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천항과 천수만의 조망, 보령 충청수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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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따라 트레킹/역사, 문화, 그리고 여행

오천항과 천수만의 조망, 보령 충청수영성..

by 정산 돌구름 2021. 3. 2.

오천항과 천수만의 조망, 보령 충청수영성..


2021년 2월 26일, 오천항과 천수만의 조망이 아름다운 보령 충청 수영성에서..

오천항의 풍경이 하눈에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곳이며,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촬영장소로 소문이 나면서 더욱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또한, 서해랑길 62코스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사적 제501호로 지정된 충청수영성(忠淸水營城)은 충남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석성이다.

조선 중종 4년(1509년) 수군절도사 이장생(李長生)이 서해를 통해 침입해 들어오는 외적을 막고 물리치기 위해 쌓았으며 소종 33년(1896년) 폐영되었다고 한다.

충청수영의 외곽을 두른 1,650m의 장대한 성(城)으로 자라(鱉)모형의 지형을 이용 높은 곳에 치성(稚城) 또는 곡성을 두어 바다와 섬의 동정을 살폈고 해안방어의 요충지였다.

사방에 4대 성문과 소서문(少西門)을 두었고, 동헌을 비롯한 관아건물 영보정(永保亭), 관덕정(觀德亭), 대섭루(待燮樓), 능허각(凌虛閣), 고소대(姑蘇臺) 등이 있었으나 허물어졌고, 서문 망화문(望華門)과 건물로는 진휼청(賑恤廳), 장교청(將校廳), 공해관(控海館)이 보존되고 있다.

망화문은 화강석을 다듬어 아치형으로 건립하여 발전된 석조예술을 볼 수 있다.

오천항(鰲川港)은 백제때부터 중국, 일본과 교역하던 항구로서 회이포(回伊浦)라 불렸고, 고려 때는 왜구를 물리치기 위하여 많은 군선(軍船)을 두었으며,

세조 12년(1466년) 수영(水營)을 설치, 충청수군 최고사령부로 서해안을 방어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 기록에 따르면 조선 초기 충청수영과 그 산하에 배속된 군선과 병력이 군선(軍船) 142척에 수군 수(水軍數)가 총 8,414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충청도 서해안 지역에 위치하여 한양으로 가는 조운선(漕運船)을 보호하고 왜구침탈을 방지했고, 근대에는 이양선을 감시하는 등의 역할을 했다.

선조 29년(1596년), 충청수사 최호가 충청수영의 본영과 속진의 수군을 이끌고 남해 한산도에 머물며 수군통제사 원균의 지휘를 받다가 이듬해인 선조 30년(1597년) 7월 1일 일본군에 패하여 통제사 원균과 함께 전사했다.

또한, 충청수영성은 천수만 입구와 어우러지는 경관이 수려하여 조선시대 시인 묵객들의 발걸음이 잦았던 지역으로 성내의 영보정이 유명했고,

서문 밖 갈마진두(渴馬津頭)는 충청수영의 군율 집행터로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천주교 신부 다섯 명이 순교한 곳이다.

1973년12월24일 충남 기념물 제9호 보령 오천성으로 지정되었다가 2009년8월24일 사적 제501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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