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박9일 여행 - 4. 여주보, 영릉, 신륵사, 화성 용주사, 탄도항, 옹진 선재도 목섬, 영흥도 국사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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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박9일 여행 - 4. 여주보, 영릉, 신륵사, 화성 용주사, 탄도항, 옹진 선재도 목섬, 영흥도 국사봉

by 정산 돌구름 2021. 6. 9.

8박9일 여행 - 4. 여주보, 영릉, 신륵사, 화성 용주사, 탄도항, 옹진 선재도 목섬, 영흥도 국사봉


○ 1일차(5월31일) : 광주 - 청주 - 남양주 다산생태공원 - 양평 두물머리

○ 2일차(6월 1일) : 두물머리 - 남양주 천마산 - 춘천 남이섬 - 가평 잣고을시장

○ 3일차(6월 2일) : 가평 잣고을시장 - 춘천 용화산 - 화천 붕어섬 - 미륵바위 - 꺼먹다리 - 파로호 - 춘천 소양강스카이워크

○ 4일차(6월 3일) : 춘천 소양강 - 김유정역 - 홍천 공작산 수타사&산소길 - 수타사계곡

○ 5일차(6월 4일) : 수타사계곡 - 공작산 산행 - 횡성호수길 5코스 - 섬강유원지

○ 6일차(6월 5일) : 횡성 섬강유원지 - 원주 치악산둘레길 1코스 - 행구수변공원 - 남한강 여주보

○ 7일차(6월 6일) : 여주보 - 여주 영녕릉 - 신륵사 - 화성 용주사 - 안산 대부도 탄도항

○ 8일차(6월 7일) : 탄도항 - 인천 선재도 목섬 - 영흥도 국사봉 - 안산 대부해솔길 1코스 - 시화달전망대 - 화성 제부도 - 궁평유원지

○ 9일차(6월 8일) : 궁평유원지 - 평택 수도사 - 평택호 관광단지 - 광주

~^^~

2021년 6월 5일, 아름다운 남한강 야경에 젖다..

2011년10월15일 일반에 개방한 여주보는 길이 525m, 높이 8m로 해시계와 물시계 형상으로 디자인하였다.

4대강 자전거길로 구성되어 한강 자전거길 남한강 구간이 지난다.

전망대는 2층 매점까지만 오를 수 있고 그 이상은 문이 닫혀 올라갈 수가 없어 아쉽다.

여행 6일차, 아름다운 남한강 야경에 젖어 여주보에 머문다.

여주보(驪州洑)는 여주시 일대의 농업용수와 상수도를 확보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한 보이며 총사업비 3,058억이 투입되었다.

4대강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2009년 11월에 착공하여 2011년 10월 15일 일반에 공개되었다.

보의 길이는 513m, 높이 8m로 보 전체가 가동보로 이루어져 있으며 12개의 수문이 설치되어 있다.

좌안에는 소수력발전소가 위치하며 총 4,950kw(1,650kw 발전기 3대)의 시설용량을 가지고 있어 연간 발전량은 2,970만 kwh이다.

보의 교각 형태는 용을 형상화 했으며 보의 우측에는 앙부일구(仰釜日晷)를 형상화하여 디자인 한 세종광장이 있다.

또한 여주보 홍보를 위한 물 문화관과 전망대(높이 40m)가 여주보 인근에 위치하고 있다.

보의 상부에 설치된 공도교는 일반보행과 자전거 통행만 가능하며, 야간조명을 설치하여 관광명소로도 역할을 하고 있다.

물억새 군락지, 자연형 어도, 갈대언덕, 야생초 화원 등 자연그대로의 멋을 살린 공간배치가 편안함과 여유로움을 더한다.

세종광장과 피크닉장, 다목적광장 등에서는 다양한 문화행사와 여가활동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2021년 6월 6일, 사적 제195호 여주 영릉(英陵)과 영릉(寧陵)~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능인 영릉(英陵)은 조선왕릉 중 최초의 합장릉이다.

영릉(寧陵)은 효종과 인선왕후의 능으로 왕릉 앞에 비릉(妃陵)을 써서 앞뒤 나란히 쌍분을 이루고있다.

