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안기행] 초의(草衣) 장의순(張意恂) 대선사를 기리는 곳, 초의선사 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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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안기행] 초의(草衣) 장의순(張意恂) 대선사를 기리는 곳, 초의선사 유적지

by 정산 돌구름 2014. 8. 12.

초의(草衣) 장의순(張意恂) 대선사를 기리는 곳, 초의선사 유적지..

 

 

○ 탐방일 : 2014년 8월 11일

○ 소재지 : 전남 무안군 삼향읍 왕산리 94-3번지 일원

○ 유적지 소개

  초의대선사의 출생지인 삼향읍 왕산리 봉수산 자락에 그 분의 높은 정신을 기리고 추모의 장을 마련하였다.

  1997년5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된 초의 장의순 대선사의 출생지인 삼향면 왕산리 봉수산 자락에 그의 높은 정신을 기리는 추모의 장이다.

  초의선사의 생가가 위치한 이곳에 초의선사기념관(艸衣禪師紀念館)을 세우고, 생가(生家)를 복원하였으며, 다성사(茶聖祠:사당)를

  세우고 초의선사의 성상(聖像)을 봉안하였다.

  후학들이 모여 학덕을 연마할 수 있도록 명선관(茗禪館)과 다문화관, 그리고 일지암 초당과 초의선사 동상, 초의선원(艸衣禪院),

  조선차역사박물관, 금오초당(金鰲草堂), 보제루(普濟樓), 시다원(施茶院), 쾌년각(快年閣), 청심재(淸心齋)을 건립하였다.

  초의는 정조 10년(1786년) 4월5일 전남 무안군 삼향면 왕산리에서 태어났으며, 속성은 흥성 장(張)씨이며 이름은 의순(意恂)이다.

  초의(艸衣)라는 호는 출가 후 스승 완호(玩虎) 윤우(倫佑)로 부터 받은 것이며, 일지암(一枝庵)은 재호(齎號)이다.

  15세때 나주 남평에 있는 운흥사로 출가하였으며, 19세때 해남 대둔사(大芚寺)에서 완호(玩虎)스님으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탱화를 잘그려서 당대 오도자(吳道者) 경지에 이르렀으며 한국 최고 근대화가 소치(小痴) 허련(許鍊)이 초의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웠다.

  서예는 천의무봉(天衣無縫) 바로 그것이었다.

  강진에 유배중이던 다산(茶山) 정약용으로부터 유학과 시문을 배웠으며 완당 김정희 등 당대의 석학들과 종파를 초월하여 교유하였다.

  39세때 대흥사 뒷편에 일지암(一枝庵)을 중건하고 이곳에서 초의선(艸衣禪), 동다송(東茶頌), 다신전(茶神專)등을 저술했다.

  55세(1840년)에 헌종(憲宗)으로부터 대각등계보제존자초의대종사(大覺登階普濟尊者草衣大宗師)라는 시호를 받았다.

  58세(1843년)에 고향을 찾아 집은 다 헐물어지고 잡초만 무성한 부모 무덤을 보며 눈물로 시를 지었는데 귀고향(歸故鄕)이라는 시이다.

 1866년(고종 3년) 7월 2일 입적하시니 세수(世數) 81세요 법랍(法臘)은 66세였다.

 

 

초의선사 주차장..

 

초의선사탄생지 안내도가 주차장 가에 서있다..

 

안내도를 보며 둘러볼 곳을 염두에 둔다..

 

월요일은 휴관일이라 문이 닫혀 뒤편으로 둘러보기로 한다...

 

초의선사 생가..

생가는 초의선사가 태어난 곳으로 일찍이 폐허가 된 것을 복원을 하였다.

선사의 귀고향(歸故鄕) 시(詩)에 보면, 이미 선사의 생전에 폐허가 되었고 가까운 형제의 후손들만 고향을 지키고 있었다.

이곳은 임진란 때 나주에서 피난을 온 선사의 6대조가 처음 정착한 곳으로, 승달산(僧達山)에서 유달산을 향해 뻗어나가는 중간 지점에

있는 빼어난 기운을 간직한 왕산(旺山) 자락이다.

산봉우리에는 봉화대가 설치되어 있고, 대 아래에는 작은 암자터가 있다.

