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제남/태항산/천계산/팔천협 4박5일 여행.
본문 바로가기
해외여행/중국

중국 제남/태항산/천계산/팔천협 4박5일 여행.

by 정산 돌구름 2018. 7. 5.

중국 제남/태항산/천계산/팔천협 4박5일 여행..


여행기간 : 2018628(목) ~ 7월 2(월) - 45

   <13:10 인천(KE0847) ~ 14:05 제남 도착, 15:05 제남(KE0848) ~ 17:45 인천 도착>

여 행 지 : 중국 제남 + 팔리구 + 천계산 + 왕망령(비나리길) + 통천협 + 태항산 대협곡 + 팔천협 + 부용가 + 흑호천

여행인원 : 14(남 10, 여 4)

여행경비 : 890,000(549,000비자 65,000, 선택(가이드, 통천협, 왕망령+비나리길 250$)

여 행 사 : 모두투어(인솔자 없음, 현지가이드 우홍량)

일정별 요약

 ○ 1일차(628, 목) : 광주~인천국제공항~대한항공~제남공항~신향 원윤온천호텔

 ○ 2일차(629, 금) : 신향~팔리구~천계산 노야정~운봉화랑~왕망령~비나리길~임주

 ○ 3일차(6월30, 토) : 통천협~태항대협곡(환산선~도화곡(황룡담,함주,이룡희주,구룡폭포)~태항천로~임주~전신맛사지

 ○ 4일차(7월  1, 일) : 임주~팔천협(유람선~케이블카~엘리베이터)~임주~제남

 ○ 5일차(7월  2, 월) : 제남~부용가 거~흑호천~제남공항~인천국제공항~광주



중국에 대한 이해

  유구한 역사와 방대한 국토를 지닌 중국(中國)은 풍부한 문화유적과 빼어난 산수를 자랑한다.

  중국은 하나의 국가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도 큰 다양성을 지닌 나라이다.

  중국인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56개의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진 민족을 품고 있으며, 5천년이 넘는 장구한 역사 속에는 수많은

  나라들이 거쳐 갔다.

  러시아와 캐나다, 미국에 이어 세계 4위의 광대한 국토를 보유해 풍부한 자원, 다양한 기후와 자연의 모습들을 지니고 있다.

  21세기로 들어오면서 중국은 공산국가로 대표되는 구시대적 이미지를 벗어버리고 도약기를 맞고 있다.

  그들은 세계 최대의 인적자원과 광대한 국토, 그 땅에서 나오는 물질적 자원을 바탕으로 세계 최강의 국가를 꿈꾸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져 있는 세계문화유산 만리장성(萬里長城), 자금성(紫禁城), 진시황릉, 병마용 등을 비롯하여 영산인

  백두산, 상해, 중경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 등 한국 사람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 유적과 관광지들이 많다.

  동(태산), 서악(화산), 중악(숭산), 북악(항산), 남악(형산) 5개악을 중국 으뜸 라 한다.

  또한 세계에서 유일하게 표의문자(뜻글자)를 쓰고 있는 나라이며, 세계 최대의 인구를 지닌 나라이다.

  ○ 국명 :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 / 수도 : 북경(北京, 베이징)

  ○ 면적 : 9,596,960(CIA 기준 세계 4, 한반도의 44, 남한면적의 약96)

  ○ 인구 : 1,415,046,000명 세계1(2018 CIA 기준)

  ○ 언어 : 표준어 - 普通話, 지역별로 8종류의 방언

  ○ 종교 : 도교, 불교 35%, 그리스도교 3.5 이슬람교 1.5%

  ○ GDP : 12조 146억$(2018 IMF 기준, 세계 2위) / 1인당 8,643$(세계 73위)

 < 기후 >

  넓은 국토에 열대, 온대, 냉대 등 다양한 기후가 분포되어 있다.

  양쯔강과 황허 주변의 대부분 지역은 온대기후에 속해 사계절이 뚜렷하며 사람이 살기 적당하다.

  남부의 하이난과 윈난 등은 일년 내내 봄 날씨가 이어지며 비가 자주 내린다.

  북부의 둥베이 삼성(헤이룽장, 지린, 랴오닝)은 겨울이 길고 상당히 추우며 눈도 많이 내린다.

  사막이 있는 서북지역은 비가 거의 내리지 않아 늘 건조하여 여름은 덥고 겨울은 추우며 일교차가 큰 전형적인 사막기후이다.

  서남부의 고산지대에서는 전형적인 고산기후가 나타난다.

  여름기온이 35를 넘는 장강연변이 있는가하면, 겨울기온이 -30까지 내려가는 동북지방도 있다.

  실크로드 지방에서는 밤낮의 기온 차가 20~30까지 나기도 한다.

 < 지리 >

  육지 면적만 약 9,596,960에 이르는 세계 4위의 영토 대국으로 한반도의 44배, 남한면적의 약 96배에 달한다.

