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기행] 선종대가람 천년고찰 종남산 송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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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기행] 선종대가람 천년고찰 종남산 송광사..

by 정산 돌구름 2019. 4. 15.

선종대가람 천년고찰 완주 종남산 송광사..


 

2019년 4월 14일 일요일,  잔뜩 흐린 날씨에 완주 종남산 송광사를 찾았다.

 

선종대가람(禪宗大伽藍) 완주 종남산(終南山) 송광사(松廣寺)

송광사는 신라 경문왕(景文王) 때 도의선사가 세웠다고 전해진다.

당시 이름은 백련사(白蓮寺)였는데, 규모가 매우 커서 일주문이 3㎞나 떨어져 있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황폐해 폐찰이 되었다가 1622년(광해군 14년)부터 승려 응호·운쟁·덕림·득정·홍신 등이 다시 세우기 시작해 14년

만인 1636년(인조 14년) 완공되었다는 기록이 전주부 송광사 개창지비(사적비)에 기록되어 있다.

이때부터 절 이름도 송광사로 바꾸어 불렀는데, 전남 순천시 송광면에 있는 승보사찰 송광사(松廣寺)와 한자까지 같다.

순천 송광사보다 규모는 작지만 분위기가 아늑하고, 봄이면 진입로부터 약 2㎞에 걸쳐 펼쳐지는 벚꽃이 장관을 이룬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금강문(金剛門)·천왕문(天王門)·종루(鐘樓)가 차례로 나오고, 종루 옆의 대웅전을 지나면 뒤쪽에 나한전

비롯한 건물들이 있다.

일주문에서 대웅전까지는 일자로 배치되어 있고, 공간 배치가 자연스러워 한국의 전통적인 정원 분위기를 자아낸다.

또 대웅전 안에 있는 소조삼불좌상(塑造三佛坐像) 가운데 오른쪽에 있는 아미타여래좌상은 국가에 나쁜 일이 생길 때마다 땀을

흘리는 불상으로 국가위난이나 기도감응시에는 대웅전, 한전, 장전의 불상들이 땀을 흘리고 있어 세인의 관심을 끌기도 했으며,

특히 대웅전 불상은 KAL기 폭파사건, 12·12사건, 군산 훼리호 침몰, 강릉잠수함 출몰, 그리고 1997년12월2일부터 13일까지는

엄청난 양의 땀과 눈물을 흘려 IMF를 예견하는 기적을 보였다한다.

지정문화재로는 대웅전(보물 제1243호), 종루(보물 제1244호), 소조사천왕상(보물 제1255호), 소조삼불좌상 및 복장유물(보물

제1274호), 일주문(전북유형문화재 제4호), 사적비(전북유형문화재 제5호), 동종(전북유형문화재 제138호), 나한전(전북유형

문화재 제172호), 금강문(전북유형문화재 제173호), 벽암당부도(전북문화재자료 제144호) 등이 있다.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4호(1971년12월2일), 송광사 일주문(一柱門)...

일주문은 2개의 원기둥을 나란히 세우고 그 위에 간결한 맞배지붕을 올렸다.

지붕의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식이며, 공포는 용머리를 조각하는 등

조선중기 이후의 화려한 장식적 수법을 엿볼 수 있다.

기둥의 앞뒤에는 연꽃무늬를 장식한 보조기둥을 세워 안정감을 주고 있으며, 앞면 중앙에는 1975년에 서암(瑞岩) 스님이 쓴

‘終南山 松廣寺’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일주문은 본래 현재의 위치에서 남쪽으로 3㎞ 지점인 나드리(현재 무주ㆍ진안 방면의 도로입구)라는 곳에 세워졌다고 한다.

그러나 송광사 경역이 축소되어 감에 따라 1814년 정준(定俊) 스님이 조계교(曹溪橋) 부근으로 옮겼다가, 1944년 해광극인

(海光克仁) 스님이 다시 현 위치로 옮긴 것이다.

 

전북유형문화재 제173호(1999년 7월 9일), 송광사 금강문(金剛門)..

가운데 칸은 통로이고, 좌우 칸은 금강역사상를 모신 공간인데 홍살 칸막이를 설치하여 금강역사상의 가슴 윗부분만 볼 수 있다.

내부에는 좌우에 각각 금강역사와 사자, 코끼리를 타고 있는 문수, 보현동자상을 봉안하였다.

