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박3일 남도여행 - 2. 강진 영랑생가, 모란공원, 사의재, 무위사, 월남사지, 월출산, 백운동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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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박3일 남도여행 - 2. 강진 영랑생가, 모란공원, 사의재, 무위사, 월남사지, 월출산, 백운동정원

by 정산 돌구름 2021. 6. 23.

2박3일 남도여행 - 2. 강진 영랑생가, 모란공원, 사의재, 무위사, 월남사지, 월출산, 백운동정원


2021년 6월 20일, 해남-강진으로 떠난 남도여행..

○ 1일차(6월 20일) : 광주 - 해남 송호해수욕장

○ 2일차(6월 21일) : 해남 송호해수욕장 - 포레스트수목원 - 대흥사쉼터 - 강진 영랑생가, 모란공원, 사의재, 무위사 - 월남사지

○ 3일차(6월 22일) : 강진 월남사지 - 경포대 - 월출산 천황봉 - 백운동정원 - 광주

~^^~

2021년 6월 21일, 감성 강진의 하룻길, 영랑생가와 세계모란공원~

한여름 같은 무더운 날씨에 해남을 떠나 남도답사 일번지 강진에 도착한다.

감성 강진의 하룻길 영랑생가와 세계모란공원을 둘러본다.

모란꽃은 이미 지고 푸르른 잎사귀만 무성하다.

월요일에 무더위 탓인지 관광객들도 없어 한가로운 풍경이다.

강진 영랑생가(永郞生家)는 전라남도기념물 제89호(1986년2월17일 )로 지정되었다가 국가민속문화재 제252호(2007년10월12일 )로 지정되었다.

김영랑이 1903년에 태어나 1948년 9월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주하기 전까지 45년간 살았던 집으로 영랑이 서울로 이주하면서 생가는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었다.

1970년대 새마을 사업으로 지붕을 시멘트기와로 보수하였고, 기단부와 벽체는 시멘트로 발라 원형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1985년 강진군이 그 집을 다시 사들여 복원작업을 하였고 원래 초가집의 원형으로 다시 지었다.

현재 본채와 사랑채, 그리고 문간채 등 3동만 남아 있고, 주변에는 영랑의 시어(詩語)가 되는 모란밭이 있다.

본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인 초가집이지만 뼈대가 굵은 네모기둥을 사용한 규모가 큰 집이다.

상량문에 “광무 10년 병오 4월(光武十年丙午四月)…”이라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 집의 건립연대는 1906년임을 알 수 있다.

집 뒤편에는 장독대가 놓여져 있고 언덕에는 오래된 동백나무와 대나무 숲이 있어 운치를 더하며, 5월이면 생가의 마당에 조성된 모란이 만개한다.

사랑채는 흔히 안채 앞에 있는 것이 일반적인데 영랑생가는 옆으로 길게 위치한다.

1930년대 건물로 전해지고 있는 사랑채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오히려 본채보다도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편이다.

특이한 것은 전면과 양측 2칸에 ㄷ자형으로 마루를 깔았으며 우측 1칸에는 마루 앞에 나지막한 난간을 설치하였는데 안상형(眼象形) 궁창을 뚫었다.

창문은 이중창문으로 내창은 아자(亞字)살 모양의 미서기창이며 외창은 띠살 모양의 여닫이창이다.

영랑(永郎)의 본명은 김윤식(金允植)으로 1903년 바로 이곳에서 태어났다.

강진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휘문의숙으로 유학을 가는데 3학년 때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으로 내려와 강진 장날에 만세운동을 벌이려다 체포되었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6개월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고, 1920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학원 중학부를 거쳐 같은 학원 영문학과에 진학하였다.

이무렵 독립투사 박렬(朴烈), 시인 박용철(朴龍喆)과도 친교를 맺었으나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였다.

일본에서 돌아온 이후 향리에 머물면서 1925년에는 개성출신 김귀련과 재혼하고, 순수문학의 길을 걷는데 그때가 1930년대이다.

이때 쓰여진 작품들이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 ‘모란이 피기까지’ 등의 작품들이다.

광복 후 은거생활에서 벗어나 사회에 적극 참여하여 강진에서 우익운동을 주도하였다.

대한독립촉성회에 관여하여 강진대한청년회 단장을 지냈으며, 1948년 제헌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하여 낙선하기도 하였다.

