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탐방일 : 2012년 2월 25일
○ 소재지 : 전남 영광군 불갑면 모악리
○ 불갑사 소개
대한불교조계종 제18교구 본사인 백양사(白羊寺)의 말사이다.
창건시기가 분명하지 않아 마라난타가 창건하였다고도 하고, 행은(幸恩)이 창건하였다고도 한다.
영조17년(1741) 이만석(李萬錫)이 쓴 사적비에 의하면 창건연대는 미상으로 되어 있다.
일설에는 백제 침류왕1년(384)에 행사존자(行士尊者)가 창건하였다고 하였는데, 행사존자는 마라난타(摩羅難陀)의 다른 이름이다.
마라난타가 백제에 불교를 전래한 뒤 최초로 세운 절이 되는데, 마라난타가 불갑사 부근의 법성포(法聖浦)를 통하여 들어왔다고 한다.
그러나 또 다른 기록에 의하면 문주왕 때 행은(幸恩)이 창건하였다는 설도 있다.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 후반에 중창하였고, 고려 후기에 각진국사(眞覺國師)가 머무르면서 크게 중창하였는데 당시 수백 명의 승려가
머물렀으며 사전(寺田)이 10리 밖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그 뒤 중수를 거듭하다가 정유재란 때 전소된 뒤 법릉(法稜)이 중창하였고, 1623년(인조 1) 대웅전의 본존불상을 조성하여 봉안하였다.
1634년 해릉(海稜)이 중창하였는데, 창건 당시의 규모에 비하여 많이 줄어들었다.
1644년 조암(照巖)이 중수하였고, 1654년과 1675년에도 중수가 있었다.
1680년 채은(采隱)이 대대적으로 중건하였고, 1702년·1705년·1706년에도 팔상전과 탱화·나한상에 대한 중수가 있었다.
1802년 득성(得性)이 중창한 이후 1869년 설두(雪竇)가, 1876년 설파(雪坡)가, 1879년 동성(東城)이 각각 중건하였다.
1904년에는 금화(錦華)가 만세루를 중수하고 1909년에 대웅전을 수리하였다.
그리고 이 무렵 영광읍에 불갑사포교당인 원각사(圓覺寺)를 세웠다. 1937년 만암(曼庵)이 명부전을 지금의 위치로 옮겨지었고,
1938년에는 설제(雪醍)가 개수하였다.
1974년 범종루와 범종이 조성되었고, 1976년 지종(知宗)이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팔상전(八相殿)·칠성각·일광당(一光堂)·명부전(冥府殿)과 전남 문화재자료 제166호로 지정된
만세루(萬歲樓)·향로전(香爐殿)·산신각·범종각·세심정(洗心亭)·천왕문(天王門) 등 15동의 건물이 있다.
이 중 대웅전은 보물 제83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다른 사찰과는 달리 중앙에 석가모니불, 왼쪽에 약사여래불, 오른쪽에 아미타불을
모셔 특이한 불상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대웅전 용마루 귀면(鬼面) 위에는 작은 석탑과 보리수를 새긴 삼존불대가 있는데,
다른 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양상이다.
이 밖에도 1359년에 세운 진각국사비와 전남 유형문화재 제159호로 지정된 사천왕상과 전일암(餞日庵)·해불암(海佛庵)·수도암(修道庵)·
불영암(佛影庵) 등의 부속 암자가 있다.
또한 진각국사가 심었다고 전해지는 수령 700여 년의 참식나무가 천연기념물 제112호로 지정되어 있다..
불갑사 안내도..
금강문..
천왕문(天王門)은 가람의 경내로 들어서는 53개의 계단의 정상에 자리하고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주심포계 맞배집이다..
사천왕상(四天王像)..
1987년9월18일 전남 유형문화재 제159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중기 연기조사가 목조로 조각한 것인데, 전북 무장군 소요산(逍遙山)의 연기사(烟起寺)에서 제작되었다.
1870년(고종 7) 승려 설두(雪竇)가 불갑사를 중수하면서 목선 4척을 동원하여 이곳으로 옮겨 봉안하였다.
이는 균형미와 조화미를 갖춘 거대한 목조품으로 사천왕문 좌우편에 2구씩 배치되어 있다.
각각의 손에는 칼(남), 창·보탑(북), 비파(동), 용·보주(서)를 들고 있으며 표정이나 기법이 거의 유사하다.
동은 지국천왕((持國天王), 남은 증장천왕(增長天王), 서는 광목천왕(廣目天王), 북은 다문천왕(多聞天王)이라 부른다.
지국천왕은 불교의 이상국인 수미산(須彌山) 동쪽을 지키는 천신이다.
증장천왕은 중생의 이익을 증장시키고, 광목천왕은 수미산의 서방국토를 바르게 지켜 중생의 이익을 도모한다.