각성()이 중창시 건립된 것으로 전해오나 상량문이 없어 정확한 건립 연도는 알 수 없다.

정면 3칸(930㎝), 측면 2칸(565㎝), 기둥 높이 293㎝, 주심간 375㎝의 팔작지붕으로 자연석을 이용하여 기단과 기둥의 주춧돌을

구축하였다. 연등천장은 뼈대가 그대로 드러나있다.
다표식으로 처마는 홑처마이며, 외3출목, 내4출목이다.

쇠서와 4출목의 살미들이 중첩되어 하나로 이어지며, 끝에는 연꽃과 연꽃 봉오리를 조각하였다.

천장은 연등천장이고, 둥근 모양의 창방(枋)과 사각형의 평방을 결구하였으며, 자연목을 그대로 사용한 대들보는 2량이다.
각 공포의 벽화는 보상화무늬로 장식하였다. 건립 당시에 조성된 것은 아니지만 금강문 안에는 금강역사상 2구()와 오른쪽과

왼쪽에 동자상을 배치하였는데 왼쪽 동자상은 사자, 오른쪽 동자상은 코끼리를 타고 있다.

 

 

 

 

 

송광사 천왕문(天王門)..

정면과 측면 각 3칸인 단층 익공계 맞배지붕이며, 내부 좌우 칸에는 천왕 2위씩을 서로 마주보도록 배치하고, 중앙은 통로이다.

송광사개창비문의 화사질에 의하면 ‘천왕전(天王殿)’이라고 적혀 있는데 ‘門’이라 하지 않고 격을 높여 ‘殿’이라고 불리었다.

중앙 칸에는 2짝 판문이 달려 있어 여닫을 수 있도록 하였으며 문인방 위에 홍살을 설치하였다.

좌우 칸에는 벽의 높이 3/4부분에 상방, 1/4부분에 하방을 설치하여 벽을 3분할하였는데, 상방 위에는 정자살고창, 상방과 하방

사이에는 판벽, 하방 밑에는 벽체를 각각 설치하였다.

1994년 사천왕상을 개채할 당시 북방 다문천왕상의 왼쪽 보관 끝 뒷면에서 ‘순치기축육년칠월일필금산화원주조상

(順治己丑六年七月日畢金山畵圓主造像)’이라는 묵서(墨書)가 발견됨에 따라 1649년(인조 27년)에 조성된 것임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왼손에 얹어 놓은 보탑 밑면에는 ‘건륭오십일년병오오월일…신조성(乾隆五十一年丙午五月日…新造成)’이라는 묵서명이

있어 1786년(정조 10년)에 새로이 보탑을 만들어 안치하였음을 알려주었다.

이로 볼 때 천왕문은 1636년 이전에 만들고 사천왕상은 1649년에 조성ㆍ봉안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소조사천왕상은 보물 제1225호로 지정되어 있다..

 

보물 제1255호(1997년6월12일) 완주 송광사 소조사천왕상(松廣寺 塑造四天王像)..

높이 4.2m인 이 사천왕상은 조선시대 사천왕상 가운데 가장 빼어난 작품성을 지닌 조각상이다.

정확한 제작 연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최소한 1649년(인조 27년) 이전에 완성된 것은 확실하다고 보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에 행해진 일련의 사찰 재건 사업에서 당시 팔도 도총섭()이었던 벽암각성 대사()가

주도한 장인 계열을 중심으로 제작하였던 승주 송광사, 화엄사와 더불어 동시대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이 상은 조선 후기 사천왕상 가운데 작품의 완성도가 가장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전체적인 신체의 균형이 조화로울 뿐만 아니라 재질이 소조이기 때문인지 얼굴의 주름살까지도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활달한 몸의 움직임과 함께 분노상이 잘 드러난 얼굴 표정은 이 작품의 우수성을 대변하고 있다.

4위() 모두 한쪽 다리는 악귀가 받들고 있고 다른 한쪽 다리는 수직으로 내리고 있다.

1994년 10월 사천왕상 개채 보수 작업 중에 보탑을 든 사천왕상의 보관 끈 뒷면과, 왼손에 받쳐 든 보탑의 밑바닥에서 묵서의

명문이 발견되었고, 여러 점의 복장품들이 나왔다.

보관 끈에는 “?(순치을축년시월일필금산화면주조?위?”라고 씌어 있었다.

