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기행] 부소산성, 낙화암과 백마강, 그리고 구드래나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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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기행] 부소산성, 낙화암과 백마강, 그리고 구드래나루터..

by 정산 돌구름 2009. 4. 27.
부소산성 낙화암과 백마강, 그리고 구드래나루터...

 

탐방일 : 2009년 4월 25일(토)

탐방지 소개

<부소산성(扶蘇山城)>

백제의 마지막 왕성으로 백제시대에는 사비성(泗沘城)으로 불렸고, 부여일대의 평야를 사비원(泗沘原)이라 하고, 금강을 사비하(泗沘河)

라고도 하였다. 부여군 부여읍의 서쪽에 금강을 낀 부소산에 자리하고 있으며, 둘레는 대략 2.2km, 면적은 약 74만㎡에 달한다.

부소산성은 부소산 정상에 테뫼식산성을 쌓은 후, 주변을 포곡식으로 쌓은 복합산성이다.

부소산성 주변에는 다시 청산성과 청마산성 등의 보조성이 있으며, 남쪽에는 성흥산성의 지원을 받았다.

과거의 군수품 창고 터 등이 남아 있으며, 그 외에도 낙화암과 고란사 등이 있다.

산이라고 하지만 해발 100m 정도밖에 되지 않는 언덕으로 그 주변을 두르고 있는 산성은 백제의 마지막 보루가 되었던 곳이다.

입구에서 오르면 먼저 삼충사라는 사당이 나오는데 백제 말의 충신인 성충·흥수·계백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곳이다. 임금에게 직언을

하다 감옥에 갇혀서도 나라 걱정을 했던 성충, 성충과 함께 임금께 고하다 유배를 당한 흥수, 황산벌전투로 잘 알려진 계백...

삼충사를 지나 오르면 동쪽을 향하고 있어 해맞이를 할 수 있는 영일대가 나오며, 그 뒤편으로는 곡식창고 자리였던 군창 터가 있다.

낮은 울타리로 둘러놓아 들어가지는 못하지만 이곳에서 불탄 쌀이나 콩들이 발견되는데 바로 군량을 적에게 내어주지 않기 위해 불을

낸 흔적이다. 부소산성 가장 꼭대기의 사자루는 달을 바라보는 서편을 향하여 자리하고 있다.

백제가 협소한 웅진(熊津)을 버리고 넓은 들이 있는 곳에 보다 큰 도읍을 건설하기 위해 천도한 것은 538년(성왕 16) 봄이다.

무왕은 수도의 건설을 위하여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공장ㆍ화사 등을 청하였다. 사비성은 이때 새로 쌓은 것이 아니고 수축만 하였다.

이 성은 부소산을 감싸고 있고 양쪽 머리가 낮게 둘러져 백마강을 향해 초승달의 형태를 보이고 있어 반월성(半月城)이라고도 했다.

조선시대의 기록에는 성터의 길이가 13,000여척이나 되며, 치소가 성 안에 있었다고 한다.

백제가 망한 뒤 백제의 유민들이 모여서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는데, 664년(문무왕 4)에는 한때 사비성을 점령하여 신라군을 물리치기

까지 했다. 당나라가 사비성을 점령한 뒤 이곳에 동명주도독부를 설치하였으며, 웅진ㆍ노신ㆍ구지ㆍ부림의 4개 현을 예속시켰다.

신라가 이곳을 차지한 뒤 사비주(泗沘州, 또는 所夫里州)를 설치하였고(문무왕 11), 신문왕 때 군으로 바꾸었다.

경덕왕 때 부여군(扶餘郡)으로 바꾸어 웅주(熊州: 지금의 공주시) 관할하에 두었고, 석산ㆍ열성의 두 현을 예속시켰다.

부여의 명칭은 성왕이 이곳으로 천도할 때 남부여(南扶餘)라고 한 데서 유래된다. 고려 이후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부소산성 군창지...

 

곡식창고 자리였던 군창터... 불탄 쌀이나 콩들이 발견되는데 바로 군량을 적에게 내어주지 않기 위해 불을 낸 흔적이다.

 

삼충사(三忠祠)...

 

백제(百濟)의 충신(忠臣)인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1957년에 세운 사당(祠堂)이다...

 

성충(成忠)은 백제 의자왕때 좌평으로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애쓰다가 투옥되어 식음을 전폐하고 죽은 충신이며, 

흥수(興首)는 나당연합군이 공격해 오자 탄현(炭峴)을 지키라고 의자왕에게 간곡하게 당부하였던 것으로 유명하고,

계백(階伯)은 신라 김유신 장군의 5만군이 황산벌로 쳐 들어오자 5천 결사대로 싸우다가 황산벌에서 장렬히 죽은 장군이다..

 

영일루(迎日樓)..

1984년 12월 29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101호로 지정되었다. 백제 때 축조된 부소산성의 동대(東臺)에 유존하던 건물지에 홍산문루를

옮겨와 세웠다. 누각을 옮겨 세우기 위해 땅을 고르게 다듬는 공사를 할 때 백제의 와편이 많이 출토되기도 했다.

