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고찰 강진 월출산 무위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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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고찰 강진 월출산 무위사에서..

by 정산 돌구름 2023. 1. 12.

천년고찰 강진 월출산 무위사에서..


2023년 1월 12일, 흑석산 산행 후 잠시 둘러본 천년고찰 월출산 무위사..

무위사 경내에 있는 홍매화는 벌써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다.
무위사를 끝으로 3박4일의 여행을 마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

무위사(無爲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의 말사이다.

신라 때 원효(元曉)가 창건하여 관음사(觀音寺)라 하였고, 875년(헌강왕 1년) 도선(道詵)이 중건하여 갈옥사(葛屋寺)라고 개칭한 뒤 많은 승려들이 주석하였다.

고려 효공왕 9년( 905년) 선각(禪覺)이 3창하였으며, 태종 7년(1407년) 무위사가 천태종(天台宗) 17자복사(資福寺) 중의 하나가 되었다.

세종 12년(1430년) 극락전을 지었는데 이 건물은 현재도 남아있고, 명종 10년(1555년) 태감(太甘)이 4창하면서 무위사라 하였다.

이때의 당우는 본절이 23동, 암자가 35개로 모두 58동에 이르는 대찰이었으나, 그 뒤 화재 등으로 규모가 크게 축소되었다.

그러나 경내에 있는 선각대사변광영탑비명(보물 제507호)에 의하면 신라시대에 이미 무위갑사(無爲岬寺)라고 불렀다 한다.

숙종 4년(1678년)에 극락전 앞에 괘불대를 조성하였고, 영조 15년(1739년)에는 해초(海超)·극잠(克岑) 등이 전각을 보수하였다.

1975년 벽화보존각(壁畵保存閣)과 해탈문(解脫門), 봉향각(奉香閣), 천불전(千佛殿), 미륵전(彌勒殿) 등을 중건하였다.

1991년에 산신각(山神閣)을 짓고 1995년에 동쪽 요사를 증축하여 오늘에 이른다.

국보 제13호(1962년12월20일)로 지정된 무위사 극락보전(極樂寶殿)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의 주심포(柱心包) 집이다.

무위사에 현존하는 대부분 건물들은 4번째 중건인 1555년에 건립된 것이나 이 극락전만은 이 보다 훨씬 오래 된 것이다.

1956년경의 수리공사 때 본존 뒷벽의 벽화 명문(銘文)에서 “十二年 丙申 三月初 吉畵成”이란 기록을 통하여 1476년(성종 7년) 이전 지어진 건물임이 밝혀졌다.

이 불전은 엇맞추어 쌓은 석단(石壇)에 갑석(甲石)만을 둘러서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주춧돌을 놓아 세웠다.

기단은 앞쪽만을 높게 쌓고 두 옆면과 뒷면은 지세(地勢)를 그대로 이용하여 건물을 세웠다.

주좌(柱坐)를 새기지 않은 주춧돌 위에 배흘림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기둥머리와 주심포작(柱心包作)을 짜올려서 가구를 결구시켰다.

출목의 수는 이출목으로서 바깥쪽 포의 끝은 제공(諸貢)처럼 되어 있고, 내포(內包)는 1장의 판으로 만든 것처럼 파련(波蓮)무늬를 새긴 운공(雲工)으로 되어 있다.

내부에서는 대들보를 가운데칸 양쪽 포 위에 놓고 대들보 위에 동자기둥을 세워 종보를 올려놓고, 그 위에 다시 파련대공(波蓮臺工)과 ㅅ자 솟을합장을 세워 마루도리를 받치고 있다.

앞면은 격자모양·빗살모양을 섞어 만든 4분합(四分閤) 문을 달았고, 옆면에는 앞쪽에 출입살문, 뒷면에는 칸마다 모두 판자문과 창을 달았다.

건물 안 뒤쪽 중앙부에 불단을 마련하여 아미타삼존불좌상(阿彌陀三尊佛坐像)을 봉안하였고, 그 뒷벽에는 1476년(성종 7년)에 조성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측면 벽에도 조선 전기 작품으로 보이는 벽화들이 있었는데 해체 수리하면서 벽체 그대로 뜯어내 보존 전시하고 있다.

