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기행] 2020 한국관광의 별, 익산 미륵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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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기행] 2020 한국관광의 별, 익산 미륵사지..

by 정산 돌구름 2020. 12. 28.

[익산기행] 2020 한국관광의 별, 익산 미륵사지..


2020년 12월 26일, 이른 아침 찾은 익산 미륵사지..

백제 무왕 때 지어진 미륵사는 백제의 가장 큰 사찰이었다.

국보 제11호인 미륵사지 석탑은은 현재 남아있는 국내 최대의 석탑이며, 가장 오래된 석탑이기도 하다.

차가운 날씨와 코로나19로 찾는 사람들은 별로 없지만 고고한 자태로 서있는 풍경이 주위의 황금빛 잔디와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경이다.

사적 제150호로 지정된 익산 미륵사지(益山彌勒寺址)는 마한(馬韓)의 옛 도읍지로 추정되기도 하는 금마면 용화산(龍華山) 남쪽 기슭에 자리 잡은 한국 최대의 사찰지이다.

백제 무왕 2년(601년)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며 무왕(武王)과 선화공주(善花公主)의 설화로 유명한 사찰이다.

국보 제11호인 동양 최대 석탑인 미륵사지 서석탑과 보물 제236호인 미륵사지 당간지주가 있으며, 1974년 8월 원광대학교에서 실시한 발굴조사 때 동탑지(東塔址)도 발견되었다. 건물지(建物址)는 백제와 고구려의 유구(遺構)가 복합되어 있다.

용화산의 남쪽 자락에 동서로 172m, 남북으로 148m에 이르는 절터에는 서석탑, 1993년에 복원된 동석탑, 당간지주 두 기, 목탑터, 금당터 세 곳, 회랑과 강당과 승방의 자취, 그리고 남문과 중문의 흔적이 남아 있다. 또 석등 지붕돌, 연꽃잎이 새겨진 석등 받침, 그리고 원래의 용도를 잘 알 수 없는 여러 가지 석물 부재들이 둥글거나 모나거나 어렴풋한 자국을 간직한 채 흩어져 있다.

미륵사는 백제 무왕(600∼641년) 때 창건되었으며 고려 때까지도 성황을 이루었으나 조선 중기 이후 폐찰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정조 때 무장의 선비인 강후진이 쓴 『와유록』(臥遊錄)을 보면 “미륵사에 오니 농부들이 탑 위로 올라가 낮잠을 자고 있었으며 탑이 100여 년 전에 부서졌다고 하더라.”는 내용이 있다. 이때는 이미 절이 폐허로 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후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이곳에는 논밭과 민가가 들어서 있었다.

1980년부터 문화재연구소에서 전반적인 발굴조사를 계속하고 있는데, 절터 앞쪽에는 발굴하면서 나온 백제 때부터 고려 시대에 걸친 각종 기와 조각들이 돌담처럼 무더기로 쌓여 있다.

『삼국유사』 무왕조의 미륵사 창건 부분을 보면 이런 내용이 있다. 무왕이 아내인 선화공주와 함께 사자사로 가던 길에 용화산 아래 큰 못가에 이르렀을 때 물 속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났다고 한다. 두 사람은 길을 멈추고 예를 올렸고, 이곳에 절을 세우자는 선화공주의 간청에 따라 무왕은 사자사 스님 지명법사의 신통력을 빌어 하룻밤 만에 산을 헐어 못을 메우고 그 위에 절을 지었다. 이때 미륵삼존을 본받아 금당과 탑과 회랑을 각각 세 곳에 세우고 미륵사라 불렀으며, 선화공주의 아버지인 신라 진평왕은 기술자를 보내 그 공사를 도왔다고 한다.

미륵사지 서석탑은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석탑 가운데 가장 크고 가장 오래된 탑이다. 원래 미륵사에는 목탑을 가운데 두고 동서로 두 기의 석탑이 있었으니 구별해서 말하자면 미륵사지 서석탑이라 불러야 하겠지만 관습상 미륵사지 석탑이라 불린다.

국보 제11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탑은 지금은 한쪽이 떨어져나간 6층으로 남아 있다. 그나마 일제강점기(1915)에 이루어진 붕괴방지 보수공사로 서남쪽에 시멘트가 무지막지하게 덧발려, 보기가 안타까울 뿐더러 더 이상 어떻게 손을 댈 수도 없는 형편이 되어버렸다. 원래 7층이었는지 9층이었는지를 둘러싸고 여러 가지 논란이 있었으나, 80년대에 발견된 노반석의 크기와 남아 있는 탑신의 비례 관계로 미루어 보아 9층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서석탑의 상태를 복원한 동석탑이 목탑자리 건너 원래의 자리에 복원되어 있다.

탑이 앉은 자리는 한 변의 길이가 10m 되는 정사각형이고 높이는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14.25m에 이르는데, 원래의 크기를 추정하면 상륜부까지 합쳐서 26m 가량 되는 거대한 규모였다고 한다. 연못을 메우고 돌과 자갈과 흙을 다져, 천 년이 넘도록 이만한 규모와 이만한 무게의 탑이 서 있을 수 있도록 조성해낸 백제 사람들의 토목 기술이 요즘의 기술 수준에 비춰보더라도 참으로 놀랍다. 더구나 이 탑은 부재를 하나하나 따로 만들어 맞춰 세운 것으로, 바닥의 어느 부분이 조금이라도 어그러지면 곧 균형을 잃고 무너지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당간지주는 절 문 앞에 한 기가 있지만 삼원일가람 형식의 미륵사지에는 동서 두 석탑에서 남쪽으로 각각 64m 되는 곳에 한 기씩, 두 기가 있다. 두 당간지주는 높이가 모두 3.95m이고 양식과 구성 수법도 같다. 보물 제236호로 지정되어 있다. 장대석을 맞추어 만든 기단의 네 면에는 안상이 새겨져 있다. 지주의 양쪽 바깥면에는 둘레를 따라 테두리선을 도드라지게 하였고 가운데에도 한 줄의 선을 돋을새김하였다. 지주 꼭대기 부분은 바깥쪽 각이 둥그스름하게 깎여 마무리되어 있기 때문에, 아래에서 보면 지주의 윗부분이 좁고 아래가 넓은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폭의 차이가 별로 없다. 대체로 필요한 최소한의 장식만을 하여 번잡하지 않은 단정한 아름다움을 보이고 있는데, 양식 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중기 이후의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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