이곳에서는 청마산성(靑馬山城: 사적 제34호)이 멀리 바라다 보이며, 남쪽으로는 백마강을 건너 임천면에 있는 백제 때의 부여 성흥산성

(사적 제4호)과 구룡평야가 조망된다...

 

이 누각은 백마강 기슭에 있는 부소산(106m)의 동쪽 산봉우리에 자리잡고 있으며 공주 계룡산연천봉이 아득히 바라다 보인다.

원래 이곳에는 영일대가 있었는데 계룡산의 연천봉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던 곳이라고 전해진다.

지금의 건물은 1964년 5월 홍산에 있던 조선시대의 관아문(官衙門)을 옮겨와 세운 것으로 이름을 영일루라고 하였다...

 

백제의 흔적들...

 

반월루(半月樓)....

 

백마강이 반달모양으로 끼고 도는 부소산 남쪽 마루에 있으며 부여 시가지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

 

백마강과 부여 시가지 전경....

 

사자루와 고란사를 찾아..

 

부소산 관광안내도..

 

사비루(泗沘樓, 사자루 泗(水+此)樓) ...

1984년5월17일 충남도문화재자료 제99호로 지정되었다..

 

원래 1824년(순조24)에 군수 심노승이 세운 것으로 임천면의 관아 정문이던 배산루를 1919년 부소산성에서 가장 높은 곳인

송월대(送月臺)에 옮겨짓고 이름을 개산루(皆山樓)에서 사비루로 바꾸었다.

2층 문루 건물로 사방이 개방되어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2층에는 누각을 설치하였으며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건물 정면에 한말 의친왕 이강(李堈)이 쓴〈泗(水+此)疵樓(사자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백마강쪽으로는 해강 김규진이 쓴〈白馬長江(백마장강)〉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땅을 고를 때 정지원(鄭智遠)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백제시대의 금동석가여래입상(金銅釋迦如來立像 보물 제196호)이 발견되었다고..


<낙화암(落花岩)>

낙화암(落花岩)은 백제 의자왕 20년(660년) 나ㆍ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백제의 수도 사비성이 함락될 때, 백제의 3천궁녀가

이곳에서 백마강(白馬江)을 향해 몸을 던졌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바위이다. 그 바위를 사람들이 낙화암이라고 불렀는데, 

절벽 아래에는 ‘낙화암(落花岩)’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110호로 지정되어 있다...

 

자살한 궁녀에 대한 내용이 언급된 최초의 기록은 일연의「삼국유사」권1「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조인데, 다음과 같다.

[百濟古記云『扶餘城北角有大岩, 下臨江水, 相傳云, 義慈王與諸後宮知其未免, 相謂曰“寧自盡, 不死於他人手.”相率至此, 投江而死,

故俗云墮死岩.』 斯乃俚諺之訛也. 但宮人之墮死, 義慈卒於唐, 唐史有明文.]

<백제고기(百濟古記)>에 말하였다. 『부여성 북쪽 모서리에 큰 바위가 있어 그 아래로 강물에 임하였는데, 서로 전하기를,

의자왕과 여러 후궁들은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차라리 자진할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 하여 서로 이끌고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하므로 세상에서는 타사암(墮死岩)이라고 부른다.』

이는 속설의 와전이다. 궁녀들은 그곳에서 떨어져 죽었겠지만, 의자왕이 당에서 죽었다 함은 당사(唐史)에 명백히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는 실제 역사와는 다른 전설도 포함되어 있으며, 당시 궁궐터를 가지고 분석해본 결과로는 3천명이나 되는 인원을 수용할 수

없다는 지적도 있다. 그 뒤 고려 시대에 '낙화암'이라는 이름이 나오고, 안정복의 <동사강목(東史綱目)> 권2에서 “여러 비빈”(諸姬)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3천'이라는 수효에 대한 첫 언급은 조선 초의 문신 김흔이 '낙화암'이란 시에서 “삼천의 가무 모래에 몸을 맡겨/꽃 지고

옥 부서지듯 물 따라 가버렸도다(三千歌舞委沙塵 / 紅殘玉碎隨水逝)”라고 읊은 것이 최초였다.

이후 윤승한의 소설 <김유신>에서 '3천 궁녀'라는 말을 직접적으로 사용했고, 이홍직이 쓴 <국사대사전>의 '낙화암' 항목에서 공식적으로

쓰이게 되었다. 결국 근대 이전에 “삼천궁녀”를 기록한 역사서는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낙화암 위에 1929년 군수 홍한표(洪漢杓)가 백화정(百花亭)을 지었다..

 

백마강(白馬江) ...일반적으로 금강변 부여읍(扶餘邑) 정동리의 앞 범바위(虎岩) 천정대에서 시작되어 낙화암과 조룡대, 구드래나루터,

부산과 대재각, 수북정과 자온대, 맞바위, 세도면 반조원리에 이르는 약16㎞ 구간을 백마강이라 한다.

전북 장수 신무산(神舞山, 897m)에서 발원하는 금강은 서쪽으로 꺾여 흘러서 공주에 이르러 웅진(熊津) 또는 금강이 되고

유구천(維鳩川)을 합하여 남쪽으로 곡류하면서 부여군에 이르러 고성진(古省津) 또는 백마강이 된다.

