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성기행] 성덕과 홍장설화 심청전의 원류, 성덕산(聖德山) 관음사(觀音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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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기행] 성덕과 홍장설화 심청전의 원류, 성덕산(聖德山) 관음사(觀音寺)

by 정산 돌구름 2010. 7. 2.

성덕과 홍장설화 심청전의 원류, 성덕산(聖德山) 관음사(觀音寺) 이야기..

 

탐방일 : 2010년 7월 1일

소재지 : 전남 곡성군 오산면 선세리

성덕산 관음사 소개  

 관음사(觀音寺)는 1729년(영조5) 백매선사가 쓴 관음사사적에 의하면,

 백제 분서왕3년(300) 성덕보살이 낙안포(지금의 벌교)에서 금동관세음보살상을 모셔다 절을 짓고 이름을 관음사라 하였다고

 한데서 비롯된다.

 창건 뒤 성공스님이 성덕의 상을 만들려다가 생각을 바꿔 관음상을 모시고 성덕산 관음사라 했다고 전한다.

 관음사는 조선 이전의 기록에서는 보이지 않고 『동국여지승람』에서 성덕산 관음사를 기록하고 있어 늦어도 고려시대에는

 관음사가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과 『범우고』에는 “전라남도 옥과 성덕산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가람고』는 “현의 남쪽 30리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태고사사법』에는 “곡성군 화면 성덕산에 있고 대본산 송광사의 말사”라고 적혀 있다.

 관음사의 연혁을 보면 고려시대에는 1374년(공민왕 23)에 원통전을 중수하는 등 5중창을 하였으며, 선원을 중심으로 큰스님이

 많이 배출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임란 때 피해를 입고 거의 폐허화되었으나 신희, 담원, 담정 세 스님만은 끝까지 절을 지켰다. 

 1604년(선조 37) 5년에 걸쳐 모든 건물을 복원하였다. 관음상을 봉안하고 있던 원통전은 임진왜란의 화를 입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후 1611년(광해군 3), 1612년에도 중창하였고, 1636(인조 14)과 1718년(숙종 44)에는 원통전을 중수하였으며,

 수각루인 금랑각을 지었다.

 근대에 들어 1832년(순조 32)에 큰 홍수로 전각의 거의 반이 쓸려 무너졌고, 금랑각처럼 남아있는 건물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금랑각은 그렇게 오래 방치하다가 1936년 청운스님이 중건하였는데 그 내용이 금랑각중수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 중수기는 근대의 고승인 한영 정호(1870~1948)스님이 이곳에 잠시 머물면서 당시 주지인 수용스님의 부탁으로 지은 것이다.

 1912년 영담화상이 전체 가람을 중수하였으나 6.25동란으로 모두 불탔다. 이곳은 빨치산들의 은신처가 된다하여 토벌군의

 방화로 대부분의 건물이 불탔다. 이 때 국보로 지정되어 있던 원통전(273호)과 금동관음보살상(274호)이 소실되었다.

 1954년 대은암의 건물을 옮겨와 원통전을 재건하였다. 1982년에는 지장전, 서원당, 금강문을 복원하였으며, 지금도 의욕적인

 불사를 추진하고 있다. 입구인 금랑각과 금강문을 들어서면 그 앞에는 아무런 법당이 없고, 좌우에 극락전과 원통전이 있다.

 극락전 앞에는 3동의 요사가 있고, 원통전 앞에는 요사채와 종루가 있다. 원통전의 향 우편에 백인당이라는 요사가 1동 더 있다.

 부도는 입구의 숲속에 위치한다.

 

 곡성 관음사 성덕과 홍장(洪莊)설화

 옛날 충청도 대흥에 원량(元良)이라는 장님이 살았는데 그에게는 홍장이라는 용모가 뛰어나고 효성이 지극한 딸이 있었다.

 어느 날 원량이 동네를 지나는데 성공스님이 그를 보자 큰 절을 올렸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간밤에 꿈을 꾸었는데 신인이 나타나

 “오늘 동네에서 장님을 만날 텐데 그가 장차 대화주(大化主)가 될 것이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원량은 가난한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였으나 스님은 한사코 그에게 화주가 되어줄 것을 간청하였다.

 스님과 헤어진 후 원량부녀는 근심이 태산 같았는데 마침 중국 진나라 사신이 그 날 저녁에 찾아와 진나라의 혜제(惠帝)가

 “새 황후가 될 분이 동국에 있을 것이니 그 곳으로 가보라“ 하여 배를 타고 왔는데,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이끌려 이집으로

 왔다는 말을 하였다. 부녀는 사신이 가지고 온 예물을 받아 그것으로 성공스님에게 시주하여 절을 짓도록 하였다.

 그리고 홍장은 중국으로 건너가 황후가 되었다.

 황후가 된 홍장은 착한 마음씨로 인해 황재의 총애를 받으며 계속해서 정업을 쌓았다.

 그러나 고국을 그리워하던 홍장은 53불(佛)과 500성중(聖衆) 그리고 16나한상을 만들어 배에 실어서 백제로 보냈다.

 그 배는 감로사앞 나루에 닿았으며, 감로사에 봉안되었다. 그 뒤로 홍장은 관음상을 주조하여 돌배에 실어 백제로 보냈는데

 낙안포에 도달한 배는 이를 수상히 여겨 잡으려는 수졸을 피해 그 곳을 떠났다.