다문천왕은 부처의 도량을 지키고 항상 부처의 설법을 들어 중생을 이롭게 한다는 뜻이다.
사천왕상은 모두 인도의 고대 재래신이었으나, 불교가 발생하면서 흡수된 신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국에서는 일주문과 본당 사이에 천왕문을 세워, 그림으로 또는 나무로 깎아 만든 사천왕의 조상(彫像)을 모시는 것이 일반적이다..
불갑사의 주불전인 대웅전..
정면과 측면 각3칸의 다포계 팔작집으로 보물 제830호로 지정되었다.
안에는 고주를 사용하여 후불벽을 조성하고 불단과 닫집을 상하로 배치하였다.
불갑사 대웅전 건물은 서향한 반면 삼세불은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장대석 기단 위에 초석을 놓았는데 정면과 우측면은 가공한 방형 초석을 쓰고 다른 곳은 부정형의 자연석 초석을 사용하였다.
초석 위에 원형기둥을 세우고 창방과 평방을 올린 다음 공포를 올렸다.
정면인 서쪽 입면에는 모두 3분합문을 달았는데 꽃살로 짠 문이며, 남측면 3칸에도 2분합문인데 역시 꽃살문을 달았다.
동쪽에는 후불벽이 붙어 있는 까닭에 문을 내지 않았으며 북쪽면에는 어칸에만 2짝 분합문을 달았다.
남측과 서측면에 달린 꽃살문은 연화, 국화, 금강저 등의 문양을 새겨 짰는데 현존 꽃살문 가운데서도 수작에 속한다...
공포는 외2출목, 내3삼출목으로 짜 올렸으며, 어칸 좌우 기둥에는 안초공을 끼웠는데 용 형상을 새긴 부재이다.
외부로는 용두가, 내부로는 용꼬리가 드러나 있으며, 귀공포 상부에도 용머리를 새겨 넣어 화려한 공포를 보여주고 있다.
남북방향으로 충량을 올려 대들보 위에 끼웠고, 독특하게도 충량 마구리는 일반적인 용두 대신에 용 얼굴을 조각한 판재로 마감하였다.
처마는 서까래와 부연을 쓴 겹처마이며 지붕은 한식기와를 올려 팔작지붕을 만들었다.
우물마루를 깔고 우물천장을 들였는데 중도리를 기준으로 중앙부와 외곽에 약간 단차를 둬서 중앙부가 더 높다.
현재 건물은 불갑사 6중창 시기인 영조 41년(1765) 무렵 대웅전 중창도 추진된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공사에 참여한 사람을 보면 도편수 쾌연(快然), 부편수 정심(定心)을 비롯하여 26명의 목수, 야장(冶匠) 박사성 등인데
이들 명단은 상량문과 묵서 등에 남아 있다. 당시 불상은 지금처럼 남향으로 봉안하였으나 이후 1825년에는 동쪽으로 옮겨 근래까지
유지되다가 1986년에 원래 모습대로 모신 후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지붕 용마루 한 가운데에 다른 건물에서 볼 수 없는 장식물인 이른바 보탑(寶塔)이 놓여있다.
집 모양의 가형토기에 도깨비 얼굴을 조합한 형상인데 금산사 대장전 지붕에도 유사한 장식물이 있기는 하다..
대웅전 중앙 불단은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한 아미타· 약사불좌상의 목조삼존상이 모셔져 있다. 석가모니불의 높이는 143cm이고,
좌우에 협시한 불상은 125cm로 주존상이 약간 크게 표현되었고, 각각 존상은 장식이 화려한 팔각 목조대좌를 갖추고 있다.
서면을 향한 건물의 방향과 달리 직각으로 남측면을 향해 조성되었다.
삼존불상의 조성 시기는 최근 본존불상과 협시불의 대좌 안쪽에 쓴 묵서명 개금기와 복장기가 발견됨에 따라 본존인 석가불은 1623년
(인조1)에 조성된 뒤 1634년에 개금하였고, 오른쪽의 협시불상도 1634년에 만들기 시작하여 이듬해 완성하였음이 확인 되었다.
조성기에는 불상은 무염스님을 비롯한 10인의 화승들이 조성하였고 이후 1743년(영조19)에 두번째, 1747년에도 다시 개금하였다...
전체적으로 주존이 약간 크고 수인이 다른 점만 제외하면 세 불상의 얼굴이나 불의 등의 세부적 양식 등은 거의 동일하다.
얼굴은 원만한 방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는 가늘고 긴 눈에 머리는 나발을 치밀하게 표현하였으며, 육계는 낮아 뚜렷한 구분이 없는데
정수리에 정상계주를 표현하고 그 앞 쪽으로 중앙계주를 표현하여 육계의 경계를 나타내고 있다.
신체는 어깨가 약간 처졌지만 비교적 당당하고, 목에는 모두 삼도를 나타냈다.