금강은 백마강을 지나 논산천을 합하고 강경을 거쳐 충청남도와 전라북도의 경계를 이루며 황해로 들어간다.

백마강은 소정방이 백마의 머리를 미끼로 하여 용을 낚았던 바위를 조룡대(釣龍台)라 하고 강의 이름도 사하(泗河)에서 백마강으로

바뀌었다고 하나, 백제 말기보다 1백60여년 앞선 무녕왕시대의 기록에 이미 금강을 ‘白江(백강)’으로 표기했던 사실이 있고 역사적으로

말(馬)을 ‘크다’는 뜻으로 써온 것을 감안할 때 백마강은 곧 ‘백제에서 가장 큰 강’이기에 붙여진 이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백마강 일대는 538년(성왕 16)에 국도를 웅진에서 사비성인 부여로 옮겨, 660년(의자왕 20)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백제의 심장부였다.

강의 남안에 있는 부소산에는 부소산성·군창지·고란사 등의 사적이 있으며, 동쪽 끝 약 100m 높이의 단애에는 백제가 멸망할 때

삼천궁녀가 백마강으로 몸을 던졌다는 전설의 낙화암이 있다.

이 지점이 바로 백마강 곡류의 공격사면이다. 백제 때의 요새로 660년에 당나라 소정방(蘇定方)이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침공할 때

당나라 군사가 쉽게 상륙하여 백제군을 치고 신라군과 연합하여 사비성을 공격하였던 곳이다.

663년(문무왕 3)에 백제 부흥을 꾀하는 백제와 일본의 수군)과 나당연합의 수군이 격전한 백촌강의 싸움터도 여기이다.

규암나루은 백마강의 주요 나루터였으나 백제대교의 건설로 나루터취락의 기능이 상실되었고 다만 농업지역으로 남아 있다.

<삼국사기>에는 백강(白江), <일본서기>에는 백촌강(白村江)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백제의 도읍이 들어선 이후로 금강의 역할이 더욱

커졌는데, 특히 백마강은 일본, 신라, 당나라, 서역에 이르도록 문물교역의 큰 길목이 되었던 곳이다..

 

고란사(皐蘭寺)..

1984년5월17일 충남도문화재자료 제98호로 지정되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이다..

 

백제 말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할 뿐,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절 뒤 바위 틈에 고란정(皐蘭井)이 있으며, 그 위쪽 바위틈에 고란초(皐蘭草)가 나 있다.

일설에 의하면 이 절은 원래 백제의 왕들을 위한 정자였다고 하며, 또 궁중의 내불전(內佛殿)이었다고도 전한다... 

 

 

고란초와 약수의 전설...

 

삼성각..

 

백제가 멸망할 때 낙화암(落花岩)에서 사라져간 삼천궁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1028년(고려 현종 19)에 지은 사찰이라고도 한다.

1629년(인조 7)과 1797년(정조 21) 각각 중수하였으며, 1900년 은산면에 있던 숭각사를 옮겨 중건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1931년에 지은 것을 1959년 보수, 단장한 정면 7칸, 측면 5칸의 법당과 종각인 영종각 뿐이다...

 

 

고란사 유람선선착장...

 

 

백제의 황포돛대를 재현한 유람선을 타면 낙화암 절벽에 새겨진 우암 송시열의 낙화암 글자와 당나라 소정방이 백마를 미끼로

용을 잡았다는 바위 조룡대를 볼 수 있고 구드래나루로 갈 수 있다...

 

구드래나루...

'구드래'는 부소산 서쪽 기슭의 백마강 가에 있는 나루터 일대를 말한다.

이 명칭은 ‘구들돌’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추측하는데,『삼국유사』에 의하면, 백제왕이 왕흥사에 예불을 드리러가다 사비수 언덕

바위에 올라 부처님을 향해 절을 하자, 바위가 저절로 따뜻해져서 이 곳을 ‘자온대(自溫臺)’라 부르게 되었고, 그 이름에서 구들돌,

그리고 다시 구드래로 변하여 구드래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또한 백제를 오가는 왜의 배들이 구드래 나루터를 통해 백제의 수도인 사비에 들어 왔는데, 왜에서 백제를 부를 때 ‘구다라’라고 부른

것은 ‘구드래’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백마강가의 구드래나루는 공원으로 꾸며졌고, 구두래나루 건너 울성산에는 600년(무왕 1)에 창건된 사찰 왕흥사(王興寺) 터가 있다...

 

백마강가의 휴게소...

 

구드래 일원은 강과 어울려 경치가 빼어나며 주변에 유적이 많다.

백마강 양쪽 기슭에는 천정대를 비롯하여 호암사지(虎岩寺址), 청룡사지(靑龍寺址), 부소산성(扶蘇山城), 부여나성(扶餘羅城) 등의

백제 유적이 많다. 1984년12월6일 사적 및 명승 제6호 '부여 구두래일원'으로 지정되었다가 2009년12월9일 지정 해제됨과 동시에

명승 제63호로 다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