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깊은 효찰대본산, 화성 용주사(龍珠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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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깊은 효찰대본산, 화성 용주사(龍珠寺)~

by 정산 돌구름 2021. 6. 9.

유서깊은 효찰대본산, 화성 용주사(龍珠寺)~


2021년 6월 6일, 유서깊은 효찰대본산, 화성 용주사..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는 문성왕 16년(854년)에 창건하여 952년에 소실된 갈양사의 옛터에 창건된 사찰이다.

이 절은 사도세자의 능인 현륭원에 명복을 빌어 주는 능사로 창건되었다고 한다.

여주에서 화성으로 이동하여 용주사를 둘러보고 떠난다.

용주사(龍珠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이다.

신라 문성왕 16년(854년)에 창건하여 고려 광종 3년(952년)에 소실된 갈양사(葛陽寺)의 옛터에 창건된 사찰이다.

정조 14년(1790년)에 사일(獅馹)이 팔도도화주(八道都化主)가 되어 철학(哲學) 등과 함께 팔도 관민의 시전(施錢) 8만 7,000여 냥을 거두어 갈양사 옛터에 145칸의 사찰을 창건하였다.

이 절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능인 현륭원(顯隆園)에 명복을 빌어 주는 능사(陵寺)로 창건되었다.

창건과 동시에 이 절은 전국 5규정소(五糾正所)의 하나가 되어 승풍(僧風)을 규정하였다.

그 뒤 1900년에 용해(龍海)가 중수하였고, 1911년에는 30본산의 하나가 되어 수원, 안성, 남양, 죽산, 진위, 음죽, 용인, 고양, 시흥 등에 있는 49개 사찰을 관장하였다.

1931년에 강대련(姜大蓮)이 중수하였고, 1955년 사찰 정화 뒤에 조계종 제2교구 본사가 되었다.

같은 해에 관응(觀應)이 불교 전문강원을 개설하였으며, 1965년 대웅보전을 중수하였다.

1966년 주지 희섭(喜燮)이 동국역경원(東國譯經院)의 역장(譯場)을 두었고, 1969년 전강(田岡)이 중앙선원(中央禪院)을 설립하여 1975년 지장전을 중수하고, 1977년 일주문을 세웠다.

1981년 3층의 부모은중경탑을 세웠고, 1985년 불음각(佛音閣), 1986년 중앙선원 건물을 지었다.

1987년 대웅보전을 중수하고, 1988년 호성각을, 1993년 천불전을 짓고 만수리실을 개축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1790년에 건립한 대웅보전(大雄寶殿)이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35호로 지정되어 있고, 지장전(地藏殿), 시방칠등각(十方七燈閣), 범종각, 법고각(法鼓閣),

봉향각(奉香閣)과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36호인 천보루(天保樓), 나유타료(那由他寮), 만수리실(曼殊利室), 삼문각(三門閣), 일주문, 수각(水閣), 동별당(東別堂) 등이 있다.

또 문화재로는 국보 제120호인 용주사 동종과 보물 제1754호인 불설대보부모은중경판(佛說大報父母恩重經版),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호인 금동향로,

제12호인 청동향로, 제13호인 용주사 상량문, 제14호인 전적수사본(典籍手寫本), 제15호인 용주사 병풍, 제16호인 용주사 대웅전후불탱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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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문화재자료 제36호(1983년9월19일) 용주사 천보루(天保樓)

1790년(정조 14년) 세워진 천보루는 대웅보전 안마당으로 들어가는 문루이다.

궁궐의 누각처럼 웅장한 천보루의 양옆에는 행랑채 같은 요사채가 길게 늘어서 있다.

모두 정면 5칸, 측면 3칸이며 전면으로 1칸만큼 돌출시키고 나머지 2칸을 양옆의 요사채와 바로 연결시켰으며, 뒤쪽 좌우에 누의 마루로 오르는 계단을 두었다.

전면 1열 양옆에는 사각형의 장초석(長礎石)을 세우고 그 위에 짧은 기둥을 놓아 마루귀틀을 받도록 되어 있다.

나머지 부분은 요사채의 기단 위에 바로 초석을 놓고 누하주(樓下柱)를 세웠다.

따라서 전면에서는 양옆의 요사채 기단과 천보루의 누 하부가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입면에서도 대웅보전으로 통하는 문루로서의 기능을 확실하게 나타내었다.

또한 대웅보전에서 보면 천보루가 단층 건물로 보이도록 하여 양옆의 요사채와 함께 마당의 윤곽을 단정하게 정리하였다.

