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 5박6일 - 3. 밀양 만어사, 여여정사, 영남루, 창원 주남저수지, 화순 숲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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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따라 트레킹/캠핑카

경상도 5박6일 - 3. 밀양 만어사, 여여정사, 영남루, 창원 주남저수지, 화순 숲정이

by 정산 돌구름 2020. 11. 2.

경상도 5박6일 - 3. 밀양 만어사, 여여정사, 영남루, 창원 주남저수지, 화순 숲정이


경상도로 떠난 5박6일 캠핑여행..

○ 제1일(10월 27일) : 광주~광주-대구고속도로~경남 거창 우두산~경북 성주 가야산역사신화테마관~야생화식물원

○ 제2일(10월 28일) : 경북 성주 가야산주차장~가야산 산행~고령 지산동고분군~경남 창녕 우포늪

○ 제3일(10월 29일) : 우포늪~창녕 화왕산 산행~영산만년교~창녕 부곡온천~울산 울주 배내고개

○ 제4일(10월 30일) : 울주 배내고개~영남알프스(간월,신불,영축산)산행~밀양 표충사관광단지

○ 제5일(10월 31일) : 밀양 표충사관광단지~만어사~여여정사~영남루와 밀양관아~창원 주남저수지

○ 제6일(11월 1일) : 창원 주남저수지~남해고속도로~화순 연둔리 숲정이~광주

 

2020년 10월 31일, 밀양의 3대 신비 만추의 만어사를 가다..

만어사(萬魚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通度寺)의 말사이다.

전설에 의하면 만어사는 수로왕 5년(46년) 수로왕이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수로왕 때 가락국의 옥지(玉池)에서 살고 있던 독룡(毒龍)과 만어산에 살던 나찰녀(羅刹女)가 서로 사귀면서 뇌우(雷雨)와 우박을 내려 4년 동안 오곡이 결실을 맺지 못하게 하였다. 수로왕은 주술(呪術)로써 이 일을 금하려 하였으나 불가능하였으므로 예를 갖추고 인도 쪽을 향하여 부처를 청하였다. 부처가 신통으로 왕의 뜻을 알고 6비구와 1만의 천인(天人)들을 데리고 와서 독룡과 나찰녀의 항복을 받고 설법수계(說法授戒)하여 모든 재앙을 물리쳤다. 이를 기리기 위해서 수로왕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또하나의 전설은 옛날 동해 용왕의 아들이 수명이 다한 것을 알고 낙동강 건너에 있는 무척산(無隻山)의 신승(神僧)을 찾아가서 새로 살 곳을 마련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신승은 가다가 멈추는 곳이 인연터라고 일러주었다. 왕자가 길을 떠나니 수많은 종류의 고기떼가 그의 뒤를 따랐는데 머물러 쉰 곳이 이 절이었다. 그 뒤 용왕의 아들은 큰 미륵돌로 변하였고 수많은 고기들은 크고 작은 화석으로 굳어 버렸다고 한다.

현재 미륵전(彌勒殿) 안에는 높이 5m 정도의 뾰족한 자연석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용왕의 아들이 변해서 된 미륵바위라고 한다.

이 미륵바위에 소원을 빌면 아기를 낳지 못한 여인이 득남을 할 수 있다고 한다.

미륵전 아래에는 무수한 돌무덤이 첩첩이 깔려 있는데 이것은 고기들이 변해서 된 만어석(萬魚石)이라 하며, 두들기면 맑은 쇳소리가 나기 때문에 종석(鐘石)이라고도 한다.

창건 이후 신라시대에는 왕들이 불공을 올리는 장소로 이용되었고, 명종 10년(1180년) 중창하였으며, 중종 1년(1506년) 화일(化日)이 중건하였다. 이어서 1879년(고종 16년)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는 대웅전, 미륵전, 삼성각(三聖閣), 요사채, 객사 등이 있다.

2020년 10월 31일, 밀양 금오산 여여정사..

2005년 창건한 여여정사(如如精舍)는 밀양 금오산 자락 높은 곳에 자리한다.

거대한 2층 규모의 대웅전은 1층은 위패를 모신 극락전이 있고 2층은 법당이다.

