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기행] 어린 임금의 한을 간직한 영월 청령포(淸泠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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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기행] 어린 임금의 한을 간직한 영월 청령포(淸泠浦)

by 정산 돌구름 2007. 1. 22.
어린 임금의 한을 간직한 영월 청령포(淸泠浦)

 

탐방일 : 2007년 1월 20일

청령포 소개

영월군 남면 광천리 남한강 상류에 있는 청령포는 1971년12월16일 강원도기념물 제5호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12월26일 명승 제50호로

변경되었다. 강의 지류인 서강(西江)이 휘돌아 흘러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한쪽으로는 육륙봉(六六峰)의 험준한 암벽이 솟아 있어

마치 한반도처럼 생긴 지형이다. 1457년(세조 3) 6월 조선 제6대 임금인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유배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그해 여름, 홍수로 서강이 범람하여 청령포가 물에 잠겼다.

단종은 강 건너 영월부의 객사인 관풍헌(觀風軒)으로 처소를 옮기기 전까지 두어 달간 이곳에서 생활하였다.

워낙 지세가 험하고 강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단종이 이곳을 '육지고도(陸地孤島)'라고 표현했다고 전한다.

청령포에는 단종이 그곳에 살았음을 말해 주는 단묘유지비(端廟遺址碑)와 어가, 한양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다고 전하는 노산대,

한양에 남겨진 정순왕후를 생각하며 쌓은 돌탑, 외인의 접근을 금하기 위해 영조가 세웠다는 금표비(禁標碑)가 있고 관음송(천연기념물

제349호)과 울창한 소나무숲 등이 남아 있다. 단종은 그해 10월 관풍헌에서 17살의 어린나이에 숨졌다.

슬픈 역사가 남아 있는 유서 깊은 유적지가 휘돌아 흐르는 서강과 어우러져 자연경관이 뛰어난 명승지이다.

보호면적은 204,241㎡로, 영월군이 관리한다.

 

 

정선과 평창 두 곳에서 흘러내린 남한강 상류의 물줄기는 영월에서 만난다.

어라연을 지나 서강을 따라 가는 길은 단종의 애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이곳에는 조선의 제6대왕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에 의해 꽃도 채 피워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유배지 청령포가 있다.

청령포는 동·북·서쪽이 깊은 물로 막혀 있는데다가 남쪽은 천길 절벽이 솟아있고 구의봉이 요새처럼 버티고 있어 마치 창살 없는 감옥과

같은 곳이다. 이른바 물동이동이라고 하는 지형으로 강물이 육지를 휘감아 돌아 섬과 같은 형세를 취하고 있다.

소나무 숲이 울창하고 서강의 물이 맑아 영월 8경의 하나로 꼽히는 명소이며, 사철 내내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한 나라의 국왕에서 일개 군(君)으로 강등된 단종이 이곳에 유배된 것은 1456년 6월의 일이다.

그 해 여름 서강이 범람하여 청령포 일대가 물에 잠기자 강 건너 영월부의 객사인 관풍헌으로 잠시 처소를 옮기는데, 늘 누각에 올라

시를 읊으며 한을 달랬다고 한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난 10월 사약을 받는다.

 

서쪽의 산비탈을 50m 정도 올라가면 단종이 두고 온 한양쪽을 바라보았다는 노산대...

이곳에는 단종이 언덕을 올라갈 때마다 왕비 송씨를 그리워 하며 쌓았다고 하는 망향탑....

 

어린 단종의 한많은 유배생활을 지켜보았던 관음송이 서 있다...

 

 

 

영조 2년(1726)에 이곳의 소나무를 함부로 베내어가지 말라는 뜻의 금표비를 세웠는데 지금까지 전해진다...

 

병약한 문종이 일찍 세상을 뜨자 12살의 어린 단종이 왕위를 잇게 된다. 단종에게는 8명의 숙부가 있었는데, 안평대군과 수양대군도

그들 중의 하나다. 야심에 차 있었던 무사출신의 수양대군은 한명회 등과 세력을 규합하여 단종을 밀어내고 왕좌를 차지한다.

이에 단종은 상왕으로 물러나게 되고, 단종을 따르던 옛 신하를 중심으로 복위운동이 시작된다.

성삼문·박팽년·하위지 등의 집현전 학사를 중심으로 세조와 세자의 암살을 도모했으나 김질의 밀고로 사전에 발각, 사육신이 처형되고

집현전은 폐지된다. 이들 사육신을 세조 또한 '당대의 난신이요, 후세에는 충신이라'고 평가했다 한다.

복위운동이 실패하고 이에 위협을 느낀 세조는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등시키고 영월 청령포에 유배시킨다.

그러나 수개월 후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이 다시 단종 복위를 꾀하려다 사전에 발각되자,

정인지가 불씨는 사전에 없애야 한다며 단종을 제거할 것을 주장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어린 단종은 사약을 받고 한 많은 짧은 생애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