당시에는 나주 운흥사에서 온 스님이 기거하였고, 훗날 이 스님을 따라 운흥사로 출가(出家)를 하였다.

이 암자는 마을 사람들이 소원을 비는 기도처이자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었던 곳으로 지금은 폐허가 되어 빈터만 남아있다.

생가는 초가삼간의 전형적인 시골 마을의 생활공간이자 삶의 터전으로, 선사는 이곳에서 열다섯살 때까지 살았다.

운흥사로 출가하기 전까지 이곳에서 글을 배우고, 바닷가에 나가서 고기를 잡고 봉화대에 올라가서 봉화불을 피우고 암자에 가서

스님과 이야기를 나누며 유년 시절을 보냈다. 바로 이 암자에서 출가의 꿈을 키운 것이다..

 

거대한 차문화체험관..

 

차문화체험관은 2011년 6월9일, 총사업비 42억원(국비 25, 군비 17)이 투입돼 지상 2층 전통한식 목조건물로 2년의 공사기간을

거쳐 200여 평의 규모로 건립되었다..

 

거대한 모습이 드러난다..

 

 

차문화 교육관인 초의선원(艸衣禪院)..

 

초의선원은 참선과 다도 수련을 전문으로 하기 위해서 지은 건물이다.

1층은 선방(禪房)이고, 2층은 다실(茶室)로 되어있다.

초의선사의 철학은 명선(茗禪)으로 다도(茶道)와 참선을 수행한다는 뜻이다.

차로서는 몸가짐을 다스리고 선으로는 깨달음을 얻는다는 말이다..

 

초의선사의 나이 81세에 맞춰 81평으로 지은 목조건물로 선사 생애의 숫자와 수리를 맞춰서 건물을 설계하였다.. 

 

바깥 기둥은 높이가 출가의 나이(15세)에 맞춰 15자이며, 안 기둥은 월출산에서 깨달음을 얻은 해의 19자이고,

도리까지의 높이는 다산선생을 만나 유학을 공부한 24자이다.

출입문은 승려 나이(法臘)인 65짝으로, 2층 창호는 헌종으로부터 대각등계보제존자 초의대선사라는 사호(賜號)를 받은 55짝으로

하였으며, 출입문에는 초의선사의 생애를 조각하였다..

 

정면의 왼편에서 8짝은 초의선사의 팔상성도(八相聖圖)를 조각하였다.

다음의 정중앙 문에는 초의문으로 생애 중에 중요한 일을 4짝에 조각하였으며, 그 옆은 다산문으로 다산선생과 일화를 조각하였다.

그 다음은 추사문으로 추사선생과의 일화를 조각하였다.

 

후면에는 동다송의 전문을 조각하였으며, 선비들과 방외청교를 나누거나 고향을 돌아보는 모습을 조각하였다.

모든 문의 아래쪽 궁창에는 우리나라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사용하던 전통 차도구들을 조각하였다.

건물의 구조를 보면 전면 7칸 측면 3칸 규모의 중층 건물로 양 옆에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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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에서 보면 1층 건물이지만 내부에 들어가면 2층으로 되어있다.

1층은 인간세상을 나타내고, 2층의 다실공간은 하늘나라를 의미한다.

1층에서 2층의 하늘로 올라가는 계단은 구름계단으로 33천의 하늘나라를 의미해서 구름문양을 조각하였다.

이 건물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특허청에 처음으로 특허등록 되었으며, 훗날 문화재로 지정이 될 건물이다..

 

 

 

용호백로정(蓉湖白鷺亭)...

 

용호(蓉湖)란 용산의 옛 이름으로 서울 용산에 있던 추사의 정자이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용산의 산언덕에 있던 정자로 백로(白鷺)가 오락가락 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어서 백로정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지금은 정자도 터도 알 수가 없지만 기록으로만 전하는 것을 이곳 초의선사에 복원을 하였다... 

 

정자의 묘미(妙味)는 허공(虛空)을 담아 낼 수 있는 공간이다.

이 공간미가 여백(餘白)의 백미(白眉)로 자연을 마음껏 품을 수 있도록 툭 터진 공간의 허허로움이다.

