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고찰, 홍천 공작산 수타사(壽陀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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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고찰, 홍천 공작산 수타사(壽陀寺)..

by 정산 돌구름 2021. 6. 9.

천년고찰, 홍천 공작산 수타사(壽陀寺)..


2021년 6월 3일, 천년고찰 홍천 공작산 수타사~

춘천에서 홍천으로 이동하여 수타사 생태숲 주차장에 자리를 잡는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날씨지만 잠시 수타사 산소길을 따라 수타사에 이른다.

홍천 공작산 수타사(壽陀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의 말사이다.

신라 성덕왕 7년(708년)에 창건하여 우적산(牛寂山) 일월사(日月寺)라 하였는데 누가 지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창건 이후 영서지방의 명찰로 꼽히다가 선조 2년(1568년)에 현 위치로 옮기면서 수타사(水墮寺)라 하였다.

그후 인진왜란으로 완전히 불타 40년 동안 폐허로 남아 있다가 인조 14년(1636년) 공잠(工岑)이 중창을 시작하여 법당을 다시 지었고, 뒤이어 1644년 학준(學俊)이 선당(禪堂)을 지었다.

1647년에는 계철(戒哲)과 승가(僧伽)가 승당(僧堂)을 건립하였으며, 1650년(효종 1년) 도전(道佺)이 정문을 건립하였다.

1658년 승해(勝海)·정명(正明)이 흥회루(興懷樓)를 건립함으로써 정형된 가람을 갖추게 되었다.

1670년(현종 11년)에는 정지(正持)·정상(正尙)·천읍(天揖)이 대종(大鐘)을 주조하여 봉안하였다.

1674년에는 법륜(法倫)이 천왕문인 봉황문(鳳凰門)을 세웠으며, 1676년(숙종 2년)에 여담(汝湛)이 사천왕상을 조성하였다.

그뒤로도 1683년까지 불사가 계속되어 청련당(靑蓮堂)·향적전(香積殿)·백련당(白蓮堂)·송월당(送月堂) 등의 당우들도 차례로 중건되어 옛 모습이 재현되었다.

순조 11년(1811년)에 지금의 명칭인 수타사(壽陀寺)로 이름을 바꾸고, 고종 15년(1861년)에 윤치(潤治)가 중수하였다.

1878년 동선당(東禪堂)을 다시 세우고 칠성각을 신축하였다.

또 1976년 심우산방(尋牛山房)을 중수하고, 이듬해 삼성각(三聖閣)을 건립하였으며 1992년에 관음전을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적광전(大寂光殿)을 비롯하여 삼성각·봉황문·흥회루·심우산방·요사채 등이 있다.

이 가운데 강원유형문화재 제17호안 대적광전은 수타사의 중심 법당으로 내부 장식이 정교하고 아름답다.

심우산방 옆에는 강원도보호수 제166호로 지정된 수령 5백년의 무목(朱木) 한 그루가 있다.

이 주목은 1568년에 사찰 이전을 관장하던 노스님이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땅에 꽂은 것이 자라난 것이라고 하며, 나무에 스님의 얼이 깃들어 있어 귀신이나 잡귀로부터 수타사를 지킨다는 설화가 있다.

이밖에도 보물 제745호로 지정된 《월인석보 月印釋譜》와 고려 후기의 삼층석탑(강원문화재자료 제11호), 홍우당부도(紅藕堂浮屠 강원문화재자료 제15호) 등이 있다.

얼마 전까지 사찰 안에 있었던 성황당은 관음전 신축을 위해 철거하였다. 사찰 안에 성황당이 있었던 것은 특이한 경우이다.

~^^~

수타사 입구 길 옆의 수타사 부도전, 부도(浮屠)는 승려의 유골이나 사리를 모셔 두는 곳이다.

부도 9기(석종형 5기, 3단 부도 4기), 폐부도 1기, 비석 4기가 있다.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5호(1984년 6월 2일) 수타사홍우당부도(壽陀寺紅藕堂浮屠)..

사각 바닥돌 위로 3단으로 이루어진 기단을 두고 납작한 공모양의 탑몸돌을 올린 후 지붕돌을 얹은 모습으로 바닥돌을 제외한 대부분이 6각을 이루고 있다.

기단 중에서 아래받침돌은 옆면마다 선으로 무늬를 새기고, 윗면에는 두 겹의 연꽃잎을 둘러 새겼다.

가운데 받침돌은 여섯 모서리에 마디가 있는 작은 기둥을 새겨두고, 면마다 직선으로 이루어진 무늬를 두었다.

윗받침돌은 아래와 대칭되는 두툼한 연꽃잎을 조각하여 장식하였다.

지붕돌은 윗면의 여섯 모서리선이 두툼하게 표현되어 있으며, 모서리에서 미끄러지는 각 귀퉁이가 위로 솟아있다.

