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영산, 태백산(太白山 1,567m), 김삿갓유허지, 청령포 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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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구름의 산행이야기/산행2007

민족의 영산, 태백산(太白山 1,567m), 김삿갓유허지, 청령포 산행

by 정산 돌구름 2007. 1. 23.

 

태백산(太白山 1,567m), 김삿갓유허지, 청령포 산행


○ 산행일자 : 2007. 1. 20(토) - 금요일 22:00 출발

○ 기상상황 : 맑음

○ 산행인원 : 44명(광주○○산악회) - 회비 4만원

○ 산행개요

  화방재~사길령매표소~유일사쉼터~장군봉~천제단~망경사~문수봉~소문수봉~당골매표소~훼미리보석사우나

○ 산행코스 : 총 14.2Km, 산행시간 4시간 40분 소요(일출대기 35분 포함)

  화방재(05:30)~사길령매표소(05:50)~유일사쉼터(06:40)~장군봉(07:25~08:00)~망경사(08:10)~갈림길(08:25)~문수봉(08:50~09:00)

   ~소문수봉(09:10)~당골광장(09:50)~보석사우나(10:10)

○ 산행개요

  문예회관(22:10) ~ 서광주IC ~ 호남고속 ~ 중부고속 ~ 일죽IC ~ 38번 ~ 31번 ~ 화방재(04:00)

  주차장(11:30)~31번~38번~영월~88번~김삿갓유허지(12:35~13:40)~38번~청령포(14:20~15:30)~38번~제천~박달재휴게소(16:10~16:20)

               ~38번~일죽IC~중부~호남~서광주~문예회관(19:50)

○ 산행지소개

태백산은 예로부터 삼한의 명산, 전국 12대 명산이라 하여 '민족의 영산' 이라 일컫는다.

태백산은 가파르지 않고 험하지 않아 초보자나 남녀노소 누구나 오를 수 있다.

2시간이면 천제단에 이르고 하산까지 4시간이면 족하다. 따라서 가족산행으로도 적합하다.

산 정상에는 고산식물이 자생하고 봄이면 산철쭉, 진달래가 만개하고, 여름에는 울창한 수목과 차고 깨끗한 계곡물이 흐르며,

가을에는 오색단풍으로 수놓으며 겨울에는 흰눈으로 뒤덮인 주목군락의 설경을 이룬다.

산 정상에 태고 때부터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천제단이 있다.

천제단은 둘레 27m, 폭8m, 높이3m의 자연석으로 쌓은 20평가량의 원형 돌 제단이다. 삼국사기에 왕이 친히 천제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고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신라에서 오악 가운데 태백산을 북악으로 받들어 봄, 가을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1991년 국가중요민속자료 제228호로 지정된 이 천제단은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는 동안 방백수령과 백성들이 천제를 지냈고,

구한말에는 쓰러져가는 우국지사들이, 일제 때는 독립군들이 천제를 올렸던 성스런 제단이다.

태백시에서는 매년 10월3일 개천절에 태백제를 개최하며 천제를 올린다.

천제단을 중심으로 5분거리인 북쪽 300m 지점이 태백산의 주봉인 가장 높은 장군봉, 남동쪽으로 능선을 타고 가면 멀리 수만 개의

바위로 이루어진 문수봉이 있다.

천제단에서 유일사 쪽으로 내려가는 능선 중간과 문수봉으로 가는 중간에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는 주목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사찰로는 망경사, 백단사, 유일사, 만덕사, 청원사 등이 있다.

태백산은 겨울의 눈과 설화가 환상적이다. 주목과 어우러진 설화는 동화속의 설경이다.

적설량이 많고 바람이 세차기로 유명하여 눈이 잘 녹지 않고 계속 쌓인다. 세차게 몰아치는 바람이 눈을 날려 설화를 만든다.

매년 1월 중순에서 하순 사이 눈축제가 열린다. 눈축제가 태백산도립공원과 시내일원에서 개최된다.

