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기행] 현존 최고의 도량 강화도 전등사(傳燈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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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기행] 현존 최고의 도량 강화도 전등사(傳燈寺)

by 정산 돌구름 2007. 5. 6.
현존 최고의 도량 강화도 전등사(傳燈寺)..

 

 

탐방일 : 2007년 5월 5일(토)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635

 전등사(傳燈寺) 소개 

  381년(소수림왕 11)에 아도(阿道)가 창건하여 진종사(眞宗寺)라 하였다. 그 후 고려 제27, 28, 30대의 충숙왕(忠肅王)·충혜왕(忠惠王)·

  충정왕(忠定王) 때에 수축하였고, 1625년(인조 3)과 1906년에도 중수하였으며, 또 일제강점기에도 두 차례 중수하였다.

  전등사라는 이름은 충렬왕(忠烈王:재위 1274∼1308)의 비 정화궁주(貞和宮主)가 이 절에 옥등(玉燈)을 시주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때 정화궁주는 승려 인기(印奇)에게 《대장경》을 인간(印刊), 이 절에 봉안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 절에는 보물 제178호인 전등사 대웅전(大雄殿), 보물 제179호인 전등사 약사전(藥師殿), 보물 제393호인 전등사 범종(梵鐘)이 있다.

  또 대웅전에는 1544년(중종 39) 정수사(淨水寺)에서 개판(改版)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의 목판 104장이 보관되어 있다. 

  전등사는 현존하는 한국사찰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졌으며 나라를 지킨 호국불교 근본도량으로 역사와 권위를 간직한 사찰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바와 같이 삼랑성은 단군이 세 아들(三郞)을 시켜 쌓았던 고대의 토성이었고, 삼국시대에는 토성 자리에

  석성을 쌓아올려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삼랑성 안에 자리 잡은 전등사는 세 발 달린 솥을 거꾸로 엎어놓은 모양을 가진 정족산과

  더불어 강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문화 유적으로 유명하다.

  전등사가 창건된 것은 서기 381년(고구려 소수림왕 11년)으로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으로 전래된 것이 서기 372년이므로 지금은 그 소재를 알 수 없는 성문사, 이불란사(375년 창건)에 이어

  전등사는 한국 불교 전래 초기에 세워진 이래,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도량임을 알 수 있다.

  처음 전등사의 창건은 진나라에서 건너온 아도화상..  당시 아도화상은 강화도를 거쳐 신라 땅에 불교를 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아도화상이 강화도에 머물고 있을 때 지금의 전등사 자리에 절을 지었으니 그때의 이름은 ‘진종사(眞宗寺)’라 하였다.

   진종사가 다시 역사의 기록에 등장한 것은 고려 고종 46년 때인 1259년이었다. 이때 고종은 삼랑성 안에 가궐(假闕)을 지었다.

  이보다 앞선 1232년, 고려 왕실에서는 몽골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강화도로 임시 도읍을 정하고 궁궐을 지은 바 있다.

  고려의 강화도 도읍은 1232년부터 1270년까지 이어진다.

  그 기간 중 전등사 경내에 가궐을 지은 것은 풍수지리설과 더불어 임금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

  고려 때 강화에서 조성된 팔만대장경 역시 부처님의 가피로 나라를 지키겠다는 호국불교 사상의 결정체였다.

  고려 조정에서는 대장경을 조성하기 위해 1245년, 선원사를 창건했는데 그 무렵에도 오랜 역사를 가졌던 진종사가 대장경 조성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였을 것이라 추측되고 있다.

  고려 왕실에서는 삼랑성 안에 가궐을 지은 후 진종사를 크게 중창시켰으며(1266년), 16년이 지1282년(충렬왕 8년)에는 왕비인

  정화궁주가 진종사에 경전과 옥등을 시주한 것을 계기로 ‘전등사’라 사찰 명칭을 바꾸었다.

  이때는 고려 왕실이 개경으로 환도한 뒤였고, 39년 동안 쓰였던 강화 궁궐터는 몽골군에 의해 폐허로 변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삼랑성 안의 전등사는 꾸준하게 사세를 유지해나갔다.

  그만큼 고려 왕실이 전등사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정족산의 산세가 안온한 명당이라는 것을 뜻한다. 풍수가들 역시 ‘마니산이

  할아버지산이라면 정족산은 할머니산으로, 신령스러운 기운이 있어 전란에도 피해를 입지 않는 복지(福地)’임을 강조하고 있다.