1949년에는 공보처 출판국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평소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어 국악이나 서양명곡을 즐겨 들었고, 축구·테니스 등 운동에도 능하여 비교적 여유롭게 살다가 9·28수복 당시 유탄에 맞아 사망하였다.

영랑생가 뒤편에 조성된 세계모란공원은 영랑생가 뒤편으로 이어져 영랑의 문학적 감성과 보은산 도시공원의 자연경관이 어우러진 생태문학공원이다.

사계절 모란을 감상할 수 있는 유리 온실과 세계 각국의 다양한 모란의 자태를 느낄수 있는 8개국 50종류의 세계모란원, 영랑 추모원, 생태연못, 전망대 등이 조성되어 있다.

특히 2,000여개의 야간 경관조명을 설치하여 자연스러운 빛과 공원 내의 모란 폭포 및 다양한 조형물을 아름다운 조명으로 꾸며 밤의 매력을 연출하고 있다.

영랑생가는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에도 포함되어 있다.

2021년 6월 21일, 강진 시문학파기념관에서 잠시 무더위를 피하며 쉬어간다.

시문학파기념관은 1930년대 동인지 '시문학'을 중심으로 순수시 운동을 전개했던 문학동인회 시문학파 참여시인 9인의 문학활동을 기념하는 공간이다.

9인의 시인은 김윤식, 박용철, 정지용, 정인보, 이하윤, 변영로, 김현구, 신석정, 허보 등이다 .

‘시문학지’ 창간일에 맞춰 2012년 3월 5일 개관하였으며, 부지 1,486㎡, 연면적 634㎡ 규모로 지하 1층, 지상 1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시문학파 동인들의 친필 원고, 1920~50년대 문예지 창간호 30여 종, 1920~60년대 희귀도서 500여 종 등을 소장 및 전시한다.

상설전시실은 시문학파 탄생배경, 시문학파 의의 및 문학세계를 살펴볼 수 있는 “시문학파가 탄생하기까지”와 1910~50년대 현대시사 연대표와 관련 신문보도로 시작한다.

이어서 한용운, 김소원, 김기림, 백석, 김광균, 서정주, 윤동주 등 시문학파 전후의 시인들을 소개하는 공간과 문예지 ‘시문학’의 창간호(1930년 3월),

제2호(1930년 5월), 제3호(1931년 10월) 원본을 관람할 수 있는 키오스크가 마련되어 있다.

시문학파 시인들의 사진자료 영상을 상영하는 영상관을 지나면 시인 9인의 친필 원고 및 유품을 전시하는 상설전시실 “시인의 전당”을 관람할 수 있다.

이어서 1920~30년대 시집과 문예지 창간호, 1940~50년대 시문학파 동인 작품이 수록된 국어교과서 등을 전시하는 희귀도서 전시 코너가 있다.

2021년 6월 21일, 다산 정약용이 머물렀던 주막집, 강진 사의재(四宜齋)~

옛 모습을 찾기 힘들 정도로 주변이 많이 변했지만 주모상과 사의재, 꽃들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경이다.

사의재(四宜齋)는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 강진에 유배되었을 때 최초로 머물렀던 조선시대 주막집이다.

주막집 주인 할머니의 배려로 4년 동안 기거하며 경세유표(經世遺表) 등을 집필하고 제자들을 교육하던 곳이다.

사의재란 '네 가지를 마땅히 해야 할 방'이라는 뜻으로 맑은 생각과 엄숙한 용모, 과묵한 말씨, 신중한 행동을 가리킨다.

2007년10월26일 강진군이 다산실학 성지(聖地)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강진읍 동성리의 옛터에 복원하였다.

대지면적 1,156㎡에 주막채, 바깥채, 초정(草亭) 등으로 이루어졌다.

정약용이 황사영 백서사건에 연루되어서 보수 유학파 대신들로부터 탄핵을 받고 강진으로 유배를 갔을 때 최초로 머물렀던 주막집이다.

다산은 이 사건을 계기로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를 가게되었으며 강진 고을에 들면서 지금의 이곳에 4년 동안 머물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처음에는 죄인이 강진으로 내려왔다고 하여서 주막 손님들과 백성들이 기피하였으나 유일하게 그의 사정을 알게 된 주막 노파가 호의를 베풀어주며

4년동안 이곳에서 머물도록 주선해 주었고 다산은 이 곳에서 학문을 수양하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지내왔다.

