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탐방일 : 2012년 2월 27일
○ 소재지 : 광주 동구 운림동
○ 증심사 소개
1986년11월1일 광주문화재자료 제1호로 지정되었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松廣寺)의 말사이다.
신라 헌안왕4년(860) 철감선사(澈鑒禪師) 도윤(道允)이 개창(開創)하고, 고려 선종11년(1094)에 혜조국사(慧照國師)가 중수했다.
세종25년(1443)에 전라도관찰사 김방(金倣)이 자신의 녹봉으로 다시 중수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광해군1년(1609)에
석경(釋經)·수장(修裝)·도광(道光)의 3대 선사가 4창(四創)했다고 한다. 그 후 신도들의 정성으로 몇 차례 보수가 이루어졌으나,
6·25전쟁 때 많은 부분이 소실되었다가 1970년에야 대웅전을 비롯한 건물들이 복구되었다.
경내에는 오백전(五百殿)·3층석탑·5층석탑·7층석탑·오백나한 및 철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131호)·석조보살입상 등이 보존되어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광주 유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된 오백전(五百殿)과 대웅전ㆍ지장전(地藏殿)ㆍ비로전(毘盧殿)ㆍ적묵당(寂默堂)ㆍ
종각ㆍ일주문ㆍ요사채 등이 있다.
이 중 오백전을 제외한 건물들은 최근에 지어진 것이다.
오백전은 대웅전 뒤에 있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조선 초기에 지어진 강진 무위사(無爲寺)의 극락전과 같은 계통의
건축양식을 보이고 있다. 전내의 오백나한상은 1443년 중창 때 김방이 조성한 것이라고 전해 오는데, 전국적으로 보기 드문 불상이다.
오백전 옆 높이 205㎝의 석불은 고려시대(10세기경) 작품으로 추정되는 석조보살입상으로 광주 유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되어 있다.
비로전 안에 안치된 높이 90㎝ 정도의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은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보물 제13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철불은 본래 광산군 서방면 동계리에 있던 것을 1934년에 옮겨온 것이다.
이밖에도 문화재로는 증심사 창건 때 만들었다는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호인 삼층석탑, 고려 초기의 석탑으로 1933년의 보수 때
탑내에서 금동석가여래입상과 금동보살 입상 등이 나왔던 오층석탑, 조선 중기의 것으로 보이는 칠층석탑 등이 있다.
특히, 오층석탑에서 발견된 금동석가여래입상과 석조보살입상은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한국전쟁 때 분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절 입구의 왼쪽 산록에는 약 3만여 평의 차밭이 있다. 원래 증심사에서 공양을 위하여 가꾸어왔던 것이나,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이
경영하였고 광복후에 허백련(許百鍊)이 인수하여 고유의 차를 재배하였다. 절 주변이 광주 문화재자료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웅전(大雄殿)...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다포계 팔작지붕으로 6.25때 불탄 것을 1971년에 중건하였다.
2단의 높은 축대 위에 원형의 초석을 놓고 배흘림의 원형기둥을 세웠다.
정면의 중앙 칸이 좌우 협칸이나 퇴칸보다 2배 정도 크며, 어칸은 솟을빗살창이 달린 4분합문이다.
협칸과 퇴칸은 2분합문에 나뭇잎 모양의 빗살문이고, 그 아래 부분은 청판을 대고 당초문을 그렸다....
기둥 위에는 용두와 주제를 놓았는데 용두를 밖으로 노출시켰으며, 내부에는 용꼬리부분을 설치하였다.
측면의 앞쪽 외진문에 외짝교살창문을 설치했는데 그 옆벽에는 십우도(十牛圖)를 그렸다.
또한 창방과 평방을 결구하고 그 위에 포작을 놓았으며 외삼출목ㆍ 내오출목의 다포양식이다. 내부의 천장은 고주가 없이
평주와 내진주를 연결시켜 대들보를 놓고 그 위에 동자주를 세운 다음 종량을 얹고, 종량에 수평으로 우물천장을 가설하였다.
오출목 부분에서 우물천장까지는 빗천장을 가설하였다.
내부에는 석가여래좌상을 주존으로 하여 좌우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협시로 두었으며, 그 뒤에 석가모니후불탱을 봉안하였다.
