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기행] 여말 3대무신 정지장군의 사당, 광주 경열사(景烈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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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기행] 여말 3대무신 정지장군의 사당, 광주 경열사(景烈祠)

by 정산 돌구름 2012. 3. 5.
고려말 3대무신 정지장군의 사당, 광주 경열사(景烈祠)..

 

탐방일 : 2012년 3월 3일 (토)

소재지 : 광주광역시 북구 망월동 산 82-2

 경열사(景烈祠) 소개

 고려 말의 무신 정지를 비롯하여 정충신, 유사, 고중영 등 8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사당이다.

 1644년(인조22년) 지금의 동구 동명동에 창건되었으며, 1868년(고종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1871년 철거되어

 유허비만 남았다.

 지금의 경열사는 정지장군 유적보존회에서 1979년부터 현재의 위치에 복원을 시작하여 1981년 완공하였다.

 사당 입구에는 홍살문이 있고, 경내에는 사우, 내삼문, 외삼문과 유물관, 관리실, 경열사 유허비, 유적정화 기념비 등이 세워져 있다.

 사당 뒤쪽 언덕 위에는 정지의 묘가 있는데, 전형적인 고려시대 방식의 예장석묘(禮葬石墓)로서 광주시기념물 제2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지(鄭地, 1347~1391)는 본관 하동(河東), 시호는 경열(景烈)이다.

 정지장군은 나주출신으로 최영, 이성계와 더불어 고려 말 3대 무신 중 한 사람으로 관음포 대첩을 이끌었다.

 어려서부터 인물이 뛰어났고 성품이 너그러웠으며 큰 뜻을 품고 독서하기를 좋아했다.

 19세에 사마장원, 20세에 문과 급제, 1374년(공민왕 23년) 28세 때에 중랑장이 되었고, 왕을 모신 속고지로 있으면서 왜구토벌책

 및 토적책 10조를 왕에게 올려 전라도 안무사(지금의 도지사)가 되어 왜구의 토벌에 공을 세웠으며 수군 창설에도 크게 이바지했다.

 1377년(우왕 3년)에 순천 낙안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쳐 공을 세웠다.

 그후 전라도 순문사를 거쳐 36세 때 제해도 도원수(해군 총사령관)를 역임하면서 왜구를 무찔러 간담을 서늘하게 했고,

 양광·전라·경상·강원도 도지휘처치사(4도의 육군 사령관)를 겸임하기도 했다.

 1389년(공양왕 1년)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에 종군하여 적을 토벌하는 한편 전지의 경작장려와 성곽수축 등을 맡아 처리했다.

 그러나 그해 11월 우왕복위 음모사건에 연루되어 나주로 귀양 갔으며, 윤이, 이초의 옥사에 연좌되어 또 청주옥에도 갇혔었으나

 수재로 인해 죄를 면했다.

 1391년 위화도회군의 공으로 2등 공신이 되어 광주 장원봉 아래에 물러가 있다가 판개성부사로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고 그해에 병으로 세상을 떴다.

 

경열사 입구..

주차장 옆 홍살문..

경열사 안내도..

 

경열사 해설..

 

외삼문 충의문..

 

좌측의 유물관..

 

유물관 내부..

 

영정..

 

내삼문인 경앙문..

 

맨 뒤쪽의 경열사 사당..

 

경열사 사당 앞에서

 

경열사 내부 정지장군의 영정..

 

정지()의 본관은 나주()이며, 초명은 준제()이다.

1374년(공민왕 23년) 유원정()의 추천으로 중낭장으로 전라도안무사로 발탁되었다.

왜인추포만호를 겸하면서 양광도안무사 이희()와 여러 차례 방왜책을 건의, 백성들의 부담 완화와 전략의 효율화에 노력하였다.

1377년(우왕 3년) 예의판서()로서 순천도병마사가 되어 순천·낙안 등지에 침입한 왜구를 연파하였다.

이듬해 다시 영광·광주·담양·화순 등지의 왜구를 격파함으로써 전라도순문사가 되었다.

1381년 밀직()으로 해도원수()가 되어 서남해에서 수차에 걸쳐 왜구를 소탕하여 많은 전공을 세우고 이듬해 지문하부사

()로서 해도도원수·양광전라경상강릉도도지휘처치사(使)가 되었다.

정지는 1383년5월 왜선 120척이 침입해 온다는 급보를 받고 경상도로 가서 합포의 군사를 모아 정비하였다.

이때 왜구는 이미 관음포에 도달하였고 그가 이끄는 군사와 박두양()에서 대치하였다.

관음포전투에서 그는 선봉대선 17척을 완파하고 적을 크게 무찔렀다.

1384년 문하평리()에 임명되어 보다 근원적인 방왜책으로서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와 이키(岐)의 정벌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1388년 최영 등을 중심으로 요동정벌이 추진되자 우군도통사 이성계 휘하에 예속되어 안주도도원수로 출전하였으나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때 동참하였다.

이 때 다시 왜구가 창궐하므로 양광전라경상도 도절제체찰사(都使)가 되어 남원 등지에서 적을 대파하는 공을 세웠다.

이듬해 우왕의 복위를 모의한 김저()·변안열()의 사건에 연좌되어 경주()·횡천()으로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나

위화도회군의 공으로 2등공신에 봉해졌다.

1391년에는 윤이()·이초()의 옥사에 연루되어 청주옥에 갇혔으나 홍수로 풀려났다.

그 뒤 광주()에 물러나 있던 중 판개성부사로 부름을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고 별세하였다..

 

우측 야산의 정지장군 묘소..

 

외삼문에서 바라본 내삼문과 경열사...

 

경열사의 전경..

 

하동 정씨 경열공파조회 재각인 휘정재..

 

재각..

 

경열사 표지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