내부 바닥에는 마루 대신에 전돌을 깔았고 천장은 위쪽 가구를 드러낸 연등천장이며 불상 윗부분에만 보개(寶蓋)와 우물반자를 가설하였다.

공포는 기둥머리 위에서 내려다본 단면이 十자형인 쌍S자형 첨차로 그 위에 장여와 제2살미를 놓아 외목의 행공첨차를 받치고 있다.

외포(外包)의 첫 출목의 첨차 끝 절단면은 느린 기울기를 가지며 밑면의 S자모양 곡선은 부드럽고 힘차다.

기둥머리나 소로[小累]의 굽은 단면이 직선이고 굽받침이 없다.

이러한 세부적 특징은 부석사무량수전(浮石寺無量壽殿)의 양식보다는 후대의 것으로 조선 초기 주심포 건물의 양식적 특징이다.

벽에는 29점의 벽화가 있었으나 지금은 본존불 뒤의 가로 4m, 세로 7m 크기의 후불탱화만이 남아 있고, 28점은 보존각에 보관되어 있다.

무위사의 극락보전 벽화에는 독특한 전설이 전하고 있다.

사찰에 극락보전을 짓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았을 즈음, 한 노인이 찾아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이 법당의 벽화를 그릴 것이니, 그 대신 49일간 절대로 이 법당 안을 들여다보는 이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를 허락한 주지스님은 약속대로 기다렸으나, 도대체 저 속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궁금증을 참을 길이 없었다.

마지막 49일째 되는 날, 주지스님은 ‘설마 작은 구멍으로 살짝 보는 것은 괜찮겠지’라고 생각하며 손가락으로 창호지에 작은 구멍을 뚫어 몰래 들여다보고 말았다.

그런데 법당 안에는 있어야 할 노인은 없고 파랑새 한 마리가 붓을 입에 물고 날아다니며 그림을 그리고 있지 않은가?

화들짝 놀란 주지스님이 법당 문을 열고 들어서니 마지막으로 관음보살의 눈동자를 그리고 있던 파랑새는 입에 붓을 문 채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지금도 극락보전의 벽화 속 관음보살에는 눈동자가 없다고 한다.

무위사 극락전 내벽사면벽화(極樂殿內壁四面壁畵)은 보물 제1315호(2001년8월3일)로 지정되었다.

동벽의 아미타삼존벽화와 서벽의 아미타내영도, 오불도 2점, 관음보살도를 비롯한 보살도 5점, 주악비천도 6점, 연화당초향로도 7점, 보상모란문도 5점,

당초문도 1점, 입불도 1점 등 총 29점으로 원래는 극락보전의 네 벽에 그려졌던 것이나 지금은 모두 해체되어 성보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29점의 불화 가운데 동쪽벽 중앙에 그려져 있던 아미타삼존벽화와 서쪽벽 중앙에 그려져 있던 아미타내영도, 15세기로 추정되는 관음보살도, 당초문도 2점 등

4점은 극락보전이 세워진 1430년경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나머지 벽화는 조선후기에 건물을 보수하면서 새롭게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아미타삼존불벽화는 극락전의 동쪽 벽 중앙에 위치해 있던 벽화로서 화면의 중앙에 설법하는 본존과 두 협시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 합장한 채 본존을 향하고 있는 입상의 두 보살상과 여섯 나한을 배치하였다.

본존불은 이중륜광(二重輪光)을 배경으로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하였는데, 머리에는 육계(肉髻)가 큼직하며 중앙에 중간계주(中間髻珠)가 표현되었다.

얼굴은 사각형에 가까운 편이며, 통견(通肩)의 법의를 걸친 신체는 당당하면서도 안정감있는 좌세를 보여준다.

오른손은 가슴 안쪽으로 끌어당겨 첫째와 셋째 손가락을 마주 잡았으며, 왼손은 길상좌를 하고 있는 오른쪽 발 위에 대어 첫째와 셋째손가락을 마주잡아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을 결하였다.