굴법당인 약사전(藥師殿)은 이 절의 백미이다.

지하 2층 규모의 약사전은 거대한 약사불 외에도 옥돌로 된 작은 부처가 1,300불이나 모셔져 있다고 하며, 내부도 엄청난 규모를 자랑한다.

사찰 밖에는 달마대사를 비롯한 이색적인 석상들이 즐비하여 신비로움마져 든다.

여여정사 목조관음보살좌상은 원래 범어사에 보관되었다가 여여정사가 개창되면서 이곳으로 이안되었다.

외형은 균열이나 파손 없이 양호한 상태이며, 보관은 새로 제작하여 착용한 것이다. 상의 밑바닥에 마련된 복장공에는 황동의 후령통(候鈴筒)과 이를 싼 황초폭자(黃稍幅子), 복장 발원문, 주서 다라니, 경전 인쇄물이 안립되어 조사 후에 다시 복장되었다. 2009년 3월 5일에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77호로 지정되었다.

이 불상은 허리는 세우고 머리를 앞으로 숙인 자세에 엄지와 중지를 맞댄 양손은 다리 위로 살짝 들어 오른손은 손등을 위로 하고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한 아미타인을 하고 있다. 소형의 불상이지만 머리가 큰 조선 후기 불상의 일반적 특징을 잘 따르고 있으며, 어깨와 적당한 다리 폭의 신체비례가 안정감을 준다. 턱이 수평을 이루는 방형의 얼굴은 눈과 코가 작은 편으로 나지막하게 조각되었으며, 입가의 희미한 미소는 부드러운 인상을 준다.

2020년 10월 31일, 밀양여행 밀양관아지를 찾아가다..

밀양관아지를 보고 바로 옆 밀양아리랑시장에서 점심식사를 한다.

시장 내의 먹거리골목에 있는 백종원의 3대천왕 단골집에서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돼지국밥으로 점심식사를 한다.

밀양시 내일동에 있는 밀양관아지는 경남기념물 제270호(2009년7월16일)로 지정된 곳이다.

본래 있던 건물은 선조25년(1592년) 4월 임진왜란으로 모조리 불타버렸는데 왜란후 선조32년(1599년)에 당시 부사 이영(李英)이 영남루 경내에 우선 초옥(草屋)을 세워 집무를 하다가 광해군 3년(1611년)에 원유남(元裕男)부사가 부임하여 원래 자리에 관아를 재건하였다.
관아의 중심 건물인 동헌(東軒)은 부사가 행정을 처리하던 곳으로 「근민헌(近民軒)」이라 불렀고, 동헌의 부속건물이라 할 수 있는 서헌(西軒)과 별실 등이 있었지만 자세한 용도는 알 수 가 없다. 다만 『밀주징신록(密州徵信錄)』 등에는 내동헌(內東軒)과 외서헌(外西軒) 건물이 별도로 있고, 내동헌은 부사 부인이 거처하던 곳이라 적혀있는 점으로 비추어 볼때, 부사의 내실(內室, 北別室), 책방(冊房, 梅竹堂), 주방(廚房), 창고 등으로 활용이 되었던 것 같다.
1611년 중건후 300여년간 관청으로 사용되어 오던 관아는 조선후기에 동헌, 정청, 매죽당, 북별실 내삼문 이외에도 연훈당(延薰堂), 전월당(餞月堂), 신당(新堂) 등 부속 건물들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정확한 위치나 규모를 헤아리지 못하고 있다. 고종 32년(1895년)에 지방관제 개편에 따라 군청으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1927년도에 삼문동으로 밀양군청을 신축하여 옮겨 가게 되자 본래의 용도가 폐지되었고, 구밀양읍사무소, 구밀양시청, 구내일동사무소의 청사 등으로 이용되다가 2010년 4월 관아를 복원 하였다.

2020년 10월 31일, 밀양 관아지를 보고 인근의 영남제일루로 불리는 영남루에 오른다.

주말을 맞아 민속공연을 펼치고 많은 인파가 북적거려 주말의 활기가 가득하다.

