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기행] 한강이남 3대 누각, 영호루(映湖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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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기행] 한강이남 3대 누각, 영호루(映湖樓)

by 정산 돌구름 2020. 10. 16.

한강이남 4대 누각, 안동 영호루()


2020년 10월 4일, 경북과 강원으로 떠난 캠핑여행 첫째날,처음으로 들른 곳은 안동 영호루..

한강이남 4대 누각, 안동 영호루(映湖樓)..

예부터 안동 영호루(映湖樓)는 밀양 영남루(嶺南樓), 진주 촉석루(矗石樓), 남원 광한루(廣寒樓)와 함께 한강 이남의 대표적인 누각으로 불려져 왔다.

창건에 관한 문헌이 없어 언제 누구에 의하여 건립되었는지 잘 알 수는 없으나 천여년 동안 그 이름이 전통의 웅부안동(雄府安東)과 함께 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의 영호루는 철근 콘크리트로 된 한식 누각이다.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의 팔작지붕으로 북쪽면에는 공민왕의 친필 현판을 걸고, 남쪽면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인 ‘영호루’를 걸었다. 내부에는 갑술년 홍수 때 유실되었다가 회수한 현액들과 새로 복원한 현액들을 게판하였다. 현재 게판되어 있는 시판은 12점이고, 제영 1점과 현판 2점이 있다.

영가지(永嘉誌)에 의하면 고려 공민왕 10년(1361년),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서 왕이 이 곳 복주(福州)로 백관을 거느리고 피난하였다고 한다. 왕은 피난중의 적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하여, 자주 남문밖에 우뚝 서 있는 영호루를 찾았고, 때로는 누각 밑 강물에 배를 띄우기도 하였다고 한다. 난리가 평정되어 환궁한 왕은 복주를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시키고 영호루를 잊지 못하여 친필로 영호루(映湖樓) 3자가 쓰인 금자현판(金子懸板)을 보내어 누각에 달게 하였다고 한다.

그 후 조선중기 명종 2년(1547년)의 홍수로 누각은 유실되었으나 현판만은 김해까지 떠내려가서 발견되어 6년후인 1552년에 안동부사 안한준(安漢俊)이 중창하였다.

영조 51년(1775년)에 다시 홍수로 유실되어 부사 신맹빈(申孟彬)에 의하여 중건되었다.

홍수로 인하여 2차례 중건된 영호루는 정조 15년(1792년)의 홍수때 또 유실되어 4년뒤에 부사 이집두(李集斗)가 중건하여 100여년 동안 안동의 관문으로서 그 위용을 갖추었으나 1934년 홍수는 면할 수가 없었다. 안동대구간의 도로를 연결하는 안동교 공사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누위에서 휴식하는 사이 갑자기 물이 닥쳐 많은 사람과 함께 떠내려 갔다고 한다. 다음날 구담(九潭)부근에서 사람들은 무사히 구했으나 누각은 유실되고 「금자현판」만은 수개월후 선산군 구미리(龜尾里) 부근의 강물 속에서 다시 찾았다고 한다.

이로써 영호루는 사라지고 강가에 빈터만 있는 것을 1969년12월 「영호루 중건 추진 위원회」를 조직, 1970년11월에 영호루를 중건하였다.

노송과 잡목이 우거진 언덕에 북향으로 자리한 새 영호루에 올라보면 멀리 북서쪽으로 선비의 영봉 학가산(鶴駕山)이 우람하게 솟아있고 낙동강 건너 안동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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