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의 아름다운 사찰, 구미 금오산 약사암과 마애보살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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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의 아름다운 사찰, 구미 금오산 약사암과 마애보살입상

by 정산 돌구름 2019. 9. 2.

산상의 아름다운 사찰, 구미 금오산 약사암과 마애보살입상..


 

91일 일요일, 금오산 산행길에 만난 금오산 약사암과 보물 제490호 마애여래좌상..

 

금오산 약사암(藥師庵)은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의 말사로, 금오산 정상의 약사봉 아래에 자리 잡고 있다.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당시의 유물은 발견된 바 없다.

1618년(광해군 10년) 간행된 일선지(誌), 1799년(정조 23년) 간행된 범우고(攷)에 고찰이었음을 알려주는 기록이 있다.

고종 때 편찬된 영남진지(誌)에는 ‘법당은 8칸으로 성내() 삼리()에 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약사암은 약사전·삼성각·일주문·종각·요사로 구성되어 있다.

1985년 기암절벽 아래에 남향으로 건립한 약사전은 정면 4칸·측면 2칸 규모의 다포계 팔작지붕집으로 약사암의 중심법당이다.

내부에 신라 말 또는 고려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화강암으로 조성한 석조여래좌상이 모셔져 있다.
1935년 우상학이 지은 ‘약사암중수기’에 본래 지리산에 있던 석불 3기 중 1기를 이곳 약사암으로, 나머지 2기를 수도산 수도암과

황악산 삼성암으로 옮겨 봉안했다고 쓰여 있다.

석조여래좌상 좌우로 일광·월광보살이 협시되어 있으며, 후불탱·신중탱·독성탱 등의 불화가 걸려 있다.

약사전에 봉안된 석조약사여래좌상은 수도산 수도암(), 황악산 삼성암()의 약사불과 함께 삼형제불(三兄弟佛)이라

불리며, 세 불상이 함께 방광()을 했다고 전하고 있다.
보물 제296호인 수도암 약광전 석불좌상의 설명문에 ‘금오산 약사암에 있는 석불, 직지사 약사전의 석불과 함께 3형제라 하고

그 중 한 석불이 하품을 하면 다른 두 석불은 따라서 재채기를 한다는 전설이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의상이 처음에 금오산 동쪽 바위 밑에 움막을 치고 수도성불할 때 선녀가 하루 한끼의 밥을 내려주었다고 한다.

이곳에 암자를 지었으니 곧 약사암(藥師庵)이다.

지금까지 수도승은 물론이요 일반의 신방(蜃訪)도 많으며 이 암자에 참선해야 극락에 갈 수 있다하며, 4월8일 부처님 오신날에는

백발노인들의 참선함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여기서 성불한 의상은 뒤에 영주 부석사를 창건하고 동해 화엄의 대종사(大宗師)가 되었다.

약사암이란 바로 약사여래에서 기인된 명칭이며, 만해 한용운과 백용성 스님도 약사암에서 참선득고(參禪得道)했다 한다.

범종각에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범종에는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고 대통령 박정희, 고 영부인 육영수, 영애 박근혜, 영애 박근영, 영식 박지만』

 

 

 

 

 

 

 

 

 

 

 

 

 

 

 

요사채 왼쪽으로 약 300m 지점의 바위에는 고려시대에 조성한 높이 5.5m의 금오산 마애보살입상(보물 제490호)이 있다.

보물 제480호로 지정된 높이 5.55m의 금오산 마애여래입상(磨崖菩薩立像)..

거대한 암벽의 모서리에 조각된 마애석불로 불상의 중심선이 모서리여서 양쪽 암벽에 조각된 특이한 구도이다.

광배()와 대좌()를 모두 갖추었으며, 보존 상태도 비교적 좋다.

머리에는 3면보관()이 있으나, 마멸로 조각한 장식은 분명하지 않다.

얼굴은 갸름하고 풍만하며, 눈·코·입 등도 원만하게 처리하였다.

귀는 어깨까지 내려오고 목에는 삼도()가 명확하게 나타났으나, 목이 짧아 가슴까지 내려오는 형식적인 것이다.

어깨의 선은 매우 원만하고 자세도 좋지만 가슴·팔·하체 등은 둔탁하게 처리하였다.

오른손은 아래로 내려 손바닥을 안으로 향하였으며, 왼손은 팔굽을 약간 굽히고 손바닥을 바깥으로 향하여 옷자락을 잡고 있다.

발은 곧게 서 있으며, 발가락은 매우 크고 듬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