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탐방일 : 2009년 5월 2일
○ 소재지 : 전남 나주시 대호동
○ 심향사 소개
대한불교 조계종 제18교구 본사인 백양사의 말사로 통일신라시대 원효가 창건하였고, 1358년(공민왕 7)에 중수하였으며,
1789년(정조 13)에 몽수가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옛 이름은 미륵원(彌勒院)이라 하였고, 그 뒤 신왕사(神王寺)로 바뀌었다가 심향사로 되었다.
언제부터 심향사로 이름이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신왕사’로 기록하고 있고, 미륵전 건물에서
발견한 기록에 따르면 정조13년(1789) 무렵까지는 ‘신황사’로 불렸던 듯하다.
고려 현종 2년(1011)에 거란군이 침입하자 현종이 이곳 나주로 몽진하여 나라의 평안을 위해 기도를 올렸다고 전하는데,
‘신황사(神皇寺)’라는 이름에서 황제 황(皇)자를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임금이 이 절의 대법회에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미륵전과 대웅전·요사채 등이 있다.
미륵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서 1976년 8월에 장마로 인해서 붕괴된 것을 1977년 10월에 재복원 하였다.
내부에는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는 석조미륵불좌상이 봉안되어 있고, 후불탱화와 1910년에 그린 지장탱화가 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며, 대웅전 안에 봉안된 불상은 베(布)에 칠을 한 건칠불(乾漆佛)로서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99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불상은 조선시대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데 매우 단아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또 대웅전 안에는 후불탱화를 비롯하여, 1910년에 그린 독성탱화, 조선 후기의 민화적 성격을 띤 산신탱화 등이 있다.
이밖의 문화재로는 미륵전 앞에 있는 삼층석탑이 있고, 미륵전 앞에는 500년 전에 심었다는 팽나무와 모과나무 두그루가 있다.
또, 보물 제50호로 지정된 나주북문외삼층석탑과 보물 제364호로 지정된 나주서문석등도 원래는 이 절에 있었던 것으로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다시 옮겨 보관하고 있다. 이 절 일원은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88호로 지정되어 있다.
극락보전(極樂寶殿)..
정면과 측면 각3칸의 다포계 팔작집으로 심향사 사역 중심축 가장 뒤편 높은 지대에 자리 잡고 있다.
정면 3칸은 모두 4분합문을 달고 좌우 측면에는 전면 쪽에 외짝 출입문을 달았으며, 나머지 면은 모두 벽을 들였다.
벽화는 그리지 않고 긋기단청으로 마감하였다. 기단과 초석은 다듬은 돌을 사용하였으며 초석은 운두가 높은 원형이다.
초석 위에 원형기둥을 세우고 기둥상부는 창방과 평방을 차례대로 걸고 그 위에 공포를 올렸다.
포는 외3출목, 내4출목이며 간포는 각 칸마다 2구씩 배열하였다.
어칸 좌우 기둥 상부에 짜인 안초공은 용 형상을 새겼는데 외부로는 용두와 몸체, 내부로는 용의 꼬리 부분이 표현되어 있다.
용은 입에 여의주를 물고 있으며 모습은 유사하나 몸체를 황색, 청색으로 달리 칠해 황룡과 청룡을 표현하고 있다.
천장은 우물반자, 처마는 서까래 위에 부연을 쓴 겹처마로 구성하고 한식기와를 올려 팔작지붕을 조성하였다.
기와골 끝은 막새로 마감하였으며, 전면 기둥 4개소에는 주련을 걸어 장식하였다.
1982년에 중건하면서 대웅전에서 극락보전으로 전각 이름을 바꾸었으며, 전남 문화재자료 제88호로 지정되어 있다...
내부 중앙에는 후불벽을 만들고 전면에 불단과 닫집을 상하로 장엄한 후 불단 위에 건칠불인 아미타여래를 봉안하고
후불벽에는 후불탱을 걸었다...
중앙 불단 좌우 칸에는 별도의 불단으로 두고 각각 지장보살상과 11면관음보살상을 모셨다.
11면 관음보살상의 오른쪽에는 나무로 만든 나한상이 있고, 11면관음보살상 뒤에는 관음보살도가 있다.
또한 지장보살상 뒤에는 지장탱, 나한상 뒤에는 산신탱, 건물의 오른쪽 벽에는 신중탱을 모셨는데, 이들은 모두 1983년에 그려진 것이다.
또한 건물 왼쪽 벽에는 호명당(浩溟堂), 황응당(幻應堂), 봉하당(峰霞堂) 스님의 영탱을 걸어 극락보전이면서도 지장전, 관음전, 조사당
등의 기능을 모두 수용하고 있다..
지장보살상(地藏菩薩像)과 지장탱(地藏幀)..