화려한 눈축제에 앞서 눈조각 경연대회가 태백산 당골에서 개최된다. 또한 태백산은 일출산행으로 인기 있다.

새해를 맞이하는 첫 일출을 보려고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태백산 철쭉은 가장 늦게 핀다. 철쭉 봉화가 중부권을 거쳐 태백산에 이르는 시기는 6월 첫 주부터 둘째 주까지 유일사 등산로를

따라 오르다보면 정상부근에 주목과 철쭉밭이 어우러져 있다.

태백산 철쭉은 동해의 거센 비바람에 씻긴 듯 연분홍으로 검은 주목과 연분홍빛 철쭉 대비가 일품이다.

강원도 태백시의 봄축제인 태백산 철쭉제가 6월 초순에서 중순경에 태백산도립공원 일대에서 개최된다.

산정상 밑 해발 1,500m에는 단종대왕을 모신 단종비각과 한국명수 100선중 으뜸인 용정이라는 우물이 있다.

신라시대 자장율사가 창건했다는 망경사 절 입구의 용정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샘물로 개천절에 올리는 천제의

제수(祭水)로 쓰인다. 또한 당골에는 매년 개천절에 제를 올리는 단군성전이 있다.

태백에는 국내에서 가장 높은 역인 추전역(해발 855m)과 가장 높은 포장도로인 만항재(1,340m)가 있다.

태백8승으로 천제단, 문수봉, 주목군락, 일출, 황지, 검룡소, 구문소, 용연동굴이 있다.

낙동강 1천3백리의 첫 여울인 황지에서는 하루 5천톤의 물이 솟아 드넓은 영남평야를 흘러 남해에 이른다.

금대봉골에 있는 검룡소는 1천3백여리를 흘러 서해로 들어가는 한강의 발원지다.

태백산은 인기명산 100산 중 9위(한국의산하 1년간 접속통계에 의한 순위)

겨울의 눈과 설화가 환상적인 태백산, 주목과 어우러진 설화는 동화 속의 설경 같다.

적설량이 많고 바람이 세차기로 유명하여 눈이 늦겨울까지 잘 녹지 않고 계속 쌓인다.

가파르거나 험하지 않은 등산로는 초보자나, 남녀노소 누구나 오를 수 있어 강원지역의 대표적인 눈 산행으로 1-2월에 집중적으로

찾는 겨울 명산이다.

철쭉이 만개하는 5월에도 인기가 있다. 두위봉과 함께 강원지역의 철쭉명산이기도 하다.

또한, 산림청 선정 100명산이기도 하다.

예로부터 삼한의 명산이라 불리었으며, 산 정상에는 고산식물이 자생하고, 겨울 흰눈으로 덮인 주목군락의 설경 등 경관이 뛰어나며

도립공원으로 지정(1989년)된 점 등을 고려하여 선정되었다.

 

 

○ 산행후기

태백산 산행을 마음먹은 지 1년여 만에 드디어 실천에 옮긴 것 같다.

19일 밤 고등학교 총동문회를 뒤로하고 밤10시10분에 문예회관에서 광주토요산악회의 코리아나 리무진버스에 몸을 실었다.

차량은 문예회관 주차장에 파킹을 하고서,,, 호남고속도로와 중부고속도로 제천,영월을 거쳐 태백산 화방재에 도착하니 새벽 4시다.

일출시간에 맞추려고 차에서 휴식을 취한 후 5시가 되어서 된장국에 아침식사를 마치고 5시30분에 산행을 시작하였다.

어둠을 뚫고 백두대간 길인 함백산의 반대편으로 오르기 시작하였다.

20여분을 오르니 사길령매표소가 나오고 아직도 도립공원이라서 입장료가 있다.

유일사쉼터 밑 삼거리에서 유일사에서 오르는 산객들과 합류되어 정체가 심하다.

등산로 옆으로 인파를 제치며 오르니 일출시간전인 7시25분에 장군봉에 도착하였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를 참아가며 기다리니 구름사이로 태양이 살짝 비추고 말았다.