송광사 개창비에는 숭정() 병자()년에 법당과 동서 재료()를 완성하고 단청을 시채()하였으며, 천왕전은 여인

()이라는 승려에 의하여 완성되었다고 한 점으로 보아 1636년과 1649년 사이에 사천왕상이 제작되었음을 시사한다.

보탑 밑바닥에는 건륭() 51년(1786)에 중수하였다는 사실이 적혀 있다.

복장품으로는 용, 보주를 든 사천왕상을 제외한 3위()의 천왕상의 등 부분 속에서 법화경과 화엄경을 비롯한 경전류와 후령통

등이 나왔다. 경전류로는 정강() 정미()년(1129)과 천계() 8년(1443)에 제작된 귀중한 목판본이 포함되어 있다.

 

 

 

 

 

 

 

 

 

 

 

 

 

 

보물 제1243호(1996년 5월 29일), 송광사 대웅전(大雄殿)..

본전(本殿)인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다포계 팔작지붕으로 광해군 14년(1622년)에 설립되었다.

당시에는 2층이었으나 1814년에 건물이 기울어지자 1층으로 고쳐지었고, 이후 철종8년(1857년)에 제봉선사가 다시 중수하였다.

‘大雄殿’이라는 편액은 선조의 8남이자 광해군의 동생인 의창군(義昌君)이 썼다.

1636년에 세운 송광사개창비의 비문도 그가 썼다.

대웅전은 다른 건물에 비해 가운데 칸이 비교적 좁은 편이며, 사면벽에 48개의 구획을 나누고 나한도와 신중ㆍ보살들을 그렸다.

내부는 고주(高柱) 4개를 세우고, 옆면의 평주열(平柱列)보다 뒤로 물린 다음 후불탱을 걸어놓았다.

그 앞에 불단(佛壇)을 설치하고 삼세불좌상(三世佛坐像)을 봉안하였다.

천정에는 보개(寶蓋)를 가설하고 그 위에 용ㆍ게ㆍ물고기ㆍ거북 등 바다동물을 장엄하였고,우물반자인 중앙 3칸 이외의 외진부

빗천정에는 주악비천(奏樂飛天)을 그려 넣었다.

법당에는 보물 제1274호인 석가여래ㆍ약사여래ㆍ아미타여래 등의 소조삼세불상을 비롯하여 근래에 조성한 후불탱, 1857년에

조성한 신중탱과 삼전패(三殿牌) 등이 봉안되어 있다..

 

 

 

보물 제1274호(1997년 8월 8일), 대웅전 소조삼존불좌상(塑造三尊佛坐像) 및 복장유물..

대웅전 소조삼존불은 5m가 넘는 거대한 불상으로 소조상으로서는 국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본존인 석가모니불을 중앙에 봉안하고, 왼쪽에 약사여래불을, 오른쪽에 아미타불을 봉안하였다.

높이 550㎝, 무릎너비 405㎝, 무릎높이 72㎝ 석가여래좌상은 나발 머리에 큼직한 육계(肉髻)가 있고 이마에는 백호(白毫)가 있다.

통견의 법의를 갖추고 왼쪽 팔에 걸친 옷 주름이 무릎을 덮고 있으며, 수인은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몸체가 균형이 잡혀 있어 당당한 느낌을 준다.

약사여래좌상은 상호나 몸체에서 전반적으로 석가여래상과 비슷하다.

어깨 정도로 든 오른쪽 손은 손바닥을 바깥으로 향하여 엄지와 중지를 맞잡고 있으며, 손바닥이 위를 향한 채 무릎 위에 놓인

왼쪽 손에는 약합이 놓여 있다.

좌상의 크기는 높이 520㎝, 무릎너비 363㎝, 무릎높이 79㎝이다.

아미타여래좌상 역시 원만한 상호로서 석가여래, 아미타여래상과 비슷한 분위기를 나타낸다.

오른손을 어깨 가까이 들어서 손바닥이 바깥을 향한 채 엄지와 중지를 맞잡고 있으며, 무릎에 놓인 왼손은 손바닥이 위로 향한

채 엄지와 중지를 맞잡고 있다.

좌상의 크기는 높이 520㎝, 무릎너비 356㎝, 무릎높이 71㎝이다.