용호백로정은 자연과 하나가 되는 공간으로 추사와 초의는 이곳에서 자연과 더불어 “방외청교(方外淸交)”를 나누었다.. 

 

초의선사는 이곳에서 두해동안이나 머물렀다. 추사와 함께 매일 시(詩) 짓고, 청담(淸談)을 나누는 재미는 세상 밖의 일이었다.

당시에 이곳에 드나들던 선비들은 입을 모아 초의선사를 금신불(金身佛), 추사를 옥국선(玉局仙)이라고 하였다..

 

정자의 구조는 남북으로 방(房)을 하나씩 두고, 가운데에 우물마루를 내어 앞으로 한칸을 더해 두칸짜리 마루을 만들었다.

정자의 한쪽 마루 기둥은 연못에 두고 두다리를 못에 담구어 허공에 마루를 달아내었다.

한칸 마루는 바로 연못위에 있는 것으로 마루 위에서 연못를 내려다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초의선사는 해남 대흥사 13대 초의대종사(十三代 艸衣大宗師)였으며,

55세(1840년)때에는 헌종으로부터 대각등계보제존자 초의대종사(大角登階普濟尊者 草衣大宗師)라는 사호를 받았다..

 

 

 

초의선사 기념관(艸衣禪師 紀念館)..

우리나라 차의 성인(茶聖) 초의선사를 기리기 위해서 세운 기념관이다.

선사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업적과 활동상황을 살펴 볼 수 있는 곳이다...

 

초의선사가 다산 정약용선생과 함께 월출산 백운동을 방문하여 그린 백운동도와 다산초당도, 그리고 함께 지은 시를 볼 수가 있다.

선사의 생애와 사상을 일목요연하게 살펴 볼 수 있는 기념관이다..

 

현관 입구에 마련된 초의선사 영정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펼쳐진 유물과 안내 패널은 초의선사의 생애를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동선을 따라가면 선사가 일생동안 주석하셨던 일지암 모형과 사진, 그리고 이어지는 진열장에는 초의선사께서 생전에 저술하신

일지암문집과 일지암시고, 그리고 초의집 상하권, 평생에 지음이 되었던 추사 김정희선생의 완당전집과 유묵을 탁본한 탑본집,

영정과 그림, 42수관음상과 준제보살도가 전시되어 있다...

 

초의선사의 대표적인 시문학사상, 선사상, 오도송이 소개되었고, 두번째 진열장 안에는 초의선사의 선사상을 대변하는 초의선과와

선의 논쟁을 불러왔던 사변만어, 필첩, 염불수업 교재등이 전시되고, 친필 범어(梵語) 글씨와 손수 그린 18나한도 두 점을 전시하였다.

 

초의선사의 생애와 사상을 동영상으로 볼 수 있도록 설치하였으며, 다도의 진수와 사용하시던 차도구를 복제하여 놓았다.

동다송과 다신전등 차에 관한 전문서도 볼 수가 있다..

 

 

초의(艸衣)는 정조 10년(1786년) 4월5일 전남 무안군 삼향면 왕산리에서 태어났으며 속성은 흥성 장(張)씨, 이름은 의순(意恂)이다.

초의(艸衣)라는 호는 출가 후 스승 완호(玩虎) 윤우(倫佑)로 부터 받은 것이며 일지암(一枝庵)은 재호(齎號)이다...

 

15세때 나주 남평에 있는 운흥사로 출가하였으며, 19세때 해남 대둔사(大芚寺)에서 완호(玩虎)스님으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탱화를 잘그려 당대 오도자(吳道者)의 경지에 이르렀으며 한국 최고 근대화가 소치(小痴) 허련(許鍊)이 초의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웠다.

서예는 천의무봉(天衣無縫) 바로 그것이었다...

 

강진에 유배중이던 다산(茶山) 정약용으로부터 유학과 시문을 배웠으며 완당 김정희 등 당대의 석학들과 종파를 초월하여 교유하였다.

39세때 대흥사 뒷편에 일지암(一枝庵)을 중건하고 이곳에서 초의선(艸衣禪), 동다송(東茶頌), 다신전(茶神專)등을 저술했다...

 

55세(1840년)에 헌종(憲宗)으로부터 대각등계보제존자초의대종사(大覺登階普濟尊者草衣大宗師)라는 시호를 받았다.