전후로 길게 귀틀(마루를 놓을 때 먼저 굵은 나무로 가로나 세로로 짜 놓은 틀)을 건너질러 누 마루를 만들고, 누 하부의 내부 기둥은 생략하였다.

누 마루 전면과 양옆 돌출 부분에만 난간을 돌려서 만들었으며, 대웅전 쪽에는 마루를 내지 않고 바로 머름 위에 창호를 구성하였다.

공포는 연봉이 조각된 이익공계로 되어 있고 초각 문양은 대웅보전과 같으며,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12호(2008년3월10일) 용주사 오층석탑

화강암으로 조성된 전체 높이는 4.5m이며, 원래 다른 장소에 있던 것을 용주사 지장전 뒤쪽에 옮겨놓았다가 현재 위치로 옮긴 것이라 전해진다.

용주사 천왕문을 지나 왼쪽에 들어서 있는 효행박물관의 전면 왼쪽에 세워 놓았다.

이중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세우고 상륜을 얹은 모습이며, 기단은 각면 마다 2매씩 바닥돌을 놓고 그 위에 쌓았다.

1층 기단 각 면에는 여의두문(如意頭紋) 형태의 안상(眼象)이 3개씩 조각되고, 2층 기단은 효행박물관 출입로 방향 한쪽 면석에만 위패 형태조각을 새겨 놓았다.

탑신부는 탑신석과 옥개석을 각각 한 개의 돌로 구성하였으며 탑신마다 우주를 새겨놓았다.

1층 탑신 중 두면에는 자물쇠 모양이 양각된 문비(門扉)를 새겨 놓았으며, 5층 탑신은 나중에 복원한 것으로 보인다.

옥개석 중 1∼3층의 옥개받침은 4단, 4층의 옥개받침은 3단으로 조성하였으나, 5층의 옥개받침은 목조건축의 서까래와 귀포의 결구를 양각해 놓은 모습이다.

옥개석은 경사가 완만하며 네 귀퉁이는 선이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고, 풍경을 달았던 구멍이 남아 있다.

상륜부는 5층 옥개석과 한 돌로 구성하였는데, 둥근 평면의 노반 위에 복발과 보주를 아래서부터 차례로 하나의 돌에 새겨놓은 모습이다.

5층 옥개석의 탑신석과 옥개석의 양식과 치석 수법, 위로 갈수록 줄어듦이 적은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화성 용주사 대웅보전(大雄寶殿)

경기도문화재자료 제35호(1983년9월19일)로 지정되었다가 보물 제1942호(2017년8월14일)로 등재되었다.

용주사의 가람배치는 사천왕문을 지나면 홍살문과 삼문이 나오는데 마치 행궁처럼 이례적인 배치를 보여준다.

삼문을 지나 오층석탑이 배치되어 있고 누대(樓臺)인 천보루를 통과해야만 대웅보전에 다가갈 수 있다.

지형 차이를 이용하여 장대석(長臺石) 축대를 쌓고 그 위에 대웅보전을 놓았는데, 이는 대웅보전을 돋보이도록 하게 위해서이다.

기단은 장대석을 사용하였는데 지형 차이를 고려하여 전면에는 두벌대, 후면에는 외벌대로 구성하고 처마의 네 귀에는 활주를 세웠다.

장헌세자 현륭원의 재궁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궁궐에서 쓰는 건축기법을 많이 이용한 듯하다.

대웅전은 전라도 장흥 천관사(天冠寺)의 스님인 도편수 문언(文彦)이 지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인 다포계 팔작지붕으로 안4출목, 밖3출목의 공포를 짜 올렸는데 공간포는 정면은 매 칸마다 2개씩, 측면은 어칸에 2개, 좌우 협칸에 1개씩을 배열하였다.

공포는 외3출목, 내4출목으로 구성되고 전면 어칸 좌우 기둥에는 용머리를 두었으며, 내부에는 각종 장엄물을 베풀어 내·외부가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외부 살미첨차는 연봉을 초각한 앙서형과 수서 및 봉두로 구성되어 있고, 내부 살미첨차는 모란당초와 연화당초를 초각한 형태로 18세기의 전형적 양식을 보여준다.

이밖에 정면 어칸 기둥 외부의 용두와 내부의 축약된 용신, 4귀에서 추녀를 받치고 있는 용두 및 대들보에 걸친 충량머리의 용두 등은 빼어난 목조각이다.

출입문의 정면 3칸에는 모두 4짝소슬빗살분합문, 좌우 측면에는 앞퇴칸에만 외짝띠살문, 뒷면에는 어칸에만 외짝띠살문을 각각 달았다.