8시가 되어서 바로 밑 망경사를 경유하여 문수봉으로 향하였다. 문수봉과 소문수봉을 거쳐 당골광장에 도착하니 9시 45분....

10여분을 더 내려가니 훼미리보석사우나가 나타나 40여분동안 사우나를 마치고 나오니 몇몇 사람들만 차에 와있다.

11시 30분에야 출발하여 영월의 김삿갓유허지로 향하였다.

12시40분 김삿갓유허지에 도착하여 구경하는 동안 떡국으로 점심이 나와 술과 한잔 곁들여 먹고 다시 영월의 단종유배지인

청령포로 떠났다.(13시40분)

14시20분 청량포에서 도착하여 1시간10분동안 관광을 마쳤다.

가면서 박달재휴게소를 경유하여 잠시 구경을 하였다.

40,000원을 투자하여 무박2일의 여행을 값지게 하였다.

 

 

 

 

 

 

 

 

 

 

 

 

 

 

 

 

 

 

 

 

 

 

 

 

 

 

 

 

 

 

 

 

 

 

 

 

 

 

 

 

 

 

 

 

 

 

 

 

[방랑시인 김삿갓유적지]

난고 김삿갓의 문학 세계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백일장에서 조부를 욕되게 하는 시를 썼다는 자책감으로 평생 방랑시인을 지낸 방랑시인 김삿갓의 업적을 기리고,

그의 문학적 위상을 재조명하기 위해 조성되었다. 이곳에는 시비와 문학의 거리가 조성되어 있으며, 김삿갓의 묘와 생가가 있다.

김삿갓 유적지는 김삿갓면 와석리 노루목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차령산맥과 소백산맥 준령의 북단과 남단에 위치하며, 경북 영주시와 충북 단양군과 경계를 이루는 3도 접경지역으로

산맥의 형상이 노루가 엎드려 있는 듯한 모습이라 하여 노루목이라 불려오고 있다.

또한 김삿갓 유적지내에 흐르는 '곡동천'은 여름철에는 유리알처럼 맑고 풍부한 수량이 기암괴석 사이로 넘쳐흐르고 가을에는

형형각색 단풍으로 인하여 보는 이의 가슴을 평온하게 만들어 주는 신비로운 곳이다.

이처럼 산자수려한 고산준령 풍운속에 청운의 푸른 꿈을 접고 해학과 재치와 풍류로 한 세상을 살다간 조선 후기 방랑시인이자

천재시인인 김삿갓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난고 김병연 묘소와 주거지가 있다.

난고 김병연 선생은 원래 전라도 동복(지금의 화순군)에서 돌아가셨지만 아버지를 찾아 전국을 떠돌던 둘째아들 익균이 주거지인

김삿갓면 노루목 바로 이곳 골짜기에 묻어 주었으며, 그의 묘소는 1982년 영월의 향토사학자 정암 박영국선생의 노력으로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김삿갓의 시대정신과 "문화예술 魂"을 추모하고 문화적 가치를 재조명하며 산자수명(山紫水明)한 김삿갓계곡을 자연문화의 중심지,

문예인의 순례지, 김삿갓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우리나라의 대표하는 시선(時仙)으로 승화시켜 문화관광자원을 널리 알리기 위해

지난 98년도부터 매년 10월초에는 "난고 김삿갓문화큰잔치"가 개최된다.

또한 강원도 시책사업인『강원의 얼 선양사업』이 2001년부터 2003년까지 추진되어 유적지내 조경 및 도로포장 등 기반시설이

조성되어 쾌적한 관광지로 탈바꿈 하였으며 특히, 2003년 10월 "난고 김삿갓 문학관"이 개관되어 선생의 문학세계를 한 곳에

연구적으로 전시해 관광객들에게 교육 효과를 거양하고 있다.

난고 김병연은 안동김씨 시조인 고려 개국공신 삼중대광태사선생의 후예, 휴암공파계 제24대 손이다.

1807년(순조7년)3월13일 경기도 양주군 회천면 회암리에서 부 안근과 모 함평이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병연(炳淵), 자는 성심(成深), 호는 난고(蘭皐), 별호는 김삿갓 또는 김립(金笠)이다.

