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제12구간(백학산) 백두대간중 가장 낮은 중화지구대를 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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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구름의 산행이야기/백두대간

백두대간 제12구간(백학산) 백두대간중 가장 낮은 중화지구대를 지나

by 정산 돌구름 2010. 2. 4.
백두대간 제12간(백학산), 백두대간 중 가장 낮은 중화지구대를 지나..

(큰재 ~ 개터재 ~ 백학산 ~ 개머리재 ~ 신의터재)


 

○ 일시 : 2007. 10. 27(토) 08:50~15:10

○ 기상 : 맑음(구름 한점 없는 전형적인 가을 날씨)

○ 구간 : 24.47km - 경북 상주

  큰재~3.9km~회룡재~1.75km~개터재~6.87km~백학산~4.7km~개머리재~2.7km~지기재~4.55km~신의터재

○ 소요시간 : 6시간20분 

  큰재(08:50)~회룡재(09:45)~개터재(10:09)~윗왕실재(11:11)~백학산(12:00~15)~개머리재(13:20)~지기재

  (14:02)~신의터재(15:10)

○ 주요봉우리 : 큰재(320m), 회룡재(340m), 개터재(380m), 윗왕실재(400m), 백학산(615m),  지기재(260m

○ 산행팀 : 광주아침산악회 (28명) - 회비 35,000원

○ 교통

  문예회관(05:35) ~ 호남 ~ 계룡휴게(아침) ~ 경부 ~ 황간IC ~ 49 ~ 68 ~ 큰재(08:40)

  신의터재(뒷풀이 17:25)~ 920번~19번~영동~사우나(18:15~19:20)~19번~영동IC~경부고속~호남~문예회관(21:30)

○ 구간소개

  이번 구간은 「큰재~신의터재」구간으로 경북 상주시 모서면, 내서면에 속해 있는「속리산 구간」이다.

  대부분 200~300m 고도에 위치한 평평한 지대에 형성된 산맥으로 접근하려면 반드시 고개를 올라야 하는 특징을 가지고있는

  해발 300m가 약간 넘는 일명 중화지구대이다.

  백두대간 중에 가장 지대가 낮고 능선의 힘이 가장 약하며 백학산을 제외하고는 600m미만의 야산으로 잡목이 많고 농로와

  소로가 많아 길을 잃기 쉬운 구간이다. 그러나 이곳은 탈출이 용이하고 식수를 쉽게 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중화(中化)지역..

  산천의 전통은 유구하여 대대로 강원과 경상이 그로부터 갈리고, 충청과 경상, 전라와 경상이 그로부터 나뉘었다.

  오늘날의 도계(道界) 또한 변함없이 백두대간을 따라 마루 금을 그었으니 이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경계가 아닌 탓이다.

  다만, 지도를 펴놓고 백두대간의 마루금을 긋다 보면 몇 군데 대간과 도계가 어긋나는 곳이 있다.

  경북 봉화군 춘양면 우구치 마을은 강원으로 백두대간의 도래기재를 넘어갔고, 영주시 단산면 마락리와 부석면 남대리는

  충북으로 각각 백두대간의 고치령과 마구령을 넘어갔다. 

  상주 화령일대의 무려 6개 면은 대간을 넘어 깊숙이 충북 땅으로 들어섰으며, 전북 남원 운봉읍을 비롯한 3개면은 경남으로

  대간의 여원재를 넘어 팔량치에서 도계를 이룬다.

  백두대간을 넘어온 경상도 여섯 고을 - 속리산 갈림길에서 상주 길로 30리쯤이면 충북과 경북이 도계를 이루는 적암이다.

  풍수에서 십승지의 하나로 꼽는 명당을 품었다는 구병산(876m) 아래 그저 평평한 들판 위에서 엉거주춤 도계가 나뉜다.

  그로부터 백두대간의 화령까지는 30리 길이다. 속리산 형제봉에서 백두대간을 벗어난 도계는 적암을 지나고 백화산(933)을

  휘돌아 추풍령 위쪽 국수봉(684)에 이르러야 다시 백두대간과 만난다.

  백두대간의 경계를 넘어온 그 경상도 땅 여섯 고을을 두고 생겨난 말이 바로 중화지역이다.

  화서, 화북, 화동, 화남의 4개 면은 본래의 화령현이요, 모동면과 모서면은 옛날의 중모현이니 중화란 바로 상주목을 따르던

  중모현과 화령현을 뭉뚱그린 이름이다.

  오늘날까지 중화지역이 경상도 땅으로 뿌리를 뻗은 것은 아마도 신라와 백제 마지막 국경에서 비롯된 전통이 아닐까 생각된다.

  남원의 팔량치 일대가 비록 백두대간의 동쪽이지만 전라도 땅으로 굳어진 연유도 비슷한 내력이 숨었을 터이다.

