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기행] 육지 최남단의 사찰, 해남 달마산 미황사(美黃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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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기행] 육지 최남단의 사찰, 해남 달마산 미황사(美黃寺)..

by 정산 돌구름 2012. 2. 12.
[해남기행] 육지 최남단의 사찰, 해남 달마산 미황사(美黃寺)...

 

탐방일 : 2012년 2월 11일

소재지 : 전남 해남군 송지면 서정리 달마산

미황사 소개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의 말사이며, 우리나라 육지 최남단에 있는 절로서 749년(성덕왕 8) 의조(義照)가 창건하였다.

  사적비에 따르면, 749년 8월 한 척의 석선(石船)이 사자포 앞바다에 나타났는데, 의조가 제자 100여 명과 함께 목욕재계하고 해변으로

  나갔더니 배가 육지에 닿았다. 배에 오르니 금인(金人)이 노를 잡고 있고, 놓여 있는 금함(金函) 속에는 화엄경, 법화경, 비로자나불,

  문수보살, 보현보살, 40성중, 53선지식, 16나한의 탱화 등이 있었다.

  곧 하선시켜 임시로 봉안하였는데, 그날 밤 꿈에 금인이 나타나 자신은 인도의 국왕이라며, “금강산이 일만 불(一萬佛)을 모실만하다

  하여 배에 싣고 갔더니, 이미 많은 사찰들이 들어서서 봉안할 곳을 찾지 못하여 되돌아가던 길에 여기가 인연토인 줄 알고 멈추었다.

  경전과 불상을 소에 싣고 가다가 소가 멈추는 곳에 절을 짓고 모시면 국운과 불교가 함께 흥왕하리라.”하고는 사라졌다.

  다음날 소에 경전과 불상을 싣고 가다가 소가 크게 울고 누웠다 일어난 곳에 통교사를 창건하고, 마지막 멈춘 곳에 미황사를 지었다.

  미황사라 한 것은 소의 울음소리가 지극히 아름다웠다 하여 미(美) 자를 취하고, 금인의 빛깔을 상징한 황(黃) 자를 택한 것이라 한다.

  이 창건설화는<금강산 오십삼불설화>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1264~1294년 사이에 중국 남송(南宋)의 학자와 관리들이 이 절에 내왕하였다고 하므로 당시 미황사가 중국에까지 알려졌던 사찰임을

  알 수 있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자 1598년 만선이 중건하였다.

  1660년(현종 1) 성간이 3창하였으며, 1751년(영조 27) 덕수가 중건하여 금고각을 짓고 대웅전. 나한전을 중건하였다.

  그뒤 고승 유일이 주석하였고, 1858년(철종9)에는 의현이 만일회를 열었다. 1996년 만하당을 짓고 누각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보전, 달마전, 응진당, 명부전, 세심당, 요사채 등과 기타 석조, 당간지주,  부도군, 사적비 등의 문화재가 있다.

  이중 미황사 응진당이 보물 제1183호로 지정되어 있다.

  응진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서 1598년 만선이 신축하였으며, 1971년 주지 이하덕이 일부 보수하였다.

  내부에는 석가모니불과 16나한 등의 상이 봉안되어 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서 보물 제947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웅전은 1598년에 중건한 뒤 1754년과 1761년에도

  중수되었으며, 1982년의 수리 때 묵서가 발견되어 건물의 연혁을 알 수 있었다.

  내부에는 삼존불을 모셨고, 후불탱화가 걸려 있으며, 법당 뒤편의 목궤에 넣어둔 괘불은 오래된 것으로 몹시 상하였다.

  이 절의 부도군은 두 곳으로 나뉘어 있는데, 한 곳은 26기의 부도와 설봉당, 송파, 금하, 낭암, 벽하 등 대사비 5기가 있다.

  다른 한 곳에도 5기의 부도가 있으나 전부 도굴되어 흩어져 있다.

  또한, 미황사 사적비는 1692년(숙종 18) 민암이 세운 것으로서 초서로 된 높이 3m의 비인데, 옥개석위에 용을 얹어 조각하였다.

 

 

편액이 없는 미황사 일주문..

 

자하루(紫霞樓)..