이 삼존불은 인조19년(1641년) 6월29일 임금과 왕비의 만수무강을 빌고,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있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조속한 환국을 발원하면서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과 청나라의 연호를 함께 사용하고 있는 등, 임진 및 병자의 양란을 겪으면서 국난극복의 의지와 함께 당시의 문화적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 삼세불은 국가에 큰 일이 있을 때면 땀을 흘리는 이적을 보인다는 속설을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조성연대가 명확할 뿐만 아니라 당시 혼란기를 불력에 의지하여 극복하려는 국가적 신앙심과 역사의식이 반영된 귀중한 자료로

여겨져 복장유물 12종 중 불상조성기(석가모니불,약사여래불,아미타불) 3점 및 후령통 3점과 함께 일괄 보물로 지정되었다.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172호(1999년7월9일),  송광사 나한전(松廣寺羅漢殿)..

정면 3칸, 측면 3칸의 주심포 건물로 천장은 우물천장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고, 각 지주의 주춧돌은 자연석을 사용하였다.

내부에는 목조 석가여래좌상이 봉안되고, 오른쪽과 왼쪽에 16나한상과 오백나한상, 인왕상, 동자상, 사자상이 배치되어 있으며,

공포는 주심포집 형식이나 쇠서 아래쪽의 초각으로 보아 18세기에 한 차례 중수되었으며, 귀공포의 쇠서에 연꽃 봉오리가 첨가

되었고, 곧게 꺾인 첨차로 보아 20세기 초에 다시 중수된 것으로 보인다.

두 번에 걸친 중수로 서까래와 천장 등이 많이 변형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1656년 각성(1575~1660)이 송광사를 중창할 때 건립한 것이며, 1934년 혜광이 중수하였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69호(1999년4월23일), 송광사 나한전 목조석가여래삼존상(羅漢殿木造釋泇如來三尊像) 및 권속상일괄

불상의 높이는 석가여래(본존) 192㎝, 제화갈라보살(우) 181㎝, 미륵보살(좌) 181㎝이다.

나한전에는 석가여래좌상을 제화갈라보살과 미륵보살이 협시하는 석가여래삼존상과 16나한상, 좌우 제석, 좌우 장군 등을 포함

526구의 존상들이 있다. 이 존상들 중에서 출토된 발원문을 통해 1656년(효종 7년)에 무염을 포함한 30명의 조각승들이 이 존상

들을 조성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본존인 석가여래좌상은 어깨가 넓고 허리가 긴 장대한 체구를 보이고, 석가여래좌상은 육계의 구분이 없는 둥근 형태이다.

머리의 중앙에는 반원형에 가까운 중간계주가, 정상에는 원통형의 정상계주가 조각되어 있다.

석가여래좌상의 상호는 넓은 미간, 두툼하게 솟은 눈두덩이, 반개한 눈과 오뚝한 코, 살짝 미소를 머금고 있는 입술로 구성된다.

착의법은 대의를 걸친 편단우견식으로 착의하여 오른쪽 어깨를 가렸지만 오른팔은 드러나 있다.

가슴을 가린 승각기는 살짝 주름이 잡혀 있으며 하반신에는 좌우 4가닥씩의 큰 주름이 펼쳐져 있다.

좌우 협시보살좌상의 착의방식은 이형대칭으로, 좌측 미륵보살은 승각기·편삼·대의를 걸친 가사를 걸쳤고, 우측 제화갈라보살은

천의를 입고 하반신에는 각대를 착용하고 있다.

좌우 협시는 모두 보상화문, 화염, 구름문양으로 장식된 보관을 쓰고 있고, 귀걸이와 팔찌를 두르고 있다.

좌측 미륵보살의 상호는 본존과 비슷하지만 두상을 타원형으로 조각하였고, 우측의 제화갈라보살은 방형의 얼굴에 눈두덩이와

양 볼의 양감이 훨씬 줄어들었고 눈 윗꺼풀을 길게 표현하였다.

16나한상은 암석 대좌 위에 결가부좌, 반가좌, 유희좌 등 다양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나한상들은 해태, 호랑이, 학, 용, 코끼리 등과 같은 서수나 동자들과 함께 있는 모습이다.

좌우 제석은 보관을 쓰고 소매가 긴 포를 입고 조끼와 같은 하피()를 걸쳤다.

길게 흘러내린 소맷자락은 좌우의 동자들이 들고 있다. 좌우 사자는 모두 갑옷을 입고 있는 무장의 모습이다.