꼭대기에는 낮은 받침돌 위로 공 모양과 꽃봉오리 모양의 돌이 차례로 놓여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6각으로 이루어진 전체적인 구성양식으로 보아, 조선시대 즈음에 이 부도를 세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수타사 봉황문(鳳凰門), 사찰로 들어서는 첫번째 문이며, 4구의 소조사천왕상이 모셔져있다.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21호(1998년9월5일) 수타사 소조사천왕상(塑造四天王像), 봉황문 좌우에 모셔져 있는 4구의 사천왕상이다.

「수타사사적기」에 의하면, 현종 15년(1674년) 승려 법륜(法倫)이 봉황문을 건립하였으며, 2년 뒤 1676년(숙종 2년) 여담(汝湛)이 사천왕상을 조성하였다고 되어 있다.

사천왕상의 높이는 3.2m이고 머리 높이는 1.12m, 어깨 너비 0.73m, 무릎 너비는 1.52m이다.

나무로 기본형태를 잡은 후 새끼줄을 감고, 그 위에 진흙을 발라 빚었다.

머리 뒤쪽의 불꽃무늬와 사천왕상이 가지고 있는 물건 등에는 부분적으로 나무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완주 송광사의 보물 제1255호 사천왕상(1649년)과 함께 조성 연대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특유의 위세 있는 얼굴 표정과 짜임새 있는 신체 균형, 사실적인 세부 표현 등에서 정교함이 돋보인다.

문의 오른쪽에 동방 지국천왕(持國天王)과 남방 증장천왕(增長天王)이, 왼쪽에 서방 광목천왕(廣目天王)과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이 마주보고 서있다.

지국천왕은 보검을, 광목천왕은 기다란 당(幢)을, 증장천왕은 용과 여의보주를, 다문천왕은 당비파를 들고 있다.

조선후기 사천왕상의 일반적인 배치법과 지물형태와는 다소 차이를 보여준다.

각 천왕상은 중국식 갑옷을 입은 용맹스런 무장(武將)의 형상에 두 다리를 딱 벌린 채 의자에 걸터앉은 듯한 좌상의 자세를 취했으며, 발아래로는 악귀(惡鬼)들을 밟고 있다.

머리에는 화려하게 장식된 보관(寶冠)을 쓰고 있으며, 곤두세운 이마, 부릅뜬 눈, 뭉툭한 주먹코, 악다문 입 등 사천왕 특유의 험상궂고도 위협적인 분노상이 특징적이다.

옷차림은 평상복을 입고 그 위에 다시 갑옷을 이중으로 걸치고 있는데, 팔뚝 소매가 위로 말려 올라가 바람에 휘날리듯 표현되고 있다.

머리 뒤에서 양 발끝까지 천의(天衣) 자락이 둥글게 흘러내리고 있으며, 여기에서 화염 가닥들이 뻗어 나와 일종의 광배(光背) 구실을 하고 있다.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72호(2015년8월7일) 수타사 흥회루(興懷樓)..

효종 9년(1658년)에 건축된 흥회루는 강원도에서 가장 오래된 보기 드문 누강당 형식의 건물이다.

창건된 이후 근대에 들어와 일부 변화가 있었으나 기본적인 평면과 구조, 공포와 가구, 세부 형식 등은 창건 당시의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다.

흥회루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장방형 평면에 자연석으로 외벌대 기단을 놓았는데 건물 규모에 비해 기단이 낮고, 초석도 자연석을 썼는데 형태가 아주 자유롭다.

기둥은 평주 12개, 좌우 측면 고주 4개, 건물 중앙에 세운 심고주 4개를 세워 가구를 결구하였다.

모두 원형기둥이며 정연한 계획 하에 치밀하게 가공된 모습은 흥회루의만 특징으로 볼 수 있다.

가구는 1고주 5량가를 기본으로 삼았지만 일반적인 고주가 아니라 평면 중앙에 심고주를 세운 독특한 방식을 따랐다.

이로 인해 대들보 대신에 심고주를 중심으로 맞보를 결구하고 맞보 상부에는 종보를 걸구하였다.

건물 좌우 측벽은 2고주 5량가로 가구를 구성하였다.

보물 제11-3호(2000년2월15일 ) 수타사 동종..

승려이자 주종장(鑄鐘匠)인 사인(思印)이 현종 11년(1670년)에 제작한 높이 110cm의 종이다.

조선 후기의 종으로는 대작(大作)에 속하며, 전체적으로 조각이 화려하고 완숙미와 사실주의적 기풍이 돋보인다.

조선시대 종으로는 특이하게 종뉴를 따로 만들어 몸체와 연결하고 음통(音筒)을 붙였다.