미황사 중심영역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으며, 2001년에 다시 지은 정면 7칸, 측면 2칸의 누각형 맞배지붕이다. 하층 어칸을 통로

사용하고 좌우는 각각 벽과 문을 달았으며, 상층은 전체가 트인 한 공간으로 한문학당이나 수련회 등 대규모 행사 때 사용하고 있다.

출입은 배면으로 드나드는데 어칸을 중심으로 좌우 끝에서 두 번째 칸 앞에 통로용 목조다리를 가설하였다.

하층은 통로를 제외한 나머지 벽은 화방벽을 들였는데 정면과 배면은 살홍창을 설치하였지만 좌우 측면은 판벽으로 마감하였다.

상층 좌우 측면은 전체적으로 판벽을 치고 전후면은 문을 달았으며, 건물 측면의 상인방 위쪽에는 미황사 창건설화를 벽화를 그렸다.. 

 

보물 제947호인 대웅보전(大雄寶殿)...

미황사의 주불전으로 정면과 측면 각 3칸의 다포계 팔작지붕으로 건물의 공포 모습을 볼 때 18세기 중반의 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건축시기도 이 무렵으로 보고있다. 내부에는 후불벽을 만들고 조선후기에 봉안된 것으로 보이는 목조삼세불(木造三世佛)을 봉안하였다..

 

건물의 구조는 고주 하나를 세워 짠 2중량 형식의 5량가로 결구하였으며, 처마는 서까래와 부연을 쓴 겹처마이다.

지붕은 한식기와를 올려 팔작을 만들었으며 기와골 끝은 막새를 사용하였고, 지붕 양측면에는 풍판을 달아 합각벽을 만들었다...

 

건물 중앙 쪽 천장은 우물반자를 수평으로 설치하였지만 외곽은 빗천장임에도 반자를 갖춘 우물천장을 들인 점은 색다르다.

정면 창호는 모두 꽃살문인데 어칸에는 4분합문, 좌우 협칸은 3분합문을 달았고, 배면과 좌우 측면에도 출입문을 달아 드나들고 있다..

대웅보전 포벽에는 천불사상을 표현하려는 듯 수많은 부처를 구름위에 묘사하였다.

불상 머리 위에는 아자형 닫집을 설치하였으며 불단에도 비천이나 괴면, 모란 등을 세밀하게 조각했다.

고주에는 옛 단청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기둥 전체에 가득 그려진 용은 아직도 생동감 있다..

 

민흘림으로 치목한 원형기둥에 기둥머리는 창방과 평방을 걸고 그 위에 공포를 짜 올렸다.

포는 외3출목, 내4출목으로,  쇠서끝은 연봉오리와 연밥 등을 새기고 도리를 받친 초공은 봉황머리 모양으로 다듬었다.

정면 어칸 기둥 머리에 끼운 안초공은 용두를 새긴 부재를 썼다...

 

기단은 자연석을 사용하여 허튼층으로 쌓았으며, 초석은 다듬은 것과 다듬지 않은 것을 섞어 사용하였다.

다듬은 초석은 원형주좌를 도드라지게 새긴 원형초석을 놓았는데 초석 표면에 연꽃 외에 거북이나 게 등 수중생물을 새겼다.

초석에 새긴 다양한 수중생물은 단순히 바다와 가깝다는 미황사의 입지적인 이유 외에도 민간신앙을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대웅전 중앙 불단에는 조선후기에 제작한 목조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약사여래불의 삼세불(三世佛)을 봉안하였다.

크기는 중앙 석가모니불이 높이 136cm이고 좌우 협시불은 이보다 조금 작다.

본존불은 볼이 통통한 계란형의 얼굴에 머리는 나발로 낮은 육계와 반달형의 계주를 갖추었다.

이마에는 백호가 묘사되었고, 작은 눈은 반개하여 정면을 향하고 있는데 명상에 잠긴 표정이다.

코와 입은 반듯하며 귀는 길게 목까지 늘어뜨렸으며, 목에는 삼도를 표현하였다. 법의는 두 어깨를 모두 덮는 통견식(通肩式)으로 걸치고,

두 어깨에서 흐른 옷자락은 가슴 아래에서 U자형을 이룬다.

법의 안에 보이는 내의자락은 띠매듭으로 고정하였으며, 두 손은 항마촉지인을 결하였다..