중앙의 아미타불상을 향했을 때 왼편에 모셔졌으며, 높이는 58cm로, 오른편의 11면관음보살상과 함께 주존 아미타불을 협시하고 있다.
지장보살은 좌우에 무독귀왕과 도명존자를 협시로 하는데, 여기서는 관음보살과 함께 아미타불을 협시하는 협시보살로 봉안되었다.
승문형으로 묘사되는 지장보살은 화려한 장식을 갖추지 않고 석장이나 보주의 지물을 든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 지장보살은 오른편의
관음보살과 함께 아무 지물없이 구품인을 결한 결가부좌의 좌상으로 표현되었고, 원만한 둥근 얼굴에 승문형 머리모양을 하고 있다.
이마에는 백호를 묘사하였고, 가늘고 길게 뜬 눈은 약간 웃는 듯한 느낌을 풍기며, 얼굴에는 살이 올라 풍만함을 느끼게 한다.
수인과 법의는 오른편 관음보살과 같게 표현되었는데, 다만 오른 손의 높이가 조금 더 높은 것이 차이점이다.
지장보살상 뒤에는 무독귀왕과 도명존자를 협시로 한 지장탱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것 역시 관음탱과 함께 1983년에 제작된 것이다.
중앙에 두광과 신광을 갖춘 두건을 쓴 피건형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양 무릎 옆으로 도명존자와 해상용왕을 그리고, 둘레는 시왕(十王)을
비롯한 권속을 배치하였다. 제작은 극락보전의 다른 불화 관음탱, 독성탱, 신장탱과 함께 금어(金魚) 구봉(龜峯)비구가 하였다...
11면관음보살상(十一面觀音菩薩像)..
중앙불단의 아미타불상을 향했을 때 우측에 모셔졌으며, 높이는 58cm로 왼편의 지장보살상과 함께 주존 아미타불을 협시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십일면관음보살은 열한가지의 얼굴 모습을 나타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중생들을 구제하고자 하는 대비(大悲)의 보살로서
정면에는 자비상(慈悲相) 3면을, 우측에는 백아출상(白牙出相) 3면을, 좌측에는 분노상(憤怒相) 3면을, 뒷면에는 폭대소상(暴大笑相)
1면에 원래의 얼굴 1면을 더해 11면이 된다. 또한 정수리에는 불도를 설하는 좌상의 아미타불을 표현하는데, 관음이 이처럼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은 여러 마음으로 중생들을 적절히 구제하기 위한 것이다.
11면관음보살상의 얼굴은 원만한 둥글며, 가늘게 뜬 눈, 작은 코와 입을 가졌는데 이전 상들에 비해 이목구비가 집중되어 있지 않다.
이마위로는 띠장식을 두르고 이 장식은 머리 뒤 양쪽에서 흩날리게 조각되었다.
머리 위에 표현된 10면의 얼굴은 경전상의 11면관음상의 도상과 달리 표정의 변화가 거의 없이 묘사되었으며, 정수리의 좌불은 통견의
법의를 선정의 자세로 결가부좌하고 있으며, 등 뒤로는 화연의 광배를 갖추고 있다.
법의는 두 어깨를 모두 걸친 통견식으로 걸치고, 내의는 가슴부분에서 띠매듭 없이 그냥 띠로 고정하고 있다.
이 11면보살상은 왼편에 모셔진 지장보살상과 함께 최근에 조성된 것이다.
보살상의 뒤에는 해상용왕과 남순동자를 협시로 한 관음탱이 봉안되어 있다.
이 관음탱은 아미타후불탱과 함께 1983년에 제작된 것으로 바다 한가운데 자연암벽의 풀방석위에 앉은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목조나한상(極樂殿 木造羅漢像)..
11면관음보살상의 우측에 모셔졌으며 승문형의 모습으로 한쪽 무릎을 세워 안고 앉은 자세로 표현되었다.
그 뒤쪽으로는 1983년에 조성된 독성탱 1점이 봉안되어 있다.
이 나한상과 독성탱은 함께 조성된 듯 자세나 착의 암석 대좌 등 동일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나한상은 갸름한 타원형의 얼굴에 승문형의 민머리를 하였으며, 살짝 웃는 인상을 하고 있다.
목조상에 채색한 이 존상은 도포식으로 겹쳐입은 회색의 법의에 속에는 내의를 입고 왼쪽어깨에 가사를 걸치고 있다.
대좌는 자연암벽을 묘사한 듯하나 진녹색으로 채색되어 있다. 그 뒤에 봉안된 독성탱은 오른쪽에 독성과 소나무,
그리고 소나무 사이에서 내다보는 동자를 묘사하고, 왼쪽에는 경책을 바치는 승문형의 인물과 그 위로 학과 폭포에서 유영하는
거북 그리고 정자의 일부를 묘사하였다.