영릉(英陵)과 영릉(寧陵)은 1970년 5월 27일 사적 제195호로 지정되었다

두 릉 사이는 소나무숲이 우거진 왕의 숲길로 연결되어 있어 운치가 있다.

무더운 날씨였지만 푸르른 초원, 우거진 송림, 잘 가꾸어진 두 왕릉을 둘러본다.

2021년 6월 6일, 남한강변 천년고찰 여주 봉미산 신륵사~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고려 말인 1376년 나옹 혜근이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하며, 200여 칸에 달하는 대찰이었다고 한다.

경내에는 보물 제180호인 조사당, 보물 제225호인 다층석탑, 보물 제226호인 다층전탑, 보물 제228호인 보제존자석종,

보물 제229호인 보제존자 석종비, 보물 제230호인 대장각기비, 보물 제231호인 석등이 있는 천년고찰이다.

남한강변에 위치하여 또다른 아름다운 풍경을 자아낸다.

봉미산 신륵사(神勒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진평왕 때 원효(元曉)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절이름을 ‘신륵’이라고 한 데는 미륵(彌勒) 또는 왕사 나옹(懶翁)이 신기한 굴레로 용마(龍馬)를 막았다는 전설에 의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그리고 고려 고종 때 건너편 마을에 나타난 용마가 걷잡을 수 없이 사나웠으므로 사람들이 잡을 수 없었다.

이 때 인당대사(印塘大師)가 고삐를 잡으니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神力)으로 제압하였다고 하여 절이름을 신륵사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또한 이 절은 고려 때부터 벽절(甓寺)이라고도 불렸는데, 이는 경내의 동대(東臺) 위에 다층전탑이 탑 전체를 벽돌(塼)로 쌓아 올린 데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나 이 절이 대찰을 이루게 된 것은 나옹화상이 이곳에서 갖가지 이적을 보이면서 입적(入寂)하였기 때문이다.

나옹이 입적할 때 오색 구름이 산마루를 덮고, 구름도 없는 하늘에서 비가 내렸으며, 수많은 사리가 나왔고, 용(龍)이 호상(護喪)을 했던 일들이 그것이다.

3개월 뒤인 고려 우왕 2년(1376년) 8월 15일에 절의 북쪽 언덕에 정골사리(頂骨舍利)를 봉안한 부도를 세우는 한편 대대적인 중창이 함께 이루어졌다.

이때 대전(大殿)·조당(祖堂), 승당(僧堂), 선당(禪堂), 종루(鐘樓), 동익당(東翼堂), 서익당(西翼堂), 남행랑(南行廊), 향적당(香積堂) 등 많은 건물이 신축, 중수되었다.

그리고 나옹의 진영(眞影)을 모시는 선각진당(禪覺眞堂)도 건립되었다.

2021년 6월 6일, 유서깊은 효찰대본산, 화성 용주사..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는 문성왕 16년(854년)에 창건하여 952년에 소실된 갈양사의 옛터에 창건된 사찰이다.

이 절은 사도세자의 능인 현륭원에 명복을 빌어 주는 능사로 창건되었다고 한다.

여주에서 화성으로 이동하여 용주사를 둘러보고 떠난다.

용주사(龍珠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이다.

신라 문성왕 16년(854년)에 창건하여 고려 광종 3년(952년)에 소실된 갈양사(葛陽寺)의 옛터에 창건된 사찰이다.

정조 14년(1790년)에 사일(獅馹)이 팔도도화주(八道都化主)가 되어 철학(哲學) 등과 함께 팔도 관민의 시전(施錢) 8만 7,000여 냥을 거두어 갈양사 옛터에 145칸의 사찰을 창건하였다.

이 절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능인 현륭원(顯隆園)에 명복을 빌어 주는 능사(陵寺)로 창건되었다.

창건과 동시에 이 절은 전국 5규정소(五糾正所)의 하나가 되어 승풍(僧風)을 규정하였다.

그 뒤 1900년에 용해(龍海)가 중수하였고, 1911년에는 30본산의 하나가 되어 수원, 안성, 남양, 죽산, 진위, 음죽, 용인, 고양, 시흥 등에 있는 49개 사찰을 관장하였다.