법의는 오른쪽 어깨에서 왼쪽어깨로 돌려 감아 배 부근에서 겹치는 형태로 두 어깨를 모두 덮은 통견식으로 걸쳤는데,
옷주름은 두껍고 형식적으로 표현되어 어깨에서 'U'자형으로 흘러내리다가 두 무릎사이에서 부채모양으로 정리되어있다.
수인은 중앙 석가불이 항마촉지인을 결하고, 좌우 약사불과 아미타불은 구품인을 대칭적으로 결하고 있다.
불상이 앉은 대좌는 팔각으로 대좌 난간에는 여러 동물 문양이 조각되어 있으며, 팔각의 각 면에 연꽃과 동문의 화려한 장식이 있다.
대좌 난간 안쪽에는 복련의 연화대좌가 올려 있으며, 이 연화대좌 위에 불상이 모셔져 있다..
대웅전 중앙불단 뒤쪽 왼편에 범종이 봉안되어 있다..
‘사자산 봉림사(獅子山 鳳林寺) 대종’이라는 명문이 있는 1702년(숙종 28)에 조성된 범종이다.
이 범종은 비교적 작은 규모로 상대와 하대 장식이 없이 단순한 형태를 보인다.
위로부터 용뉴의 용은 가늘게 발을 세워 음통과 종을 지지하고 있으며, 그 아래로는 상대(띠장식)없이 2줄의 양각선을 두르고 원좌에
범자문 8개를 돌렸다. 그 아래 종신에는 당좌(撞座) 대신 불패를 장식하여 “성상삼전수만세(聖上三殿壽萬歲)”라 쓰고,
그 좌우로 합장하는 보살상을, 그 아래로 화기(畵記)를 새겼다...
칠성각(七星閣)..
정면 3칸, 측면 1칸의 익공계 맞배지붕 건물로 내부에는 원래 칠성탱을 봉안하고 있다.
칠성각 내부에는 칠성탱과 독성탱 그리고 산신탱을 봉안하였고, 각 불화 앞에 치성광여래와 독성 및 산신의 작은 존상을 봉안하였다..
칠성각은 칠성 즉 북두칠성을 신격화하여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예배하는 곳인데, 이 칠성신앙은 한국 불교만의 고유한 특색이다..
칠성탱은 보륜(寶輪)을 들고 결가부좌한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를 중심으로 좌우에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을
배치하고, 이 삼존 주위로 칠성여래를 묘사하였다.
하단과 상단에는 태상노군(太士老君), 좌보필성(左補弼星), 우보필성(右補弼星)을 비롯한 성중들이 중심 칠성여래 무리의 주위를
에워싸는 듯이 배치되었다. 치성광여래를 제외한 주위 성중은 상단으로 올라갈수록 작게 묘사하여 원근감을 표현하였으며,
상단은 하늘을 하단을 황토 바닥을 배경으로 하였다. 칠성탱 중앙 앞에는 보륜을 들고 결가부좌한 치성광여래상이 봉안되어 있다...
산신탱은 중앙에 파초선을 들고 있는 백발의 산신을 중심으로 산신의 오른쪽에 동자를 왼쪽에 호랑이를 묘사하고,
배경으로는 근경에 소나무, 원경에 폭포를 그렸다.
화기란에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칠성탱과 같은 시기 혹은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산신탱 앞에는 호랑이 등에 걸터앉아 수염을 매만지고 있는 산신상이 봉안되어 있다....
독성탱은 화면을 기암을 중심으로 나누어 왼편에 독성을 묘사하고, 오른편에 경책을 들고 있는 시자(侍者)를 묘사하였다.
독성은 한쪽 무릎을 세워 팔을 걸친 자세로 기암에 걸터앉아 있는데, 방금까지 경전을 본 듯 바위위에 책이 펼쳐져 있다.
배경은 산신탱과 같이 폭포와 소나무를 배경으로 하고, 독성탱 앞에는 그림과 같은 자세의 독성이 미소지은 모습으로 봉안되어 있다..
칠성각과 명부전..
명부전(冥府殿)..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계 맞배집으로 처마는 홑처마이며 구조는 간결한 5량가를 결구하였다.
본래 대웅전 뒤편의 왼쪽에 있었던 것을 대웅전 우측으로 옮겨온 것인데, 각진국사가 중창하였던 시대에는 이 자리에 적묵당이 있었다..
명부전 내부는 뒷벽에 붙여서 ㄷ자형 불단을 두고 존상을 안치하였다.
중앙불단에는 지장삼존상을 봉안하였고, 명부세계에서 지장보살을 도와 사자(死者)를 심판한다는 시왕상 10位와 판관, 녹사, 사자,
인왕 등을 각각 2位씩 모셨다. 시왕상은 1654년에 조성된 작품으로서 조선후기 목조조각의 양상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유례이다.