  국토는 북위 53º에서 북위 까지 남북 5,500km, 동경 135º에서 동경 73º까지 동서로 우수리강(烏蘇里江)과 헤이룽강

  (黑龍江)의 합류점에서부터 파미르 고원까지 5,200km에 달한다.

  북동쪽으로 한국·러시아연방, 서쪽으로는 카자흐스탄·키르기스스탄·타지키스탄·아프가니스탄, 남서쪽으로는 인도·파키스탄·

  네팔·부탄, 남쪽으로는 미얀마·베트남·라오스, 북쪽으로는 몽골·러시아연방과 각각 국경을 이룬다.

  행정구역은 간쑤(甘肅)·광둥(广东)·구이저우(贵州)·랴오닝(辽宁)·산둥(山东)·산시(山西)·산시(陝西)·쓰촨(四川)·안후이(安徽)

  ·윈난(云南)·장시(江西)·장쑤(苏)·저장(浙江)·지린(吉林)·칭하이(青海)·푸젠(福建)·하이난(海南)·허난(河南)·허베이(河北)

  ·헤이룽장(黑龙江)·후난(湖南)·후베이(湖北)·타이완(台湾)23개 성()과 광시장족(廣西壯族)·네이멍구(内蒙古)·닝샤후이

  족(寧夏回族)·시짱(西藏 티베트신장웨이우얼新疆维吾尔 위구르) 등 5개 자치구(自治區), 베이징(北京)·상하이(上海)·충칭

  (重庆)·톈진(天津) 등 4개 직할시, 마카오(澳门)·홍콩(香港) 등 2개 특별행정구로 이루어져 있다.

  산맥, 분지, 고원, 평원, 사막 등 다양한 지형이 공존하며, 전반적으로 서쪽의 지대가 높고 동쪽이 낮은 편이다.

  황허와 양쯔강 사이의 남북 분계선을 기준으로 북부와 남부 지역이 기후, 기질 등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 인구와 민족 >

  중국 인구는 현재 14억1천5백만명을 넘어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지고 있다.

  중국정부는 인구의 급속한 증가를 막기 위해 한족(漢族)에 한해 1가구1자녀 정책을 펴왔다.

  하지만 이 정책의 역효과로 농촌지역에서는 호적에 오르지 못한 아이들이 증가하기 시작했는데 이 아이들은 흑해자(黑孩子,

  헤이하이즈) 라고 불린다.

  그리고 중국 정부의 강력한 인구 억제 정책에도 불구하고 2025년에는 중국인구가 15억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은 56개의 민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중 91.5% 이상을 한족(漢族)이 차지하고 있으며, 장족, 회족, 묘족, 만주족 등

  55개의 소수민족이 나머지 8.5% 정도를 차지한다.

  그 중 우리나라와 밀접한 관계를 지닌 조선족은 약 200만 명이며, 이들 대부분은 연변 조선족 자치구에 살고 있다.

 < 중국인 >

  장대한 대륙을 닮은 중국인의 성격을 가장 핵심적으로 표현한 말은 “만만디(慢慢地)”이다.

  말 그대로 중국인의 성격은 느긋하고 나아가 대범하다.

  또 중국인은 관계(關係, 꽌시)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 중에서도 신용을 첫째로 꼽는다.

  이 때문에 중국인은 쉽게 자기 속을 드러내지 않고 깊이 친해졌다는 생각이 들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생각을 드러낸다.

  따라서 중국인과 교류하기 위해서는 이 '꽌시'라는 말부터 이해해야하고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 언어 >

  일반적으로 한어(漢語)로 불리는 중국어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사용하는 언어로 표준어를 보통화(普通話)라고 한다.

  중국에는 지역에 따라 방언이 심해 중국인 사이에서도 의사소통이 안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최근에는 정부차원의 국어사용

  운동으로 표준어 사용이 활발해지고 있다.

 < 시차 >

  한국표준시차(GMT+9)보다 1시간 늦은 GMT+8을 사용하고 있다.

 < 통화 >

  인민폐(RMB) 단위는 원(, 위엔=), (, 지아오=), (, )이다. 1=10=100

  1이하 단위는 동전과 지폐가 함께 사용되는데, 특히 남방지역으로 갈수록 동전이 많이 유통되고 있다.

  갈수록 단위의 사용이 사라지고 있으며, 그 외의 지폐는 5, 10, 50, 100원짜리로 구분된다.

  1위안(CNY) = 167.46/ 1달러(USD) =6.4위안(CNY) 2018년6월5일 기준

 < 전압 >

  일반적으로 220V이지만, 플러그의 모양이 틀려서 우리나라의 전기제품들과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

 < 전화 >

  중국의 국제전화는 한국에 비해 70%이상이 비싸다.