그리고 왼편에 칠성탱, 오른쪽 벽에는 신중탱을 모셨으며, 그 외에 범종 등을 봉안하였다..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는 삼존상은 중앙의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배치하였다.
일반적으로 석가삼존상이면 석가모니불과 좌우 협시로 문수ㆍ보현보살이 상례지만, 여기에서는 관음과 대세지보살을 봉안하였다...
대웅전 석가모니후불탱(釋迦牟尼後佛幀)은 석가모니불이 영축산에서 설법하고 있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탱화이다.
구도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문수ㆍ보현ㆍ관음ㆍ지장 등 8대 보살과, 범천ㆍ제석천, 10대 제자, 사천왕 등이 등장하고 있다.
화면 가득히 배치된 보살과 성문(聲聞)들은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석가모니불의 좌대 아래에는 두 명의 동자가 합장한 채 서있다.
이 탱화는 1997년 불모(佛母)인 석정(石鼎) 스님이 조성하였다...
대웅전 칠성탱(七星幀)은 중앙의 금륜(金輪)을 든 치성광여래와 좌우 대칭으로 7여래를 배치하였다.
좌측으로 원만세계금색성취여래불(圓滿世界金色成就如來佛), 유리세계약사유리여래불(琉璃世界藥師琉璃如來佛), 정주세계광달지변
여래불(淨住世界廣達智辨如來佛), 최승세계운의통증여래불(最勝世界運意通證如來佛)과 상단에 3인의 성군을 배치하였다.
우측에는 묘보세계광음자재여래불(妙寶世界光音自在如來佛), 무우세계최승길상여래불(無優世界最勝吉祥如來佛), 법의세계법해유희
여래불(法意世界法海遊戱如來佛)과 상단에 역시 3인의 성군을 배치하였다.
치성광여래의 두광(頭光) 좌우측에는 연꽃에 쌓인 듯한 모습의 해와 달이, 무릎 주변에는 3인의 동자ㆍ동녀가 시립해 있다.
우측 하단에는 북두칠성을 표현하고 각각의 별에 성군의 명호(名號)와 부적을 적어 칠원성군(七元星君)을 표현하였다.
삼베에 감청색을 바탕색으로 채색하여 밤하늘을 나타내었으며, 하단에 구름과 산을 표현하여 땅과 하늘을 구분하였다.
이 불화는 송광사 방장인 범일보성(梵日普成) 스님의 증명으로 고영을(高永乙)이 2001년에 조성하였다...
대웅전 신중탱(神衆幀)은 불법을 수호하는 선신(善神)들을 나타낸 탱화로서 중앙의 예적금강(穢跡金剛)을 중심으로 화면 가득 104위의
신중들을 배치하였다. 일반적인 신중탱에 등장하는 범천ㆍ제석천ㆍ위태천은 화면 상단의 좌우와 중단에서 각각 연꽃을 들거나
금강저를 들고 있다. 화면을 유심히 살펴보면 사천왕과 팔금강, 천부의 천자, 팔부신중 등 다양한 신중들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탱화는 1990년 금어인 조정우(曺廷宇)가 조성한 것이다..
비로전(毘盧殿)은 대웅전 뒤쪽의 높은 축대 위에 위치하고 있는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맞배지붕 주심포 건물이다.
덤벙초석을 놓고 원형 기둥을 세웠으며, 정면 3칸에 모두 2분합문을 달았다. 정면 중앙 칸에는 권창윤(權昌倫)이 쓴 편액을 달았다.
내부구조는 대들보와 종보 위에 마루대공을 올려 종도리를 가구한 5량집이며 연등천정으로 되어 있다.
중앙의 불단 위에는 보물 제131호인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을 주존으로 봉안하였으며, 그 뒤에 비로자나후불탱을 봉안하였다.
1986년 영주스님이 중수하였다...
비로전 철조비로자나불좌상(鐵造毘盧舍那佛坐像)..
보물 제13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현재 광배(光背)와 좌대(座臺)는 잃어버렸지만 불상 자체는 완전한 편이다. 전체 높이는 90cm이다.
상호는 원만한 타원형이며 머리는 나발(螺髮)에 육계(肉髻)가 솟아 있다...
