남아 옛 정취를 말해주고 있다... 

 

교구정은 조선말까지 있었으나 항일의병전쟁 때에 일본군이 불태웠다고 전한다. 현재 사적지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조선전기의 문신인 김종직은 교구정의 아름다움을 시로 읊었다..

 

KBS사극 태조왕건의 궁예의 최후 촬영지인 용추...

 

제2관문인 조곡관(鳥谷關)...

선조 27년(1594)에 충주인 신충원이 축성하였으며 중성(中城)이라고도 한다....

 

숙종조에 관방을 설치할 때 옛 성을 개축하였으나 관(關)은 영성(嶺城 3관문)과 초곡성(草谷城 1관문)에만 설치하고

이곳에는 조동문(鳥東門)을 설치하였다. 1907년 훼손되어 1975년에 복원하였다.

이렇게 복원한 문루를 옛 이름 '조동문'이라 하지 않고 조곡관(鳥谷關)이라 개칭하였다...

 

누각은 정면3칸, 측면2칸이며 좌우에 협문이 2개가 있고, 팔작지붕이며 홍예문은 높이 3.6m, 길이 5.8m이다.

대문은 높이 3.6m, 폭 3.56m, 두께 11m이다.

좌우의 석성 높이는 4.5m, 폭 3.3m, 길이 73m이고, 좌우에 부속된 산성이 높이 2m, 폭 2~3m, 길이는 동측이 400m, 서측이 100m이다..

 

조령제3관문인 조령관..

숙종 때 조령 재 위에 북적(北賊)을 막기 위하여 조령산성을 쌓았다. 이것이 곧 제3관문으로 현재 경북과 충북의 경계에 위치한다...

 

제3관문은 육축만 남겨 놓은 채 불타버려 1977년 복원하였다..

경북 문경과 충북 충주 경계를 이루는 조령관은 비가 올 때 용마루에서 남쪽 기왓골을 타면 흘러서 낙동강으로 들어가 남해로 빠지고

북쪽 기왓골을 타면 한강으로 접어들어 서해로 유입된다..

 

조선초 중추부지사를 지낸 김종직이 남긴 「새재를 지나가는 길에」라는 시비...

「나라님 부름 받아 새재를 넘자니 봉우리 꼭대기에 겨울 빛이 차갑구나.

벼슬길로 돌아가는 부끄러운 이 마음 개울 바닥 뒹구는 마른 잎 같아라.

대궐 안에 아부꾼들 멀어지면 조정엔 오가는 말 화락하리라.

근심과 걱정으로 십년을 보냈건만 날뛰는 금수무리 잡아내지 못하였네.」.. 

 

새재의 산신각...

 

조령(鳥嶺)의 유래...

백두대간의 조령산과 마패봉 사이를 넘는 이 고개는 옛 문헌에는 초점(草岾)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조령(鳥嶺)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어원은 풀(억새)이 우거진 고개,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또한, 하늘재(麻骨嶺)와 이우리재(伊火峴) 사이에 있다고 하여 새(사이)재 혹은 새(新)로 된 고개라고 해서 새(新)재라고도 한다.

조령은 조선시대에는 영남과 한양을 잇는 중요한 길목으로 영남대로라 불렀으며 군사적요충지로서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