  따라서 현지 직통전화보다는 한국 통신사를 통한 수신자부담 서비스(Collect Call)를 이용하는 것이 더 저렴하다.

  * 중국에서 한국으로 직통전화(IDD) : 00 + 82 + 0을 뺀 지역번호 + 개인번호

  * 한국 수신자 부담 전화 - 한국통신 : 10800-820-1611

 < 중국의 음식문화 >

  地大物博(지대물박) - 중국은 땅이 크고 자원이 많아 각 지방의 기후, 풍토, 산물 등에 각기 다른 특색이 있다.

  없는 것만 빼고는 다 있는 곳, 중국. 그래서 중국음식의 재료와 내용, 모양과 맛도 천차만별이다.

  일반적으로 중국요리에 대해서 '동쪽은 시고, 서쪽은 맵고, 남쪽은 달고, 북쪽은 짜다'라는 말이 있다.

  그에 따라 경제, 지리, 사회, 문화 등 다양한 요소가 작용하여 4대 요리가 형성되었다.

  황허강 유역 및 기타 북방은 베이징(北京)요리를 대표로 하고, 양쯔강의 하류는 상하이(上海)요리를,

  양쯔강의 중상류는 쓰촨(泗川)요리를, 쭈강 유역은 광둥(廣東)요리를 대표로 하고 있다.

  1. 베이징(北京) 요리 징차이(京菜)라고 한다.

    베이징이 가장 화려한 문명을 자랑한 것은 청나라 때로 이때부터 궁중을 중심으로 중국 각지에서 명물 진상품과 우수한

    요리사들이 모여 각지역의 장점만을 받아들인 음식문화를 발달시켰다.

    중국 요리의 별칭인 ‘()요리’도 이때 유래된 것이다. 밀의 생산이 많아 면류·만두·전병의 종류가 많은 것도 특징이다.

    대표적인 음식은 베이징 오리 요리이고,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중국집은 대부분 이 베이징 요리법을 따르고 있다.

  2. 상하이(上海) 요리 일명 쑤차이(蘇菜)라고 한다.

    양쯔강 하류지역을 대표하는 도시는 난징이지만 상하이가 항구로서 발달하여 국제적인 풍미를 갖추었기 때문에 상하이

    요리로 부르고 있다. 상하이 요리는 비교적 바다와 가깝기 때문에 해산물을 많이 이용한다.

    음식의 색이 화려하고 선명하도록 만들며, 그 지방의 특산품인 간장과 설탕을 써서 진하고 달콤하며, 기름지게 만드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9월 말부터 1월 중순에 맛볼 수 있는 상하이의 게 요리는 전 세계 식도락가들이 최고로 뽑는 진미이다.

  3. 쓰촨(四川) 요리 챤차이(川菜)라고 한다.

    중국의 곡창지대로 유명한 쓰촨 분지는 해산물을 제외한 사계절 산물이 모두 풍성해 야생 동식물이나 채소류, 민물고기를

    주재료로 한 요리가 많다. 더위와 추위가 심해 향신료를 많이 쓴 요리가 발달한 것이 특징으로, 그에 따라 매운 요리와 마늘·

    파·고추를 사용하는 요리가 많다. 깨끗함, 신선함, 순수함과 진함이 함께 느껴지는 저리고 매운 맛을 잘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누룽지탕, 마파두부 등이 대표적이다.

  4. 광둥(廣東) 요리 위에차이(粵菜)라고 한다.

    광둥지역은 동남 연해에 위치하여 기후가 온화하고 재료가 풍부한 곳이다.

    그래서 “먹는 것은 광둥에서”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광둥 지역은 예부터 요리가 발달한 곳이다.

    특히 외국과의 교류가 많은 지역으로 전통 요리와 국제적인 요리의 특성이 조화를 이뤄 독특하게 발달하였다.

    서유럽 요리의 영향을 받아 쇠고기, 서양 채소, 토마토 케첩 등 서양 요리재료와 조미료를 받아들인 요리도 있다.

    간을 싱겁게 하고 기름도 적게 써 가장 대중적인 요리로 꼽힌다.

    탕수육과 팔보채, 중국 요리의 보석으로 꼽히는 딤섬도 광둥 요리이다.

    2백여 가지의 맛과 모양을 가진 딤섬(點心)은 모양에 따라 교, 파오, 마이, 쇼마이, 편 등 크게 다섯 종류로 나눌 수 있다.

    ※ 중국의 8대 요리

    8대 요리체계가 완성된 것은 청나라 말기로 청나라 초기에는 4대 요리, 즉 쓰촨요리(川菜), 산둥요리(鲁菜), 광둥요리

    (粤菜), 장쑤요리(苏菜)만 있었던 것이 청나라 말기에 이르러 음식의 조리법이 점점 다양해지면서 저장요리(浙菜),푸젠요리

    (闽菜), 후난요리(湘菜), 안후이요리(湘菜)가 추가로 늘어났다.

