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 강진의 하룻길, 영랑생가와 세계모란공원, 그리고 금서당과 사의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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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따라 트레킹/발길 머무는 곳에

감성 강진의 하룻길, 영랑생가와 세계모란공원, 그리고 금서당과 사의재..

by 정산 돌구름 2018. 11. 19.

감성 강진의 하룻길, 영랑생가와 세계모란공원, 그리고 금서당과 사의재..


 


2018년 11월 15일(목), 강진 영랑생가(강진읍 남성리 211-1)를 찾아서...

감성 강진의 하룻길, 영랑생가와 세계모란공원, 그리고 정약용 남도유배길 따라 금서당과 사의재를 걸어본다..


20세기 초에 지어진 김영랑( 1903∼1950)의 생가는 중요민속자료 제252호로 지정되어 있다.

영랑생가는 현재 본채와 사랑채, 그리고 문간채 등 3동만 남아 있고, 주변에는 영랑의 시어()가 되는 모란밭이 있다.

생가의 본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인 초가집이지만 뼈대가 굵은 네모기둥을 사용한 규모가 큰 집이다.

상량문에 “광무10년 병오4월()…”이라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집의 건립연대는 1906년임을 알 수 있다.

사랑채는 흔히 안채 앞에 있는 것이 일반적인데 영랑생가는 옆으로 길게 위치한다.

사랑채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오히려 본채보다도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편이다.

특이한 것은 전면과 양측 2칸에 ㄷ자형으로 마루를 깔았으며, 우측 1칸에는 마루 앞에 나지막한 난간을 설치하였는데

안상형() 궁창(문의 하부에 낮게 끼워 댄 널)을 뚫었다.

창문은 이중창문으로 내창은 아자()살 모양의 미서기창이며, 외창은 띠살 모양의 여닫이창이다.

이 사랑채는 1930년대 건물로 전해지고 있다.

영랑 김윤식은 1903년1월16일, 이곳에서 대지주 집의 5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강진보통학교를 졸업 후 1917년에 서울 휘문의숙에 들어갔는데 당시 휘문의숙에는 그의 선배로 홍사용·안석주·박종화가 있었고

또 후배로는 정지용·이태준 등이 있었다.

3학년 때 3·1 운동이 일어나자 영랑은 고향으로 내려와 강진 장날에 만세운동을 일으키려다 발각되어 대구형무소에서 6개월

동안 복역했다.

1920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 학원 중학부에 다니며 용아 박용철 시인과 사귀었다.

1921년에 잠시 귀국했다가 1922년에 다시 일본으로 가서 아오야마 학원 영문과에 들어갔으나 관동대지진이 나자 그만두고

귀국했다.
1930년에 박용철·정지용·이하윤·정인보·변형윤 등과 『시문학』지를 창간하고 그 지면에 ‘모란이 피기까지는’,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 등 시를 발표하면서 영랑은 본격적인 시작 활동에 들어갔고 여러 잡지에 작품을 발표했다.

1935년에 ‘영랑시집’이 나왔고, 그후에도 시편들을 내놓았으나 영랑의 시 세계는 주로 1930년대의 작품들로 대변된다.
광복 후에는 강진에서 대한청년회 단장을 맡는 등 우익 운동을 주도했고 1948년에는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기도 하는 등,

강진의 자연처럼 따사로운 시를 통해서만 그를 알았던 사람들에게는 다소 의외로 느껴지는 활동을 하기도 했다.

1948년에 서울로 이사했고 이듬해에는 이승만 정권 밑에서 공보처 출판국장으로 일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서울에 숨어 있었는데 9·28 수복 때 포탄 파편을 맞고 이튿날 돌아갔다. 그의 나이 47세였다.


세계모란공원은 영랑생가 뒤편으로 이어져 영랑의 문학적 감성과 보은산 도시공원의 자연경관이 어우러진 생태문학공원이다.

사계절모란원, 세계모란원, 영랑추모원 등 사시사철 모란꽃을 감상할 수 있다.


금서당(琴書堂)은 강진 영랑 생가의 약 150m 위쪽, 보은산 선인봉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일찍부터 서당 역할을 하였고 일제강점기에 사립 금릉학교에서 강진공립보통학교를 거쳐 강진중앙초등학교로 이름이 바뀌면서

강진지역에 신학문을 보급하는 터전이 되었다. 

한동안 폐허로 방치되어 있었으나, 1950년 이후 화가 김영렬이 매입하여 관리해왔으며, 2003년 김영렬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부인 박영숙이 남편의 작품을 보관하며 관리하고 있다.

건물은 반쪽자리 2채의 건물을 붙여놓은 모습인데 반쪽은 기와, 다른 반쪽은 슬레이트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몸체도 오래된

옛집에 벽돌집 절반을 붙여지었다.


사의재(四宜齋)는 다산 정약용이 1801년 강진에 유배 와서 처음 묵은 곳이다.

사의재는 이곳 주막집(동문매반가) 주인 할머니의 배려로 골방 하나를 거처로 삼은 다산이 몸과 마음을 새롭게 다잡아 교육과

학문연구에 헌신키로 다짐하면서 붙임 이름으로 "네가지를 올바로하는 이가 거처하는 집"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다산은 생각과 용모와 언어와 행동, 이 네가지를 바로하도록 자신을 경계하였던 것이다.

“생각을 맑게 하되 더욱 맑게, 용모를 단정히 하되 더욱 단정히, 말을 적게 하되 더욱 적게, 행동을 무겁게 하되 더욱 무겁게” 할

것을 스스로 주문하였다.

사의재는 창조와 희망의 공간이다.

사려깊은 주막 할머니의 “어찌 그냥 헛되이 사시려 하는가? 제자라도 가르쳐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얘기에 자신 스스로 편찬한

『아학편』을 주교재로 교육을 베풀고, 「경세유표」와 「애절양」 등을 이곳에서 집필하었다.

 다산은 주막 할머니와 그 외동딸의 보살핌을 받으며 1801년 겨울부터 1805년 겨울까지 이곳에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