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산 자락 문화유적지를 찾아서(경열사~충민사~원효사~충장사~취가정~환벽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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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 자락 문화유적지를 찾아서(경열사~충민사~원효사~충장사~취가정~환벽당)..

by 정산 돌구름 2012. 3. 5.
[광주기행] 무등산 자락 문화유적지(경열사~충민사~원효사~충장사~취가정~환벽당)


여행일자 : 2012. 3. 3(토)

기상상황 : 구름 많은 흐린 날씨(6~10℃)

여행코스 : 경열사~충민사~원효사~충장사~무등산분청사기전시실~취가정~환벽당

여행지 소개

  산행을 포기하고 무등산자락 북부지역의 문화와 역사 탐방로를 찾아 나섰다.

  고려말의 무신 정지장군의 경열사, 정묘호란 당시 청나라군과 싸우다 순절한 전상의장군의 충민사, 원효대사가 머물렀던 원효사,

  임진왜란 때 의병장 김덕령장군의 충장사, 고려말의 분청사기 가마터가 있는 금곡동도요지인 무등산 분청사기전시실, 의병장 김덕령의

  혼을 위로하고 충절을 기리기 위한 취가정,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호인 환벽당을 둘러보았다.

 

< 경열사(景烈祠) >

광주광역시 북구 망월동에 있는 사당. 고려 말의 무신 정지를 비롯하여 정충신, 유사, 고중영 등 8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1644년(인조22) 지금의 동구 동명동에 창건되었으며, 1868년(고종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1871년 철거,  유허비만 남았다.

지금의 경렬사는 정지장군 유적보존회에서 1979년부터 현재의 위치에 복원을 시작하여 1981년 완공하였다.

사당 입구에는 홍살문이 세워져 있고 경내에는 사우,내삼문,외삼문과 유물관,관리실,경렬사 유허비,유적정화 기념비 등이 세워져 있다.

사당 뒤쪽 언덕 위에는 정지의 묘가 있는데, 전형적인 고려시대 방식의 예장석묘(禮葬石墓)로서 광주시기념물 제2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지(鄭地, 1347~1391)는 본관 하동(河東), 시호는 경렬(景烈)이다.

어려서부터 인물이 뛰어났고 성품이 너그러웠으며 큰 뜻을 품고 독서하기를 좋아했다.

19세에 사마장원, 20세에 문과 급제, 1374년(고려 공민왕 23년) 28세 때에 중랑장이 되었고, 왕을 모신 속고지로 있으면서 왜구토벌책 및

토적책 10조를 왕에게 올려 전라도 안무사(지금의 도지사)가 되어 왜구의 토벌에 공을 세웠으며 수군 창설에도 크게 이바지했다.

1377년(우왕 3년)에 순천 낙안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쳐 공을 세웠다.

그 후 전라도 순문사를 거쳐 36세 때 제해도 도원수(해군 총사령관)를 역임하면서 왜구를 무찔러 간담을 서늘하게 했고, 양광·전라·경상·

강원도 도지휘처치사(4도의 육군 사령관)를 겸임하기도 했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1389년, 공양왕 1년)에 종군하여 적을 토벌하는 한편 전지의 경작장려와 성곽수축 등을 맡아 처리했다.

그러나 그 해 11월 우왕복위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나주로 귀양 갔으며, 윤이, 이초의 옥사에 연좌되어 또 청주옥에도 갇혔었으나 수재로

인해 죄를 면했다. 1391년 위화도 회군의 공으로 2등 공신이 되어 광주 장원봉 아래에 물러가 있다가 판개성부사로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고 그해에 병으로 세상을 떴다.

 

 경열사 입구..

 

주차장 옆 홍살문..

 

경열사 안내도..

 

외삼문 충의문..

 

 

좌측의 유물관..

 

유물관 내부..

 

영정..

 

내삼문인 경앙문..

 

맨 뒤쪽의 경열사 사당..

 

경열사 내부..

 

경열사의 정지장군 영정..

 

 

 

우측 야산의 정지장군 묘소..

 

경열사를 나서며...

 

경열사의 전경..

 

하동 정씨 경열공파조회 재각인 휘정재..

 

재각..

 

경열사 표지석..

 

< 충민사(忠愍祠) >

광주광역시 북구 화암동에 있는 사당. 정묘호란 당시 안주성에서 청나라군과 싸우다 순절한 전상의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정묘호란이 끝난 뒤 시신을 출생지인 광주로 옮겨 예장하였는데, 1977년 묘소가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3호로 지정되었다.

이후 1979년8월24일 전상의장군 유적보존회가 장군의 충의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화암동 입구에 신도비를 세웠으며, 1985년10월21일

유적정화사업으로 현재의 사당을 건립하였다.