 

좌우 아미타불과 약사불은 크기와 중품하생인의 수인을 취한 점만 본존불과 다를 뿐 얼굴의 생김새나 법의 착의형식은 동일하다.

삼세불의 대좌는 3단의 중앙 불단위에 3개의 연화대좌가 올려진 팔각대좌이며, 대좌의 문양은 화려하진 않지만 연화대좌에는 채색을

팔각대좌에는 금채를 하였다. 삼세불의 각각 앞에는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나무석가모니불(南無釋迦牟尼佛)’, ‘나무약사여래불

(南無藥師如來佛)’이 적힌 화려한 불패를 봉안하였고, 후불탱인 삼세불탱(1993년)과 좌측벽 불단에 신중탱(1943년)이 모셔져 있다.

이밖에 법고대(法鼓臺)와 1979년에 주조된 중간 크기의 종(鍾), 그리고 괘불(보물 제1342호)을 담은 목조 괘불함이 들어 있다.. 

 

괘불대(掛佛臺)..

대웅보전으로 오르는 계단 바로 앞에 양쪽으로 한 기씩 있다. 모두 조선시대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입구 쪽에 있는 것이 높이 145cm,

폭 45cm, 두께 15cm, 간공 6cm이고, 대웅전 앞에 있는 것이 높이 140.1cm, 폭 46cm, 두께 24cm, 간공 9cm이다.

형태는 간결하여 정상부분이 반원형인 직사각형의 기둥 형식이다..

 

보물 제1183호로 지정된 응진당(應眞堂)..

대웅전 오른쪽의 약간 높은 지대에 자리 잡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집이다. 

전면에 쌓은 담장 사이를 개방하여 돌문을 통해 오르는 듯한 분위기를 조성하였고, 측면과 배면에도 석축을 쌓아 일곽을 형성하였다.

'달마산 미황사 대법당중수상량문'에는 나한전으로 적혀 있으나 현재 현판은 응진당이다.

기단은 비교적 모양이 정연한 자연석을 사용하였는데 일부는 원래 제자리에 있던 커다란 자연암반을 그대로 기단으로 활용하였다.

응진당은 공포 형태나 '달마산 미황사 응진당 중수상량문'으로 미루어 1660년에 중건된 기본 골격을 유지하면서 1754년에 서까래와

천장 등을 대대적으로 수리한 뒤 지금까지 이어진 건물로 판단된다..

  

안에는 뒷벽과 좌우 측면벽에 붙여서 'ㄷ'자형 불단을 두고 그 위에 아난과 가섭을 협시로 한 석가삼존불상과 16나한상, 인왕상,

시자상 및 보살상을 봉안하였다. 중앙 석가불은 원만한 방형의 얼굴에 가늘고 긴 눈과 작은 코와 입을 갖추고, 낮은 육계가 있는 나발의

머리에는 중앙계주와 정상계주가 표현되었다.

수인은 항마촉지인을 결하였다. 대좌는 복판의 연화대좌가 올려진 8각대좌이며, 광배는 갖추지 않았다.

석가불 좌우에는 의좌상의 보살상이 모셔져 있는데 이는 석가의 협시보살인 문수·보현보살로 추정되며,

그 좌우로는 석가불의 또 다른 협시인 아난과 가섭존자가 시립하고 있다. 아난은 젊은 승려의 모습, 가섭은 나이 든 승려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외에 16나한은 기암 괴석이나 대좌에 앉은 의좌상으로 좌우 8분씩 16분이 대칭적으로 봉안되었고, 전각 입구 양쪽에는 제법 큰

인왕상이 권법의 자세로 시립하고 있다. 또한 내부 양 측면과 후면 벽체에는 흑선묘의 나한상과 보살상 등의 벽화가 14폭 남아있다..

 

명부전(冥府殿)..

대웅보전 왼쪽에 자리한 정면 5칸, 측면 2칸의 익공계 맞배지붕으로 1997년 원래 자리에 새로 지었다.

내부에는 뒷벽과 측벽에 붙여서 ㄷ자형 불단을 조성하고 중앙에 지장보살삼존상을 비롯해 시왕상 등의 권속을 봉안하였다.

