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적 제126호 진도 용장산성(龍藏山城)과 삼별초 항쟁..
○ 탐방일 : 2014년 7월 21일
○ 소재지 : 전남 진도군 군내면 용장리 106
○ 용장산성(龍藏山城) 소개
사적 제126호(1964년6월10일)로 고려 원종 11년(1270년) 8월 삼별초를 이끌던 고려 장군 배중손이 쌓은 산성이다.
현재 용장산 기슭에 약간의 석축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고 성내에 용장사지(龍藏寺址)와 행궁지(行宮址)가 남아 있다.
몽고침입시 이에 대항하여 진도로 옮긴 배중손(裵仲孫)이 이끄는 삼별초(三別抄)의 대몽항쟁의 근거지였다.
삼별초는 이곳에서 부서(部署)를 정하고 관부(官府)를 열었으며, 궁궐과 성곽을 쌓고 몽고 침략자와 개경 정부에 반기를 들어 승화후 온
(承和侯溫)을 왕으로 추대하여 왕실과 대립되는 정권을 세웠는데, 이때 쌓은 성이 용장성이다.
그러나 1350년(충정왕 2년) 왜구의 침략이 극심하여지자 세종 초까지 육지로 피난하였기 때문에 용장성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고 있다.
그 뒤 세종 초기에 다시 귀향하게 됨으로써 기록이 보이게 되는데, 이에 의하면 성의 둘레는 3만 8741척, 높이 5척이라 나와 있다.
이 성은 임해면 남동리에 있는 남도석성(南桃石城)과 함께 삼별초의 대몽항쟁의 유적지로 좋은 자료이며, 축성연대가 확실하다는 점,
고려왕실과 대립되는 궁전이 건립되었다는 점에서 가치가 크다..
삼별초(三別抄)의 항쟁..
삼별초의 항쟁은 13세기 고려가 몽골에 대항하여 최후까지 항쟁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원래 삼별초는 무인정권하 몽고 침입 직전인 1230년(고종 17년) 경 집정자 최우(崔瑀)에 의하여 야별초라는 이름으로 조직된 군사조직이다.
‘별초’라는 말처럼 이들은 정예군으로 선발된 조직이었으며, 무인정권 하에서 만들어진 조직이었던 만큼 친정권적 성격을 가졌다.
몽고의 대대적 침략이 시작되자 삼별초는 자연히 고려의 가장 강력한 군사집단으로 부각되었으며, 전쟁의 장기화로 그 규모 역시 확장되었다.
야별초가 ‘삼별초’라는 조직으로 바뀌는 것 또한 이러한 조직 확대의 결과였다.
1270년(원종 11년) 강화도의 삼별초는 몽골에 복속하여 개경으로 환도한 원종의 고려정부에 반기를 들고 봉기하였다.
이들은 몽골에 복속한 개경정부를 전면 부정하고, 새로 조직한 그들의 정부야말로 고려의 정통정부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장군 배중손, 야별초 지유 노영희를 중심으로 하여 강화도에서 봉기한 삼별초는 6월 강화도로부터 진도로 이동하여, 용장성을 구심점으로
소려 정부와의 대결을 기도하였다.
이들은 구 후백제 지역과 남부 해안지역의 연안 해양세력권 구축을 통하여 개경정부 및 몽골과 대결한다는 것이었다.
동시에 몽골의 압력에 대응하는 방편으로 일본과의 공동전선 구축을 시도 하였다.
진도의 삼별초군이 벌인 활동양상은 진도 입거 이후 거점세력의 확보를 위하여 대략 3단계로 작전을 확대시켜 나갔다.
즉 초기에는 전라도 연해지역의 세력 확보에 주력하였으며, 제2단계로는 후방의 배후지가 되는 제주도의 확보, 그리고 3단계는 경상도 남부
연해지역 일대에 대한 지배권의 확보였다. 그리하여 진도를 중심으로 전라, 경상 연해 지역에 대한 일정한 세력 확보에 삼별초는 성공한다.
남부 연안 지역은 대체로 풍부한 물산지대인 데다 이들 물산의 운송로를 포함하고 있어서 진도측의 이같은 연안장악으로 개경측의 타격은
자못 심각하였다.
진도를 거점으로 한 삼별초는 진도 이외에 남해안의 완도, 남해도 등 주변 여러 도서에 세력을 부식하였고 제주도를 배후거점으로 삼고 있었다.
완도의 송징, 남해도의 유존혁(劉存奕) 등이 그 예이다.
진도의 삼별초군은 여러 차례 여몽연합군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며 개경정부를 위협하였다.
그러나 1271년(원종 12년) 5월 김방경(金方慶)과 흔도(忻都), 홍다구(洪茶丘)가 지휘하는 여몽연합군의 공격에 의하여 패퇴하고 말았다.
진도전투에서 장군 배중손이 전사하고 왕으로 옹립된 승화후 온이 생포되어 참수되었으며 삼별초 진도정권은 봉기한 지 1년 만에 붕괴되었다.
그러나 삼별초의 잔여세력은 제주도로 거점을 옮겨 1273(원종 14년)까지 항전을 지속하였다.
북제주군 애월읍 소재 항파두성은 당시 제주 삼별초의 거점이었다.
이들은 애월항의 입구에 목성(木城)을 쌓고 해변에는 장성(長城)을 돌로 쌓아 여몽연합군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김통정(金通精)이 배중손을 대신하는 새로운 지도자로 부각되었다.
제주에서의 삼별초는 처음 1년 동안 자체적인 조직 정비 및 방어시설의 구축에 주력하였고 이후 약 반년 간은 삼별초의 원래 본거지였던
전라도 연해안에 대한 군사활동 전개를 거쳐 점차 그 활동이 충청 경기 연해안까지 확대되어 개경을 위협하였다.
그러나 여몽연합군의 조직적 공략에 의하여 원종 14년(1273) 4월 제주 삼별초 역시 무너지고 말았다.
삼별초의 항전은 고려 대몽항전의 최후를 장식한 것으로서 이후 고려는 14세기 중반까지 원의 정치적 관리 하에 놓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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