  낮은 산줄기로 이어지는 그 두 곳은 싸움의 결과에 따라 쉴새없이 국경이 바뀌었을 것이다.

  그 두 곳은 백두대간이 천연의 국경 역할을 잃었기 때문에 힘이 센 어느 한 쪽이 상대의 영토 깊숙이 쳐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목이었다. 물론, 이는 사람이 걷거나 기껏 말이나 타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러나 현재에도 유사한 논쟁이 있었다.

  얼마 전, 문장대 용화온천의 개발을 둘러싸고 충북과 경북이 서로 팽팽하게 맞섰던 사건이 그것이다.

  용화는 바로 화북면이니 경상도이지만 백두대간을 넘어온 탓에 그 물은 달래강을 거쳐 남한강으로 흘러드는 한강수계이다.

  돈벌이는 경상도가 하지만 수질 오염의 대가는 고스란히 충북의 몫이다.

  결국 경북 쪽의 개발 포기로 단락을 맺은 이 사건은 지방의 경계가 백두대간을 따르지 않았던 탓에 일어난 분쟁이었다.

  삼백(누에, 쌀, 곶감)의 고장 상주는 신라의 두번째 도시였고 삼국시대의 중요한 격전지였다.

  견훤과 그의 부친 아자개의 주활동 무대였으며, 조선시대에는 경주와 상주를 합하여 8도의 행정구역 중 하나인 경상도의

  지명에서 보듯 우리나라 역사의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지역이다.

  또, 이중환은 팔역지에서「조선인재의 절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인재의 반은 상주와 선산에 있다」라고 하였다.

 

○ 산행개요

 지난주에는 바쁜 일정으로 무등산만 나홀로 오르고 지리산 종주 산행을 하지 못하였다.

 오늘은 고등학교 동문체육대회, 초등학교 1박2일 모임이지만 부득이 백두대간길을 택하였다.

 5시에 집을 나와 김밥 두줄을 사서 몇몇의 일행을 태우고 문예회관 후문으로 가니 벌써 사람들이 나와 있고

 차는 아직 도착하지 아니하였다. 5시35분에 28명을 태운 코리아나 버스가 문예회관을 출발하여 호남고속도로에 접어들었다.

 룡휴게소에서 조개죽으로 아침을 하고 다시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오다 황간IC를 벗어나 상주시 모동면과 공성면을 연결하는

 지방도 68번 2차선 포장도로에서 폐교된 옥산초등학교 인성분교로 들어선다.

 지난 9월 대간에 이어 한 달여 만에 큰재에 도착하니 폐교인근이 많이 바뀌어 있다.

 폐교 안에서 산행준비를 하고 출발...

 

08:50, 큰재(320m)

68번 지방도가 관통하는 큰재는 추풍령 쪽에서 다가가면 평지의 고원지대 같은 곳으로 그 이름이 어울리지 않지만

상주의 옥산 쪽에서 오르는 길은 골짜기가 깊어 그 높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보여서 큰재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이제 폐교가 되어 백두대간 자연학습장으로 탈바꿈하기 위하여 공사중인 옥산초등학교 인성분교 옆 논가의 이정표

「국수봉3.0km(1시간30분)/ 회룡재3.9km(2시간)/공성면5.3km/모동면12.5km」옆에서 산행은 시작된다..

 

농로를 따라 관사 뒤의 완만한 능선을 따라 오르면 묘지가 나타난다..

 

잡목을 제거하여 시원스럽게 보이는 소나무 숲길을 따라 올라서 우측으로 틀어지며 완만하게 오른 430m봉을 넘어가면

양촌에서 회룡마을로 넘어가는 시멘트포장 도로를 만나게 된다.(09:15)

이정표「큰재1.6km/회룡목장120m/버스타러가는길 1.0km」에서 임도를 따라 100m가량 가면 회룡목장 들어서기 전에

이정표「큰재1.7km/회룡재2.1km/ 회룡목장」이 세워진 곳에서 우측 숲속으로 들어간다..

 

09:45, 회룡재(340m)

완만하게 오르는 길은 아랫못골쪽으로 능선 분기봉에서 좌측으로 틀어지고 통나무계단을 내려선 십자안부는 양촌마을에서

광골마을로 넘는 길이며 농가와 우사가 있는 소로에 이르면 좌측 목장의 개짓는 소리가 들리고 다시 통나무계단을 따라오른다.

간길은 잡목지대를 통과하다가 봉우리를 넘어서면 비포장도로인 회룡재에 이른다.

회룡재는 지형이 마치 용이 뒤를 돌아보는 산세로 이루어졌다 하여 용이 회귀한다는 뜻을 담고 있으며,

이정표「큰재3.9km/개터재1.7km/공성봉산(회룡마을) 600m」를 지나 능선으로 오른다.