뛰어난 조각수법은 아니지만 통일된 균형미를 갖추고 있는 점이 우수하게 평가되고 있으며,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국보 제63호),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117호) 등과 함께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불상은 원래 증심사에서 조성한 것이 아니라 1934년 광주시내의 폐사지에서 옮겨온 것이라 전한다.
원래의 위치는 전남도청 부근으로서, 그곳은 당시 광산군 서방면 동계리의 대황사(大皇寺)라는 절터였다고도 하고,
지산동 부근이라고도 하는 등 옮겨올 당시의 자료가 전하지 않아 확실한 것을 알 수 없다...
가늘게 뜬 눈과 우뚝한 코, 굳게 다문 입술 등은 다소 근엄한 표정이며, 목에는 삼도(三道)가 뚜렷하고 두 귀는 짧은 편이다.
신체는 두꺼운 옷에 싸여 있어 굴곡이 드러나지 않지만, 무릎 너비와 적절한 비례를 이루고 있어 안정적인 느낌을 준다.
양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가슴을 넓게 드러내고,
양 팔에 걸친 두꺼운 옷자락은 규칙적인 평행의 옷주름을 이루면서 흘러내리고 있다.
손모양은 왼손이 오른손 검지를 감싸 쥔 형태로, 일반적인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형식과는 반대로 된 점이 특이하다..
오백전(五百殿)은 대웅전 뒤편에 세워진 정면과 측면 각3칸 규모의 맞배지붕으로 현재 광주유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되어 있다.
증심사에서 6.25 당시 유일하게 불타지 않은 당우일 뿐만 아니라 무등산에 남아 있는 사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이기도 하다.
막돌허튼 쌓기의 기단(基壇) 위에 두리기둥을 세웠으며, 공포는 둥근 기둥 위에 간단한 쇠서를 둔 익공식 건축이고 처마는 겹처마이다.
양측 박공(朴工)에는 풍판(風板)이 없으며, 내부는 천정시설이 따로 없이 서까래만 노출되어 있다.
내부는 앞부분을 조금 남기고 좌우 벽을 연결하는 긴 불단을 만들었다.
불단 중앙에는 연꽃 좌대에 앉은 석가모니불과 좌우 협시인 가섭ㆍ아난존자를 배치하였다.
좌우와 뒤쪽에 계단식탁자를 설치, 오백나한을 빽빽하게 배열하였는데, 이들 아라한상은 상호가 우수하며 영험이 많다고 알려져 있다.
이 오백전은 세종25년(1443)에 전라감사 김방(金倣)이 오백나한과 십대제자의 성상(聖像)을 조성ㆍ봉안하고 이 고장의 민안(民安)을
기원하기 위해 지은 것이라 전한다. 실제로 1430년 건립된 강진 무위사의 극락보전과 가구수법 등에서 같은 계통의 양식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정유재란 때 사찰이 소실되었다가 1609년 석경(釋經)ㆍ수장(修裝)ㆍ도광(道光) 등 세 분의 스님이 4창(創)하였으므로, 오백전은 이때 건립된 것이거나 이전에 존재하던 법당을 이 시기에 중창한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의 퇴락이 심하여 1971년 주지 보성스님이 지붕을 보수하였으며, 2001년 재보수하기 위해 해체하던 중 대들보에서 1971년의
중수기와 함께 1489년(성종 20) 증심사에서 판각한 목판본 금강경이 발견되었다...
오백전의 불단은 맨 앞줄의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가섭존자와 아난존자가 입상으로 협시하고 있다.
다시 그 좌우로 12위씩 전체 24위의 나한이 암석 모양의 좌대에 합장을 하거나 동물들을 희롱하는 모습으로 앉아 있다.
전면에 배치된 이 나한들 뒤로는 13개의 단을 마련하여 소형의 나한상들을 천장 서까래까지 닿도록 배치하였다.
전면에 배치한 석가삼존상과 24위의 나한상이 나무로 조성된 반면, 뒤쪽의 소형 나한상들은 나무와 흙으로 조성된 상들이 섞여 있다.
1443년에 김방이 오백전을 건립하고 오백나한 10대 제자의 성상(聖像)을 봉안하였다고 하는데, 현재의 존상들이 그 시기에 봉안되었던
상들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기법으로 보아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은 확실하다...
3층석탑(三層石塔)...