  1. 쓰촨 요리(川菜) : 혀가 얼얼한 매운맛(), 매운맛(), 짠맛, 신맛, 쓴맛, 고소한맛 등 6가지 맛의 배합을 특징이다.

    각종 향신료가 어우러진 강한 맛이 특징이며, 마파두부(麻婆豆腐)가 바로 쓰촨(泗川) 요리이다.

  2. 산둥 요리(鲁菜) : 산둥요리는 역사가 매우 깊어 송나라 때부터 북쪽 음식의 대표로 자리매김하였다.

    산둥(山東)요리는 지리적으로도 수도인 베이징과 가까워서 명(), ()대 궁중요리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다양한 조리법과 담백하고 신선한 맛이 특징이다.

  3. 장쑤 요리(苏菜) : 예로부터 부유하고, 따뜻한 장쑤성은 유명한 요리사들을 많이 배출한 지역이다.

    장쑤(江蘇)요리는 대체로 매운맛이 덜하고 달콤한 맛이 강하다. 양쯔강 하류에 위치한 데다 호수가 많은 지역이라 강이나

    호수에 나오는 생선, , 장어, 새우 등 민물고기를 재료로 쓰는 요리가 많다.

  4. 안후이 요리(徽菜) : 귀한 야생 동식물과 약재 생산지로 유명한 곳이어서 지역적 특성을 이용한 보양식이 발달하였다.

    중국 중부에 위치한 안후이(安徽) 지방은 바다에 접해 있지 않고, 남부에는 산이 많고, 중부와 북부는 장강, 회하 유역으로

    회북평원을 형성하고 낮고 습한 지역이 많다는 지리적 특징이 있다.

    따라서 산에서 채취할 수 있는 산나물, 차, 죽순, 버섯, 야생 동물과 민물고기, 자라 등 민물 식재를 사용하는 특징이 있다.

  5. 저장 요리(浙菜)

    저장(浙江) 지역의 요리 맛은 식감이 부드럽고, 짠맛이 조금 강하며, 담백한 맛이 특징이다.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동파육(东坡肉)이 바로 저장요리이다.

  6. 푸젠 요리(闽菜) : 푸젠(福建) 요리는 해산물요리가 많은데 맛은 대체로 달고 짜고 시고 향기롭다.

    푸젠 지역은 화교를 많이 배출한 지역으로 이 지역의 화교들이 일본으로 진출한 경우가 많아서 푸젠요리는 일본의 중화요리

    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일본의 나가사끼 짬뽕의 원형은 바로 푸젠 요리에서 출발하였다고도 한다.

  7. 후난 요리(湘菜) : 후난(湖南) 요리는 매콤, 새콤하고 담백한 맛을 특징으로 한다.

    쓰촨의 매운맛과 더불어 중국식 매운맛으로 유명한 고장이다쓰촨의 매운맛이 산초와 후추, 고추의 얼얼하고 매운맛이라면

    후난의 매운맛은 고추와 마늘의 깔끔한 매운맛이라고 할 수 있다.

  8. 광둥 요리(奥菜) : 중국 사람들은 하늘을 나는 날짐승과 땅에서 달리는 모든 동물을 식재료로 해서 먹는다.’라는 인식을

    심어준 요리가 바로 광둥요리로 요리재료가 아주 다양하기로 소문이 난 지역이다.

    광둥(廣東)지역은 청나라 말기 유럽과 교류가 많았던 지역으로 광둥음식은 중국음식 중 서양에 가장 먼저 알려진 음식이다.

    미국에서 자리 잡은 중화요리들은 바로 광둥 지역 요리들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또한, 중국 음식은 8대 요리 이외에도 둥베이 요리(东北菜), 베이징 요리(京菜), 톈진 요리(津菜),허베이 요리(冀菜),허난

    요리(豫菜),후베이 요리(鄂菜),장시 요리(赣菜), 상하이본방 요리(本帮菜), 회교요리(清真菜) 등이 유명하다.

 [중국인의 식사예절]

  중국인은 우리가 말하는 의식주(衣食住)를 식의주(食衣住)라고 할 만큼 식사와 식사예절을 매우 중시한다.

  식사 분위기는 비교적 자유분방하며, 정성을 다해 손님을 접대한다.

 1. 식탁은 원형으로 되어 있으며, 음식을 놓는 부분이 빙글빙글 도는 원판 테이블을 사용한다.(원탁은 화목과 단결을 상징)

 2. 자리를 앉을 때는 집에서는 손님이 안쪽에 앉고 주인이 입구에 앉으며, 밖에서도 비슷하지만 때로는 주인과 손님이 옆에

   나란히 앉는 경우도 있다.(나머지 사람들은 안쪽에서부터 자리를 차지하여 앉음.)

 3. 요리가 나오면 손님이 먼저 맛을 보도록 손님 앞에 놓는다.