좌측은 상주시 모동면 회룡마을로 우측은 공성면 봉산리로 내려선다. 다시 돌계단을 몇 개 오르고 나면 소나무숲 오솔길

이어지고 아주신씨묘지 옆을 지나가면 표지기는 450봉을 앞에 두고 능선으로 오르지 않고 우회한다.. 

 

10:09, 개터재(380m)

450봉을 우회하여 전주가 있는 곳에서 묘지를 지나 도로와 만나는데 개터재이다. 

개터재는 상주시 공성면 봉산리 골가실과 효곡리 큰마마을을 잇는 해발 380m로써 민초들에게 유용하게 식량을 제공할

날짐승들이 많이 살았기 때문에 개터재라 하는가 하면 산세의 모양이 개들이 모여 살고 있는 모양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한다.

「지기재산장」에서 붙여놓은 이정표 「큰재5.2km/ 백학산6.3km」와 수많은 리본이 붙여져 있다..

 

11:11, 윗왕실재(400m)

도로를 지나 20여m를 가면 묘지가 있고 고도를 높여 약15분 오르면 505m봉이다.

대간길은 505m봉에서 좌측으로 급격히 휘어지며 내려선 안부에서 다시 오르면 외남면과 구성면 경계인 465m 능선분기봉

으로 좌측으로 꺾어 이어진다. 이어 잔돌이 박혀 있는 480m봉을 넘어 부드럽게 능선을 따라 고도차가 거의 없는 봉우리

몇 개를 지나 내려서 소나무숲 지대를 지나면 윗왕실재이다..

 

윗왕실재는 윗왕실과 소상리를 잇는 비포장도로로서 동물이동통로를 따라 지나간다.

왕실재는 산세가 왕궁과 같다 하여 당초에는 왕재라 하였으나 민초들이 왕을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없어 사이에 실자를 붙여

왕실재로 불렀다. 왕실재를 지나 가파르게 오르다가 첫 봉우리에서는 우측으로 가로지르고, 둘째 봉우리는 좌측 사면으로

내려서면 다시 소로가 나오고 477m봉은 좌측으로 가로질러 오른다..

 

477봉을 지나면 대간길은 좌측으로 휘어져 오르며 평평한 봉우리에 이른다..

 

12:00, 백학산(615m)

이어 올라선 480m봉에는 표시기들이 많이 걸려있고 살짝 내려섰다 고도를 높여 오르면 오늘 구간중 가장 높은 백학산이다.

백학산(白鶴山)은 물 좋고 공기 좋던 이 산에 수많은 학들이 날아와 앉아있는 모습이 마치 눈이 내린 설산처럼 하얗다 하여

백학산이라 불렸다. 그러나 그도 이제는 머나먼 옛 이야기일 뿐 어디에서도 그 흔적조차 찾아볼 길이 없다.

참나무 숲 공터가 있는 봉우리에는 상주시청산악회가 1998년 세운「白頭大幹 白鶴山 615m」표지석이 자리잡고 있다.

 

사방이 참나무 숲에 가려 조망이 트이질 않는다.  정상에서 점심을 먹고 출발하였다.(12:15)

대간길은 모서면과 모동면 경계를 따라 내려서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가파르게 내려가는데 좌측길에는 통나무로 막아 놓았다..

 

가파른 길을 내려가면 함박골에서 약국마로 넘어가는 비포장 임도와 만난다.(12:27)

 

임도따라 내려서 절개지쪽 표시기를 따라 숲속으로 부드럽게 이어지는 길은 고도차가 거의 없는 봉우리 몇 개를 지나게 된다.. 

 

소나무숲 사이로 진행하여 안부에서 키작은 소나무 숲을 따라가면 좌측에 숲 사이로 논이 보이면서 임도 삼거리를 지난다.

좌측에는 논밭이 있으며, 한참을 진행하면 왼쪽으로 인삼밭이 보인다..

 

소로 갈림길을 주의하여 인삼밭 옆으로 난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농로가 나온다..

 

농로 정상에서 우측은 사과밭 과수원이고 왼쪽 농로를 내려서면 개머리재(소정재)이다..

 

13:20,  개머리재(290m)

산세가 개의 머리를 닮았다하여 개머리재라 하는가 하면, 일부에서는 소의 머리를 닮았다고도하여 소정재라 불리기도 한다.

901번지방도에서 49번도로로 이어지며 함박골에서 소정리 원소정을 잇는 2차선 포장도로이다..

 

소머리재를 넘어서면 외딴집과 인삼밭이 나오는데, 우측으로 난 임도를 따라 올라야 한다.