영남루 인근에는 천진궁, 무봉사, 작곡가 박시춘선생 옛집, 유정 사명대사동상 등이 자리한다.

보물 제147호(1963년1월21일)로 지정된 영남루는 진주 촉석루, 평양 부벽루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누각으로 꼽힌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익공식(翼工式)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조선시대 밀양도호부의 객사 부속건물로 손님을 접대하거나 주변 경치를 보면서 휴식을 취하던 건물이다. 처음 지어진 것은 고려시대로 그뒤 여러 차례의 소실과 재건을 거듭하였다.

원래 그 자리에는 신라시대에 세워진 영남사(嶺南寺)라는 절이 있고 절의 종각으로 금벽루(金壁樓)라는 작은 누각이 있었는데 고려시대에 절은 없어지고 누각만 남아 있었던 것을 공민왕 14년(1365년) 누각을 새로 짓고 절의 이름을 따서 영남루(嶺南樓)라 하였다.

조선 세조 6년(1460년)에 중수하면서 규모를 크게 넓혔으며, 선조 때 소실되었던 것을 1637년(인조 15년) 다시 지었고 마지막으로 1844년(헌종 10년) 불에 탔던 것을 다시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넓은 강을 옆에 낀 절벽 위에 남향으로 있다. 세부적으로 조선시대 말기의 건축양식을 지니고 있는데, 출목(出目)을 갖춘 3익공식의 공포구성과 공포 주변에 새겨진 부재의 장식 수법에서 그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즉, 외부로 뻗은 쇠서(牛舌)에 연꽃 또는 연봉 장식이 첨가되고 판재화(板材化)된 3익공의 내부도 초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 밖에 고주(高柱) 위에도 복잡한 장식이 중첩되며 용머리를 장식한 충량(衝樑)이 올라와 있다.

전체적으로 부재도 크고 기둥 간격도 넓으며 중층(重層)으로 되어 우리 나라 건축 중에서는 크고 우람한 외관을 갖추고 있다. 더욱이, 건물 서편에 작은 부속건물이 딸려 있고 지붕이 여러 단으로 낮아지면서 연결되어 독특한 외관을 구성한다.

빼어난 경관과 건축미가 조화를 이룬 건물의 하나이다. 《동국여지승람》에 이 건물을 노래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여러 문인들의 시가 전해지고 있다.

고려시대 이후 시대를 대표하는 문인들의 글과 글씨가 누각 내부에 가득하다. 시원스런 기둥 사이로 걸려 있는 편액은 ‘영남제일루(嶺南第一樓)’로 당시 10세인 이증석의 글씨라 하니 어린 소년이 넘치는 힘으로 써내려간 모습이 대단하다.

영남루는 남아 있는 건물의 보존 상태로도 우리나라의 으뜸이다. 현재 영남루를 찾는 많은 사람들이 누각 마루에 앉아 밀양강의 시원한 경관을 감상할 수 있다. 영남루와 부속건물인 침류각은 월랑으로 연결되어 있다. 층을 구분하여 계단식으로 만들어진 월랑은 그 위에 지붕을 얹은 화려한 모습이다.

천진궁(天眞宮)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주심포 팔작지붕 목조와가로 1974년12월28일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17호로 지정되었다.

과거 객사건물의 일부로 지금은 단군 영정과 역대 여덟 왕조의 시조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매년 음력 3월15일 어천대제, 음력 10월3일 개천대제를 하고 있다.

영남루 경내에 있는 건물로 원래 이곳은 요선관이 있던 자리로 효종 3년(1652년)에 지었으며 공진관이라 부르기도 한다. 영조 15년(1739년)에 불탄 것을 영조 25년(1749년)에 다시 지었으며, 헌종 10년(1844년)에 크게 수리하였다. 1952년 단군봉안회가 생기면서 단군 및 삼국의 시조왕, 고려 태조의 위패를 모시면서 대덕전이라 하였으나 1957년에 천진궁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영남루는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에 포함된 가볼만한 곳이다.

밀양 영남루 옆에 자리한 무봉사를 찾아서..

봉황이 춤을 추던 성지, 무봉사(舞鳳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의 말사이다.