   (생선요리는 생선머리가 앉아있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신분이 높은 손님에게 향하도록 놓음)

 4. 요리는 원판을 돌려가며 자유롭게 조금씩 덜어서 먹는다.(맛있다고 혼자 많이 먹으면 실례)

 5. 요리접시를 완전히 비워서 먹는 것은 오히려 실례이므로 음식은 조금씩 남긴다.

   (우리와 달리 접시를 완전히 비우면 음식이 모자라는 것으로 간주되어 결례)

 6. 차나 술도 손님부터 시작하여 따라서 마신다.(항상 손님 위주로 음식을 배려함)

중국의 역사

< 고대 >

  중국 전설에 의하면 상고의 3(三皇)·5(五帝)의 평화시대를 거쳐 하((()3(三代)가 계속되었다 한다.

  은허에서 발견된 귀갑수골(龜甲獸骨)에 새겨진 한자의 최고형(最古形)인 복사(卜辭)에 의하여 상대의 사회를 알 수 있다.

  상나라는 웨이수이(渭水)에서 일어난 주나라에 의하여 멸망되었는데 주나라는 왕권의 확립과 사회의 안정에 따라 제자백가

  (諸子百家)와 같은 문화가 발달하였다.

  주나라는 BC 770년 수도를 낙읍(洛邑, 지금의 洛陽縣)으로 옮겼다. 주나라의 동천 후 춘추(春秋, BC 770BC 403)시대를

  거쳐 전국(戰國, BC 403BC 221)을 거쳤고 BC 221, ()나라의 시황제(始皇帝)가 천하를 통일하였다.

  진나라는 중앙집권군현제도를 단행하고 행정·군사·감찰의 3권분립 체제를 세웠다.

  또, 만리장성을 축조하고 국위를 사방에 떨쳐 진(Chin)의 이름이 서쪽에 전해져 china라는 명칭의 기원이 되었다.

  그러나 BC 207년 진은 멸망하고, 서민 출신인 유방(劉邦)이 장안(長安)을 수도로 한왕조(漢王朝)를 창업하였다.(BC 202)

  한대에는 서방과의 교통이 활발하여 그 문화가 수입됨으로써 중국 문화의 내용이 충실해졌다.

  지방 호족세력이 발전하게 되어 한때 왕망(王莽)이 신()을 건국하였지만 15년 만에 무너지고 광무제 유수(劉秀)에 의하여

  후한(後漢 25220) 시대가 된다.

  그러나 전한부터의 타성이 그대로 남아 184년 황건적(黃巾賊)의 난을 계기로 몰락의 기로에 들었다.

< 중세 >

  황건적의 난으로 군웅할거 시대가 된 중국 국토는 조조(曹操)의 아들 조비(曹丕)가 낙양에 세운 위()와 유비(劉備)가 청두

  (成都)에 세운 촉한(蜀漢), 그리고 양쯔강 ·하류에 손권(孫權)이 세운 오() 등의 3나라로 삼국시대가 되었다.

  280년 위의 신하이던 사마씨(司馬氏)3국을 통일하여 서진(西晉)이 되었고, 4세기 초 흉노(匈奴)의 침입으로 난징으로

  옮겨 동진(東晉)이라 하여 명맥을 유지하였다.

  그 후 송(((()4(四朝)와 오(()을 더한 6(六朝)가 교대되었는데 이 시대의 문화는 귀족과

  호족들의 풍족한 생활에서 전개된 화려하고 우미한 것이었다.

  한편, 화베이지방은 516(五胡十六國)이 서로 싸우다가 선비족(鮮卑族)439년 북위(北魏)로 통일하여 송()나라와

  대항하여 남북조 형세를 이루었다.

  수나라 문제(文帝)는 군권을 강화하고 과거제도를 시작하였으며, 양제(煬帝)대운하를 만들었지만 고구려와 싸워 대패함

  으로써 내란이 일어나 618년 멸망하였다.

  이연(李淵)이 장안을 점령하고 당()나라의 제위에 올라 이후 당나라는 넓은 대제국으로 영토를 확대하였다. 귀족의 취미와

  외형미를 강조하는 당대의 문화는 국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이런 문화는 인접국가에 파급, 동아문화권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후기로 오면서 귀족계급이 몰락하고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나 907주전충(朱全忠)의 후량(後梁)에 멸망되었다.

  이후 510여개국이 흥망하였다.

  979년 송()은 중국을 재통일하였으나 문치주의정책을 펼치면서 군사력이 약화되어 북방 유목민 세력이 크게 확장되었다.

  거란족(契丹族)의 요(), 탕구트족(Tangut, 黨項族)의 서하(西夏), 여진족(女眞族)의 금() 등이 송()을 압박하였다.

