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례 석주관 칠의사묘(石柱關七義士墓)와 석주관성..
2019년 3월 10일(일), 구례 산수유마을 가는 길에 잠시 둘러본 구례 석주관 칠의사묘와 석주관성..
석주관 칠의사묘(石柱關七義士墓)는 사적 제106호(1963년1월21일)로 지정되어 있는 7인의 묘소이다.
석주관은 구례와 경남 하동을 잇는 지리산의 요새로 임진왜란 직후에 호남의 안전방어를 위하여 성을 쌓았는데 정유재란 당시
왜병 수만 명이 들이닥치자 구례 선비 왕득인(王得仁)은 의병을 모아 적을 여러 차례 기습, 공을 세웠으나 결국 전사하고 말았다.
구례가 함락되고 왜구의 노략질이 심하여지자 왕득인의 아들 의성(義成)을 비롯하여 이정익(李廷翼)·한호성(韓好成)·양응록
(梁應祿)·고정철(高貞喆)·오종(吳琮) 등이 수백명의 의병을 모집하고 화엄사의 승병 153명의 지원을 받아 석주관에 집결, 왜병에
저항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무기공급을 받을 수 없어 나무를 베고 바윗돌을 옮겨 길목을 차단하고 기습과 백병전으로 여러 차례의 전공을
올렸는데 당시 죽은 왜적들로 인하여 냇물이 피로 물들었다하여 이때부터 이 고장에 ‘피아골’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듬해인 1598년(선조 31년)하동으로부터 왜병이 큰 무리로 내습하자 당시의 의병들은 결사적으로 대항하였으나 병력의
열세로 왕의성을 제외한 모든 의병들이 전사하고 말았다.
왕의성은 살아남아 인조 14년(1636년) 병자호란 때 재차 의병을 일으켰다.
그 뒤 1805년(순조 5년) 조정에서 7인의 의사에게 각각 관직을 추증하였으며, 1946년 지방인사들이 칠의각(七義閣)과 영모정
(永慕亭)을 지어 의사들의 공훈을 추모하였다.
현재 구례에서 하동으로 향하는 석주관터 길목 왼편에 칠의사의 묘소와 추념비가 세워져 있다.
무덤은 8기인데 왕득인(王得仁), 완의성(王義成), 이정익(李廷翼), 한호성(韓好成), 양응록(梁應祿), 고정철(高貞喆), 오종(吳琮)
등 7인의 의사와 당시 구례현감의 묘소이다.
사적 제385호(1993년11월10일)로 지정된 구례 석주관성(石柱關城)은 북쪽·남쪽이 지리산과 백운산의 험한 산줄기이고 그 사이를
섬진강이 흐르는 천험의 요충지로서 하동과 구례를 통하는 호·영남간의 인후지에 해당된다.
고려 말 이곳에 진(鎭)을 두고 둘레 500칸의 석성을 쌓아 왜구를 막았다.
지금 남은 석축관문은 임진왜란 당시 전라방어사 곽영(郭嶸)이 고려시대의 진성(鎭城) 위에 쌓은 것이다.
경사진 산허리의 정상부를 따라 축조된 현존 성곽의 길이는 736m, 석축 높이는 50~120cm이며 석축에 일정한 간격으로 단(段)을
두고 단과 단 사이에 타구(垛口)를 두어, 적의 공격시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도록 한 점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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