 전등사는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에도 불구하고 향화(香華)가 그치지 않았던 가람이다.

  하지만 여고찰과 마찬가지로 전등사도 몇차례의 화마를 겪었다. 조선 광해군 때인 1614년에도 화재로 인해 건물이 모두 소실되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지경 스님을 중심으로 한 대중이 재건을 시작해 1621년 2월에는 전등사의 옛 모습을 되찾았다.

  지금까지 건물의 건축적인 가치는 물론 ‘나부상’으로 더욱 유명한 전등사 대웅전(보물 178호)도 이때 중건되었다.

  숙종 때인 1678년, 조선왕조실록을 전등사에 보관하기 시작하면서 전등사는 왕실종찰로서 더욱 성장했다.

  본래 왕실에서는 실록을 4부씩 만들어 궁궐 내의 춘추관과 충주, 성주, 전주 등 네 군데의 사고(史庫)에 보관하도록 했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고 전주 사고만 무사했다. 이때 전주 사고본이 보존된 것만 해도 우리 역사에서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조정에서는 임진왜란 후 전주 사고본을 4부씩 옮겨 적게 하여 전주 사고본은 강화도 전등사로 옮겼고, 다른 실록은 봉화군 태백산,

  영변 묘향산, 평창 오대산에 각각 보관하게 했다.

  1707년, 강화 유수였던 황흠은 사각(史閣)을 고쳐 짓고, 다시 별관을 지어 취향당이라 이름하였다.

  그때부터 정족산 사각은 실록은 물론 왕실의 문서까지 보관하는 보사권봉소로 정해졌다.

  이때 왕실의 세보인 선원세보를 비롯해 왕실 문서를 보관하던 건물이 ‘선원각’이었다.

  이후 1719년부터 1910년까지 전등사의 가장 어른 스님에게는 도총섭이라는 지위가 주어졌다.

  도총섭은 조선시대 최고의 승직을 일컫는 말이다. 1726년에는 영조 임금이 직접 전등사를 방문해 ‘취향당’ 편액을 내렸는가 하면

  1749년에는 영조가 시주한 목재를 사용해 전등사의 중수(重修) 불사가 이뤄지기도 했다.

  이 때 대조루도 함께 건립되었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전등사는 더욱 빈번하게 왕실의 지원을 받는 사찰로 부각되었다.

  조선말기로 접어들면서 전등사는 그 지형적 특성으로 인해 국난을 지키는 요충지 구실을 하기도  했다.

  1866년, 프랑스 함대가 조선에 개항을 요구한다는 명목으로 강화도를 점령했다.

  이에 맞서 조정에서는 순무영을 설치하고 양헌수 장군 등을 임명하여 프랑스 함대를 물리치게 했다.

  이때 양헌수 장군은 휘하 병력을 이끌고 초지진을 건너 정족산성에서 적을 무찔렀다.

  조선군을 얕잡아보던 프랑스 함대는 이 전투가 끝난 뒤 크게 전의를 상실하여 조선에서 물러갔다.

  프랑스군은 양헌수 부대와 싸우기 직전만 해도 정족산성을 돌파하고 전등사에서 점심을 먹겠노라 공언한 바 있었다.  이 전투에서는

  조선의 관군뿐만 아니라 경기·황해도 일대의 포수들, 전등사 사부대중들까지 가세하여 나라의 위기를 구하는 데 힘을 모았다.

  조정에서는 전투의 승전을 기리기 위해 양헌수 장군 승전비와 비각을 정족산성 동문 내에 세웠다.

  또한 지금도 전등사 대웅전 내부의 기둥과 벽화에는 여러 사람의 이름을 적은 낙서의 흔적이 남아있다.

  병인양요 당시 부처님의 가피로 국난을 극복하려는 병사들의 염원이 그렇게 남게 된 것이다.

  당시 국정의 실권을 쥐고 있던 대원군은 병인양요 후 전등사에 포량고를 건설하였고, 이듬해인 1872년에는 승군 50명과 총섭 1명을

  두게 하여 전등사는 다시금 국난 극복의 호국 도량으로 자리매김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등사는 호국기도 도량으로 널리 알려져 창건 이래 나라의 역사를 움직였던 인사들이 꾸준하게 찾는 수도권 최고(最古)의

  기도 도량으로 손꼽힌다. 현재 전등사에는 대웅보전, 약사전, 범종 등 보물급 유적을 비롯해 국가사적, 인천시 지정 유형문화재 등

  무수한 문화 유적을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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