선생은 5세 때 선친 부사인 조부 익순이 홍경래 난 때 투항한 죄로 처형당하고, 조모 전주 이씨는 광주의 관비로 축출되었으며,

부친은 남해로 귀향을 갔다.

선생은 형 병하와 함께 노복 김성수의 등에 업혀 황해도 곡산으로, 모친은 아기 병호를 데리고 여주 이천으로 피신하였다.

후일에 조부의 죄가 멸족에서 폐족으로 감형되어 형제는 모친에게로 돌아갔다.

그러나 부친은 홧병으로 죽었고 세인의 괄시와 천대가 심하자 모친은 가족을 이끌고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삼옥리로 이주하였다.

선생은 비극적인 가족사를 모르고 자랐으며, 20세 때 한살 연상인 장수 황씨와 결혼하였다.

그해 영월 동현에서 실시한 백일장에서 시제 "논정가산충절사탄김익순죄통우천" 에 대하여 가산군수 정씨를 예찬하고 선천부사이자

방어사이던 조부 김익순을 호되게 비판하는 글을 지어 장원을 하였다.

그러나 후일 모친으로부터 집안 내력을 듣고 조상을 욕되게 한 죄인이라는 자책감에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 어둔으로 옮겨

은둔생활을 하였으며 22세때 아들 학균을 낳은 뒤 상경하여 이름을 김란, 자를 이명, 호를 지상으로 바꾸고 안응수의 문객으로

들어가 공부를 시작하였다.

24세가 되던 해 권문에 기대어 출세하려는 생각을 단념하고 귀가하여 형 병하에게 아들 학균을 입양시키고 그해 차남 익균을

얻었지만 처자식을 남겨둔 채 방랑길에 올랐다.

그때부터 푸른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고 자책하며 삿갓을 쓰고 죽장을 짚고 다녔으므로 김삿갓 또는 김립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금강산 유람을 시작으로 함경도에서 제주도까지 전국각지를 방랑하면서 서민들의 애환과 양반들의 잘못 된 생활상을 시로 옮겼으며,

도산서원 아랫마을과 황해도 곡산에서는 훈장으로 글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차남 익균이 여러 번 찾아와 귀가하자는 간청을 끝내 물리치고 방랑하다 54세 때에는 전라도 화순군 동북면 구암리에서 쓰러졌는데,

어느 선비가 자기 집으로 데려가 간병하여 그곳에서 반년 가까이 지냈으며, 이후 지리산 등을 방랑하다 3년 만에 쇠약한 몸으로

선비의 집에 다시 돌아와 1863년(철종14년)3월29일(57세) 별세하여 마을 동편 산록에 안장되었다.

그로부터 3년 후에 차남 익균이 지금의 묘인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 노루목에 이장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이응수(李應洙)에 의해 김립시집(金笠詩集)이 간행되었고, 묘역 주변에는 김삿갓의 문학과 사상을 기리기 위한

난고 김삿갓 문학관과 이응수선생 공적비가 있다.

난고 김삿갓 문학관에서는 난고 김병연의 생애와 발자취를 쫓아 일생을 바친 정암 박영국선생의 김삿갓 연구자료가 전시되어 있고,

멀티미디어를 활용한 다양한 김삿갓 관련 자료를 상영하고 있다.

난고김삿갓문학관은 강원도 시책 사업인 "강원의 얼 선양사업"의 하나로 2003년 10월 개관했다.

김삿갓 선생의 생애와 문학 세계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으로, 매년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 그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 청령포 ]

청령포는 단종이 세조 2년(1456)에 노산군으로 낮추어져 처음 유배되었던 곳이다.

삼면이 깊은 강물로 둘러싸여 있고 한쪽은 험준한 절벽으로 가로막혀 있어서, 배로 강을 건너지 않으면 어디로도 나갈 수 없게

되어 있는 곳이다.