  이들 나라들은 훗날 몽고족이 세운 원()이나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처럼 독자적인 문화를 지니고 중국문화에 큰 영향을

  끼쳐 정복왕조(征服王朝)’라고 불린다.

  1127년에 송()은 금나라의 압박으로 강남(江南)으로 옮겨갔지만, 1279칭기즈칸이 이끈 몽고군에 멸망했다.

  몽고족의 원()1368주원장(朱元璋)이 세운 명()에 도성인 대도(大都, 베이징)가 함락되며 실질적으로 멸망했다.

  명()1644년 민란 지도자인 이자성(李自成)에 의해 멸망했고, 그 해 산하이관(山海關)을 넘어온 만주족의 후금(後金)

  베이징을 점령하면서 다시 정복왕조인 청()이 중국을 지배하였다.

< 근대 >

  중국사에서 서양세력이 침투하기 시작하여 전통왕조 체제에서 새로운 체제로 전환하는 시기로서 1840아편전쟁부터

  19195·4운동까지를 근대사로 구분하고 있다. 이는 청()나라 말기부터 중화민국 초기까지에 해당한다.

  청나라는 무역개방을 요구하는 영국의 침략을 받았다.(1840년 아편전쟁)

  이로써 동양의 전통적인 대제국은 서양 근대국가의 침략을 받게 되었고, 중국의 근대사는 피침사로 시작되었다.

  이 전쟁에서 패한 청은 반식민지화의 길로 접어들었고, 서양 자본주의의 침투로 전통적 전제사회는 혼란에 빠졌다.

  이에 불만을 갖고 홍수전(洪秀全)태평천국(太平天國)을 건설한다는 이상으로 농민전쟁을 일으켜 세력을 형성하였다.

  (태평천국의 난, 1850~1864) 그러나 결국 정부군에 의해 토벌되었다.

  청나라는 1856애로호사건으로 제2차 아편전쟁을 맞았고, 이로 인해 서양 열강의 반식민지화가 더욱 심화되었다.

  청 황족이 거주하던 집단거주지였던 원명원(圓明園)은 영·연합군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었고, 베이징(北京)이 점령되었다.

  이후 청나라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북경조약으로 화해하였다.

  러시아는 영국, 프랑스와의 북경조약을 주선한 대가로 중국으로부터 연해주를 할양받았다.

  열강의 침략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중국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양무운동(洋務運動, 1862)이 일어나 서양문물을 배우고

  도입하자는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그러나 서양 물질문명을 수용하되 중국 전통의 정신과 철학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는 동도서기(東道西器) 정신을 유지하였다.

  열강들의 중국내 세력 강화와 청일전쟁의 패배 등에 자극받아 캉유웨이(康有爲), 량치차오(梁啓超) 등 일부 선각자들은 국내

  제도의 혁신을 통해 중국을 근대화시켜 난국을 타개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변법자강(變法自强)운동을 일으켰다.

  그 결과 광서제(光緖帝)는 이들을 중용하고 과거제 개혁, 근대학교 설립, 관보발행, 입헌정치 계획 등 개혁정치를 단행하였다.

  그러나 어린 광서제와 서태후(西太后) 사이에 갈등이 생기고 개혁정치를 반대하는 서태후와 조정 보수파 관료들이 정변을

  일으켜 개혁파를 축출하고 실권을 잡았다(무술정변, 1898). 그리고는 개혁정치를 중단하고 과거체제로 회귀하였다.

  이는 중국이 보수화의 길을 택하여 근대화가 지연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열강의 침투로 중국은 일본을 비롯하여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열강이 전국을 분할 관리하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

  특히 중국이 청불전쟁(1884~1985)에서 프랑스에게 패하고 청일전쟁(1894)에서 일본에게 패함으로서 베트남, 조선 등에서

  종주권을 상실하였고, 타이완마저 일본에게 내주어야 했다.

  그 결과 청조는 그 동안 동양의 강자로 군림하던 패권을 일본에게 내주었고, 동양의 국제질서가 일본 중심으로 전환되었다.

  열강들의 약취에 대항, 1900년 의화단(義和團)이 봉기하여 외국공관에 방화하는 등 저항하였으나 연합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청 정부의 위약과 열강세력의 침탈 속에서 한족(漢族) 중심으로 멸만흥한(滅滿興漢)운동이 일어났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쑨원(孫文)이 주동이 되어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이 일어났다.

  이로써 1912년 전통왕조인 청조가 망하고 중화민국(中華民國)이 탄생하였다.

  1914년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독일이 중국 경영에 소홀한 틈을 타 일본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대전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리고 독일이 경영하던 지역인 산동반도일대에 일본군이 상륙하고 항구도시인 청도(淸島)를 점령하였다.

