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제225호, 인천 강화 초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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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제225호, 인천 강화 초지진..

by 정산 돌구름 2022. 4. 4.

사적 제225, 인천 강화 초지진..


2022년 4월 4일, 강화 초지진에서..

오후 늦은 시간에 초지진을 둘러보고 건너편 김포 대명항으로 돌아온다.

초지진(草芝鎭)은 강화군 길상면에 있는 조선후기 해상으로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해 구축한 진지로 사적 제225호(1971년12월28일)로 지정되었다.

『여지도서』와 『강화부지』에 따르면 숙종 42년(1716년)에 설치되었다.

영조 2년(1726년)에 진장(鎭將)으로 종4품 무관 병마만호(兵馬萬戶)가 배치되었고, 1763년에는 진장을 종3품 무관 첨사(僉使)로 승격시켰다.

군관 11인, 사병 98인, 돈군(墩軍) 18인, 목자(牧子) 210인을 배치했고, 진선(鎭船) 3척을 두었다.

초지돈(草芝墩), 장자평돈(長者坪墩), 섬암돈(蟾巖墩)이 소속되어 있었고, 포대는 9개가 있었다.

고종 8년(1871년) 4월 23일 미국 해병 450명이 함포의 지원을 받으며 초지진에 상륙하였다.

초지진 수비대가 이들을 맞아 싸웠으나 화력의 열세로 패배, 결국 미군에 점령당했다.

이 때 진내에 있던 군기고(軍器庫), 화약고, 진사(鎭舍) 등 군사시설물은 미군에 의해 모조리 파괴되었다.

포대에 남아 있던 40여 문의 대포 역시 그들에 의해 파괴되거나 강화해협으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그 뒤 1875년 8월 21일, 운요호가 강화도 동남방인 난지도 부근에 정박, 단정을 내려 담수를 찾는다는 구실로 초지진 포대에 접근하여 왔다.

이에 초지진 수비군이 일본 함정을 향해 포격을 개시하자 운요호는 110㎜와 40㎜ 함포로 포격을 해 초지진 포대는 일시에 파괴되고 말았다.

이 때 초지진에는 사정거리 700m의 2인치 정도의 대완구만 있었다.

그 뒤 초지진은 폐쇄되어 시설은 모두 허물어지고 돈(墩)의 터와 성의 기초만 남아 있었다.

1973년 초지진의 초지돈만 복원되었는데 높이가 4m 정도이고 장축이 100여m 되는 타원형으로 이 돈에는 3개소의 포좌와 총좌 100여 개가 있다.

그 외 조선시대 대포 1문이 포각(砲閣) 안에 전시되어 있다.

지금도 성채와 돈 옆의 소나무에는 전투 때 포탄에 맞은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어 당시 전투상을 그대로 전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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