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안길이 아름다운 섬, 다리로 연결된 고흥 거금도(居金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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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길이 아름다운 섬, 다리로 연결된 고흥 거금도(居金島)..

by 정산 돌구름 2018. 11. 19.

해안길이 아름다운 섬, 다리로 연결된 고흥 거금도(居金島)..


 

2018년 11월 16일(금), 고흥 거금도에서 하루를 보내다.


해안길이 아름다운 섬, 거금도(居金島)는 고흥반도 서남단 도양읍에서 약 2.3km 떨어진 섬으로 지금은 연륙이 되어 있다.

면적은 63.57km2, 해안선 길이는 54km로 주위에는 연홍도·허우도 등의 유인도와 형제도·독도·오동도 등 무인도가 흩어져 있다.

조선시대에는 절리도()라 불렀으며, 거억금도라고도 기록되어 있다.

강진군에 편입되었다가 1897년에는 돌산군()에, 1914년에는 고흥군에 속하게 되었다.

섬에는 적대봉(592m)과 용두봉(419m)이 있으며, 경사가 급하다.
절이도 목장성은 ‘조선왕조실록’ 1466년(세조 12년) 이월 기축(17일) 조에 에 “전라도의 점마별감 박식이 아뢰기를 “도내의 흥양

절이도는 주위가 2백70리인데, 물과 풀이 모두 풍족하여 말 8백여필을 방목할 수 있습니다. 청컨대 회령포, 금갑도, 돌산, 남도포,

어란포 등 여러 포구의 선군()으로서 ‘목장’을 수축()하게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는 기록과 1470년(성종1년) 일월

계미(4일) 조의 “사복사 제조( 調)가 각지에서 기르는 마소의 원래 숫자와 현재 잃어버린 숫자를 아뢰다. ···흥양의 도양

곶이()에는 본래 방목할 말이 6백66두였는데 고실이 1백36두, 유실이 5두이며, 절이도()에는 본래 방목할 말이 3백

64두였는데 고실이 72두”라는 기록이 있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0권 흥양현 산천 조에는 “절이도()는 현의 남쪽 30리에 있으니, 둘레가 1백리요, 목장이 있다”는

기록도 있다. ‘호남읍지()’(1895) 흥양목장지사례()에는 “절이도는 동서 30리이고 남북 10리이며 둘레는

100리이다. 관문으로부터 거리는 녹도진까지 10리이고 수로로 30리이다. 민호는 180호이며 방목을 한다”는 기록을 통해 연혁을

알 수 있다.
거금도는 거대한 낙타 모양의 섬으로 원래 우리나라의 섬 가운데 일곱 번째로 큰 섬이었으나 다른 섬들이 방조제 공사를 통해

면적을 늘리는 바람에 지금은 열 번째로 뒤처졌다.

거금도란 이름은 큰 금맥이 있는 섬이란 뜻이지만 정작 거금도에서는 금이 생산되지 않는다.
거금도와 소록도 사이에 두 개의 작은 무인도를 끼고 S자형으로 이어지는 거금대교는 총 연장이 2,028m(사장교 1,116m, 접속교

912m)에 이른다. 중앙부분에 167.5m에 이르는 다이아몬드 모양의 주탑 2개를 케이블로 상판과 연결한 사장교이다.

주탑 사이 거리(주경간)는 480m로 서해대교보다 10m 더 길다.

녹동항의 주항로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대형선박 왕래가 자유롭도록 주경간을 넓게 설계한 것이라고 한다.

특히 차도와 자전거·보행자 도로를 병용한 복층(2층) 구조로 건설했다.

차가 다니는 상층부는 너비 13m 안팎의 2차로이며, 하부는 자전거 및 보행자 도로다.

이 때문에 불편함과 위험을 없앤 인간 중심의 ‘휴먼 브릿지(Human Bridge)’라 할 수 있다.

거금대교를 지나는 선착장이 바로 ‘금진선착장’이다.

예전에 녹동에서 이곳으로 배가 오고 간 거금도의 대표적인 나들이 포구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 화려함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관광안내도와 함께 겨우 건물 한동에 불이 켜져 있을 뿐 선착장에도 주변에도 그 어디에도 고깃배 한 척 없고 고요한 바닷물만이

다리 아래를 드나들고 있다.
‘금진()’이란 지명은 원래 ‘조금나루’라고 하였다.

그러다가 돌산군 시절 ‘소진()’으로 개칭되었다가 마을이 북쪽 해안에 위치하여 조금 때에는 암석이 노출되므로 조금너리라

하였는데 예부터 이곳에 나루터가 있어 나루 진()자를 붙여 금진()이라 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거금도는 1960~1970년대 박치기로 국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주었던 전설적인 프로레슬러 고() 김일 선수의 고향이다.

국도를 타고 면사무소를 지나면 왼쪽으로 ‘김일기념체육관’ 간판이 보이고, 건물 뒤쪽엔 체육관도 있다.

원래 ‘김일체육관’이었는데 ‘김일기념체육관’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박치기 왕’으로 국내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그는 1929년 거금도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184cm의 거구였던 김일 선수는 어렸을 때부터 각종 씨름대회를 휩쓸었을 만큼 이름난 장사였다고 한다.

그의 특기인 박치기로 인해 우리의 영웅이 되었지만 말년에는 박치기를 많이 하여 큰 고생을 하였다.

김일 기념체육관 앞에는 김일의 생가와 그가 잠든 묘역, 기념비 등이 세워졌다.

오천항이 있는 27번국도 끝 오른쪽으로 넓은 공간이 있고 중간지점에 종점표지석이 하늘을 향해 뻗어 있다.

오른쪽으로는 방파제 가는 길이 있는데 바로 앞 조그마한 무인도를 연결하여 하나의 섬으로 만든 것이다.

길은 계속 방파제까지 이어져 방조제와 방파제를 잇는 것은 무인도, 온통 돌로 된 바위섬이다.

주변에 소나무가 몇 그루 심어져 있으나 온통 바위다.

바위 위에서 자라는 소나무의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다. 여기서 앞을 바라보면 큰 섬이 바로 시산도이다.

바위 위에서 마을을 바라보면 오천마을이 제법 큼을 알 수 있다.

오천마을은 적대봉 등산코스로 고흥군에서는 팔영산(608.6m) 다음으로 높다는 ‘적대봉(, 592.2m)’이 위치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