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기행] 5대 적멸보궁, 천년고찰 태백산 정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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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기행] 5대 적멸보궁, 천년고찰 태백산 정암사~

by 정산 돌구름 2020. 10. 17.

5대 적멸보궁, 천년고찰 정선 태백산 정암사~


2020년 10월 7일, 강원도 여행길에 만난 태백산 정암사, 붉게 물든 단풍과 어울어진 사찰의 모습이 아름답다.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寂滅寶宮)의 하나인 정암사(淨巖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의 말사이다.
거대한 7층 모전석탑 수마노탑은 보물 제410호였는데 지난 7월 10일 국보 제332호로 승격하고 기념식을 가졌다.

신라 선덕여왕 5년(636년) 대국통(大國統)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한 창건한 사찰로 갈래사(葛來寺)라고도 한다.

사적기(事蹟記)에 의하면 자장율사는 말년에 강릉 수다사(水多寺)에 머물렀는데 하루는 꿈에 이승(異僧)이 나타나 “내일 대송정(大松汀)에서 보리라.”라고 하였다. 아침에 대송정에 가니 문수보살(文殊菩薩)이 내현하여 “태백산 갈반지(葛磻地)에서 만나자.” 하고 사라졌다.

자장율사는 태백산으로 들어가 갈반지를 찾다가 어느 날 큰 구렁이가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을 보고 제자에게 ‘이곳이 갈반지’라 이르고 석남원(石南院)을 지었는데 이 절이 정암사이다.

이 절에는 자장율사와 문수보살 사이에 있었던 유명한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자장이 이곳에서 문수보살이 오기를 기다리던 어느 날, 떨어진 방포(方袍)를 걸친 늙은 거사가 칡 삼태기에 죽은 강아지를 담아 와서 자장을 만나러 왔다고 하였다.

시자(侍者)가 스승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을 나무라자 거사는 스승에게 아뢰기만 하라고 말하였다. 시자가 자장에게 이 사실을 알렸으나 미처 깨닫지 못하고 미친 사람으로 생각하여 만나지 않겠다고 하였다.

거사는 “아상(我相)을 가진 자가 어찌 나를 알아보겠는가.” 하고 삼태기를 쏟자 죽은 강아지가 사자보좌(獅子寶座)로 바뀌었으며, 그 보좌에 올라 앉아 빛을 발하면서 가버렸다.

이 말을 들은 자장이 황급히 쫓아가 고개에 올랐으나 벌써 멀리 사라져 도저히 따를 수 없었다. 자장은 그 자리에 쓰러진 채 죽었는데, 뼈를 석혈(石穴)에 안치했다고 전한다.

또, 창건에 관한 일설에는 자장이 처음 사북리 불소(佛沼) 위의 산정에다 불사리탑(佛舍利塔)을 세우려 하였으나, 세울 때마다 붕괴되므로 간절히 기도했다.

그랬더니 하룻밤 사이에 칡 세 줄기가 설상(雪上)으로 뻗어 지금의 수마노탑(水瑪瑙塔)·적멸보궁·사찰터에 멈추었으므로 그 자리에 탑과 법당과 본당(本堂)을 세우고, 이 절을 갈래사라 하고 지명을 갈래라고 했다고 전한다.

이 절은 창건에 얽힌 전설 외의 역사는 거의 전하지 않는다.

절 입구에는 일주문(一柱門)이 세워져 있고, 일주문을 들어서면 왼편에는 선불장(選佛場)이 있다.

오른쪽에는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2호(1984년6월2일)로 지정된 적멸보궁이 수마노탑을 등에 지고 있다.

중간 도량가에 종루가 있고, 선불장 옆에는 무량수전(無量壽殿)과 자장각(慈藏閣)·삼성각(三聖閣)이 있다.

적멸보궁은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석가모니불의 사리를 수마노탑에 봉안하고 이를 지키기 위하여 건립한 것으로 수마노탑에 불사리가 봉안되어 있기 때문에 법당에는 불상을 모시지 않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주심포 팔작지붕이며 용마루에는 취두를 얹었다. 건물은 3~4단의 막돌로 쌓은 기단 위에 건립되었는데 기단 상면에는 다듬지 않은 자연석으로 주초를 놓고, 배흘림 기법의 원형 기둥을 놓았다. 북서향의 건물 중앙 위에 적멸궁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건물 안에는 신중탱화 2점과 근년에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작은 동종 1점이 봉안되어 있다. 보궁 주변에 부처의 진신사리를 보관하므로 보궁 안에는 불상을 두지 않는다. 1713년(숙종 39년) 중수했는데 낙뢰로 부서져 6년 뒤 중건하였고, 최근에 새로 두세 차례 중건하였다.

