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는 길목, 사적 제302호 순천 낙안읍성의 풍경..
2019년 3월 8일(금), 순천 금전산 산행 후 찾은 낙안읍성, 봄은 어느덧 우리 곁에 머물고 있었다..
시간이 멈추는 마을, 순천 낙안읍성(樂安邑城)..
낙안민속마을은 야트막한 산들이 감싸안아 분지를 만드는 자리에 돌담이 아름다운 마을이다.
마치 드라마 촬영장을 연상케 하지만 이곳은 마을 사람들이 삶을 살아가며 이야기를 나누는 마을이다.
수백 년을 거스르는 시간여행, 조선 중기 만들어진 석성 내부로 행정구역상 세 개의 마을 100여 가구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이다.
이곳은 마한시대부터 삶의 터전이었다.
낙안읍성은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1001’에 포함된 곳이기도 하다.
사적 제302호인 낙안읍성(樂安邑城)은 고려후기부터 왜구가 자주 침입하자 1397년(태조 6년)에 낙안 출신의 절제사(節制使)인
김빈길(金贇吉)이 흙으로 성곽을 쌓았다.
『세종실록』에는 1424년(세종 6년) 9월부터 성벽을 돌로 고쳐 쌓으면서 원래의 규모보다 넓혔다고 기록되어 있다.
토성으로 담장을 둘렀던 마을은 조선 중기 북벌운동으로 유명한 임경업(林慶業)이 군수로 부임하여 석성으로 개축하였다.
현재까지도 허술한 담장 하나 보이지 않는 석성은 1.4㎞를 이어가며 마을을 감싸고 있다.
석축으로 고쳐 쌓는 작업은 1450년 경에 거의 마무리되었는데, 당시 성벽의 둘레는 2,865척이고, 높이는 평지에서 9.5척이지만,
높은 곳은 8.5척이었으며, 성벽 위에 낮게 쌓은 여장(女墻)이 420개로 높이가 2.5척이었다고 한다.
또한 성문은 3곳이었는데 옹성을 두지 않았고 옹성과 성문을 지키기 위해 성문 옆에 쌓은 네모난 적대(敵臺)는 12개를 만들기로
하였지만 4개만 설치하였다고 전한다.
성 안에는 우물 2곳과 연못 2곳이 있었으며, 성 밖에 성벽을 둘러 판 해자(垓子)는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옹성은 그 뒤에 설치되었고, 여장도 무너진 것을 다시 고쳐 쌓았지만 지금은 모두 무너져 없어진 상태이다.
현재 남아 있는 읍성의 모습은 성벽의 축조나 적대의 존재 등에서 조선 초기 성곽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준다.
읍성은 낮은 구릉을 포함한 평지에 동서 방향의 긴 장방형으로 자리하고 있다.
동문은 악풍루(樂豐樓), 남문은 쌍청루(雙淸樓, 鎭南樓), 서문은 악추문(樂秋門) 등으로 불렸는데 터만 남아 있을 뿐이고, 옹성은
남문터와 서문터에서만 흔적을 볼 수 있다. 적대는 전하는 기록대로 동문터 좌우와 동북쪽·동남쪽 모서리에 각각 하나씩 있다.
성벽의 둘레는 1.385㎞이다.
동문터의 남쪽 부분이 가장 잘 남았는데, 높이는 4.2m이고, 위쪽 너비와 아래쪽 너비는 각각 3∼4m, 7∼8m이다.
아래쪽에 커다란 깬돌을 이용하여 쌓아 올리면서 틈마다 작은 돌을 쐐기박음하였으며, 위쪽으로 갈수록 석재의 크기를 줄였다.
이 읍성은 가장 완전한 모습으로 보존된 조선시대 읍성 가운데 한 곳이다.
특히 성 안의 마을은 전통적인 면모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인위적으로 옛 모습을 갖춘 민속촌이나 명망있는 양반들의 기와 가옥이 남아 있는 경우는 전국적으로 여러 곳이지만 노란지붕의
초가집으로 마을을 이룬 일반 백성들 삶의 터전이 지금까지 유지되는 곳은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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