단종이 유배되었던 해 여름에 홍수로 청령포가 휩쓸려 단종은 영월읍 영흥리에 있는 관풍헌으로 옮겨졌다.

청령포는 단종이 유배되었던 곳이므로 조정에서는 영조 2년(1726)에 일반민의 출입을 제한하기 위하여 금표비(禁標碑)를 세웠고

단종이 기거하던 곳을 의미하는 단묘재본(端廟在本) 부시유지(府時遺止)라는 비문을 새긴 비를 영조 39년(1763)에 세웠다.

어린 임금의 한을 간직한 영월땅

정선과 평창 두 곳에서 흘러내린 남한강 상류의 물줄기는 영월에서 만난다.

어라연을 지나 서강을 따라 가는 길은 단종의 애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이곳에는 조선의 제6대왕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에 의해 꽃도 채 피워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유배지 청령포가 있다.

청령포는 동,북,서쪽이 깊은 물로 막혀 있는데다가 남쪽은 천길 절벽이 솟아있고 구의봉이 요새처럼 버티고 있어 마치 창살 없는

감옥과 같은 곳이다.

이른바 물동이동이라고 하는 지형으로 강물이 육지를 휘감아 돌아 섬과 같은 형세를 취하고 있다.

소나무 숲이 울창하고 서강의 물이 맑아 영월 8경의 하나로 꼽히는 명소이며, 사철 내내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한 나라의 국왕에서 일개 군(君)으로 강등된 단종이 이곳에 유배된 것은 1456년 6월의 일이다. 그 해 여름 서강이 범람하여 청령포

일대가 물에 잠기자 강 건너 영월부의 객사인 관풍헌으로 잠시 처소를 옮기는데 늘 누각에 올라 시를 읊으며 한을 달랬다고 한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난 10월 사약을 받는다. 서쪽의 산비탈을 50m 정도 올라가면 단종이 두고 온 한양쪽을 바라보았다는 노산대

꼭대기에 다다른다. 이곳에는 단종이 언덕을 올라갈 때마다 왕비 송씨를 그리워하며 쌓았다고 하는 망향탑과 어린 단종의 한 많은

유배생활을 지켜보았던 관음송이 서 있다.

영조 2년(1726)에 이곳의 소나무를 함부로 베어 가지 말라는 뜻의 금표비를 세웠는데 지금까지 전해진다.

병약한 문종이 일찍 세상을 뜨자 12살의 어린 단종이 왕위를 잇게 된다. 단종에게는 8명의 숙부가 있었는데,

안평대군과 수양대군도 그들 중의 하나다. 야심에 차 있었던 무사출신의 수양대군은 한명회 등과 세력을 규합하여 단종을 밀어내고

왕좌를 차지한다. 이에 단종은 상왕으로 물러나게 되고 단종을 따르던 옛 신하를 중심으로 복위운동이 시작된다.

성삼문,박팽년,하위지 등 집현전 학사를 중심으로 세조와 세자의 암살을 도모했으나 김질의 밀고로 사전에 발각, 사육신이 처형되고

집현전은 폐지된다. 이들 사육신을 세조 또한 '당대의 난신이요, 후세에는 충신이라'고 평가했다 한다. 복위운동이 실패하고 이에

위협을 느낀 세조는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등시키고 영월 청령포에 유배시킨다.

그러나 수개월 후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이 다시 단종 복위를 꾀하려다 사전에 발각되자 정인지가 불씨는 사전에 없애야 한다며

단종을 제거할 것을 주장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어린 단종은 사약을 받고 한 많은 짧은 생애를 마친다.

후한을 두려워한 사람들은 시신을 거두기를 꺼렸지만 당시 영월 호장이었던 엄흥도는 시신을 수습하여 영월 지산에 매장했다고 한다.

지금도 엄흥도가 엄나무가 되어 단종이 있던 서낭당을 지켜주고 있다는 전설이 전해내려 온다.

 

 

 

 

 

 

 

 

 

 

 

 

 

 

 

 

 

 

 

 

 

 

 

 

 

 

 

[박달재 서원휴게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