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 윤선도의 흔적, 보길도 낙서재(樂書齋)와 곡수당(曲水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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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 윤선도의 흔적, 보길도 낙서재(樂書齋)와 곡수당(曲水堂)..

by 정산 돌구름 2021. 1. 29.

고산 윤선도의 흔적, 보길도 낙서재(樂書齋)와 곡수당(曲水堂)..


2021년 1월 26일, 윤선도의 유적이 있는 완도 보길도 낙서재와 곡수당을 찾았다.

동백꽃과 어우러진 풍경이 아름답다.

낙서재(樂書齋)는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가 보길도에 은거하면서 머물렀던 집으로 1671년 이곳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당시 집은 초가로 추정되지만 현재는 복원되어 팔작지붕 기와로 지어져 있다. 남해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자형 구조의 집에 사방으로 툇마루를 내어 주변환경을 쉽게 바라볼 수 있도록 지어졌다.

마주보는 언덕에는 윤선도의 책을 읽거나 휴식을 취하며 사색하는 공간으로 쓰였다는 동천석실이 있다. 2011년에는 『고산유고(孤山遺稿)』와 『보길도지(甫吉島識)』에 나오는 윤선도가 달(月)을 감상하는 장소로 사용한 귀암(龜巖)으로 추정되는 돌이 낙서재 앞마당에 있다.

소은병은 낙서재터의 뒤에 있는 2.5m 높이의 병풍바위이다. 소은(小隱)은 세속을 싫어하여 은둔해 있다는 뜻이며 은병청풍(隱屛淸風)이라는 부용동팔경이 있다. 또 낙서재 앞뜰에 있었다는 바위가 귀암이다. 2.8m의 거북바위라고도 한다. 고산은 4령(봉황 기린 용 거북)이라고 하고 저녁이면 귀암에 앉아 보름달을 즐겼다고 한다.

조선 중기의 문신·시인이었던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는 치열한 당쟁으로 일생을 거의 벽지의 유배지에서 보냈으나 경사에 해박하고 의약·복서·음양·지리에도 통하였으며, 특히 시조에 뛰어나 정철의 가사와 더불어 조선시가에서 쌍벽을 이루고 있다.

1587년 태어났으며,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 해옹(海翁)이며,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1612년(광해군 4년) 진사가 되고, 1616년 성균관 유생으로 권신(權臣) 이이첨(李爾瞻) 등의 횡포를 상소했다가 함경도 경원(慶源)과 경상도 기장(機張)에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풀려나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낙향, 여러 관직에 임명된 것을 모두 사퇴했다.

1628년 42세 때 별시문과(別試文科) 초시(初試)에 장원,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어 봉림대군(鳳林大君:孝宗)을 보도(輔導)했다. 1629년 형조정랑(刑曹正郞) 등을 거쳐 1632년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을 지내고 1633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문학(文學)에 올랐으나 모함을 받고 파직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의병을 이끌고 강화도로 갔으나 청나라와 화의를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제주도로 항해하다 풍랑을 만나 보길도에서 은거하였다. 하지만 병자호란 당시 왕을 호종하지 않았다 하여 1638년 영덕(盈德)에 유배되었다가 1년 뒤에 풀려나 해남으로 돌아갔다.

1652년(효종 3년) 왕명으로 복직하여 동부승지(同副承旨) 때 남인(南人) 정개청(鄭介淸)의 서원(書院) 철폐를 놓고 서인 송시열(宋時烈) 등과 논쟁, 탄핵을 받고 삭직당했다. 1657년 중추부첨지사(中樞府僉知事)에 복직되었다.

1659년 남인의 거두로서 효종의 장지문제와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를 가지고 송시열이 영수로 있는 서인의 세력을 꺾으려다가 실패하여 1660년 삼수(三水)에 유배당하였다.

치열한 당쟁으로 일생을 거의 벽지의 유배지에서 보냈으나 경사(經史)에 해박하고 의약·복서(卜筮)·음양·지리에도 통하였으며, 특히 시조(時調)에 더욱 뛰어났다. 그의 작품은 한국어에 새로운 뜻을 창조하였으며 시조는 정철(鄭澈)의 가사(歌辭)와 더불어 조선시가에서 쌍벽을 이루고 있다.

사후인 1675년(숙종 1년) 남인의 집권으로 신원(伸寃)되어 이조판서가 추증되었다. 저서에 『고산유고(孤山遺稿)』가 있다.

곡수당(曲水堂)은 윤선도의 아들 학관이 거주하며 휴식을 취할 목적으로 조성한 공간이다. 낙서재 골짜기에서 흐른 물줄기가 이곳 인근에 이르러서 곡수를 이루고 있다. 1칸 짜리 집으로 사방에 퇴를 달고 반자를 두었다. 남쪽 난간에는 취적헌(取適軒), 서쪽은 익청헌(益淸軒)이라는 편액을 학관의 글씨로 새겼다. 주변에 일삼교(日三橋)와 유의교(有意橋)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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