경내에는 전상의의 영정과 위패가 봉안된 사당과 수의문, 정려각, 유물관 등이 있으며, 유물관에는 장군의 유품인 갑옷, 투구, 활, 검과

교지, 완문(完文), 완약(完約) 등이 전시되어 있다.

전상의(全尙毅, 1575~1627)는 1603년(선조 36)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 등의 내외관직을 역임하였다.

1617년(광해군 9)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임진왜란, 정유재란 때 끌려간 백성 300여 명을 귀국시키는 데 공을 세웠고,

1625년(인조 3)에는 구성도호부사 겸 좌영장으로 일하였다.

1627년(인조 5) 1월 청나라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 침략해오자 안주성에서 닷새 동안 분전하다가 전사하였다.

 

충민사 입구..

 

외삼문인 창절문...

 

전면의 내삼문인 수의문, 좌측의 유물관, 우측의 정려각...

 

유물관...

 

유물관 내부...

 

 

 

정려각..

 

충민사의 사당...

 

사당 내부..

 

전상의장군 영정..

 

사당 앞에서...

 

수의문을 나서면서...

 

창절문에서 본 유물관, 수의문, 사당...

 

< 원효사(元曉寺) >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이다.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신라의 지증왕이나 법흥왕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뒤 삼국통일을 전후한 문무왕 때 원효가 이곳에 머물면서 암자를 개축한 뒤부터 원효사ㆍ원효당ㆍ원효암 등으로 불렀다고 한다.

일설에는 고려 충숙왕 당시의 이름 있는 화엄종승이 창건한 뒤 원효를 사모하는 마음에서 원효암이라 했다고도 한다.

그 후 역사는 입증할 길이 없으나 문정왕후의 섭정 때 사세가 다시 일어났으며, 선조 때의 승병장이었던 영규가 수도했던 곳이기도 하다.

정유재란 때 전소된 뒤 증심사를 중창했던 석경이 직접 기와를 구워 중창하였다. 그 뒤 1636년(인조 14)에 신원이, 1685년(숙종 11)에는

신옥과 정식이, 1789년(정조 13)에는 회운이, 1831년(순조 31)과 1847년(헌종 13)에는 내원이 각각 중수하였다.

6ㆍ25전쟁으로 소실된 것을 광주광역시 당국의 무등산 개발에 힘입어 1954년부터 중창에 착수하였다.

이 때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대웅전, 선원과 요사 등을 중건하였다.

이 공사 때 옛 절터에서 삼국시대의 금동불상 6점을 비롯하여 백제의 토기와 와당, 통일신라시대의 금동불상 6점, 고려시대의 철불두상

ㆍ고려자기 및 기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만든 토기불두 140점이 출토되었다.

이들 출토 유물 중 32점은 일괄하여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절 주변에는 무명의 고려시대 묘탑을 비롯하여 조선 중기의 회운당부도 등이 산재되어 있다.

부도는 높이 2m이고 4각 지대석 위의 4우에 신장을 세운 중대석을 놓고 그 위에 연화대로 받쳐진 탑신을 얹고 있는데,

옥개는 역시 8각으로 각 마루에는 용ㆍ거북ㆍ비둘기 등의 동물들이 조각되어 있다.

이 절에서 무등산의 정상 쪽으로 골짜기를 넘은 곳에 의상대라는 매우 수려한 바위 봉우리가 있으며, 그 아래에는 의상토굴이 있다.

 

원효사 일주문...

 

매암루..

 

경내에 들어서면..

 

원효대사의 모습일까요?

 

모퉁이에서는 무언가를 태우고 있는데...

 

먼저 가신 님의 유품들인가 봅니다...

 

개산조당... 원효대사의 영정이 모셔져 있겠지요?..

 

그 옆의 명부전...

 

1981년 건축된 대웅전...

 

대웅전에 들어서면 석가모니불, 문수보상, 보현보살의 삼존불.. 그리고 뒤편의 영산회상도..

 

오른쪽의 약사전...

 

약사전과 대웅전..

 

약사전에서 바라본 무등산 천왕봉...

 

대웅전 왼편의 성산각...

 

 

 

매암루에서 바라본 무등산 천왕봉...

 

< 충장사(忠壯祠) >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에 있는 사당.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충장공 김덕령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1975년2월 조성.

경내에는 김덕령의 영정과 교지가 봉안되어 있는 사우 충장사, 동재와 서재, 은륜비각과 해설비, 유물관, 충용문, 익호문 등이 있다.

유물관에는 중요민속자료 제111호로 지정된 '김덕령장군' 의복과 장군의 묘에서 출토된 관곽, 친필 등이 전시되어 있다.

사당 뒤쪽 언덕에는 김덕령의 묘와 묘비가 있으며 가족묘도 조성되어 있다.

김덕령(金德齡 1567~1596)은 임진왜란때의 의병장으로 본관은 광산, 자는 경수이며 광주출신이다.