 이것을 옥과 땅의 성덕처자가 해변을 거닐다가 멀리서 배 한 척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바로 홍장이 보낸 그 배였다.

 배가 저절로 성덕에게 다가와 성덕이 안을 살펴보니 관음금상이 빛나고 있었다. 성덕은 놀라 예배하고 관음상을 모셔 인연의

 땅에 모시기 위해 11곳을 전전하다가 마침내 관음금상을 봉안하고 절을 창건하였다는 것이다.

 성덕이 불상을 옮기는 도중 쉬었던 곳마다 정자를 세웠는데 대추정, 연봉정, 삽정, 현정, 홍복정 등이 이때 세워졌다고 한다.

 이 홍장의 설화는 「심청전」의 원형설화로 설명되기도 한다.

 

 

관음사 극락전(極樂殿)..

1900년경에 건립된 정면과 측면 각 3칸의 팔작지붕..

내부와 외부 벽화는 사찰의 전통적인 소재 외에도 동백꽃이나 매화 등도 그려져 있고 주련도 한글로 쓰여 있다..

 

안에는 아미타불을 봉안하고 있다...

 

 좌우에는 조그만 불상들이 모셔져 있다..

 

그리고 우측에 탱화..

 

원통전 (圓通殿)..

원통전은 관음보살을 주존하는 법당이 주불전일때 부르는 이름이다..

 

6.25전쟁 중에 모두 불타 없어졌으며, 절 전체는 전남 문화재 자료 제24호로 지정되어 있다... 예전의 원통전의 자리는 그대로 두고..

 

2000년에 예전의 자리 바로 옆의 현위치로 이전 복원한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편액은 화순군 북면 용골리 출신인 행서와 초서의 대가 용곡(龍谷) 조기동(趙基銅)선생의 필체라고 한다...

원통전 앞에있는 전체 높이 95cm의 석조 조각상인 어람관음상(魚籃觀音像)..

왼손에는 물고기 한 마리를 들고 있는데 앞에는 물고기의 머리 부분만이 보이고 꼬리는 관음상의 등에 표현되어 있다.

오른손에는 지물을 들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현재 결구공만이 남아 있다.

조각의 기법은 구체적이지 못하고 투박하고 단순하며, 민예적 요소가 강한 수법들로 보아 조선시대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어람관음은 33관음의 하나로 <법화경(法華經)>에서 손에 물고기가 가득 찬 바구니를 들거나 혹은 큰 물고기를 타고 있다 하며,

나찰(羅刹), 독룡(毒龍)의 해를 제거하는 공덕이 있다고 여기는데, 어람관음신앙은 중국의 송(宋)대 이후에 널리 유행하였다고 한다.. 

 

원통전 안에는 1970년경에 봉안한 관음보살좌상..

 

그리고 아미타후불탱, 칠성탱, 지장탱, 신중탱, 산신탱 등의 불화가 있다...

 

불에 타다남은 관음보살상...

이 소조불두는 절을 창건한 성덕보살의 상이라고 전하고 있다...

 

상의 크기는 높이 12cm, 폭 10cm로 머리는 대부분이 파손되고 얼굴만 남아있다.

얼굴은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으며, 이마의 중앙에는 백호공이 뚜렷하고, 두 눈은 반개하여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중앙을 보발이 가로지르고 있고 귓불은 도톰하게 처리하였다...

6.25전쟁 이전까지 이 절의 원통전은 국보 제273호로, 금동관음보살좌상은 국보 제21호로 지정되어 있었다..

 

벽안당(碧眼堂)...

요사채로써 현재 주지실로 사용하고 있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금강문(金剛門)..

금강문은 사찰에 따라 인왕문이라고도 하는데, 부처님의 가람과 불법을 수호하는 두 분의 금강역사가 지키고 있는 문이다...

 

금강역사상(金剛力士像)..

오른쪽은 나라연금강이다.. 나라연금강은 그 힘의 세기가 코끼리의 백만배에 이른다고한다..

입을 크게 벌려 범어의 첫글자인 "아" 소리를 내면서 공격자세를 취하고 있어 아금강역사라고 한다..

왼쪽을 지키고 있는 밀적금강..

밀적금강은 부처님을 호위하는 500 야차신을 거느리고 있으며, 부처님의 비밀스러은 사적을 모두 듣겠다는 서원을 세웠으므로

밀적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밀적금강은 입을 굳게 다문채 방어자세를 취하고 있어 훔금강역사라고 한다..

 

관음사 현존 건물중 가장 오래된 금랑각(錦浪閣)..

정면 3칸 측면 1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관음사 입구에 다리 역할을 하는 누각이다..

커다란 통나무 두개를 양쪽으로 걸치고 그 위에 널빤지를 깔고 기둥을 세웠다.

기둥 위로는 2익공 형식으로 창방이 결구되어 있으며 창방 위로는 화반이 장혀를 받치고 있다.

금랑각은 비단같은 물결이 넘실대는 전각이란 뜻으로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위에 다리가 놓여있다.

정면에는 성덕산 관음사(聖德山 觀音寺) 편액이 있는데 숭정기원후경신6월일서(崇禎紀元後庚申六月日書)라고 적혀 있어

숭정(1628년) 이후 경신년인 1680년 6월에 이 현판을 썼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