58세(1843년)에 고향을 찾아 집은 다 헐물어가고 잡초만 무성한 부모 무덤을 보며 눈물로 시를 지었는데 귀고향(歸故鄕)이라는 시이다.

1866년(고종 3년) 7월 2일 입적하시니 세수(世數) 81세요 법랍(法臘)은 66세였다..

 

 

일지암(一枝庵) 초당..

일지암 다실은 해남 대흥사 일지암에 있는데, 초의선사께서 평생을 수행하며 사시다가 열반을 하신 곳이다..

 

일지암에는 자우산방과 일지암 다실이 있다. 자우산방은 평상시 기거하는 생활공간이고 부처님을 모신 법당이 있는 곳이다.

손님이 오시면 일지암 초당에서 쉴 수 있도록 하였다. 당대의 많은 선비들이 초의선사를 찾아와서 쉬었다 간 곳이요,

선사가 차를 달여 대접을 하던 곳이요, 청교의 공간이다..

 

다실의 구조는 사방 9자 한칸 집으로 삼면에 창호를 두고 한편에 부엌과 벽장을 두었다.

대나무 마루를 삼면에 둘렀고 지붕은 볕 짚으로 덮었다..

 

이곳에는 추사의 아버지 유당 김노경, 추사 김정희, 위당 신헌, 소치 허련, 석오 윤치영, 백파 신헌구 등 많은 선비들이 드나들었다.

조선 후기 차문화의 중심지요, 남종화의 발상지요, 시가(詩歌) 문화의 교류지였다.

선사는 이곳에서 동다송과 다신전을 저술하였고, 일지암시고와 문집, 그리고 선의 논쟁이 되었던 초의선과와 선문사변만어를 펴낸 곳이다.

이 역사적인 일지암 초당을 탄생지에 복원하여 그 문화와 역사를 계승하고자 한 것이다..

 

세심헌(洗心軒)..

 

 

  

 

명선관(茗禪館)..

초의선사의 차의 철학인 명선을 당호로 사용하였다.

명선관에는 다문화관이 전시장으로 열려있다. 전시장에는 우리나라 전반에 대한 차문화를 살펴볼 수가 있다.

한국 차문화 2만년사의 공간 배치와 지리적 여건과 역사적 배경이 펼쳐진다.

구석기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차문화가 싹트고 자란 배경과 공간, 그리고 민족의 이동과 문화의 발전단계,

나아가 자연환경적 특성에 따라 발달된 차문화의 특성을 간추려 놓았다.

민족의 형성 시기부터 정착까지의 과정을 지도를 통해 공간적으로 배치되었다.

민족의 명칭과 문화적 특성, 그리고 사용하던 차도구와 시대적 배경을 자세히 살펴 볼 수가 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기록된 자료를 통해서 간추려 논 차문화 2천년사에는 시간적 배치를 통해서 삼국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차의 종류, 차도구의 종류, 다례의식의 변천과정, 대표적인 다인들, 그리고 차의 문헌에 이르기까지 상세한 설명을 곁들였다.

백산차 분포, 차나무 분류와 유적지, 초의선사 제다법을 소개하는 모형전시물은 초의차와 초의병차를 만드는 과정을 상세히 묘사했다.

그리고 각시대의 차도구를 전시하였으며, 그 외 떡차로 만든 동다송, 다약설, 남다병서등 떡차예술작품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

 

 

다성사 오르는길...  

 

다성사(茶聖祠)..

 

다성(茶聖) 초의선사의 성상(聖像)을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초의선사께서 탄생하신 음력4월 초5일을 기해 매년 헌다제를 모시고, 또한 열반하신 8월 초2일에도 헌다제를 봉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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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상시에도 많은 추모객들이 헌다를 하고 예를 올릴 수 있도록 개방하였으며, 많은 다인들과 제자들이 올린 헌다잔이 보관되어 있다.

초의선사 성상은 청동으로 주조하여 자연스럽게 채색을 하여 살아 계시는 듯한 모습이다.

성상은 선사의 영정을 보고 그대로 재현을 하였는데, 영정은 제자인 소치 허련이 선사가 열반하시기 한해 전에 그려서 모신 것이다.