이 보궁 안에는 선덕여왕이 자장율사에게 하사했다는 금란가사(錦襴袈裟)가 보관되어 있었다고 한다.

정암사 수마노탑(水瑪瑙塔)은 적멸보궁 뒤의 산비탈에 세워진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7층 모전석탑이다. 보물 제410호(1964년9월4일)로 지정되었다가 2020년 6월 25일 국보 제332호로 승격되었다.

수마노탑의 높이는 9m로 지대석은 모를 죽인 화강암재로 6단을 쌓아 마련하고, 탑신을 받치기 위한 1단의 받침을 모전석(模塼石)으로 만들고 그 위에 너비 1.78m, 높이1.03m인 사각형 옥신(屋身)을 모전석으로 15단을 쌓아 만들었다.

화강암으로 6단의 기단(基壇)을 쌓고 탑신부를 받치기 위해 2단의 받침을 두었다. 탑신(塔身)은 회녹색을 띤 석회암으로 쌓았는데, 표면을 정교하게 잘 정돈하여 벽돌을 사용한 것처럼 보인다. 1층 몸돌의 남쪽면에는 감실(龕室 불상을 모시는 방)을 마련했으며, 1장의 돌을 세워 문을 만들고 그 가운데에는 철로 만든 문고리를 달았다. 지붕돌은 추녀 너비가 짧고 추녀끝에서 살짝 들려있으며, 풍경이 달려 있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는 1층이 7단이고, 1단씩 줄어들어 7층은 1단이며, 지붕돌 윗면도 1층이 9단, 1단씩 줄어들어 7층은 3단으로 되어있다. 꼭대기의 머리장식으로는 청동으로 만든 장식을 올렸다. 돌벽돌의 일반적인 크기로 보아 그리 거대한 편은 아니지만 형태가 세련되고 수법 또한 정교한 탑이다. 탑 앞에 돌이 하나 있는데, 여기에 새겨진 연꽃무늬, 안상(眼象) 등은 모두 고려시대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이 석탑은 파손이 심해서 1972년 해체·복원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탑을 세운 이유를 담은 탑지석(塔誌石) 5개와 금·은·동으로 만들어진 사리구가 발견되어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보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의 모습이 언제부터 전해진 것인지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어서 확실하지 않지만, 정암사에 있는 여러 유물과 비교해 볼 때 고려시대에 처음 만들어졌을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자장율사가 643년(선덕여왕 12년) 당나라에서 돌아올 때 서해 용왕이 자장율사의 신심에 감화되어 마노석(瑪瑙石)을 배에 싣고 동해 울진포를 지나 신력으로 갈래산에 비장해 두었다가, 자장율사가 이 절을 창건할 때 이 돌로써 탑을 건조하게 했다고 하여 마노탑이라 하였다 한다.

또한, 물길을 따라 이 돌이 반입되었다고 해서 수 자를 앞에 붙여 수마노탑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 탑을 세운 목적은 전란이 없고 날씨가 고르며, 나라가 복되고 백성이 편안하게 살기를 염원하는 데 있다고 한다.

또 이 절에는 금탑과 은탑의 전설이 있다. 정암사의 북쪽으로 금대봉이 있고 남쪽으로 은대봉이 있는데, 그 가운데 금탑·은탑·마노탑의 3보탑이 있다고 한다.

마노탑은 사람이 세웠으므로 세인들이 볼 수 있으나, 금탑과 은탑은 자장율사가 후세 중생들의 탐심(貪心)을 우려하여 불심이 없는 중생들이 육안으로 볼 수 없도록 비장(秘藏)하여 버렸다고 전해진다.

자장율사는 그의 어머니에게 금탑과 은탑을 구경시키기 위해 동구에 연못을 파서 보게 했는데 지금의 못골이 그 유지이며 지상에는 삼지암(三池庵)이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그밖에도 적멸보궁 입구 석단에는 선장단(禪杖壇)이라는 고목이 있다. 이 나무는 자장율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심은 뒤 수백년 동안 자랐으나 지금은 고목으로 남아있다.

신기한 점은 고목이 옛날 그대로 손상된 곳이 없다는 것인데, 다시 이 나무에 잎이 피면 자장율사가 재생한다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탑 안에는 불지절(佛指節), 치아, 염주, 구경 등이 봉안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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