  일본은 중국 정부에 이권을 요구하는 내용의 21개조 요구를 하였고, 이에 대한 중국의 반일 감정이 일어났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료되고 세계는 평화를 추구하게 되었다. 이때 한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나 독립을 쟁취하려 하였고,

  중국에서는 이러한 추세를 타고 1919년 일본의 21개조 요구에 반대하는 5·4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일본 군국주의의 적극적 공세로 중국은 일본의 침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 현대 >

  산업혁명을 치른 서구의 문화가 명나라 말기, ()나라 초기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영국아편전쟁을 일으켜 청왕조에 큰 타격을 주었다. 서구 세력들의 물밀듯한 침점으로, 홍콩(香港)을 영국에게,

  만주 북방을 러시아에게 할양하고, 안남(安南) 등 조공국에 대한 종주권(宗主權)을 잃었으며, 국내 요소에 외국 조계(租界)

  많이 설치되어 청왕조의 주권이 미치지 못하게 되었다. 이러한 동요 속에서도 근대화를 도모하고자 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동치중흥(同治中興)을 통해 근대공업이 일기 시작하였으나 청일전쟁이 일어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청일전쟁 직후에는 캉유웨이(康有爲)의 점진개혁론이 활발하였으나 무술정변(戊戌政變)에 의하여 실패하고 의화단(義和團)

  북청사변(北淸事變)은 청왕조를 더욱 궁지로 몰아넣었다.

  러일전쟁 후 쑨원이 신해혁명(辛亥革命)에 의하여 임시 대통령에 취임하여(1912) 2,000년 이래의 전제군주제가 무너지고

  공화제중화민국이 탄생되었으나 그 후 약 20년간 군벌의 압제에 시달려야 했다.

  쑨원의 사후에 후계자가 된 장제스(蔣介石)는 북벌(北伐)의 성공으로 양쯔강 유역에 진출하였다.

  난징사건이 일어나 소련과 단교한 장제스는 군벌 장쭤린(張作霖)을 몰아내어 국민정부를 정통정부로 만들었다.(1928)

  장제스는 소련과 단교하였을 때 중국공산당도 탄압하였는데, 이때 공산당은 지하로 숨어 소련의 원조를 받았다.

  일본의 침공이 격화되자 장제스는 다시 공산당과 화해하여 일본에 대항하였고 그동안에 공산당의 세력이 증대해 갔다.

  공동의 적인 일본이 패하자 국민정부와 공산당은 다시 적대관계로 돌아가 국공내전이 계속되다가 국민정부가 패하여 대만으로

  물러가고 공산당은 1949중화인민공화국을 세웠다.

  1949101일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베이징에 세우고 마오져뚱(毛澤東)국가주석 및 혁명군사위원회 주석으로 뽑혔다.

  194912월 소련을 방문하여 19502월 중소우호동맹호조조약과 기타 협정을 맺었다.

  건국 후 1949~1955년까지는 초기 변혁기에 해당, 자본주의를 적대시 하였으나 류사오치를 중심으로 정부의 능률적 경영이

  중시되면서 중앙집권적 관료조직이 팽창하였다.

  1955~1959년의 시기는 새로운 변혁기로 마오쩌둥실용주의 노선에 반대하면서 대중노선을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마오쩌둥은 시중심의 공업화에 반대하고 중국의 공업화이전에 농업집단화를 추진할 것을 주장하여 대약진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관료주의화된 당을 비판하고 당은 인민에 의해 끊임없는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에 따라 중국 농촌의 99% 이상이 집단적인 인민공사로 재편되었다.

  그러나 농업생산력은 하락하였고 자연재해로 중국 경제는 매우 어려운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우선시하였던 마오쩌둥의 농업집단화정책은 실패로 끝나고, 공산당내 노선갈등이 다시 나타났다.

  1959년부터 문화혁명 이전인 1966년 초반까지는 이념보다 다시 효율성전문성이 강조되는 시기가 되었으며 마오쩌둥은

  2선으로 물러났다. 1959년 중공 당정치국 회의에서 펑더화이(彭德懷)는 마오쩌둥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덩샤오핑(鄧小平),

  류샤오치(劉少奇)와 연합하여 인민공사를 축소하고 자작경영을 늘였으며 급진적인 정책을 완화시켰다.

  그러나 이는 잠시 동안의 실용주의 노선이 강화되는 시기이며, 이후는 다시 또 사회주의 이념 및 사상으로의 무장을 강조하는

  이른바 문화혁명기가 도래하면서 중국은 혹독한 이데올로기적 실험을 경험한다.

  새로운 변혁기인 문화혁명기는 1969년까지 지속된다. 마오쩌둥은 류샤오치와의 정책논쟁을 통해서 류샤오치의 실용주의

  노선이 불평등과 관료주의를 심화시키고 있다고 비판하고 군부의 린뱌오(林彪)와 연대하여 반격을 시도하였다.