지장보살은 양감 넘치는 얼굴에 승문형 민머리를 하고 있으며, 눈은 가늘고 길게 아래쪽을 내려보고 있으며 살짝 웃는 인상을 풍긴다.
이마에는 백호가 목에는 삼도가 있으며, 법의는 두어깨를 모두 덮는 통견식으로 걸치고, 내의는 가슴부분에서 띠로 돌려 고정하였는데
띠 위부분의 내의가 꽃잎모양으로 주름져 있다. 옷주름은 어깨를 타고 배 부분까지 자연스럽게 흘러 두 무릎 사이에서 부채꼴로 퍼지게
묘사하였고, 수인은 아미타구품인을 결하고 있다. 지장보살의 좌우에는 협시인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시립하고 있다.
그리고 1654년에 조성된 지장탱, 조선후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업경대, 목조 동자상 등이 내부를 가득 메우고 있었으나,보관의 어려움 때문에 지금은 별도로 관리하고 있다...
일광당(日光堂)..
대웅전 좌측에 자리 잡고 있다. 당초에는 선당(禪堂) 용도의 건물이었으나 지금은 승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익공과 민도리를 섞어 쓴 맞배집으로 주간에는 방형 화반을 1구씩 설이하였다.
구조는 5량가를 결구하였다. 울퉁불퉁 휜 부재를 곧게 다듬지 않고 사용한 미감이 돋보인다..
내부는 방과 부엌, 툇마루로 나뉘어 있는데 좌측 2칸은 부엌이며 우측 3칸은 방을 들이고 배면쪽에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처마는 서까래와 부연을 쓴 겹처마이며 한식기와를 올려 맞배지붕을 만들고 좌우 측면에는 풍판을 달았다..
범종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계 팔작집으로, 정면에서 보면 단층이나 배면에서 보면 누각형이다.
연잎을 새긴 원형 초석 위에 원형기둥을 세웠는데 누하주는 초석 밑으로 장초석을 받쳤다.
기둥 상부는 익공을 짜고 구조는 5량가를 결구하였으며, 처마는 겹처마에 지붕은 한식기와를 올려 팔작을 꾸몄다....
만세루는 누하의 높이가 낮아 누하진입방식의 누각이 아리라 누각 좌우가 개방되어 있어 누각을 돌아 대웅전 앞마당으로 진입한다.
이 방식은 비교적 평탄지에 있는 사찰에서 취하는데, 널찍한 자연석 초석 위에 누하주를 놓고 귀틀을 짜서 상층 마루바닥을 형성하였다.
기둥 상부는 주심포식 공포를 짜고 주간에는 화반을 1구씩 두었는데 전면은 판형이고, 배면에는 귀면을 새겼다.
전후면은 5칸 모두 분합문을 달았는데 주출입문인 배면 어칸을 제외한 나머지는 하부에 머름을 들이고 그 위에 문짝을 설치하였다.
구조는 7량가로 짰으며, 앞뒤 기둥 위로 걸린 기둥은 구불구굴하게 휜 자연재를 그대로 사용하여 자연미가 돋보이다.
대들보 위에는 동자주를 세워 중보를 걸고 다시 짧은 동자주를 세워 종보를 세운 다음 판대공을 놓고 종도리를 받쳤다.
서까래와 부연을 쓴 겹처마로 구성하고 한식기와를 올려 맞배지붕을 만들었으며, 내부는 통칸으로 트여 있다.
바닥은 우물마루이며 천장은 구조가 드러난 연등천장이다.
만세루는 불갑사의 여러 전각 가운데 가장 많은 중수 기록을 남기고 있다. 1741년1월에 중수를 마치고 석촌거사가 쓴
'영광군불갑사만세루중수상량문', 1802년에 다시 중수한 후 최수준이 쓴 '영광군불갑사만세루중수상량문', 1878년으로 추정되는
'불갑사만세루중수기' 등이다.
현재 정면 5칸, 옆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축소되었지만 절이 한창 번성하던 조선시대에는 누각의 정면은 7칸에 달했고,
고려시대에는 기둥 높이가 90척에 달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정유재란의 피해를 딛고 복구하면서 3칸으로 축소되었고, 숙종 때(1674~1720) 다시 7칸으로 복원하였다.
이후 1938년에 설제 스님이 누각 왼쪽이 썩자 한 칸을 줄여서 6칸으로 축소하였고, 1984년에는 수산 지종 선사가 법당이 3칸임을
고려하여 누각을 다시 한 칸을 줄여 5칸으로 개수하였다. 또한 1996년에는 두각에 기와를 새로 입히는 등 여러 차례의 개·보수가 있었다.
현재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166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만세루 안에는 칠성각의 칠성탱, 산신탱, 독성탱 등이 임시로 봉안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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