그리고 종의 어깨에 있는 상대 바로 아래에는 9개의 돌기(乳頭]) 있는 네모난 유곽(乳廓) 4개가 사방에 있는데 이는 신라시대의 전통적인 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법이다.

종의 몸통 아래 하대에는 여러가지 무늬가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고, 현란한 꽃무늬로 표현된 당좌(撞座)는 문경김룡사동종(聞慶金龍寺銅鐘 보물 제11-2호)의 양식에 비견된다.

몸통에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어 종을 만든 내력과 시기·발원자 등을 알 수 있다.

사인은 모두 8개의 종을 만들었는데 이 종은 신라시대 종의 전통성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고 구조도 짜임새가 있다.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7호(1976년 12월16일) 수타사 대적광전(大寂光殿)은 수타사의 본전으로 1636년(인조 14년)에 공잠대사(工岑大師)가 중건하였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多包系) 단층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높은 장대석(長大石) 기단 위에 세웠는데 기둥은 모두 둥근기둥으로 세웠다.

문은 중앙칸에 4분합(四分閤) 띠살문을 달고 양 옆칸에는 2짝 분합인 빗살문을 달았다.

한편 기둥 위에 창방(昌枋)을 놓은 다음 기둥머리를 짜맞추고, 이 기둥머리 사이에 주간포작(柱間包作)을 정면인 경우에 각각 1·2·1씩 배열하였다.

첨차 끝의 쇠서[牛舌]는 모두 수서[垂舌]로 되어 있다.

내부에는 바닥에 마루를 깔고, 뒤쪽 가운데 칸에 불단(佛壇)을 설치하였다. 양식적(樣式的)으로 보아 조선 초기적인 특징을 약간 보여주고 있다.

수타사 대적광전 비로자나불..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22호(1998년9월5일) 수타사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

수타사 대적광전 내에 있는 비로자나불의 후불탱화로 비단 바탕에 채색하였으며, 세로 278㎝, 가로 263㎝의 크기이다.

석가가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하고 있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중앙의 석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열보살과 사천왕 등을 배치하였다.

중앙의 석가불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옷을 걸치고 있으며, 손은 항마촉지인을 하고 붉은색을 칠한 옷은 각종 무늬를 두어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머리 꼭대기에 있는 육계는 높고 뾰족하며, 머리카락은 조그만 소라 모양처럼 구불구불하게 표현하였다.

몸 뒤의 광배는 연꽃봉오리 모양으로 크게 나타냈으며, 대좌는 두 겹의 흰 연꽃잎으로 장식하였다.

석가불의 좌우에는 보현보살과 문수보살이 배치되어 각각 흰 연꽃과 여의를 들고 서있고, 그 윗쪽으로는 둥근 두광을 지닌 8보살이 배치되어 있다.

그림 아래 2구씩의 사천왕상은 갑옷의 금색부분이 입체감있게 표현되어 있는데, 사각에 가까운 얼굴, 작은 코와 입, 콧수염과 턱수염의 표현 등에서 조선 후기 불화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석가불의 어깨 좌우에는 늙은 비구 모습의 가섭과 청년 모습의 아난이 서있다.

아랫부분에 새긴 기록을 통해 조선 영조 38년(1762) 금어 진찰 등이 이 그림을 그렸음을 알 수 있다.

탱화란 천이나 종이에 그린 그림을 족자나 액자의 형태로 만들어 걸어두는 불화의 한 종류로, 보통 사찰의 전각 안에 모셔둔 본존상 뒤에 걸어두는 후불화를 이른다. 

수타사의 원통보전(圓通寶殿), 최근에 신축한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이다.

내부에는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76호인 목조관음보살좌상을 모시고 있다.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76호(2016년11월4일) 수타사 목조관음보살좌상(木造觀音菩薩坐像)

이 불상 복장에서 발견된 조성발원문에 따르면 이 불상은 1758년(건륭23년) 5월에 수타사 옥수암에서 화승 순경(順瓊), 덕순(德淳)에 의해 제작되었음이 확인된다.

불상을 조성한 화승 순경과 덕순은 1739년에 수화승 초흠과 서울 학림사 괘불도를 조성한 화승들이다.

불교조각사에서 18세기 중반은 불상의 조성과 개금에 불화승들이 점차 참여하게 된다. 

이 불상은 조각수법이 우수하고, 발원문을 통해 조성연대와 작가 등을 명확히 알 수 있는 기년명 불상이며,

다라니ㆍ후령통 등의 복장유물을 동반하고 있는 등 불교미술사적 가치가 우수하다는 점에서 지정 보존가치가 있다.

원통보전에 보관 전시하고 있는 사리는 대적광전 닫집 위에서 발견된 부처님진신사리와 원통보전 관세음보살 복장에서 발견된 부처님 진신사리이다.