1931년에 강대련(姜大蓮)이 중수하였고, 1955년 사찰 정화 뒤에 조계종 제2교구 본사가 되었다.

같은 해에 관응(觀應)이 불교 전문강원을 개설하였으며, 1965년 대웅보전을 중수하였다.

1966년 주지 희섭(喜燮)이 동국역경원(東國譯經院)의 역장(譯場)을 두었고, 1969년 전강(田岡)이 중앙선원(中央禪院)을 설립하여 1975년 지장전을 중수하고, 1977년 일주문을 세웠다.

1981년 3층의 부모은중경탑을 세웠고, 1985년 불음각(佛音閣), 1986년 중앙선원 건물을 지었다.

1987년 대웅보전을 중수하고, 1988년 호성각을, 1993년 천불전을 짓고 만수리실을 개축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1790년에 건립한 대웅보전(大雄寶殿)이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35호로 지정되어 있고, 지장전(地藏殿), 시방칠등각(十方七燈閣), 범종각, 법고각(法鼓閣),

봉향각(奉香閣)과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36호인 천보루(天保樓), 나유타료(那由他寮), 만수리실(曼殊利室), 삼문각(三門閣), 일주문, 수각(水閣), 동별당(東別堂) 등이 있다.

또 문화재로는 국보 제120호인 용주사 동종과 보물 제1754호인 불설대보부모은중경판(佛說大報父母恩重經版),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호인 금동향로,

제12호인 청동향로, 제13호인 용주사 상량문, 제14호인 전적수사본(典籍手寫本), 제15호인 용주사 병풍, 제16호인 용주사 대웅전후불탱화 등이 있다.

2021년 6월 6일, 일몰 풍경이 아름다운 대부도 탄도항~

탄도는 참나무 숲이 울창하여 그 나무를 베어 숯을 굽던 곳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원래 섬이었으나 1988년 매립공사로 육지와 이어지면서 육지가 되었다.

탄도항은 간조 때가 되면 누에섬까지 길이 열려 바다 위를 걷는 듯한 느낌이 든다.

해질녘 누에섬과 풍력발전기가 어우러진 풍경이 아름답다.

여행 7일차, 오늘밤은 아름다운 낙조 풍경과 함께 여기에 머문다.

2021년 6월 7일, 한국의 아름다운 섬 1위, 하루 두번 바닷길이 열리는 선재도 목섬~

인천 옹진군 영흥면 선재도에 딸린 무인도 목섬은 CNN이 선정한 ‘한국의 아름다운 섬 33’중 으뜸으로 꼽힐 만큼 아름다운 섬이다.

선재도는 대부도와 연륙이 되고 영흥도와도 영흥대교로 연결되어 있어 차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이른 아침 선재도에서 바닷길이 열려 잠시 목섬을 보고 떠난다.

대부도와 영흥도를 잇는 징검다리 섬 선재도(仙才島)는 인천광역시 옹진군 영흥면 선재리에 있는 섬이다.

선녀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춤을 추던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선녀와 연관 지을 정도로 물이 맑고 수려한 풍경과 신비를 간직하고 있다.

면적은 1.97㎢, 해안선 길이 10.9km로 동쪽의 경기도 안산 대부도와는 500m 거리로 2000년 11월에 개통된 선재대교를 통해 연도되었다.

서쪽의 영흥도와는 1.8km 거리로 2001년 11월에 개통된 영흥대교를 통해 연결되었다.

고려시대부터 조선 후기까지 소우도라고 부르다가 1871년을 전후하여 선재도로 개칭되었다.

원래의 명칭인 소우도(小牛島) 또는 독우도(犢牛島)에서 선재도(仙才島)로 개칭되었다고 전한다.

소우나 독우는 모두 송아지를 뜻하는 것으로 ‘영흥도는 어미 소처럼 따라다니는 송아지 섬’이라는 유래를 갖고 있다.

주민 입도는 신석기시대부터로 추정되며, 조선초기에 목장 부지로 남양도호부(南陽都護府)에 예속되었다가 대부도에 진이 설치되면서 대부진(大阜鎭)에 속했다.