그리고 보은산방으로 떠나게 되면서 호의를 베풀어 준 주막 노파에게 감사의 뜻으로 주막을 사의재라는 이름으로 지어주었다.

2021년 6월 21일, 천년고찰 강진 월출산 무위사를 찾아서..

무위사는 무료 주차장에 입장료 또한 없어 자유롭게 출입할 수가 있다.

극락전은 보수공사로 문이 굳게 닫혀있어 잠시 머물다가 떠난다.

무위사(無爲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의 말사이다.

신라 때 원효(元曉)가 창건하여 관음사(觀音寺)라 하였고, 875년(헌강왕 1) 도선(道詵)이 중건하여 갈옥사(葛屋寺)라고 개칭한 뒤, 많은 승려들이 주석하였다.

고려 효공왕 9년( 905년) 선각(禪覺)이 3창하였으며, 태종 7년(1407년) 무위사가 천태종(天台宗) 17자복사(資福寺) 중의 하나가 되었다.

세종 12년(1430년) 극락전을 지었는데, 이 건물은 현재도 남아있고, 명종 10년(1555년) 태감(太甘)이 4창하면서 무위사라 하였다.

이때의 당우는 본절이 23동, 암자가 35개로 모두 58동에 이르는 대찰이었으나, 그 뒤 화재 등으로 규모가 크게 축소되었다.

그러나 경내에 있는 선각대사변광영탑비명(보물 제507호)에 의하면 신라시대에 이미 무위갑사(無爲岬寺)라고 불렀다 한다.

숙종 4년(1678년)에 극락전 앞에 괘불대를 조성하였고, 영조 15년(1739년)에는 해초(海超)·극잠(克岑) 등이 전각을 보수하였다.

1975년 벽화보존각(壁畵保存閣)과 해탈문(解脫門), 봉향각(奉香閣), 천불전(千佛殿), 미륵전(彌勒殿) 등을 중건하였다.

1991년에 산신각(山神閣)을 짓고 1995년에 동쪽 요사를 증축하여 오늘에 이른다.

국보 제13호(1962년12월20일)로 지정된 무위사 극락보전(極樂寶殿)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의 주심포(柱心包) 집이다.

무위사에 현존하는 대부분 건물들은 4번째 중건인 1555년에 건립된 것이나 이 극락전만은 이 보다 훨씬 오래 된 것이다.

1956년경의 수리공사 때 본존 뒷벽의 벽화 명문(銘文)에서 “十二年 丙申 三月初 吉畵成”이란 기록을 통하여 1476년(성종 7년) 이전 지어진 건물임이 밝혀졌다.

2021년 6월 21일, 무위사 주차장에서 하룻밤을 보내려고 하였지만 여의치않아 인근 월남사지로 자리를 옮긴다.

월남사지 삼층석탑이 있는 월출산 자락, 어둠 속에 이따금 적막을 깨며 들려오는 산새와 풀벌레 울음소리 들으며 오늘밤은 여기에 머문다.

2021년 6월 22일, 삼층석탑과 진각국사비가 있는 강진 월남사지에서..

어둠이 깃든 월남사지의 풍경과 함께 밤을 보내고 아침을 맞는다.

전라남도 기념물 제125호(1988년12월21일)로 지정된 월남사지(月南寺址)는 강진군 성전면 월출산을 배경으로 월남마을 중앙에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월남사재월출산남고려승진각소창유이규보비(月南寺在月出山南高麗僧眞覺所創有李奎報碑) - 월남사는 월출산 남쪽에 있는데

고려시대 진각국사가 창건하였고 이규보가 찬한 비가 있다.’라는 기록이 있어 고려 후기에 창건된 듯하나 언제 폐찰되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동국여지지』에 ‘진각소창유이규보찬비금폐(眞覺所創有李奎報撰碑今廢)’라고 한 점으로 미루어 동국여지지를 쓸 당시(1649∼1659) 이미 월남사는 폐찰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인근에 있는 무위사의 사적기에 임진왜란 때 주변의 절이 모두 불타 사라졌다는 내용이 있어 월남사도 이때 폐찰된 것으로 추정된다.

금당지(金堂址)에는 월남사의 건물 초석과 기단으로 보이는 축대가 남아 있으며, 마을 어귀의 돌담장 근처에서 기와편과 청자·백자편, 탑재로 쓰인 직사각형의 판석들이 발견되었다.

