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제158호, 경주 문무대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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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제158호, 경주 문무대왕릉..

by 정산 돌구름 2020. 7. 20.

사적 제158호, 경주 문무대왕릉(文武大王陵)..


2020년 7월 17일, 동해안 경주 문무대왕릉을 찾아서..

 

경주 문무대왕릉(文武大王陵)은 사적 제158호(1967년7월24일)로 지정되었으며, 대왕암(大王岩)이라고도 한다.

삼국통일을 완수한 문무왕은 통일 후 불안정한 국가의 안위를 위해 죽어서도 국가를 지킬 뜻을 가졌다.

그리하여 지의법사(智義法師)에게 유언으로 자신의 시신을 불식(佛式)에 따라 고문(庫門) 밖에서 화장하여 유골을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국가를 평안하게 지키도록(護國大龍) 하겠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 유해를 육지에서 화장하여 동해의 대왕암 일대에 뿌리고 대석(大石)에 장례를 치렀다.

사람들은 왕의 유언을 믿어 그 대석을 대왕암이라고 불렀다.

대왕암은 육지에서 불과 200m 가량 떨어진 가까운 바다에 있다.

큰 바위가 주변을 둘러싸고 있고, 중앙에 약간의 넓은 공간이 있는데, 이 공간에 대석을 이동하여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중앙의 대왕암 주변을 큰 바위(화강암)가 둘러 싸고 있는데, 네 방향으로 물길이 나 있어 주변 바위는 네 부분으로 구분되어 있다.

자연적으로 물길이 나 있는 상태이나 약간의 인공을 가하여 튀어나온 부분을 떼어내어 물길이난 가운데 공간을 약간 가다듬은 흔적이 발견되었다.

바닷물은 파도와 함께 동쪽 물길을 따라 중앙 공간으로 흘러들어와 서쪽 물길을 통해 빠져 나간다.

바닷물이 물길을 따라 중앙으로 진입할 때 파도가 소멸되기 때문에 중앙의 물은 파도의 영향을 받지 않아 잔잔하며, 물 높이는 중앙의 큰 바위를 살짝 덮을 정도를 항상 유지한다.

대석의 안치 방법과 유골의 수장 여부에 대하여 그 동안 많은 의문점이 있었다.

2001년 3월 한 방송사에서 역사연구 프로그램 제작을 위해 초음파 탐지기 등을 이용하여 바위의 조직과 바위의 내부 및 수면하를 조사한 결과, 대왕암 내부 또는 아래에 유골이나 부장품이 존재하지 않음을 확인하였다.

대왕암에서 멀지 않은 육지에 '낭산'이라고 하는 신성시되는 언덕이 있는데, 이곳에 '능지탑'이라고 불리는 탑이 있다.

연구 결과 문무왕의 시신은 이 능지탑에서 화장되어 대왕암 주변에 산골하고, 대왕암 주변 바위에서 절리된 큰 바위를 중앙의 빈 공터에 남북으로 안치시켜 장례를 지낸 형식적 절차를 가짐으로써 무덤(왕릉)으로서의 의미를 부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대왕암의 네 방향으로 수로를 낸 것은 석가의 사리를 안치한 탑의 형식을 적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신라의 한 설화에 문무왕이 그 아들 신문왕(神文王)에게 만파식적(万波息笛)이라는 피리를 주어, 문무왕이 죽은 후 바다의 용이 되었다가 만파식적을 불면 용이 나타나 국가의 안위를 지키도록 하겠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한다.

아들 신문왕은 바다에서 1.5km 떨어진 동해변에 부왕을 기리는 감은사(感恩寺)를 지어 절의 금당 밑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도록 설계하였다. 이는 용이 쉽게 접근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감은사의 동쪽에 약간 높은 언덕이 있다. 이곳은 대왕암을 정면으로 바라다 볼 수 있는 곳인데, 이곳에 이견대(利見臺)를 짓고 신문왕은 이곳에 수시로 와서 대왕암을 망배(望拜)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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