좌우 출입문에는 금강역사상이 시립해있는데 오른쪽의 금강역사 앞에 근년에 조성된 법고와 법고대가 모셔져 있다.

ㄷ자형 불단으로 인해 전면 3칸에만 출입문을 달았고, 어칸에는 4분합이며, 좌우 협칸에는 3분합문을 설치하였다.

다른 면은 벽을 치고 상하로 나눠 하부는 긋기단청으로 마감하고 상부는 벽화를 그려 장엄하였다.. 

 

삼성각(三聖閣)..

대웅전과 명부전 사이에 있는 계단 위에 위치하며, 1998년에 새로 지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익공계 맞배집이다.

내부에는 뒷벽에 일자형 불단을 조성하여 중앙에 칠성탱(七星幀)을 중심으로 산신탱(山神幀)과 독성탱(獨聖幀)을 봉안하였다.

정면에만 문을 달았는데 어칸에는 4분합문을, 좌우 협칸에는 2분합문이다. 문짝은 궁판을 두고 그 위는 띠살로 짰다.. 

 

요사채..

주요 전각 외에 요사와 승방도 대부분 새로 지은 건물인데 1995년에는 승려의 수행처인 만하당(晩霞堂)을 건립하였으며

1996년에서 1997년 사이에 기존 세심당(洗心堂)을 허물고 새로 지었다.

2001년 이후 계속해서 후원채인 안심료를 신축하였으며 자하루를 복원하였다.

현재 미황사 부속 건물은 대웅전과 응진당 좌우에 포진해 있다. 먼저 사역 왼쪽에는 명부전 뒤쪽에 승방과 객실(향적전)이 있고,

그 밑에 종무소로 사용하는 가설건물이 있다. 응진당 오른쪽 영역에는 지형적으로 높은 단에 만하당과 달마전 두 채가 자리 잡았고,

그 밑으로 세심당과 후원(공양간)이 위치하고 있으며 공양간 밑으로 해우소 1동이 있다..

 

범종각(梵鐘閣)..

누각 바로 옆에 2004년에 새로 지었으며, 평면 사방 1칸의 단층 건물이다.

장대석 기단 위에 원형 초석을 놓고 원형기둥을 세워 창방과 평방을 걸고 다포계 공포로 외2출목, 내2출목으로 내외 출목수가 같다.

내부 천장은 대들보 높이에 맞춰 우물반자를 가설하여 구조를 볼 수 없으며, 처마는 서까래 위에 부연을 쓴 겹처마로 구성하였다.

지붕은 한식기와를 올려 모임지붕을 만들고 한가운데 돌로 만든 절병통을 장식하였다.

내부는 대들보 사이에 가로질러 보를 걸고 거기에 종을 매달았는데, 종구가 향한 바닥 부분만 약간 팠는데 음향효과를 노린 시도이다.

 '미황사대종중성기'에는 창건 때 조성한 종이 오래되어 도광 14년 즉 1834년에 새로 종을 조성했다고 하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부도밭..

대웅보전에서 남서쪽으로 동백나무 숲길을 따라 도보 10여분 거리에 위치한다.

부도밭은 다시 남쪽과 서쪽 두구역으로 나뉘어 남부도밭에 21기, 서부도밭에 6기 등 제법 많은 다양한 형식의 부도를 모시고 있다.

이들 부도의 조성 시기는 대부분 18~19세기로 추정된다.

남부도밭은 창건설화에 전하는 통교사 터로 알려져 있는데, 여기에는 탑비 5기, 부도 21기, 부도 부재 1기 총 27기가 모셔져 있다.

연담 유일(蓮潭 有一) 스님의 부도를 비롯해서 벽하당(碧霞堂), 설봉당(雪峰堂), 정련당(井蓮堂), 미봉당(眉峰堂), 완해당(玩海堂), 정암당

(晶岩堂), 송암당(松岩堂), 영월당(靈月堂, 1808), 오봉당(午峰堂, 1788), 송월당(松月堂), 백월당(白月堂, 1841), 죽암당(竹庵堂, 1821),

붕명당(鵬溟堂), 사봉당(師峰堂), 응화탑(應化塔), 혼허당(渾虛堂), 영허당(靈虛堂), 이봉당(?峰堂) 및 당호가 분명하지 않은 2기가 있다.

