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기행] 전라남도 기념물 제61호, 담양 독수정 원림(獨守亭 園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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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기행] 전라남도 기념물 제61호, 담양 독수정 원림(獨守亭 園林)

by 정산 돌구름 2011. 6. 7.
담양 독수정 원림(獨守亭 園林)과 소산정(小山亭), 죽림재(竹林齋)..

 

탐방일 : 2011년 6월 7일

독수정 원림(獨守亭 園林)

  담양군 남면 연천리에 있는 누정의 숲인 독수정 원림은 1982년10월15일 전남기념물 제61호로 지정되었다.

  원림 중앙에 자리한 독수정은 고려 공민왕 때 북도안무사(北道按撫使) 겸 병마원수(兵馬元帥)를 거쳐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낸

  서은(瑞隱) 전신민(全新民)이 1390년 전후에 세운 것이다. 전신민은 고려가 멸망하자 두문동 72현과 함께 두나라를 섬기지 않을 것을

  다짐하며 벼슬을 버리고 이곳으로 내려와 은거하며 그 뜻을 혼자라도 지키겠다는 뜻으로 독수정을 건립하였다.

  전신민은 물이 흐르는 남쪽 언덕 위에 정자를 짓고 뒤쪽 정원에는 소나무를 심고 앞의 계단에는 대나무를 심어 수절을 다짐하였다.

  또한 다른 정자에 비하여 정자의 방향이 북쪽을 향하고 있는 이유는 송도를 향하여 아침마다 조복을 입고 곡배하며 자신의 충절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독수정이라는 정자의 이름은 이백의 시구 중 ‘백이숙제는 누구인가. 홀로 서산에서 절개를 지키다 굶어 죽었네’에서 따온 말이다.

  이 정자는 정면과 측면 각3칸의 팔작지붕으로 정면 1칸과 후퇴(後退)를 온돌방으로 꾸몄다.

  정면과 측면 모두 3칸의 중앙에 재실이 있는 팔작지붕으로 비교적 보존이 잘 된 상태이다.

  창호는 띠살창인데 측면은 2분합문, 정면은 4분합문의 열 개로 하여 걸쇠에 걸게 하였다.

  독수정 주위 일대의 노거수 원림을 기념물로 지정하였으나 정자는 1972년에 허물고 새로 건립하였기 때문에 지정을 받지 못하였다.

  독수정 지역은 진입로에 중국 원산종인 회화나무, 자미나무 등의 노거수가 심어져 있고, 정자 앞에는 자미나무, 매화나무 등의 수목이

  심어져 있는데 그 크기로 보아 1890년대 중건 당시에 심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경적인 측면에서 볼때 고려시대에 성행했던 산수 원림으로서의 기법을 이 지방에 도입하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담양 소산정(小山亭)

  담양군 고서면 분향리 용담대(龍潭臺) 위에 세워진 정자로, 2004년1월6일 담양군향토유형문화유산 제6호로 지정되었다.

  광주호 좌측의 용담대 위에 증암천(甑岩川)을 굽어보면서 남향하고 있으며 우측으로는 무등산을 향하고 있다.

  만옹정(晩翁亭), 관수정(觀水亭) 등 창녕조씨문중의 정자와 마찬가지로 이 정자도 창녕인 동호당 (桐湖堂) 조은환(曺殷煥)이 선조인

  환학공(喚鶴公) 조여심(曺汝諶)이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제봉(霽峯) 고경명(高敬貿)과 더불어 소요유영(逍遙遊詠)하던 유적을 기리기

  위해 1927년에 건립된 것이다. 정자내에는 송회헌(宋會憲)의 기(記) 및 이승학(李承鶴), 김관호(金觀鎬), 오준선(吳駿善), 조병하(曺秉夏),

  고광선(高光善), 김명수(金明秀) 등의 시문이 있다.

  정면과 측면 각3칸 규모의 팔작지붕집으로 전면과 후면에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화강석 기둥이 마루 높이까지 올라오며, 그 위쪽으로는 나무 원기둥을 세웠다.

  천장은 연등천장, 기와는 한식기와이다. 정자 외부 왼편에 ‘소산정(篠山亭)’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내부에 ‘소산정기(小山亭記)’ 현판

  등 9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현판은 해강 김규진의 글씨이다.

 

 

 

 

 

죽림재(竹林齋)

  담양군 고서면 분향리에 있는 조선시대 서원으로 1987년1월15일 전남기념물 제99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은 죽림 조수문(曺秀文)이 사숙(私塾)의 수련장으로 사용하려고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는데, 인조1년(1623)에 조수문의 6대손인 삼청당 조부(曺溥)가 중건하였다.

  고종5년(1868) 흥선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헐렸다가 1948년 다시 세운 것이 지금에 이른다.

  정면과 측면 각2칸의 홋처마 팔작지붕이며, 전툇간을 비롯한 서쪽과 북쪽에 툇마루를 깔았으며, 동쪽은 나중에 변형된 듯하다.

  전면(前面)에서 보아 2개의 방은 이분합(二分閤)의 세살문을 달았다. 측면은 비늘살이 고정된 비늘창이 설치되어 통풍이 잘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