오백전 앞 축대 아래에 자리하고 있는 석탑으로 초층 옥개석의 일부가 파손된 것을 제외하고 각 부재가 완전한 형태의 3층석탑이다.
높은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로 탑신의 체감비율이 뚜렷하여 매우 안정감 있는 통일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이다.
하층기단 중석의 네 모서리에 귀기둥을 표시하고, 면마다 2개의 면기둥을 새겼다.
기둥과 기둥 사이의 공간에는 가늘고 긴 안상(眼象)을 얕게 조각하여 각 면마다 3개씩 배치하였다.
하층기단 갑석은 윗면의 경사가 완만하며, 둥근 2단의 상층기단 받침이 있다.
꼭대기에는 네모난 받침돌 위로 앙화(仰花)만 남아 장식하고 있다.
이 탑은 기단부 면기둥의 변화, 초층 탑신받침, 옥개석 모서리의 치켜올림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말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현재 증심사의 문화재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1971년에 해체ㆍ복원하였으며, 전체 높이는 340cm로 비교적 작은 편으로, 현재 광주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5층석탑(五層石塔)과 7층석탑(七層石塔)...
이중기단에 5층으로 된 석탑으로 옥신에 퇴화된 연화문을 장식하였고 전체적으로 3층석탑을 따르고 있지만 기법등이 떨어지는 편이다.
이 석탑은 대웅전의 북쪽 공터에 있던것을 현재의 위치로 옮겨 놓았다.
1933년 이 탑을 해체ㆍ복원할 때 탑 내에서 금동불상 2구와 오층철탑(높이 19cm), 소형 철불 2구, 수정 1점, 청옥(靑玉) 23점 등이
발견되었다. 이 가운데 금동석가여래입상(높이 15.9cm)은 국보 제211호로, 금동보살입상(높이 18.2cm)은 국보 제212호로 각각
지정 되었으나 6.25로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어 지정문화재에서 해제되었다..
오층석탑과 나란히 서 있는 칠층석탑으로 탑신에 ‘옴마니반메훔’이라는 범자가 새겨져 있어 범자7층석탑(梵字七層石塔)이라고도 한다.
하나의 돌로된 방형의 지대석 위에 탑신을 올려놓아 기단부가 생략되었다. 탑신에는 귀기둥을 표현하고 초층 탑신의 면에는 꽃무늬를
새겼으며, 2층부터 7층까지는 범자(梵字)를 양각하였다.
옥개석은 아랫면에 통상적으로 조각하는 옥개받침을 생략하고 윗면의 물매가 완만하여 매우 납작하다.
각 층의 네 면마다 관세음보살 육자대명왕진언(觀世音菩薩 六字大明王眞言)인 ‘옴마니반메훔’이라는 동일한 범자를 7층에서 아래로
한 자씩 새겼다. 일반적인 석탑양식에서 벗어나는 어색한 점이 있으나, 탑신 각 면에 범자를 새겨 희귀한 예를 보여주고 있다.
조성연대는 조선중기로 추정된다..
지장전(地藏殿)...
대웅전 왼쪽에 위치한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으로 정면 5칸 모두 2분합문을 달았다.
원형의 초석을 놓고 그 위에 원형의 기둥을 세웠으며 창방(昌防) 아래에는 4면에 모두 돌아가면서 주악비천상을 그렸다.
정면의 중앙과 왼쪽에 ‘지장전(地藏殿)’과 ‘회심당(繪心堂)’이라는 편액을 각각 달았다.
내부에는 지장보살과 도명존자, 무독귀왕, 판관, 녹사, 동자 등 명부중(冥府衆)의 상과 지장탱 및 4폭의 시왕탱을 봉안하였다...
지장전의 주존인 지장보살은 영화대좌에 결가부좌를 하고 민머리에 석장을 쥐고 있다.
문관의 모습을 한 무독귀왕과 수행하는 모습의 도명존자가 협시를 하고 있다.
후불화로 지장보살화가 있는데 지장보살과 그 권속들이 표현되어 있다.
사후세계인 명부(冥府)의 심판관인 십대왕(十大王)과 그들이 주재하는 지옥의 모습을 나타낸 시왕탱이다.