나머지는 모두 가운데 중방을 가로지른 토벽으로 처리하였다.

벽의 안쪽에 기대어 ‘ㄱ’자형으로 불당을 조성하고 삼장탱, 신중탱, 관음탱, 감로왕탱(현재 분실) 등 여러 불화를 봉안한 후 천개를 걸었다.

내부에는 측면 평주열보다 약간 뒤로 물려 고주 2개를 세우고 여기에 후불탱화로 삼세불화(석가, 약사, 아미타불)를 그려 걸었다.

그 앞에 1칸 규모의 불단을 조성하고 삼세불좌상(아미타–석가–약사, 1790년작)을 봉안하였다.

불상 위쪽에는 중아자형 천개를 천정에 걸었는데 천개 내부의 천정에 있는 운룡 조각, 주위의 화염보주, 비천, 극락조 등은 뛰어난 조각이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25호(2009년6월24일) 용주사 삼장보살도..

대웅보전 오른쪽 벽면을 장식하고 있으며, 지장탱(地藏幀)이 발전하면서 더욱 확대된 것으로 삼장은 천장(天藏), 지장, 지지(持地) 등 세 보살을 가리킨다.

세 보살의 법회를 하나의 화폭에 도설한 것으로 1790년(정조 14년) 용주사 창건 당시에 감로탱과 함께 제작되었으며 크기는 가로 318cm, 세로 173cm이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14호(2009년3월10일) 대웅보전 목조삼세불좌상

대표적인 조각승이 모여 제작한 불상들로 정조13년(1790년) 대웅보전 건립 시에 계초(戒初)가 석가불을, 봉현(奉絃)이 아미타불을, 상식(尙植, 또는 상계)이 약사불을 제작하였다.

높이 106.5㎝의 중형 불상으로 석가불을 중심으로 아미타와 약사를 배치하였다.

불상은 전형적인 조선 후기 불상 양식을 따르고 있지만 각각 조각승이 달라 얼굴의 인상이나 신체 비례 등이 다르다.

석가불은 오른손을 촉지인(觸地印)하고, 왼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은 채 손바닥을 펴고 엄지와 중지를 맞댄 수인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아미타불은 오른손 손바닥을 밑으로 엄지와 중지를, 왼손은 반대로 손바닥을 위로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약사불은 오른손에 뚜껑이 덮인 작은 약합을 들고있다.

불상은 상체를 앞으로 약간 내밀고 머리를 숙여 구부정하며, 머리의 나발(螺髮)은 촘촘하지만, 육계(肉髻)의 표현이 명확하지 않다.

머리 정상부에 원통형의 정상 계주(頂上髻珠)와 이마 위에 반원형의 중앙 계주(中央髻珠)는 불상마다 크기와 형태가 약간 다르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6호(1972년5월4일)로 지정된 용주사 대웅보전 후불탱화

대웅보전 삼존불상 뒤에 있는 이 불화는 용주사 창건 당시에 그려진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약사불의 삼존불화로 가로 350cm, 세로 440cm이다.

불화 안에는 제작 내역을 전해주는 화기가 없지만 용주사에 전해 내려오는 ‘본사제반서화조작등제인방함(本寺諸般書畵造作等諸人芳啣)’에는 김홍도가 그렸다고 전한다.

그런데 최근 대웅보전 닫집에서 발견된 원문에는 민관(旻寬) 등 25인이 그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림의 상단 양옆 가장자리에는 비사문천황과 광목천왕이 불법을 수호하고 있고, 중앙의 석가모니불 두광 양옆에는 화불이 보이며,

곳곳에 여러 제자상과 천녀상이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다.

각 존상(尊像)들의 얼굴은 모두 중앙의 삼존불을 향하여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어 원형 구도를 이룬다.

채색은 삼존불의 법의(法衣)와 석가의 광배에 붉은색을 칠하고 대좌는 청연화로 표현해 청홍(靑紅)의 대비를 보인다.

인물들의 얼굴과 드러난 신체 부분에는 갈색빛이 감도는 연주황색을 사용하였다.

코를 비롯한 앞으로 나온 부분은 흰색으로 처리하였고, 두광에는 어두운 녹색을, 기타 부분에는 간간이 검은색과 흰색을 섞어 사용하였다.

필선(筆線)은 비교적 딱딱한 편이나, 모든 존상의 얼굴과 손에 서양화의 음영법을 사용하였다.