오르면 좌측으로 묘지가 나타나고 잠시후 다시 임도로 내려서 임도를 따라 가다가 소나무 숲으로 대간길이 이어진다. 

가파른 길을 오르면 또 다시 임도가 나타나 임도따라 오르다가 임도가 넘어가는 지점에서 임도 좌측 숲길로 들어선다.

평평한 길을 가다가 왼쪽 능선으로 내려가는데 오늘 가장 주의할 곳으로 능선에서 지기재로 하산하는 길이 희미하다..

 

지나는 능선봉에서 우측으로 꺾어 가파르게 내려서면 앞이 트이고 숲길을 빠져나와 밭길 농로로 이어지는데, 우측은 포도나무,

좌측은 사과밭인 농로를 따라 내려서는데 사과밭에는 잘 익은 사과들이 주렁주렁 열려 있어 나뭇가지로 받쳐 놓았다..

 

14:02, 지기재(260m)

사과밭을 지나 내려서면 지기재...

지기재는 도적들이 많아 통행하는 민초들에게 많은 피해를 주었던 곳으로 적기재라 불렀으나 사투리를 따라 지기재로 변했다.

다른 재처럼 고도감을 느끼지는 않으나 지기재에 올라서면 동과 서가 확연히 가려지는 고개이자 분수령임을 확인할 수 있다.. 

 

2차선 포장도로인 901번 지방도를 건너서「금강 낙동강 분수령」표시가 있는 곳을 지나면 대간길은 작은 나무가지에 촘촘히

걸려있는 백두대간 종주자들의 리본이 나부낀다..

 

시멘트도로를 따라 오르다보면 대간길은 다시 산속으로 접어든다.(14:08)

도로를 가로질러 금은골 마을로 들어가는 시멘트길을 따라가면 우측으로 창녕성씨묘가 보이고, 간마루금은 묘지 뒤로

이어지지만 능선은 과수원이 차지하고 있어 도로를 따라 논이 있고 전주가 세워진 대나무 숲을 지나 대숲이 끝나는 곳에서

표시기를 보고 우측으로 들어간다. 

대나무 숲을 빠져나가 산길로 접어들어 오르면 산길은 좌측으로 꺾어 시멘트도로에 논둑에 내려선다..

 

과수원을 우측에 두고 도로를 따라 가다가 임도로 들어서 숲길로 올라선다..

 

숲속으로 접어들어 오르면 다시 마루금을 만나는 능선에 이른다.(14:30) 지나온 길이 훤히 바라다 보인다..

묘지를 지나 올라서면 능선마루로서 좌측에 409봉 쪽으로 흐릿한 길이 보이나 대간은 우측으로 꺾어 내려가다 부드러운 길을

따라가면 암봉을 우측 사면길로 우회하여 또 다른 슬랩지대를 지나(14:58) 내려서자 앞이 트이면서 논이 있는 곳에 이른다..

 

15:10, 신의터재(260m)

포도밭 우측으로 이어진 농로를 잠깐 따르다가 다시 숲길로 들어간다.

잘 나있는 능선길을 내려가면 우측으로 꺾이고 한참을 내려가면 갑자기 좌측으로 휘어지고 다시 내려서면 안쑥밭골재이다.

고개 왼쪽은 논과 농가가 있고 우측 아래에 못이 있다.

고도차를 크게 느낄 수 없는 부드러운 대간길은 계속되고 능선을 따라 가면 고압선 철탑이 나오고 잠시 후 20번 군도

(25번 국도와 49번 지방도를 연결하는 도로)가 지나는 신의터재이다..

 

의터재는 임진왜란 이전에는 ‘신의현’이라 불리었는데 임진왜란 때 의사 ‘김준신’이 여기에서 의병을 모아 최초의 의병장으로

상주진에서 많은 왜병을 물리치고 임진 4월25일 장렬하게 전사한 사실이 있은 후부터 「신의터재」라 불리었으나 일제 때

민족정기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어산재」로 불리게 되었다..

 

광복 50주년을 맞이한 96년에 민족정기를 되찾고자 옛이름인「신의터재」로 다시 고치게 되었다고 한다..

 

낙동강과 금강의 분수령이기도 한 신의터재..

 

표지석 뒤편에는「신의터재 내력」이 새겨져 있다..

 

최고의 명품 팔음산 포도 생산지..

 

17:25,  신의터재 출발

후미가 오기를 기다리며 뒷풀이 준비를 하였다.

가면서 목욕 후 뒷풀이를 계획하였으나 마지막이 내려오려면 적어도 두시간은 있어야 할 것 같아서이다.

뒷풀이도 거의 끝나갈 무렵인 17시에 후미가 도착하였다..

 

뒤풀이를 마치고 영동읍으로 들어가 영동교 인근 사우나에서 목욕을 하고 광주로 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