  마오쩌둥은 11전중회에서 <무산계급문화대혁명에 대한 결정>이라는 문안을 통과시키고 청년 대학생을 중심으로 결성된

  홍위병을 앞세워 문화혁명을 추진하였다. 홍위병들은 공산당내 부르조아적 요소를 몰아내기 위한 하방운동과 구시대적 문화

  유산 제거운동을 주도하였다. 문화혁명에는 마오쩌둥의 아내 장칭(江靑) 4인방도 합세하였다.

  문화혁명 기간 중 마오쩌둥의 노선에 반대하는 지도자들은 모두 유배되거나 숙청되었으며 당과 국가기구 등 마오쩌둥과 군중

  사이에 놓인 공식기구들은 모두 불신과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류샤오치는 자본주의 추종자로 몰려 사망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 초에는 마오쩌둥과 린뱌오 간의 연대가 무너지고 군부의 힘이 약해지면서 문화혁명초기 급진파들이 득세

  하는 양상이 약화되고 저우언라이와 같은 중도파가 권력을 쥐게 되었다.

  문화혁명의 폐해가 너무 컸기 때문에 이 시기에는 정책의 전환보다는 문화혁명 폐해를 수습하는 데 주력한 시기였다.

  1976마오쩌둥이 사망하자 덩샤오핑이 복권되었고 중국의 실권은 덩샤오핑에게로 넘어갔다.

  장칭 등 4인방은 문화혁명기간 중의 죄목으로 처형당하였으며 실용주의적 지도자들이 대거 복귀하였다.

  19783중전회에서 덩샤오핑은 개혁, 개방노선을 채택하면서 중국식 사회주의로의 급격한 변화를 추구하였다.

  이후부터 현재까지 중국은 안정적인 실사구시형의 정책을 중심으로 발전을 추구하게 되었다.

  새로운 집권세력은 농업·공업·국방 및 과학기술에서의 ‘4개 현대화추진을 정책목표로 세우고 미·일과의 국교정상화를 통해

  서방과의 관계개선과 경제원조를 얻어냈으며 개혁·개방정책을 실시하여 눈부신 성장을 이룩하고 있다.

  중국은 계획경제에 시장경제의 요소를 가미하여 점차 상품가격이 시장원리에 의해 결성되게 하고 있으며 기업의 독립채산제

  확대, 농촌에서의 잉여생산물의 판매허용 등 자본주의적 요소를 도입하여 경제발전생산력 증대를 최고의 정책목표로 설정

  하고 있다.

  1980년대에도 지속적인 실용주의적 경제발전 노선은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잘 잡는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다.)으로 상징되는 덩샤오핑의 사상에 의해 진행되었으며,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정치이념

  보다는 경제에 더 중점을 둠으로써 중국정치의 실세가 된 상하이방에 의해 추진되었다.

  그런데 개혁, 개방이 가속화되면서 개혁과 개방의 속도에 대한 논쟁이 촉발되었고, 부정부패에 반대하고 정치적 자유주의

  주장하는 학생, 지식인의 반대운동은 19896월의 천안문(天安門)사태로 나타났다.

  이 사태는 결국 보수파에 의해 무력진압으로 끝났지만, 당시의 총서기인 자오쯔양(趙紫陽)은 실각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상하이방을 대표하는 장쩌민(江澤民)이 총서기에 임명되면서 개혁개방파는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이들은 중국의 개혁개방과 중국 외교의 실무를 담당하였으며, 장쩌민이 1990년 덩샤오핑의 마지막 공직이었던 국가중앙군사

  위원회의 주석을 맡음으로써 경제관료에 의해 당과 정부의 전권을 장악하였다.

  장쩌민은 2002년 당 총서기, 2003국가주석, 2004년 당 중앙군사위 주석, 20055월 국가 중앙군사위 주석 자리를

  후진타오(胡錦濤) 에게 물려주면서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등장한 후진타오 총서기와 윈자바오(溫家寶)총리 체제는 성장우선론자특히 상하이를 중심으로 한 동부연안 지역

  중심의 성장을 우선시하는 정책을 선호하는 선부론자(先富論者)' 세력들을 몰락시키고, 중국 전역에 걸친 성장을 중시하는

  분배를 강조하는 개혁파가 득세하는 모습을 보였다.


- 1일차 (628, 목) : 광주 인천국제공항 대한항공 KE 0847 ⇨ 제남 야오창국제공항  신향













- 2일차 (629일, 금) : 신향 ⇨ 팔리구 ⇨ 천계산(노야정 케이블카) ⇨ 운봉화랑  왕망령  임주
































































- 3일차 (6월 30일, 토) : 임주 ⇨ 팔천협 ⇨ 태항산대협곡 ⇨ 임주















































- 4일차 (7월   1일, 일) : 임주 ⇨ 팔천협 ⇨ 제남























- 5일차 (7월   2일, 월) : 제남 ⇨ 부용가 ⇨ 흑호천 ⇨ 제남공항 ⇨ 인천공항 ⇨ 광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