아버지는 붕섭이며, 어머니는 남평반씨로 직장 계종의 딸이다. 20세에 형 덕홍과 함께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고경명 막하에서 전라도 경내로 침입하는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전주에 이르렀을

때 돌아가서 어머니를 봉양하라는 형의 권고에 따라 귀향하였다. 1593년 어머니 상중에 담양부사 이경린, 장성현감 이귀 등의 권유로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켜 그 세력이 크게 떨치자, 선조로부터 형조좌랑의 직함과 함께 충용장의 군호를 받았다. 1594년 세자의 분조로

세워진 무군사에 지략과 용맹이 알려져 세자로부터 익호장군의 칭호를 받고 이어서 선조로부터 다시 초승장군의 군호를 받았다.

그 뒤 최담년을 별장으로 하여 남원에 머물다가 다시 진주로 옮겼는데, 이때 조정에서는 작전상의 통솔과 군량조달의 문제로 각처의

의병을 통합, 충용군에 속하도록 하였으며, 이로써 의병장이 되어 곽재우와 함께 권율의 막하에서 영남서부지역의 방어임무를 맡았다.

왜적의 전라도 침입을 막기 위하여 진해·고성 사이에 주둔하며 적과 대치하였으나 이때 강화회담이 진행 중이어서 별다른 전투상황도

없고, 또 군량의 부족으로 그 예하 3천여명 가운데 호남출신 5백여명만 남기고 모두 귀농시켰다. 그해 10월 거제도의 왜적을 수륙양면

으로 공격할 때 선봉장으로 활약하여 이를 크게 무찌르고 이어서 1595년 고성에 상륙하려는 왜적을 기습, 격퇴하였다.

그뒤 진주에 둔전을 설치하는 등 장기전에 대비하여 출전 차비를 갖추었지만, 강화의 추진으로 출전 기회가 주어지지 않자 울화가 생겨

과음을 하고 군법을 엄하게 함에 막료·군졸간에 불평의 소리가 높았고, 조정에서도 실망한 나머지 그에 대한 논의가 빈번히 제기되었다.

1596년에는 도체찰사 윤근수의 노복을 장살하여 투옥되었으나 영남유생들의 상소와 정탁의 변호로 곧 석방되었다.

그해 7월 홍산에서 이몽학이 반란을 일으키자 도원수 권율의 명을 받아 진주에서 운봉까지 진군하였다가 난이 이미 평정됐다는 소식

듣고 광주로 돌아가려 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해 진주로 돌아왔다.

이때 이몽학과 내통하였다는 충청도체찰사 종사관 신경행과 모속관 한현의 무고로 최담년·곽재우·고언백·홍계남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에 정탁·김응남 등이 그의 무관함을 힘써 변명하였으나 20일 동안에 여섯 차례의 혹독한 고문으로 옥사하였다.

체구가 작지만 날래고 민첩하며 신용이 있었다고 하여 용력에 대한 전설적인 이야기가 많다.

1661년(현종 2)에 신원되어 관작이 복구되고, 1668년 병조참의에 추증되었다.

1681년(숙종 7)에 다시 병조판서로 추증되고 1710년에 봉사손인 수신도 녹용되었다.

1788년(정조 12) 의정부좌참찬에 추증되고 부조특명이 내려졌다. 죽기 전에 지었다는‘춘산곡’시조 한 수가 전한다.

1678년(숙종 4) 광주의 벽진서원에 제향되었는데, 이듬해 의열사로 사액되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충장사 전경..

 

 

충장사 안내도..

 

외삼문인 충용문..

 

내삼문인 익호문..

 

충장사 사당..

 

사당 내부.. 김덕령장군의 영정...

 

뒤편의 충장공의 묘소, 그리고 가족묘...

 

외삼문에서 바라본 전경...

 

유물관..

 

충장공 김덕령장군의 유물들...

 

사용했던 목관..

 

< 무등산 분청사기전시실 >

무등산 북쪽 충효동에 자리잡은 가마터로, 고려 후기에서 조선 전기까지 상감청자·분청사기·백자를 굽던 곳이다. 가마의 구조는 사람이

드나드는 출입시설·도자기를 집어넣는 번조실·굴뚝실로 이루어져 있으며, 둥근 무덤 형태가 연결된 모양으로 되어있다.

