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기행] 남해의 3대 사찰, 망운산 화방사(花芳寺)..
본문 바로가기
길따라 트레킹/역사, 문화, 그리고 여행

[남해기행] 남해의 3대 사찰, 망운산 화방사(花芳寺)..

by 정산 돌구름 2021. 3. 21.

남해의 3대 사찰, 망운산 화방사(花芳寺)..


2021년 3월 16일, 남해 망운산 등산길에 찾은 화방사..

망운산 화방사(花芳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雙磎寺)의 말사이다.

신라 신문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하고 연죽사(煙竹寺)라 하였던 것을 고려 중기에 진각국사(眞覺國師)가 현재의 위치 가까이로 옮겨서 중창하고 영장사(靈藏寺)라고 하였다.

임진왜란 때 왜병에 의하여 불타버렸고, 인조 14년(1636년) 계원(戒元)과 영철(靈哲)이 현재의 위치로 옮겨 중창하고 화방사라 하였다.

그 뒤 영조와 정조 때의 고승인 가직(嘉直)이 머물면서 갖가지 이적(異蹟)을 남겼고, 절을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大雄殿)을 비롯하여 경남도 문화재자료 제152호로 지정된 채진루(採眞樓)와 승당(僧堂)·산신각·요사채 등이 있다.

1636년 중수한 보광전은 1981년10월1일에 화재로 소실되자 1984년12월29일에 신축 복원하고 대웅전이라고 하였다.

유물로는 옥종자(玉宗子)와 금고(金鼓), 그리고 2,000자로 된 이충무공비문목판(李忠武公碑文木版) 등이 있다.

옥종자는 사찰이 건립되어 불상을 봉안할 때 불을 밝히는 옥돌로 만든 등잔이다.

한 번 불을 붙이면 깨뜨려서는 안 되고,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불이 꺼지면 다시 불을 붙여서는 안된다.

이 옥종자는 고려 고종 21년(1234년) 이전에 만들어져 불이 점화된 뒤 임진왜란 때 꺼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현재 사용하지 않고 있다.

지름 24cm, 높이 12cm, 두께 2cm, 무게 3.9kg, 용량은 3ℓ이다.

또, 금고는 조선 중기의 작품으로 지름 70cm, 너비 10cm, 두께 1cm이며, 표면 사방에 범자(梵字)를 양각하였다.

화방사는 호구산 용문사, 금산 보리암과 함께 남해군의 3대사찰 중 하나이며, 절 주위에는 천연기념물 제152호로 지정된 산닥나무가 자생하고 있다.

진각국사는 멀리 신령스러운 기운이 바다에 감추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바로 떼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서 산을 바라보니 호산(湖山)의 좋은 형상인 망운산이 나타났다.

그는 말했다. "영구(靈區)가 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냐?" 그 뒤 절 이름을 영장이라 하고 승도를 거처하도록 했다.

영장사는 임진왜란 때 불 타 소실되었는데 인조 14년(1636년), 서산대사의 제자인 계원(戒元)과 영철(靈哲) 두 선사가 지금 위치에 이건 중수하고 '연화형국'의 뜻을 취해 화방사라고 했다.

화방사 역시 103년이 지난 1740년에 화재를 입었다.

사방이 일시에 재가 되고 승도들이 흩어졌으나 다음해인 영조17년(1741년)에 석순, 충찰, 충념 등이 동지들을 모아 재건했다.

화방사 채진루(採眞樓)는 경남도문화재자료 제152호(1985년11월14일)로 지정되었다.

신라 문무왕 때 원효가 금산에 보광사를 세우고 망운산 남쪽에 연죽사를 세운 뒤에 진각국사가 현 위치에 보광전을 옮김에 따라 계원대사가 1638년에 지금의 채진루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채진루는 정면 5칸, 측면 2칸, 5량(樑) 구조로 되어 있는 팔작지붕 맞배집이다. 세부장식은 조선 말기의 수법으로 익공계(翼工系)의 특징을 나타낸다.

채진루는 사찰 경역 왼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경역 오른쪽으로는 설선당, 종무소, 요사채, 선방 등이 있다.

채진루를 들어서면 왼쪽에 명부전, 나한전이 있고 오른쪽에 칠성각, 봉향각이 있으며 정면에 단층 팔작지붕 목조와가로 정면 3칸, 측면 3칸, 외3출목 다포집인 보광전이 있다.

화방사 지장시왕탱(地藏十王幀)은 철종 6년(1855년)에 전남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화승 천여(天如)가 수화승이 되어 제자들과 함께 조성한 지장보살도 및 시왕도이다.

지장보살도는 화면 중앙의 높은 수미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양협시인 도명존자와 무독귀왕, 4구의 보살, 사천왕 등이 묘사된 간단한 구도를 취하고 있다.

지장보살은 녹색 두광과 신광을 배경으로 오른손에 가늘고 긴 석장을 들고 왼손에 투명보주를 들고 결가부좌한 둥근 얼굴에 건장한 신체와 안정된 자세 등 균형잡힌 모습이다.

목에는 화려한 목걸이를 착용하였으며 양어깨에 걸쳐 붉은 법의를 입고 그 위에 가사를 걸쳤는데, 왼쪽 어깨부근에는 가사를 묶은 금구장식이 보인다.

옷에는 잔잔한 화문이 시문되었으며 옷가장자리에는 화문으로 장식하여 화려한 느낌이 든다.