지금의 영남루 자리는 예전에 영남사(嶺南寺)라는 절이 있던 곳이고, 무봉사는 신라 혜공왕 9년(773년) 법조(法照)가 이 영남사의 부속 암자로 세운 사찰이다. 고려 공민왕 8년(1359년) 영남사가 불에 타 없어지자 무봉암을 무봉사로 승격시켰다고 한다. 이후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으로 불에 탄 것을 선조 38년(1605년) 혜징(慧澄)이 중창하면서 법당과 칠성각, 수월루를 새로 지었다. 인조 6년(1628년) 경의(敬儀)가 중창하였으며, 1899년(광무 3년) 경봉(慶蓬)이 중건하고, 1942년에 중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과 삼성각, 종루, 요사 등이 있고, 유물로는 대웅전에 있는 무봉사석조여래좌상이 유명하다.

보물 제493호(1969년6월24일)로 지정된 이 약사불(藥師佛)은 연화대좌 위에 올라 결가부좌(結跏趺坐)하고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다.

머리는 나발(螺髮)로 보발(寶髮)이 굵은 육계(肉?)를 갖추었고, 양미간에는 백호(白毫)가 있으나 최근 수정하여 새로 만들었으며, 목에도 삼도(三道)가 있다. 얼굴의 풍만함과 길게 늘어진 두 귀는 잘 조화되어 존엄한 상호를 보이고, 법의(法衣)는 통견의로서 그 옷무늬가 유려하고 가슴에 군의(裙衣)를 갖추었다. 전체적으로 손상이 없는 신라 말기의 우수한 불상으로 광배는 주형광배(舟形光背)로서 화불이 배치된 화염이중윤광(火焰二重輪光)이며, 하부에는 구름모양의 문양이 있다. 특히, 광배에는 5구의 화불이 장식되어 있고, 이 화불도 주형광배에 항마촉지인의 수인(手印)과 합장한 손모양을 하고 있다. 또, 광배 뒷면에도 앙련화(꽃부리가 위로 향한 연꽃)에 결가부좌한 여래상이 양각되어 있는 것이 특이하다.

2020년 10월 31일, 10월의 마지막 밤을 주남저수지에서 보낸다.

고요한 달밤, 철새들도 잠이 들었는지 10월의 마지막밤은 고요하기만 하다..

경남 창원시 의창구 동읍 일원에 있는 주남저수지(注南貯水池)는 산남, 주남(용산), 동판 3개의 저수지로 이루어져 있다. 배후습지성 호수로 멸종위기동물인 가창오리, 천연기념물인 재두루미, 부리저어새, 고니 등의 겨울 철새 도래지로 유명하다.

주남저수지는 1920년대 농업용수의 공급을 위해 만들어졌다. 낙동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수량의 조절기능까지 담당하는 저수지는 마치 호수처럼 느껴진다.

총면적은 6.02㎢이며 산남저수지(0.75㎢), 주남(용산)저수지(2.85㎢), 동판저수지(2.42㎢)로 이루어져 있다. 낙동강의 범람으로 생성된 배후습지성 호수로 흔히 주남저수지라고 하면 산남, 주남, 동판 세 저수지를 포괄하여 지칭하는 말이다. 남동쪽으로 금병산(271.8m), 남쪽으로 봉림산(566.7m), 남서쪽으로 구룡산(433.5m), 북서쪽으로 백월산(428m)에 둘러싸여 있으며, 주변 지역의 농업용수, 공업용수 공급과 홍수조절 기능을 하고 있다.

무엇보다 주남저수지를 유명하게 만드는 것은 겨울철 머나먼 시베리아의 추위를 피하여 이곳을 찾는 100여 종, 20만 마리에 이른다는 철새들이다.

