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남고산성과 관성묘(關聖廟)..
2025년 2월 6일, 전주 남고산성과 관성묘(關聖廟)를 찾아서..
전주 남고산과 고덕산 산행길에 남고산성과 관성묘를 찾았다.
남고산성(南固山城)은 전주시 완산구 동서학동의 해발 274m 남고산 정상부와 그 남쪽의 계곡부를 에워싼 포곡식 석성으로 1981년12월10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언제, 어떤 목적으로 축조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산성의 정비복원을 위한 기초자료를 얻기 위해 발굴조사를 벌인 결과 축성시기를 통일신라 때까지 소급할 수 있게 되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전주에 완산주를 설치할 때 혹은 완산주가 전주로 바뀔 때 남고산성도 축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고덕산(高德山) 석성으로 등장하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덕산성이 고적(古跡)조에 소개되어 있는 만큼 이 시기에는 남고산성이 이미 폐성된 것으로 보인다.
『문헌비고』에도 이미 폐성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성내에 우물 7개소와 계곡 1개가 있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국조보감』에 의하면 순조 13년(1813년)에 전주부에 남고산성을 쌓고 진(鎭)을 설치하였으며, 별장(別將)을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 전기에 폐성되었던 남고산성을 다시 남고진으로 재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성내에는 남고사(南固寺), 관성묘(關聖廟), 그리고 남고진사적비(南固鎭事蹟碑) 등이 남아 있다.
폭은 3.4m, 높이는 1.2m, 길이는 5.3km이다.
《문헌비고(文獻備考)》에는 "남고산의 주봉인 고덕산(高德山)의 이름을 따서 고덕산성이라 하였고, 그 길이는 8,920자가 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901년 견훤(甄萱)이 도성의 방어를 위하여 축성하였으므로 견훤산성이라고도 하였는데 이를 1811년(순조 11년)에 관찰사 이상황이 수축하여 남고진(南固鎭)을 두었다.
당시 이 성은 전주의 남동쪽에서 남원, 순창 행로인 2갈래 길을 좌우로 거느리고 내려다보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여기에는 화약 4,320근, 궁노(弓弩)·궁기(弓機) 각 50좌(坐), 노시(弩矢) 1만 개, 장창 100자루, 군량미 6,006섬 등이 항상 비축되었고 산성별장 1명, 장관(將官) 22명, 군졸 1,340명 등이 상주하였다.
지금은 대부분의 석축이 허물어지고, 천경대(千景臺), 만경대, 억경대 등 3봉우리가 천연의 요새를 이루었음을 말해 준다. 이 봉우리들에는 각각 가로 세로 약 10m의 장대(將臺)터가 있으며, 성터 안에는 관성묘·남고사와 서문터 옆에 최영일이 찬(撰)하고 이삼만이 쓴 남고진사적비(南固鎭事蹟碑)가 있다.
1984년4월1일 전북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된 관성묘(關聖廟)는 주왕묘(周王廟) 또는 관제묘(關帝廟)라고도 한다.
남고산성의 만경대(萬景臺) 남동쪽에 있으며, 중국 촉한(蜀漢)의 장수 관우(關羽)를 무신(武神)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낸다.
1895년(고종 32년) 전라도관찰사 김성근과 남고별장 이신문이 각처 유지들의 헌금을 받아 건립한 것으로 30m 높이의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면 중앙에 본전이 있고 좌측에 서루, 우측에 통무가 있는 특이한 구조이다.
본전 네 기둥에 유려한 필체로 장수 관우를 봉안한 목적 등이 기록되었고 조선 말기의 화가 소정산이 그린 『삼국연의도』 10폭 그림과 관우의 소상(塑像)이 안치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울산싸움에서 부상을 입고 현재 서울의 남묘(南廟) 자리에서 치료를 받던 명나라 유격장군 진인(陳寅)이 명나라 군사들이 관우신장의 가호를 받는다고 믿고 자신이 있던 곳에 묘를 세워 관우의 신상(神像)을 안치한 것이 관우신앙의 시발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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