1980년대 중반 모전석탑 우측에 있는 어느 민가의 장독대에서 석탑의 옥개석이 발견되었다.

지역민들의 구전에 따르면 월남사지에는 원래 2개의 석탑이 있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모전석탑과 또 하나의 석탑이 있었던 듯하다.

그런데 발견된 옥개석의 세부 기법이 모전석탑 양식과 다른 신라의 양식과 기법을 따르고 있어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같은 절터에 백제계와 신라계 석탑이 공존하였던 것이다.

기록대로 진각국사가 창건하였다면 월남사는 고려시대에 창건되었으며 모전석탑의 조성시기 또한 13세기경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거대한 규모나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제9호)과 같은 백제계 탑들이 고려 초기부터 나타났음을 감안하면 진각국사에 대한 기록은 당시 월남사의 중창일 것으로 보인다.

절터에는 민가가 있으며 마을 입구 양쪽에 월남사지 모전석탑(보물 제298호)과 진각국사비(眞覺國師碑)가 있다.

이른 아침 인근 월남사지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월출산국립공원 금릉경포대 주차장에 주차를 한다.

예전에는 주차요금이 있었으나 2019년부터는 주차요금이 없이 무료주차를 할 수 있다.

주차장에서 경포대계곡을 따라 경포대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이어가면 동백숲길이 이어지고 한참 후에 샘터를 지나 오른다.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서면 구름다리에서 오르는 주능선과 합류하여 계단을 따라가면 산성대에서 올라오는 능선과 합류하는 통천문 삼거리에 이른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서면 통천문에 이르고 잠시 내려섰다가 가파르게 오르면 월출산 천황봉이다.

천황봉은 평일 이른 시간이라서 한사람도 없고 잠시 후 몇사람이 올라온다.

정상에서 잠시 머물다가 남근바위를 지나 바람재에서 계곡으로 내려서 주차장에 원점회귀하여 산행을 마무리한다.

무더운 날씨에 가파른 오르내리막이 힘들었지만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부부가 함께 걷는 기분좋은 산행길이었다.

○ 산행일자 : 2021년 6월 22일(화)

○ 기상상황 : 맑음(구름 조금 맑은 날씨에 정상 아래로는 운무에 잠김 19~27℃)

○ 산행인원 : 부부

○ 산행코스 : 경포대주차장~경포대 삼거리~통천문~천황봉~남근바위~바람재~경포대계곡~경포대주차장(전남 영암, 강진)

○ 구간별소요시간 : 10.14km(트랭글GPS), 3시간45분 소요

2021년 6월 22일, 호남의 3대 정원, 강진 백운동별서정원~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백운동정원은 조선 중기 선비인 처사 이담로가 말년에 둘째 손자인 이언길와 함께 조성하고 20여년간 은거한 유서깊은 정원이다.

바로 옆에는 오설록 녹차밭이 거대하게 자리잡고 월출산이 한눈에 들어와 아름다움을 더하는 곳이기도 하다.

강진 여행을 끝으로 2박3일의 짧은 여행을 마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

이번 여름에는 어디로 떠날까?

2019년3월11일 명승 제115호로 지정된 강진 백운동원림(白雲洞園林)은 완도 보길도 부용동정원, 담양 소쇄원과 함께 호남의 3대 정원으로 꼽힌다.

백운동원림은 이담로(李聃老 1627∼1701)가 조영한 후 지금껏 보존되어 온 전통 원림으로 수많은 선비와 문인들이 조영과 경치에 관하여 예찬한 옛 시와 그림들이 현재까지 잘 남아있다.

특히 <백운첩>에는 다산 정약용의 <백운동12승사>의 시가 있고 초의선사의 <백운동도>가 그려져 있어 유명하다.

또한, 김창흡, 김창집, 신명규, 임영 등이 원림의 경치를 향유한 기록과 조영자 이담로의 후손들이 경영하여온 기록이 남아있다.

월출산을 배경으로 원림을 조영한 유래 및 의도가 명확하게 확인되며, 내원에 화계를 만들어 지형을 자연스럽게 보전하고 계곡물을 상하 연지에 끌어왔다.

특히 수려한 옥판봉의 지세와 아름다움을 빌려온(借景) 정선대의 경관 등 정약용이 제시한 12곳의 경치가 온전히 남아있는 한국 전통원림의 백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