좌측 사자는 해태 얼굴이 새겨진 두건을 쓰고 있으며, 오른쪽 사자는 뿔이 2개 솟은 듯한 모자를 쓰고 있다.

나한전 벽면에는 20~40㎝ 크기의 나한상들이 빼곡히 배치되어 있다.

나한전 존상들을 제작한 조각승들은 무염(), 현준(), 수화원() 계훈(), 사인(), 성순(), 태신(),

법기(), 희순(), 각선(), 경희(), 단응(), 천신(), 도균(), 해정(), 삼응(), 도심(), 행민

(), 인경(), 법행(), 선문(), 충학(), 의종(), 심민(), 성환(), 사인(), 지수(), 각림(),

충행(), 옥현(), 행주()이다.

무염은 17세기 전반기 활발한 활동을 했던 조각승으로 1630년대부터 수화승으로 활동한 기록들이 남아있다.

그가 조성한 대표적인 불상들은 1633년 고창 선운사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 1635년 영광 불갑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1650년

대전 비래사 목조비로자나불좌상, 1651년 속초 신흥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및 목조지장보살삼존상, 1654년 영광 불갑사

명부전 권속, 1656년 완주 정수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 등이다.

나한전 존상을 제작한 조각승들 중 도균은 1648년 해남 도장사 석가여래 제작 때 10번째 조각승으로 무염과 함께 참여한 기록이

전하고 있어 무염 집단에 속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보물 제1244호(1996년 5월 29일) 송광사 종루(鍾樓)..

'亞'자형 평면 위에 다포계 팔작지붕을 교차시켜 십자형으로 짜 올린 2층 건물이다.

설립연대는 대웅전을 1층으로 고쳐 지은 1814년(순조 14년) 혹은 1857년(철종 8년)으로 보이며,  종루나 종각은 보통 사각형

건물인데 비해, 여기서는 보궁에 즐겨 쓰는 특수한 평면형식인 亞자형을 택하고 있어 주목된다.

위층은 난간을 두르고 계단 있는 쪽만 개방하였으며, 아래층은 흙바닥으로 완전히 개방되어 있다.

2층 누각 안에는 중앙에 종을 걸고, 사방으로 돌출된 칸에 법고ㆍ목어ㆍ운판을 걸어 기본 불구(佛具)를 다 갖추고 있다.

칸 사이는 모두 똑같이 2.5m로 소규모인데, 내외 3출목 포작을 주두 및 보간에 1구씩 짜 올려 빈틈없이 지붕을 받게 하였다.

건물 크기에 비하여 공포대가 크고 화려해 보이는 반면, 가냘프게 휘어 올라간 앙서형 살미, 양끝이 사절된 교두형 첨차 등으로

인하여 세부는 섬약해 보인다. 겹처마 밑의 서까래와 부연 또한 다른 건물에 비해 가늘고 섬세하다.

아름답게 치켜 올라간 추녀 곡선은 이 건물이 누각임을 그대로 보여준다.

2층 내부의 천정은 네 귀에서 짜 올라간 공포로 가득 채워져 있어서 특이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천정 가구는 창방이 대신 대들보 구실을 하도록 하였다..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138호(1992년6월20일), 송광사 무등산증심사대종명 범종(松廣寺 無等山證心寺大鍾銘 梵鍾)..

숙종42년(1716년)에 조성된 동종으로 현재 종루에 보관되어 있으며, 종을 거는 고리까지 포함하여 높이 107㎝이고, 아랫부분은

지름 73㎝, 두께 4.5㎝ 크기이다.

종의 윗부분에는 60개의 입화식(立花飾) 꽃무늬가 있고, 그 아래에 방패모양의 꽃무늬를 양각하였다.

범종에는 ‘강희 55년 병신 4월 전라우도 광주무등산증심사대종조성(康熙五五年丙申 四月全羅右道光州無等山證心寺大鍾造成)

…’으로 시작하여 시주자 이름이 양각되어 있고 ‘대시주 계묘 채구 건융34년 기축 9월 중수 문광득(大施主 癸卯 蔡龜 乾隆 三四年

己丑 九月 重修 文光得)’이란 글이 음각되어 있다.

이에 따라 이 범종은 광주 무등산 증심사에서 만들어졌으며, 그뒤 1769년(영조 45년)에 보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