1973년 옹진군에 속했다가 1995년 인천광역시에 통합되었다.

한국의 아름다운 섬 1위 목섬은 선재대교를 건너자마자 왼쪽으로 동그랗게 보이는 조그만 섬이다.

목섬(目島)은 하루 두 번 바닷물이 갈라지면서 융단을 깔아 놓은 듯 황금빛 모랫길을 열어준다.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로 평소엔 바다 위에 떠있는 조그만 섬이지만 바닷물이 빠지면 목도를 중심으로 바닷길이 500m쯤 갈라지면서 조금씩 모랫길이 드러난다.

다른 곳의 바닷길은 대부분 질퍽거리는 갯벌로 되어있는데 신기하게도 선재도와 목섬을 잇는 500m 바닷길은 자연스레 단단한 모랫길이 생긴다.

목섬은 2013년 미국 CNN에서 발표한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33’ 중 1위를 차지했다.

당시 미국 CNN의 보도는 “한국에 섬이 3,358개 있는데, 그중 으뜸은 목섬이다. 썰물이 되면 어미 섬에서 목섬까지 바다가 갈라진다.

국제공항이 있는 인천에 이런 비경이 있으리라고 그 누가 상상했으랴.”라고 표현했다.

2021년 6월 7일, 섬&산 옹진군 영흥도 국사봉 산행~

대부도에서 선재도를 거쳐 영흥도 국사봉 산행을 한다.

영흥도 통일사 입구에서 영흥익령군길을 따라 산행을 시작하여 임도를 따라 통일사를 지나 국사봉에 올라선다.

정상에는 전망대가 있지만 울창한 소사나무 숲에 가려 조망이 없다.

잔뜩 흐린 날씨였지만 소사나무가 우거진 부드러운 영흥익령군길(통일염원길)을 따라 걷는 기분좋은 발걸음이었다.

인천광역시 옹진군 영흥면의 주도인 영흥도(靈興島)는 면적 23.46㎢, 해안선길이 42.2km이다.

동쪽에 대부도(大阜島), 북쪽에 무의도(舞衣島), 서쪽에 자월도(紫月島)가 있으며, 최고봉은 중앙에 솟은 국사봉(國思峰 127.7m)이다.

원래 명칭은 연흥도(延興島)였으나 고려 말 익령군(翼嶺君) 기(奇)가 정국의 불안으로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온 식구를 이끌고 이곳으로 피신하면서 익령군의 영(靈)자를 따서 영흥도(靈興島)라고 칭하였다.

1975년, 1984년 신석기시대 조개무지, 23점의 빗살무늬토기, 원시농업 흔적의 농기구들이 발견되면서 이 때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에 속하였고, 고려 현종 9년(1018년) 수주(수원)에 속군되었으며, 뒤에 인주(인천)에 속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남양부에 속하였고, 1914년 경기도 부천군에 소속되었다가 1973년 지금의 옹진군에 편입되어 1995년 인천광역시로 통합, 편입되었다.

고려 원종 11년(1270년) 배중손이 이끄는 삼별초가 강화도에서 진도로 근거지를 옮기면서 영흥도를 기지로 삼아 70여 일 동안 항몽전을 벌였다.

한국전쟁 때에는 인천상륙작전의 전초기지로 활용되었다.

영흥도는 산이 낮고 농경지가 많아 주민의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며, 지역 특산물로 포도와 흑염소 엑기스가 유명하다.

섬 전체에 상수리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으며, 십리포해수욕장·장경리해수욕장 등의 해변에는 노송이 우거져 있어 피서철이 되면 사람들로 붐빈다.

2001년에 선재도와 영흥도가 영흥대교로 연결되어 접근이 쉬워졌으며, 서쪽 해안에는 영흥화력발전소가 들어서 있다.

인천 옹진군 영흥도에서 가장 높은 국사봉(156.3m)은 고려왕조의 멸망과 관련된 전설이 전한다.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개창할 즈음 고려의 왕족일가가 영흥도로 피난해 이 봉우리에 올라 '멸망하던 나라를 생각하였다.'는 유래를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