큼직한 육계와 중간계주의 묘사, 승각기를 묶은 띠 매듭의 표현, 단정하면서도 안정감있는 신체표현, 자연스러운 옷주름의 처리 등에서 고려 말∼조선 초기 불상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본존 좌우에 협시한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은 손의 모습이 약간 다를 뿐 보관을 쓰고 구름 위 연화대좌 위에 앉아 본존을 향한 측면향의 자세, 가슴 중앙에 묘사된 영락 양쪽에서 띠 매듭이 신체 좌우로 흘러내리는 모습, 어깨 위로 서너 가닥의 머리카락이 매듭지어 흘러내리는 모습 등이 거의 비슷하다.

본존과 협시보살 주위로는 본존을 향해 합장한 입상의 보살 2구와 나한 6구가 묘사되었다.

나한 가운데 본존 좌우로 배치된 노비구와 젊은 비구는 각각 아난존자와 가섭존자를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삼존불과 보살, 나한들은 모두 구름에 둘러싸여 있는데, 화면 상부에는 날카로운 산봉우리가 연이어 묘사되어 있어 아미타극락정토를 표현한 듯 하다.

삼존불과 상대하여 그려진 서벽의 아미타내영도는 아미타불이 8대보살과 8비구를 거느리고 극락왕생자를 맞이하는 장면을 그렸다.

아미타불은 오른손을 내밀고 왼손은 어깨 위로 들어 오른쪽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데 여래의 왼쪽에는 백의를 입고 정병을 든 관음보살을 비롯하여 문수보살, 미륵보살, 금강장보살 등 네 보살과 네 비구, 오른쪽에는 정병이 그려진 보관을 쓴 대세지보살을 비롯하여 보현보살, 지장보살, 제장애보살과 네 비구가 구름 위에 둘러싸여 모두 오른쪽으로 향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구도가 자연스럽고 오른쪽을 향하여 나아가는 듯한 인물들의 동적인 자세와 자연스러운 필선 등은 삼존불도와 거의 유사한 특징을 보여준다.

이 벽화 외에 측벽 협칸 위 대공과 주심도리 사이에 있었던 정면을 향한 관음보살을 그린 관음보살도는 채색이 많이 박락되어 정확한 형태는 잘 알 수 없지만 연화대좌 위에 앉아 선정인을 취하고 있는 관음보살의 유려한 필치로 보아 15세기경의 작품으로 생각된다.

이외에 삼존벽화와 아미타내영도의 위쪽에 그려졌던 오불도를 비롯한 연화당초향로도(蓮華唐草香爐圖), 주악비천도(奏樂飛天圖), 지장보살도(地藏菩薩圖) 등은 모두 조선후기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무위사 극락전 아미타여래삼존벽화(阿彌陀如來三尊壁畵)는 국보 제313호(2009년9월2일)로 지정되었다.

화면 중앙의 높은 수미대좌 위에 아미타불이 결가부좌하였고, 왼쪽(향우)에는 관음보살, 오른쪽(향좌)에는 지장보살이 정면을 향해 서있으며, 그 위로는 좌우에 각각 3명씩 총 6구의 나한이 구름 속에 상반신만을 드러낸 채 서있다.

화면 상단부 좌우에는 작은 규모의 화불이 2구씩 배치되었다.

세로 270㎝, 가로 210㎝의 벽면에 아미타삼존불을 비롯하여 6구의 나한 및 2구의 화불이 배치된 아미타삼존도벽화로서 중앙의 아미타삼존을 벽면 대부분을 차지하게끔 크게 그리고 나머지 권속들은 작게 묘사한 삼존불 중심의 구도를 취하였다.

아미타불은 오른손을 가슴으로 들어올려 첫째와 셋째 손가락을 마주잡고 왼손은 가부좌한 무릎 위에 놓고 첫째와 셋째 손가락을 마주 잡은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을 결한 채 커다란 광배를 배경으로 높은 대좌 위에 결가부좌하였다.

얼굴은 둥근 편이며 머리에는 크고 넓적한 육계가 묘사되었는데, 작은 이목구비와 높은 육계 등의 표현이 고려 아미타불화의 얼굴 표현과 유사하다.

이 벽화에 보이는 고려 불화적인 요소는 착의법에서도 볼 수 있는데, 안에 군의(裙衣)를 입고 붉은 바탕에 원문이 있는 대의를 입은 모습은 고려 아미타불화의 착의법과 유사하다.

그러나 대의의 원문이 간략해지고 승각기 없이 군의만 입은 모습에서 조선 초기 불화의 새로운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본존의 좌우로는 왼쪽에 지장보살, 오른쪽에 관음보살이 배치되었다.