선사의 80세때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여 살아 계신 듯 사실감이 넘쳐난다.

성상 옆에는 영정을 모셔서 보는 이로 하여금 생동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하였다...

 

다성사의 건물 구조는 사당(祠堂)의 전형적인 건축양식으로 전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형식이다.

정면 북쪽 벽에 성상(聖像)을 봉안하고 왼편에 영정(影幀)을 모시었다.

편액은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이 썼다.

주련(柱聯)은 초의선사가 쓰신 친필(親筆) 게송(偈頌)을 각(刻)을 해서 걸었다..

 

추모비명..

 

 

 

 

 

금오초당(金鰲草堂)..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의 다실(茶室)이다.

매월당은 세조(世祖)때 문인으로 뛰어난 시인(詩人)이자, 문장가로 이름을 날렸으며, 출가하여 설잠(雪岑)이란 불명을 얻은 승려이다.

전국을 유랑하다가 금오산 용장사에 가서 작은 초당을 짓고 금오초당이라 이름붙이고 은거하기를 7년간 하였다.

이곳에서 금오신화를 저술하였고, 염포(鹽浦 울산)에 와있던 일본승 준장로가 찾아오자 차를 끓여 대접하고 시를 지어주며 교류를 하였다.

준장로는 매월당의 인품과 학덕에 반해 매우 존경의 예를 표했고, 돌아가서는 매월당의 금오초당을 본떠 초당을 세우고 차를 달여 마셨다.

이때 금오초당에는 땅바닥을 파서 만들어 놓은 “땅화로(地爐)”가 있었는데, 일본다도의 핵심문화로 자리 잡고 지금까지 계승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사라졌지만, 매월당의 땅화로 문화는 일본에서 꽃을 피웠다... 

 

이 금오초당은 오랜 세월이 지나자 폐허가 되고 빈터만 남아있었는데, 이를 확인하여 고증을 거쳐 이곳 초의선사에 복원을 했다.. 

 

조선차역사박물관.. 

 

조선시대 차문화를 한눈에 살펴 볼 수 있는 차문화 박물관으로, 조선시대 사람들이 사용하던 차도구를 정리 전시를 하였다.

조선 이전, 조선 전기, 조선 중기, 조선 후기 순서로 전시하였으며, 중국 차도구와 조선시대 차문화를 기록한 도서를 전시하였다.

모든 전시 진열관 안에는 그 시대의 차문화사를 한눈에 볼수 있도록 년대표를 정리하였다.

동영상으로는 우리나라 차 산지와 문화를 소개하고, 각 시대별로 차문화을 상세히 설명하였다.

특별히 초의선사의 차를 만드는 제다법과 차를 마시는 행다법을 동영상으로 볼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조선시대 차의 종류와 문헌에 나타나는 차의 종류와 문헌의 이름을 정리하였고, 중국의 사신, 일본의 통신사의 차문화 교류를

지도를 통해서 상세히 소개하고, 초의선사와 추사와의 차문화 교류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도록 하였다...

 

건물은 정면 5칸에 측면 3칸의 정자식 건물로 하단 기둥부분은 자연 지형의 경사도를 그대로 살려 돌기둥을 각기 다르게 세워 평면을

이룬 뒤에 그 위에 우물마루를 놓고 건물을 올렸다.

그러므로 정자처럼 하단에 한 층이 높이 솟아있어 통풍이 잘되고 그늘이 만들어져 쉴 수도 있으며, 정자가 주는 멋스러움이 넘쳐난다.

선사가 동다송을 저술한 해(52세)에 맞춰 52평으로 설계하였으며, 모든 포를 차꽃을 3종류로 디자인해서 차꽃 포를 만들어 올렸다..

 

출입문에는 조선시대 선인들이 그린 차 그림을 조각하였으며, 궁창에는 차 꽃꽂이(茶花) 그림을 새겨 놓았다.

박물관 입구에는 조선시대 차문화를 한폭의 그림으로 압축하여 조각하여 조선시대의 차문화의 특징을 파악할 수 있도록 했다..

 

봉수산에서 바라본 초의선사 유적지.. 

 

 

 

 

바로 아래에는 오승우미술관이 자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