시왕탱은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측에 제1 진광대왕(秦廣大王), 제3 송제대왕(宋帝大王), 제5 염라대왕(閻羅大王), 제7 태산대왕
(泰山大王), 제9 도시대왕(都市大王)을 모시고, 우측에 제2 초강대왕(初江大王), 제4 오관대왕(五官大王), 제6 변성대왕(變成大王),
제8 평등대왕(平等大王), 제10 전륜대왕(轉輪大王)을 각 폭에 그려 봉안하였다.
각 시왕탱에 그려진 지옥장면은 악업의 결과를 보여주는 것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경계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원통전(圓通殿)은 정면과 측면 각3칸 규모의 주심포 정자형 건물로 2003년 9월에 착공하여 11월에 상량하였다..
오백전 옆에 범자칠층석탑과 함께 서 있던 석조보살입상(광주유형문화재 제14호)이 세월의 풍화에 훼손되어,
이를 보존하기 위한 전각으로 신축한 것이다...
원래 오백전 우측 범자7층석탑(梵字七層石塔)과 나란히 서 있었으나, 11월에 원통전을 보호각으로 건립하면서 옮겨 봉안하고 있다.
이 석조보살입상의 원래 위치에 대해 여러 의견이 많으나 서봉사지(瑞峰寺址)에서 옮겨온 것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1966년 간행한『광주시사』에도 담양군 남면 정곡리 서봉사 터에 있던 것을 현준호가 사재를 들여 이곳으로 옮겨온 것으로 기록하였다.
전체 높이는 205cm로 연화대좌는 원형이며, 상ㆍ중ㆍ하대석과 지대석을 모두 갖추고 있다.
상대석의 앙련좌는 11엽의 단판연화문(單瓣蓮花文)과 2엽의 큼직한 연화당초문(蓮花唐草文)이 혼합 조각되어 있으며,
하대석의 앙련좌는 두툼한 16엽의 복판연화문(復瓣蓮花文)을 돌렸다.
지대석 역시 원형으로 측면을 분할하여 연화문을 만들었으나 분할을 잘못하여 9엽이 되어 있다.
대좌 위의 보살은 머리에 원통형 보관을 쓰고 있으며 얼굴은 타원형으로 갸름하여 우아한 기품을 나타내고 있다.
얕게 새긴 삼도(三道)에는 목걸이를 장식했으며 납의(衲衣)는 우견편단(右肩偏袒)이다.
수인(手印)은 왼손을 굽혀서 왼쪽 가슴에 올려놓았고 오른손은 편 채로 내려뜨려 오른쪽 대퇴부 바깥쪽으로 붙이고 있다.
이 석조보살입상의 조성연대는 고려시대로 추정되며 현재 광주유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되어 있다.
지대석 직경 130cm, 상대석 직경 100cm, 대좌높이 50cm, 불신높이 150cm, 머리높이 50cm 등이다..
산신각..
취백루(翠栢樓)는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2층 팔작지붕 누각(樓閣)으로 하층에는 종무소와 큰방을 시설하여 사용하고 있으며,
상층은 하나의 공간으로 터서 강당의 역할을 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건립되었으나 6.25 때 소실된 것을 1970년대 이후에 신축한 것이다.
원래 취백루는 정유재란으로 증심사가 불타버린 뒤 1609년(광해군 1)에 석경(釋經)ㆍ수장(修裝)ㆍ도광(道光) 등 세 스님이 증심사를
4창하면서 세운 정문 누각이라 한다.
당시에는 아래층에 사천왕을 봉안하고 대웅전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경내로 들어갈 수 있도록 된 2층 건물로, 마루가 깔린 2층에는
법고가 걸려 있었다고 한다. 또한 취백루라는 누각의 명칭은 ‘취백홍도(翠栢紅桃)’가 피어 있는 아름다운 정경을 묘사한 고려 명종 때의
시인 김극기(金克己)의 시구에서 취해진 것이라 전하고 있다.
취백루가 처음 건립된 시기는 1574년(선조 7)에 쓴 고경명의 「유서석록」에 “취백루에 올라 휴식을 취했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어,
증심사가 4창 되던 1609년 이전에도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2012년 2월 23일 오후 경내 법당에서 사천왕상 복장 유물 안치 의식을 열었다.
6.25전쟁때 소실된 사천왕문(四天王門)복원 공사를 마치고 사천왕상을 안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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