1963년과 1991년 무등산 문화유적보존을 위해 실시한 총 3차례의 발굴조사에 의해 15세기에서 17세기 사이의 조선시대 가마터와

다수의 출토유물이 확인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과 출토유물의 연도를 통해 1430년을 전후해 만들어지기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 후 약 70∼80년간 자기제작이 지속되다가 16세기 초에 중단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 되어있는 금곡동도요지는 가마의 퇴적층과 완전 파괴된 가마등에서 출토된 것을 보면 상감청자파편, 분청자,

백자 등 많은 종류의 도자기 파편들이 발견 었다. 대접, 접시 류가 대부분이며 장군, 마상배, 벼루발, 항아리, 매병, 병,, 제기류 등

주로 분청자와 백자가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발굴된 청자 중에는 무늬 결이 섬세하고도 정교한 인화문, 상감문, 조화박지문, 귀얄문 등이

파편조각에서 확인되었으며 인화분청 명문은 도공이름, 지명, 품질 표지, 관청명 등이 새겨져있는데 이는 관에 납품을 하는 관요(官窯)

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제작시기로 보아 청자 말기부터 분청자를 거쳐 백자로 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어 고려말에서 조선초까지

운영되었던 곳으로 보아진다. 명문이 없는 귀알문은 서민용으로 만든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고로 관급 공급용과 서민생활용품의 도자기를 동시에 만들었던 요지라고 봐야할 것이다.

이에 따라 충효동 분청사기 가마터는 1964년 사적지(사적 제141호)로 지정되었다.

무등산 분청사기 전시실은 무등산 일원의 도자문화가 한국 도자발달사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역할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전시실 입구...

 

전시실 내부..

 

 

가마터...

 

가마터 내부...

 

의상봉...

 

무등산 옛길 3구간이 지나는 무등산역사길..

 

< 취가정(醉歌亭) >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 있는 조선시대 말기의 정자. 충장공 김덕령이 출생한 곳으로서 환벽당 남쪽 언덕 위에 있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김덕령의 혼을 위로하고 그의 충정을 기리기 위하여 1890년(고종 27년) 후손 김만식 등이 세웠다.

6·25전쟁으로 불탄 것을 1955년 재건하였다. 주변 정자들 가운데 가장 늦게 야트막한 산 위에 누대처럼 지었는데 대부분의 정자들이

강변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과 달리 넓게 펼쳐진 논과 밭들을 향하여 세웠다. 정자 앞에 서있는 소나무는 정자의 운치를 한결 더해준다.

정자의 이름은 정철의 제자였던 석주 권필의 꿈에서 비롯하였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은 김덕령이 꿈에 나타나 억울함을 호소하고

한 맺힌 노래 <취시가(醉時歌)>를 부르자, 권필이 이에 화답하는 시를 지어 원혼을 달랬다고 한다.

 

취가정의 모습...

 

 

취가정에서 환벽당으로 가는 길목의 연화정사...

 

 

< 환벽당(環碧堂) >

1972년1월29일 광주광역시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광주광역시 북구 광주호 상류 창계천가의 충효동쪽 언덕 위에 있는 정자로 나주목사를 지낸 김윤제(金允悌 1501∼1572)가 낙향하여

창건하고 육영에 힘쓰던 곳이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목조와가이며, 당호는 신잠이 었다.

송시열이 쓴 제액(題額)이 걸려 있고, 임억령·조자이의 시가 현판으로 걸려 있다.

김윤제는 광주광역시 충효리 태생으로, 호는 사촌(沙村)이다. 1528년 진사가 되고, 1532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다.

그 후 나주목사 등 13개 고을의 지방관을 역임하였다.

관직을 떠난 뒤 고향으로 돌아와 벽당을 짓고 후학 양성에 힘을 썼다. 그의 제자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정철과 김성원 등이 있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김덕령과 김덕보 형제는 그의 종손으로 역시 김윤제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특히, 정철은 16세 때부터 27세에 관계에 나갈 때까지 환벽당에 머물면서 학문을 닦았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환벽당 아래에 있는 조대와 용소는 김윤제가 어린 정철을 처음 만난 사연이 전하는 곳이다.

조부의 묘가 있는 고향 담양에 내려와 살고 있던 당시 14살의 정철이 순천에 사는 형을 만나기 위하여 길을 가던 도중에 환벽당 앞을

지나게 되었다. 때마침 김윤제가 환벽당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꿈에 창계천의 용소에서 용 한마리가 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꿈을 깬 후 용소로 내려가 보니 용모가 비범한 소년이 멱을 감고 있었다. 김윤제는 소년을 데려다가 여러 가지 문답을 하는 사이에 그의

영특함을 알게 되었다. 그는 순천에 가는 것을 만류하고 슬하에 두어 학문을 닦게 하였다.

정철은 이곳에서 김인후, 기대승 등 명현들을 만나 그들에게서 학문과 시를 배웠다.

후에 김윤제는 그를 외손녀와 혼인을 하게하고 그가 27세로 관계에 진출할 때까지 모든 뒷바라지를 해주었다.

환벽당은 정철의 4대손 정수환이 김윤제의 후손으로부터 사들여 현재 연일 정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환벽당 전경...

 

 

 

 

 

환벽당 아래의 무등산옛길(3구간) 마지막 지점...

 

 

 

 

취가정 주차장에서 바라본 무등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