원래 아미타불의 양 협시보살은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지만 고려시대에는 대세지보살 대신 지장보살로 바뀌어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 벽화에서도 그와 같은 전통을 따르고 있다.

관음보살은 아미타화불이 있는 높은 보관을 쓰고 두 손을 배 앞으로 모아 정병을 들고 정면을 향해 몸을 살짝 비튼 모습으로, 어깨 위로는 검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리고 있으며 머리 위에서부터 발끝까지 얇고 투명한 옷을 걸쳤다.

아미타불의 오른쪽에 서있는 지장보살은 조의가사(條衣袈裟)에 두건을 쓰고 오른손에는 석장, 왼손에는 보주를 들고 있다.

구름 속에 상체만 드러낸 6구의 나한은 합장하고 본존을 향해 또는 서로 마주보면서 서있는데, 둥근 얼굴에 개성이 뚜렷하다.

채색은 황색바탕에 붉은색과 녹색, 검은색 등을 주로 사용하였다.

한편, 이 벽화의 좌우 하단에는 ‘□□12년 병신년 3월에 무량수여래(無量壽如來)와 관음보살, 지장보살을 그렸으며, 화원은 대선사(大禪師) 해련(海連)’이라는 내용의 화기가 적혀있다.

여기서 말하는 □□12년은 장흥 보림사 삼층석탑 북탑지(北塔誌) 내용 중 성화(成化) 14년(1478년) 무술(戊戌) 4월 17일에 무위사에 주불을 주조하고 대회(大會)를 열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성화 12년, 즉 1476년으로 추정된다.

이 벽화 앞에는 현재 1430년경 극락보전을 중수하면서 봉안된 것으로 추정되는 아미타불, 관음보살, 지장보살 등 삼존불상이 있는데, 벽화의 삼존불과 유사하여 주목된다.

보물 제1314호(2001년8월3일)인 백의관음도(白衣觀音圖)는 파도 위에 연잎을 타고 서 있는 백의관음보살과 선재동자, 공양자 등을 그린 벽화이다.

이 벽화는 극락보전의 후불벽 뒷면 토벽에 황토색을 칠한 후 유려하고 간결한 필치로 그린 관음보살벽화로 1476년에 후불벽의 아미타삼존벽화와 함께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벽면의 가운데에는 흰 옷을 입은 관음보살이 아래쪽을 내려다보고 있으며, 그림의 왼쪽 아랫부분에는 비구형 인물이 보살을 향해 예배드리는 모습을 배치하였다.

관음보살은 두광과 커다란 신광을 두르고 오른쪽으로 몸을 돌린 채 두 손은 앞에 모아 엇갈리게 하여 오른손에는 버들가지, 왼손에는 정병을 들었다.

얼굴은 넓적하고 둥근 편으로 옆으로 긴 눈을 반쯤 내려뜨고 있다. 우뚝한 코 밑에는 팔(八)자모의 수염이 그려져 있고 커다란 귀와 함께 목에는 삼도가 뚜렷한데

목이 굵고 어깨가 각지고 건장하여 전체적으로 당당한 체구의 강한 남성적인 신체를 보여준다.

머리에는 아미타불을 그린 관을 쓰고 있는데, 흰색의 천의가 머리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양어깨를 감싸고 팔을 덮고 흘러내렸다.

간략화된 옷주름과 더불어 팔찌와 가슴장식 역시 간소화되어 있긴 하나 힘있고 빠른 필치로 바람에 심하게 흩날리는 듯한 옷자락과 넘실대는 듯한 파도를 표현함으로써 강한 인상을 보여주고 있다.

앞쪽 아래 구석 둔덕에는 관음보살을 향해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벌려 손뼉을 치고 있는 듯한 자세의 늙은 비구가 보인다.

다른 불화에서처럼 나이어린 소년의 모습이 아니라 승복을 입은 나이든 승려의 모습인 점이 특이하다.

비구의 어깨 위에는 머리를 뒤로 돌려 관음보살을 쳐다보고 있는 새 한 마리(靑鳥)가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관음보살상의 주위로 화면 전체에 물결 모양을 그려 넣어 마치 보살이 물 위에 떠 있는 연꽃잎을 타고 넘실대는 물결 위에 서 있는 것 같이 보인다.