저수지 중앙에 자생 갈대섬이 있고, 1년 내내 저수량이 일정하며, 기후가 따뜻해 겨울에도 수면이 결빙되지 않는다. 또한 개구리밥, 붕어마름 등 각종 먹이가 풍부하여 한국 최대의 철새도래지를 이룬다. 10월 중순에서 12월까지 시베리아, 중국 등지에서 재두루미(천연기념물 제203호), 부리저어새(천연기념물 제205호), 고니(천연기념물 제201호), 큰기러기, 쇠기러기, 청둥오리, 쇠오리, 고방오리, 흰죽지, 큰고니 등 20여 종의 철새들이 날아와 이듬해 3월말까지 월동한다. 그러나 1994년을 고비로 주변 지역의 재배작물 교체로 비닐하우스가 증가하면서 먹이 공급처가 줄어 철새들이 크게 줄고 있다.

특히 국제보존기구의 개체보존 종으로 유명한 가창오리가 매년 1~2만 마리 모여든다. 저수지의 푸른 자연을 배경으로 한 수생식물과 들꽃 등 식물들의 향연도 이곳을 더욱 아름답게 만든다. 강원 대왕산 용늪, 경남 창녕 우포늪, 전남 신안 장도습지, 전남 순천만갯벌, 제주 물항아리오름과 함께 국제 습지협약인 람사르조약으로 보존지구로 지정되었다.

주남저수지는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에 포함된 가볼만한 곳이다.

2020년 11월 1일, 10월의 마지막 밤을 보내고 11월을 맞이한다.

동녁을 붉게 물들이는 이른 새벽부터 철새들의 이동이 시작되는지 요란하다.

2020년 11월 1일, 6박7일 캠핑여행 마지막 일정은 집으로 향하는 길에 화순 동복면 연둔리 숲정이마을이다.

500년 된 화순 동복 연둔리 숲정이는 둔동마을 앞 동복천을 따라 700m 정도 남북으로 길게 형성된 면적 6,437㎡의 숲이다.

2002년 7월에 화순군 향토문화유산 제12호로, 2006년12월27일에 전라남도 기념물 제237호로 지정되었다.

둔동마을 숲정이에는 동복천 물길을 따라 아름드리 왕버들나무·느티나무·서어나무·검팽나무·상수리나무·뽕나무 등 227그루의 나무로 이루어진 대단위 마을 숲이다.

이 숲은 2002년 산림청, 생명의 숲 국민운동, 유한 킴벌리가 함께 주최하는 ‘제3회 아름다운 숲 전국 대회’에서 마을 숲 부문 공존상(우수상)을 수상하였다.

숲정이란 마을 근처 숲을 가리키는 순수한 우리말이다.

연둔리 숲정이는 1500년(연산군 6년) 경에 마을이 형성되면서 인공적으로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흉고 직경 5~20㎝인 나무가 총 72그루로 전체 31.7%로 가장 많은데 수령은 50년 전후로 추정된다.

흉고 직경 61~80㎝ 나무는 45그루로 전체 19.8%를 차지하며, 수령은 100~200년으로 추정된다.

또한, 직경 100㎝ 이상인 것은 느티나무·서어나무·검팽나무·왕버들로 마을이 형성되면서 방수 목적으로 조성되었으며, 마을 형성 시기인 1500년 이후 식재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수중보 아래에 있는 왕버들은 자연적으로 자란 노거수로 수령이 마을 형성 시기 이전의 것으로 추정된다.

갯버들이나 왕버들은 하천에서 자라는 마지막 수목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숲정이 문화는 세계적으로 이름난 일본 사토야마 문화의 원형으로 알려지고 있다.

연둔리 숲정이는 동복천 변에 마을이 형성되고 여름철 홍수를 막기 위해 나무를 심으면서 생겨났다는 설이 있고, 마을 뒷산에 있는 큰바위가 건너편 구암에서 보이면 마을에 재앙이 생긴다하여 이곳에 살던 만석꾼이 숲을 조성했다는 설이 있다.

둔동마을에서는 숲정이에 속한 나무가 썩어도 그대로 둔다고 한다. 썩은 나무를 베거나 모닥불로 사용하면 흉액이 생긴다는 속신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건너편 구암마을은 김삿갓이 57살의 나이로 숨을 거둔 곳이다.

말년에 그가 살았던 압해 정씨의 종갓집이 복원돼 있다. 3년 동안 묻혀있었던 첫 무덤자리 표지석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