지장보살의 대좌 좌우에는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합장하고 본존을 향해 시립하였다.

두 협시는 투명한 두광에 다른 권속들보다 크기도 작게 표현되어 언뜻 눈에 띄지 않는다.

반면 지장보살의 신광 좌우로 각 2구씩 표현된 보살은 화려한 보관에 정병과 경책, 연꽃 등을 들고 녹색두광을 배경으로 지장보살과 거의 같은 크기로 묘사되어, 도명존자와 무독귀왕보다도 더 눈에 띈다.

이 보살들은 『예수시왕생칠경(預修十王生七經)』에 등장하는 육광보살〔용수보살(龍樹菩薩), 상비보살(常悲菩薩), 타라니보살(陀羅尼菩薩), 관음보살(觀音菩薩), 금강장보살(金剛藏菩薩), 지장보살(地藏菩薩)〕중 일부를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화면 가장자리에는 사천왕이 창과 칼, 보탑, 용과 여의주 등을 들고 시립하였다. 이들은 다른 불화에서와 달리 공작깃을 꽂은 투구를 쓰고 있는데 이러한 모습은 천여가 1856년(철종 7년)에 그린 기장 장안사 지장보살도에서도 볼 수 있어 천여의 특징적인 도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지장보살과 권속 들 사이로는 황색과 녹색의 채운을 가득 채워 장엄하였다.

시왕도(十王圖)는 10폭 가운데 제1진광대왕도, 제3송제대왕도, 제5염라대왕도, 제6변성대왕도, 제7태산대왕도, 제8평등대왕도, 제10오도전륜대왕도 등 7폭만 남아있다.

각 폭 모두 상단에는 시왕이 등 높은 의자에 앉아 판관과 사자, 동자, 옥졸 등 권속을 거느리고 망자를 심판하는 모습이 표현되었으며 채운으로 분리된 하단에는 지옥에서 망자가 벌을 받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제1진광대왕도에는 망자의 몸에 못을 박는 철정지옥(鐵釘地獄), 제3송제대왕도에는 망자의 혀를 빼내어 그 위에서 소가 쟁기질하는 발설지옥(拔舌地獄), 제5염라대왕도에는 절구에 망자를 넣고 찧는 대애지옥(碓磑地獄)과 업경(業鏡), 제6변성대왕도에는 칼산에서 고통받는 도산지옥(刀山地獄), 제7태산대왕도에는 망자를 기둥에 묶고 톱질하는 거해지옥(鋸解地獄), 제8평등지옥도에는 바위 틈에 망자를 놓고 누르는 협산지옥(夾山地獄), 그리고 제10오도전륜대왕도에는 불타는 지옥성과 심판을 마치고 육도윤회(六道輪廻)하는 장면 등이 묘사되었다.

시왕도의 이와 같은 같은 도상은 고성 옥천사 시왕도(1744년)를 기본으로 일부 장면을 생략하여 그린 것으로 18세기 시왕도의 전통을 잘 따르고 있다.

화방사 건륭삼십이년 동종(乾隆三十二年 銅鍾)은 1767년(영조 43년)에 제작되었고, 원래는 경상도 성주 쌍사(雙寺) 내원암(內院庵)에 봉안되었던 유물이다.

2010년 3월 11일에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94호로 지정되었다.

종의 몸체는 완만하게 곡선을 이루면서 종구가 좁아지는 형태로 만들었다. 종의 고리는 두 마리의 용으로 만들었고 천판(天板)은 둥글면서 높게 형성되었다.

몸체의 표면은 횡선을 둘러 공간을 구획하였고, 상단에는 원형범자문을 장식하였다. 중단에는 합장한 보살 입상 4구를 부조하였고, 보살상 사이에는 명문을 새겨 놓았다.

명문을 통해, 동종의 조성 연대, 봉안처, 주종장, 시주자, 재료 등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원래는 경상도 성주 쌍사 내원암에 봉안된 동종이며, 1767년(영조 43)에 주조되었다. 제작에 참여한 장인은 이만중으로 확인되는데, 조선 후기 대표적인 사장(私匠)이다.

초기에는 경상도를 중심으로 활약하다가 이후 충청도와 전라도까지 영역을 넓혔던 인물이다.

지금까지 확인된 자료로는 1767년(영조 43)부터 1788년(정조 12)까지 약 22년간 6점의 범종을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2점은 문헌 기록으로만 남아 있다.

화방사 동종은 현존 유물 가운에 가장 이른 시기에 해당하며, 이만중의 초기 작품 경향을 살펴볼 수 있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화방사 부도(浮屠)는 경남도 문화재자료 제507호(2010년10월7일)로 지정된 조선시대 승탑이다.

일주문을 지나 약 20~30m 올라오면 왼쪽 산사면에 위치해 있는 석조형 부도로 이끼가 전체적으로 덮혀 있으며, 앞쪽 기단면은 완전히 드러나 있다.

부도의 특징을 보면 기단, 탑신, 상륜부 3部로 구분되었으며, 탑신과 상륜은 일석이다.

기단은 치석하여 2段으로 만들고 탑신이 놓이는 기단 상면은 복엽연판으로 돌려 장식했다.

연봉형 상륜 아래로는 크고 대담한 7개의 연판으로 장식된 것처럼 보이는데, 문양을 자세히 보면 연잎을 서로 대칭으로 말아 연판 같은 효과를 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