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제195호, 여주 영릉(英陵)과 영릉(寧陵)~
2021년 6월 6일, 사적 제195호 여주 영릉(英陵)과 영릉(寧陵)~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능인 영릉(英陵)은 조선왕릉 중 최초의 합장릉이다.
영릉(寧陵)은 효종과 인선왕후의 능으로 왕릉 앞에 비릉(妃陵)을 써서 앞뒤 나란히 쌍분을 이루고있다.
영릉(英陵)과 영릉(寧陵)은 1970년 5월 27일 사적 제195호로 지정되었다
두 릉 사이는 소나무숲이 우거진 왕의 숲길로 연결되어 있어 운치가 있다.
무더운 날씨였지만 푸르른 초원, 우거진 송림, 잘 가꾸어진 두 왕릉을 둘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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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릉(英陵)은 여주시 능서면에 있는 조선 제4대 세종대왕과 왕비 소헌왕후 심씨의 합장릉이다.
당초 영릉은 세종 28년(1446년) 소헌왕후가 죽자 광주(廣州) 서강(西岡)에 쌍실의 능을 만들고 그 우실(右室)은 왕의 수릉(壽陵)으로 삼았다가 1450년(문종 원년) 세종이 죽자 합장하였다.
이 능제(陵制)는 『국조오례의』 치장조(治葬條)에 따라 만든 것으로 조선 전기 묘제의 기본이 되었다.
능의 석물은 병석(屛石) 가운데 영저(靈杵 공이), 영탁(靈鐸 방울), 지초문양(芝草文樣)을 빼고 운채(雲彩)와 십이지신상만을 새겨 조선병석문(朝鮮屛石文)을 확정하였다.
혼유석(魂遊石)의 고석(鼓石)은 5개에서 4개로 줄였고, 기타 양식상 바꾸어 고친 것이 약간 있었다.
세조 이후 영릉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능을 옮기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서거정(徐居正)의 반대로 옮기지 못하다 1469년(예종 1년)에 다시 옮기자는 의논에 따라 여주로 옮겼다.
능제는 세조가 죽은 뒤부터 크게 바뀌어 병석과 석실제를 폐지하고 회격(灰隔)으로 하여 합장하고 능 앞에 혼유석 2좌를 놓아 양위임을 표시하였을 뿐 단릉과 마찬가지로 하였다.
영릉에는 병풍석이 없고 난간석만 설치되었으며, 봉분 내부는 석실이 아니라 회격(灰隔 관을 구덩이 속에 내려놓고 그 사이를 석회로 메워서 다짐) 형식으로 되어 있다.
혼유석 2좌를 마련하여 합장릉임을 표시하였으며, 난간석에 12지신상을 조각하는 대신 12지를 문자로 표현하여 방위를 표시하였다.
여주로 영릉을 옮길 때 천장도감(遷葬都監)에서 석물을 함께 옮기자고 하였으나 왕명에 의하여 그 자리에 묻었다.
1973년에 석물들을 발굴하여 청량리 영휘원(永徽園) 북쪽에 세운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옮겼다.
혼유석, 장명등(長明燈), 2기(基)의 무관석과 문관석, 4기의 석수, 7기의 망주석과 구 영릉터에 세웠던 세종대왕신도비가 그것이다.
영릉(寧陵)은 조선 제17대 효종(孝宗)대왕과 부인 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의 무덤이다.
왕릉과 왕비릉을 좌우로 나란히 배치한 것이 아니라 아래위로 배치한 쌍릉 형식이다.
풍수지리에 의한 이런 쌍릉 형식은 조선 왕릉 중 최초의 형태인데 경종과 선의왕후의 무덤인 의릉(懿陵)도 이런 형태를 띠고 있다.
처음엔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東九陵)의 태조 무덤인 건원릉(健元陵) 서쪽에 있었으며 능호를 익릉(翼陵)’이라 하였다.