그림의 우측 상부에는 고려시대의 문인 유자량(庾資諒)이 쓴 오언율시, 즉 “바다가 높은 벼랑 아득한 곳, 그 가운데 낙가봉이 있으니 대성은 머물러도 머문 것이 아니고, 보문은 만나도 만남이 없네. 명주는 나의 바라는 바 아니지만, 청조와 이 사람은 상봉하였네. 오직 바라옵건대 푸른 물결 위에서 친히 만월같은 모습 뵈옵게 하옵소서”라는 내용의 낙산관음찬(洛山觀音讚)이 먹으로 쓰여 있다.

무위사 선각대사탑비(先覺大師塔碑)는 보물 제507호(1969년6월16일)로 지정되어 있다.

선각대사 형미(逈微)는 신라 말기의 명승으로 체징선사(體澄禪師)를 사사하고 당나라에 건너가서 14년 만에 돌아와 무위사에 8년간 머물렀다.

918년 속년(俗年) 54세, 승랍(僧臘) 35세로 입적하자 고려 태조가 ‘선각’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명을 ‘편광탑(遍光塔)’이라고 하였다.

이 비는 대사가 입적한 지 28 년만인 946년(정종 1년)에 건립되었으며, 귀부와 비신, 이수(螭首)를 모두 갖춘 완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비제(碑題)는 ‘고려국고무위갑사선각대사편광영탑비명(高麗國故無爲岬寺先覺大師遍光靈塔碑銘)’이라고 되어 있는데, 비문은 최언위(崔彦撝)가 짓고 유훈율(柳勳律)이 해서로 썼다.

비신을 받치고 있는 귀부는 용두화(龍頭化)된 귀두에 조각이 뚜렷한데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두 귀는 용의 귀와 같이 깃털이 날리는듯 조각하여 사납게 표현되었다.

귀부의 등에는 6각의 귀갑문을 정연하게 배치하고 그 중앙에 비좌(碑座)를 설정하여 비좌 전후 2면에 운문(雲文)을 조각하고 양측에 안상(眼象)을 조각하였다.

비신 위의 이수에는 3단의 받침을 복판연화문으로 장식하였는데, 이수는 상하 2석으로 겹쳐 쌓았으며 중앙에 방형의 전액을 마련하고 있으나 마멸되어 판독할 수 없다.

이수 주위는 모두 운룡문(雲龍文)과 쌍룡문(雙龍文)으로 조각되어 있는 것이 특색이며 사실성을 띠고 있어 우수한 조각기법을 보여준다.

무위사 삼층석탑은 1984년2월29일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76호로 지정되었다.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 바로 앞에 있으며, 탑비와 같은 시대인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전형적인 2층 기단의 3층석탑으로 각 부재가 잘 조화되고 균제된 석탑이다.

지대석은 수매의 장대석으로 결구하였고, 그 위에 각형 2단의 괴임대와 하층기단의 중석이 연결되어 있다.

각구를 2구로 나누어 중앙에는 탱주 1주와, 양면에는 모서리 기둥을 모각하였고, 모서리 기둥과 탱주 사이에는 안상이 정교하게 조각되었다.

하대 갑석은 3매의 판석으로 결구되어 하면에 엷은 1단의 부연(附椽)을 각출하고, 상면도 역시 1단 각형 괴임대를 조각하여 탑신부를 받고 있다.

상층 기단중석은 4매 판석으로 각면에는 모서리 기둥이 정연하다. 동서면에 벽판석이고, 남북면에는 2매 판석으로 결구하였다.

각면에 새겨진 면상은 그 조식이 정교하여 세련되었다.

옥개석은 상면의 낙수면이 평박하고, 처마의 곡선도 중앙에서 직선을 이루다가 우동의 합각에 이르러서는 가볍게 반전되었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이 각 1석씩으로 탑신에는 양면에 우주가 모각되고, 2∼3층에서는 높이를 줄여 체감되었다.

3층 지붕돌과 1층 지붕돌 일부에서 약간의 파손을 입었을 뿐, 그 외 부재에서는 완전한 상태로 비교적 통일신라의 전형양식을 충실히 고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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