국보 제120호(1964년3월30일) 용주사 동종(銅鐘)

고려 전기의 동종으로서는 드물게 보는 거종이며 신라 동종의 양식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동종의 정상에는 용뉴(龍鈕)와 용통(甬筒)을 갖추었고, 특히 용통은 세잔한 연주문으로 돌려서 6단으로 구분하고 당초문(唐草文)과 연판(蓮瓣)으로 장식하였다.

연판은 원형, 반원형, 타원형 등 여러 형태로 종정(鐘頂)의 천판(天板)에는 문양이 없으며 상대와 하대의 문양은 서로 다른 형태의 문양대로 장식하였다.

다만 동일한 것은 상대·하대 유곽(乳廓)·당좌(撞座) 등의 내외 둘레만 세잔한 연주문대로 하였고 그 내부에 화려한 문양대로 장식한 것이 하나의 특징이다.

상대 문양은 반원권 문양을 상하 엇갈려서 장식하고 그 사이사이에 당초문으로 장식하였으며, 하대 문양은 상대와 달리 연속되는 당초문으로 장식하였다.

특히, 하대의 당초문에 있어서 당초가 한번 선곡(旋曲)하는 중앙에 8판 혹은 9판의 연화문을 독립시켜 배치한 것이 이색적이다.

유곽 역시 연주문대 내에 당초문으로 장식하였고, 유두(乳頭)는 원형의 연판좌 위에 돌기된 9개의 유두를 가지고 있다.

4개소의 유곽 밑으로 원형 당좌를 배치하고 있는데 연화를 주문양으로 하고 그 둘레에 연주문대를, 다시 당초문으로 돌린 다음 또다시 연주문대로 조식하였다.

종신(鐘身)에는 천의를 날리며 승천하는 비천상(飛天像)과 결가부좌(結跏趺坐)한 채 두광을 갖추고 합장하여 승천하는 3존상을 교대로 배치한 특수한 양식이다.

원래 이 동종은 무명종(無銘鐘)이었으나, 후각한 명문이 있어 이에 따라 854년(문성왕 16)에 주조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이는 동종의 형태와 일치하지 않는다.

종신의 1개소에는 32자의 명문이 각명(刻銘)되어 있고, 또 1개소에는 55자의 명문이 각명되어 있다.

또한 이 동종은 신라 동종의 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고려 전기의 종으로, 반원권 문양을 상대에 장식하고 있는 점은 주목된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23호(2009년5월21일) 로 용주사 지장전 목조지장보살좌상과 시왕상

원래 용주사 말사인 동탄면 중리 만의사(萬儀寺) 지장전에 봉안되어 있었던 것이지만, 1894년(고종 31년) 지장전이 무너져 내리자 용주사로 옮겨온 것이다.

만의사는 원래 동탄면 신리에 있었으나 이 터가 1669년(현종 10년)에 송시열(宋時烈)의 장지로 정해지자 현재의 자리로 옮겨오면서 이름도 만의사(萬義寺)에서 만의사(萬儀寺)로 바꾸었다.

조성 시기는 두 시기로 추정하는데 하나는 원 봉안처인 만의사를 현재의 위치로 이건한 1669년(현종 10년) 때이고, 다른 하나는 1791년(정조 15년) 때이다.

현재 만의사 대웅전에 걸려있는 지장시왕도가 원래 지장보살상 등과 함께 지장전에 걸려있었다가 용주사로 옮길 때 이 불화는 옮겨지지 않았는데

이 조각상들이 함께 조성된 것이라면 지장시왕도가 그려진 1791년(정조 15년) 무렵일 것이다.

조각상의 중심을 이루는 지장보살상은 높이 101.8㎝로 장엄을 하지 않은 승려형에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의 수인을 결하고 오른손에 석장을 들었다.

상체를 다소 움츠려 굽어보는 듯한 자세, 동글동글한 신체표현, 간략하지만 굵직한 옷자락 등은 크지 않은 상이지만 멀리서도 분명히 형체를 인식할 수 있는 조선 후기 조각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시왕상은 좌상임에도 높이 170㎝ 내외에 이르는 대형이며 제1부터 제10까지의 왕을 좌우 번갈아가며 안치했다.

초강·오관·도시대왕처럼 원류관에 홀을 쥔 자세를 기본으로 하여 관모, 자세, 지물 등에서 변화를 주어 시왕의 개성을 드러냈다.

이외에 귀왕과 판관, 금강역사, 사자, 동자상 등도 모두 격식에 맞춰 날씬하고 장쾌한 비례로 만들어졌다.

이들 중 다양한 지물을 든 목동자상 10구는 용주사 효행박물관 전시실과 수장고에 나뉘어 소장되어 있다.

전반적인 양식적 특징으로 보아 17세기 이전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