이후 석물에 틈이 생겨 봉분 안으로 빗물이 샐 염려가 있다하여 1673년(현종 14년) 세종의 무덤인 영릉(英陵) 동쪽으로 능을 옮겼다.
다음해 왕비 인선왕후의 능이 동원(同原)에 택정(擇定)되어 왕릉 앞에 비릉(妃陵)을 써서 앞뒤로 나란히 쌍분(雙墳)을 이루게 하였다.
왕릉에만 곡장(曲牆 굽은 담장)이 있고, 앞에 있는 왕비릉과 쌍분임을 나타내는 외에 비릉도 마찬가지로 석물을 갖추고 있다.
봉분을 감싸고 12칸의 난간석을 설치하였으며, 동자석(童子石 난간의 기둥 사이를 받치는 돌)에는 십이방위 문자를 새겼다.
세조 때부터 시작된 병풍석을 세우지 않는 전통이 성종의 무덤인 선릉(宣陵)부터 다시 출현하였으나 영릉(寧陵)에서 다시 사라져 왕릉 배치에 있어 또 하나의 전기가 되었다.
능에 갖추어진 석물은 석양(石羊)과 석호(石虎) 각 2쌍, 상석 1좌, 망주석 1쌍, 문인석과 석마(石馬) 각 1쌍, 장명등 1좌, 무인석·석마 각 1쌍이다.
왕비릉에는 곡장만 없을 뿐 다른 배치는 왕릉과 똑같다.
능원 아래에는 정자각, 비각, 홍살문, 재실이 있고,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에 금천(禁川)이 흐른다.
이 능을 보호하기 위하여 영(令 종5품) 1인과 참봉(종9품) 1인을 두어 관리하게 하였다.
효종 영릉 재실(寧陵 齋室)은 조선의 대표적인 재실 건축으로 2007년11월29일 보물 제1532호로 지정되었다.
재실은 제관(祭官)의 휴식, 제수 장만, 제기 보관 등의 제사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능의 부속건물이다.
영릉을 옮기면서 함께 재실도 함께 옮겨왔다.
재실은 재방, 안향청, 제기고, 전사청, 행랑채, 우물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조선 왕릉 재실의 기본형태가 잘 남아 있고, 공간 구성과 배치가 잘 되어 있다.
또한 경내의 재향과 관계 있는 향나무와 느티나무, 회양목(천연기념물 제459호) 등의 고목도 함께 어우러져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효종대왕릉 회양목(淮陽木)은 2005년 4월 30일에 천연기념물 제459호로 지정되었다.
수령은 약 300년으로 추정되며, 높이는 4.4m, 가슴높이의 줄기둘레는 동쪽이 29㎝, 서쪽이 43㎝이고, 수관 폭은 동서 방향이 4.4m, 남북 방향이 6.5m이다.
나무는 지상 15㎝ 높이 정도에서 동서 방향으로 분지하여 전체적으로 반구형(半球形)의 단정한 수관을 형성하고 있으며, 가지의 끝이 지상 약 1m 높이까지 늘어져 있다.
효종대왕 영릉 재실 안에 위치하며 주변에 향나무와 느티나무 노거수가 함께 있다.
회양목의 동북 방향 2.6m 거리에는 재실의 전사청이 있고, 남동 방향 1.7m 거리에는 담장이 가로막고 있다.
또 남서 방향 약 3~4m 거리의 협문 바로 옆에는 향나무 노거수 한 그루가 있어 생육공간이 협소하고 일조 여건도 좋지 않은 상태이다.
회양목은 경북 북부, 충북, 강원도, 황해도 등지의 석회암지대에 주로 자생하는 늘 푸른 넓은잎나무인데 나무 높이가 4.4m에 이르는 큰 나무는 흔하지 않다.
원래 회양목은 작고 낮게 자라는 나무로 이와 같이 재실 내에 크게 자란 나무는 쉽게 찾아볼 수 없어 생물학적 가치가 큰 노거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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