이러한 남부도밭의 부도는 규칙적이지는 않지만 대략 5열로 정리되어 있는데, 낭암대사부도가 그의 스승 송암당부도보다 앞 열에 있고,

송월당부도가 그의 제자인 응화당부도 보다 뒤에 있는 점 등을 미루어보아 일관적이지는 않지만 대체로 뒷열의 부도가 연대가 올라가고

앞쪽으로 나올수록 점점 연대가 내려오는 것으로 추정된다...

 

서부도밭은 남부도밭에서 서쪽으로 난 숲길을 따라 2~3분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하는데, 입구부터 영파당(靈坡堂), 창암당(蒼岩堂),

고압당(孤鴨堂, 18세기중엽), 감파당(減坡堂, 1768), 천연당(天然堂), 은곡당(銀谷堂, 19세기후반)의 부도가 있다.

남서 부도군을 합쳐 미황사의 부도는 형식적인 면에서 전통적인 형태인 팔각원당형부도가 15기, 방형의 탑신석에 지붕이 십자형을

띠면서 평면이 방형인 부도가 10기, 종형 및 기타 부도가 2기로 분류할 수 있다...

 

미황사의 부도는 이 지역이 바다에 가까운 영향 때문인지 부도의 기단부 또는 전면에 물고기, 게, 문어, 거북이 등의 무늬가 조각되어

있다는 점이 특이한데, 이 외에도 학, 물오리는 물론 유교 민간신앙의 소재도 등장하고 있다

 

보물 제1342호로 지정되어 있는 미황사 괘불(掛佛)..

대웅전 목조함에 보관되어 있는 이 괘불은 항마촉지인을 결한 석가불을 묘사한 것으로 옹정 5년(雍正五年, 1727) 9월에 삼베바탕에

채색하여 조성한 것이다. 길이 11.70m, 폭 4.86m이며, 현재 괘불은 대웅보전 중앙 불단 후벽 뒤편에 있는데 목제 괘불함에 모셔져 있다.

중앙에 석가여래를 독존의 입상으로 크게 묘사하고, 화면 상단 좌우에 구름을 타고 법회도량에 내려오는 화불 6위를, 하단 좌우에는

해상용왕과 용녀를 배치해, 조선후기 괘불이 대부분 석가의 영산회상을 주제로 많은 권속을 표현함에 반해 단순한 구성을 취하고 있다.

본존은 마치 좌상에서 보이는 원형 두광과 신광을 갖추었는데, 원만한 얼굴에 이목구비는 작으며, 윤곽선만 표현된 나발머리에는

뾰족하게 육계가 솟아 중앙계주와 정상계주가 큼직하게 묘사되었다.

전체적으로 화면은 원형 신광을 경계로 상단에는 천상의 세계를 묘사하고, 하단에는 좌우 용왕 용녀 주위로 바다 속 세계를 연출하였다.

용왕은 원유관을 쓰고 보석함과 같은 지물을 들고 본존불을 향하고 있고, 용녀는 여의주가 담긴 정병을 들고 있다. 바다 속 표현으로는

산호, 조개 등을 묘사하였는데, 본존이 딛고 서있는 연화대좌의 연화도 산호와 같이 표현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이는 대웅전의 기단과 부도밭의 부도 등에서 게, 물고기 등을 조각한 점과 연관하여, 미황사의 위치가 바다와 가까이 있다는 점과

상관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화기에 따르면 괘불의 조성에 참여한 화사는 탁행(琢行), 설심(雪心), 희심(喜心), 임한(任閑), 민휘(敏輝), 취상(就詳), 명현(明現)이며,

이들은 18세기 전반 전라도 및 경상도일대에서 활발히 활동한 의겸(義謙)화파의 유파와 임한(任閑)화파의 인물들이다.

이 괘불은 다른 괘불처럼 야외법회 때 걸기도 하지만 가뭄이 들 때 이 괘불을 걸고 제를 지내면 비가 내린다는 영험으로 유명한데,

실제로 1992년 기우제를 지냈는데 제를 지내고 서너 시간이 지나자 달마산으로 먹구름이 몰려와 폭우가 쏟아져 그 영험을 증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