삼성각(三聖閣)은 대적광전과 원통보전사이 뒤편에 있다.

1977년에 새로 지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칠성(七星)과 산신(山神). 독성(獨聖)을 함께 봉안하는 전각을 삼성각이라고 한다.

상단 한가운데의 칠성단에는 1895년에 조성한 칠성탱화(七星幀畵), 그 좌우로는 1900년에 조성한 산신탱화(山神幀畵)와 독성탱화(獨聖幀畵)가 봉안되어 있다.

칠성탱화는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를 중심으로 좌우에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을 배치하였다.

중단과 상단에는 칠불(七佛), 하단에는 칠원성군(七元星君)을 배치하였다.

칠원성군은 북두칠성(北斗七星)을 신격화한 것으로 도교적 민간신앙을 불교에서 수용한 것으로 북두칠성은 칠여래(七如來)의 화현(化現)이기도 하다.

칠성신은 인간의 수명과 재물, 재능 등을 관장하며, 농경시대에는 비를 내리는 매우 중요한 신이었다.

수명장수신(壽命長壽神)으로 일컬어지는 칠성신은 각각 북두제일(北斗第一) 자손만덕(子孫萬德) 탐낭성군(貪狼星君), 북두제이(北斗第二) 장난원리(障難遠離) 거문성군(巨門星君), 북두제삼(北斗第三) 업장소제(業障消除) 녹존성군(祿存星君), 북두제사(北斗第四) 소구개득(所求皆得) 문곡성군(文曲星君), 북두제오(北斗第五) 백장진멸(百障殄滅) 염정성군(廉貞星君), 북두제육(北斗第六) 복덕구족(福德具足) 무곡성군(武曲星君), 북두제칠(北斗第七) 수명장원(壽命長遠) 파군성군(破軍星君) 등 맡은 바 그 역할이 있다.

칠성탱화는 보통 치성광여래와 일광여래, 월광여래 삼존불을 중심으로 상단에 칠여래, 하단에 칠원성군, 그리고 좌우에 삼태, 육성, 이십팔수(二十八宿)를 도상화한 것이다.

산신탱화는 특이하게도 시봉자가 두 명의 동녀(童女)이고, 산신의 손톱이 길게 표현되어 있어서 호랑이의 발톱을 연상케 한다.

산신은 불법 수호의 서원을 세운 호법선신(護法善神) 중 하나인 산왕대신(山王大神)으로 흔히 산신령(山神靈)이라고도 한다.

불교에서 산신은 가람 수호신이자 산중 생활의 평온을 비는 외호신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산신은 옛날 농경민들에게 비를 내려 풍년이 들게 하는 강우신(降雨神)이나 풍산신(豊産神), 유목민 또는 수렵민들에게 사냥감을 풍성하게 내리는 신으로 여겨졌다.

산신은 또 인간에게 아이를 점지해 주고, 악귀로부터 지켜주는 수호신이다.

독성탱화는 벗겨진 머리에 백발 머리털과 흰 눈썹, 흰 수염이 덥수룩한 독성이 절벽을 배경으로 앉아 왼손에 주장자(柱杖子)를 들고 있다.

하늘에는 서운(瑞雲)이 떠 있고, 향로에서는 향을 태우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향로 위에는 극락조 두 마리가 그려져 있으며, 시자는 보이지 않는다.

독성존자를 묘사한 독성탱화를 불교에서는 독수성탱(獨修聖幀) 또는 나반존자도(那畔尊者圖)라고도 하며, 보통 16나한도(十六羅漢圖)와 같은 구도법으로 그린다.

독성탱화에는 보통 산과 소나무, 구름 등을 배경으로 삭발 머리에 길고 흰 눈썹을 가진 비구가 오른손에는 석장(錫杖), 왼손에는 염주 또는 불로초를 들고 반석위에 정좌하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종종 차를 달이는 동자가 등장하기도 한다.

독성은 스승 없이 독수선정(獨修禪定)으로 진리를 깨달아 부처의 반열에 오른 성자로서 독성을 벽지불(辟支佛)이라고도 한다.

수타사 지장전, 지장전은 명부전 이라고도 하며 저승의 유명계를 상징하는 전각이다.

안에는 지장보살을 주불로 모시고 죽은 사람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곳이다.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1호(1984년6월2일 ) 수타사 삼층석탑..

이 탑은 고려 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높이 1.15m의 화강암으로 만든 삼층석탑이다.

단층기단 위에 건립한 3층석탑으로 지대석과 면석에는 아무런 조각이 없으며 갑석(甲石)은 바깥쪽으로 경사졌고 상면은 2단의 몰딩이 있어 탑신부를 받고 있다.

2·3층의 탑신과 상륜부(相輪部)는 없어졌으나 원래는 큰 탑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