제작은 극락보전의 다른 불화 관음탱, 지장탱, 신장탱과 함께 금어(金魚) 구봉(龜峯)비구가 하였다.
미륵전(彌勒殿)..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계 맞배지붕 건물로, 기단은 다듬은 돌을 썼으나 치석이 거칠다.
초석은 고복형으로 다듬은 원형 초석을 놓고 그 위에 민흘림으로 다듬은 원형기둥을 세워 기둥 상부는 창방을 걸고 포를 짜 올렸다.
구조를 노출시킨 연등천장이고, 서까래와 부연을 쓴 겹처마로 구성하였으며 지붕은 한식기와를 올려 맞배로 만들었다.
정면 3칸에는 분합문을 달았는데 어칸에는 4분합, 좌우 협칸에는 2분합문을 달고 나머지는 벽을 들였다..
내부 중앙에 미륵불좌상과 후불탱을 모시고, 우측에는 칠성탱을 건물의 우측벽에는 신중탱을 모셨는데, 모두 1977년에 그린 것이다.
미륵불 왼쪽에는 본래 극락전에 모셨던 산신탱을 봉안하고 있다.
예전에는 현재 삼층석탑 자리에 미륵전이 있었는데, 1976년 8월에 무너져 현재의 위치로 옮겨지었다고 한다.
이때 조선후기 중건한 사실을 적은 상량문이 발견되었다.
상량문은 종이에 먹으로 썼는데, 미륵전을 용화전으로 지칭하고 있어 석불은 미륵불임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공사는 정조 13년(1789)에 나주목사를 비롯한 관원의 후원을 받아 중건하였다고 한다.
이 상량문은 현재 액자에 넣어져 미륵전의 왼쪽 벽에 걸어 놓았다...
미륵전 석조미륵불좌상(石造彌勒佛立像)..
미륵전 중앙 불단의 높이 150cm의 미륵불로 석조로 제작되었고 제작시기는 고려시대로 추정된다.
그러나 불상의 얼굴에는 연노란 빛을, 광배에는 적색을, 법의와 양손에는 흰색 등으로 덧칠을 하여 돌의 질감을 느낄 수 없다.
또한 머리와 왼쪽 어깨의 일부도 보수된 상태이며, 원만하고 둥근 얼굴에 전체적으로 이목구비가 단정하게 표현되었다.
흑색으로 채색된 머리에는 높은 육계가 갖추어 민머리로 묘사되고, 목에는 삼도가 희미하게, 귀는 이마부터 턱까지 길게 묘사되었다.
목조의 중앙 불단은 이 불상을 안치하기 위해 그 형태를 따라 구멍을 내 봉안하였는데, 이 불단의 하단 안에는 대리석제 판석위에
소원을 들어준다는 신비한 돌이 모셔져 있다.
이 돌은 납작한 원구형으로 미륵부처께서 소원을 들어주실지 여하에 따라 돌을 밀고 당겼을 때 움직임이 다르다 한다.
소원을 들어주시겠다는 증표로 돌이 움직이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석조미륵상의 뒤에는 세존응화 2521년(1977)년 금어 구봉(龜峯)이
조성한 후불탱이 봉안되어 있다. 미륵전에는 후불탱 말고도 신중탱, 칠성탱이 있는데, 모두 같은 시기 같은 작가에 의한 작품이다..
삼층석탑(三層石塔)...
미륵전 앞마당에 있는데 전에는 바로 이 자리에 미륵전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 탑은 본래 심향사에 있었으나 나주군청으로 옮겼다가 1977년 12월에 다시 현재의 위치로 옮긴 것으로 전하고 있다.
그런데 현재 옛 나주군청 안에 있는 나주북문 밖 삼층석탑이 심향사의 석탑으로 전해지고 있어 이들 두 탑이 같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지만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다
..
현재 높이는 287cm인데, 기단부의 중대석 이하가 지면과 수평인 상태로 묻혀 있어 정확한 형태와 규모를 알 수 없다.
중대석의 모서리에는 귀기둥을 조각하고, 두꺼운 갑석의 윗면에는 넓은 3단의 초층탑받침을 만들었다.
1층 탑신의 모서리에도 귀기둥을 조각하였다.
옥개석의 아랫면에는 3단의 옥개받침이 있는데, 윗면의 모서리를 치켜 올렸으며 각이진 1단의 탑신받침이 있다.
2층과 3층의 형태는 1층과 같지만 탑신은 체감률이 어색하고 돌의 재질이 다른 탑재와 다르게 보여 본래의 구조물이 아닌 듯하다.
앙화에는 구름무늬와 비슷한 것이 새겨져 있다...
미륵전 앞에는 500년 전에 심었다는 팽나무와 모과나무 두 그루가 있어 절의 역사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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