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제일의 산수, 중국 계림~양삭 4박5일 이야기..
□ 여행기간 : 2014년4월12일(토) ~ 4월16일(수)
□ 여 행 지 : 중국 계림 + 양삭
□ 여행인원 : 26명(우리부부, 사돈부부 포함)
□ 여행경비 : 1인 428,900원(현지 165$ 추가)
□ 여 행 사 : 모두투어(인솔자 없음, 현지가이드 김용일)
□ 항 공 편 : 중국 남방항공(CZ6042, CZ6041)
□ 일정별 요약
○ 1일차(4월 12일, 토) : 무안공항~계림국제공항
17:35 무안공항 도착, 18:30 여행사 미팅, 18:40 수하물 송부 및 출국수속, 19:50 중국남방항공 CZ-6042출발(19:30 탑승)
22:30 계림국제공항 도착, 22:50 입국심사, 23:20 가이드(교포 2세, 김용일) 미팅, 23:30 전용버스, 00:15 호텔 도착
○ 2일차(4월 13일, 일) : 요산~관암동굴~이강유람~몽환이강쇼
07:00 기상, 07:30 호텔 조식, 09:00 호텔 출발, 09:30~11:20 요산 관광, 12:45~13:20 점심식사,
13:30~15:10 관암동굴, 15:20~16:30 이강유람, 17:40~18:05 쇼핑(히노끼), 18:25~19:15 저녁(현지식),
19:20~20:40 몽환이강쇼, 21:15 호텔
○ 3일차(4월 14일, 월) : 칠성공원, 복파산, 첩채산, 우산공원, 전신맛사지, 양강사호 유람선
07:00 기상후 인근산책, 07:30 호텔조식, 09:00 호텔 출발, 09:15 칠성공원, 10:30~11:00 라텍스매장,
11:20~12:10 오찬, 12:30~13:10 복파산, 13:15~14:10 첩채산, 14:15~15:10 우산공원, 15:30~16:20 죽제품쇼핑,
16:45~18:30 전신맛사지,18:35~19:05 저녁식사, 19:20~20:35 양강사호 야간유람선, 21:30 호텔 투숙
○ 4일차(4월 15일, 화) : 용호공원, 대용수, 서양거리, 인상유삼쇼
06:30 기상후 짐꾸리기, 07:30 호텔 조식, 09:00 호텔출발, 09:15~09:50 용호공원, 10:05~10:35 비단(Silk)제품쇼핑
11:20~12:20 점심(삼겹살), 12:25 계림 출발, 13:20 양삭 도착, 14:20~15:00 대용수 관람, 15:25~16:50 양삭강변,
16:55~18:10 서양거리, 18:20~55 저녁(호텔), 19:20~21:00 인상유삼제쇼 관람(공연 19:45~20:50), 21:20 군호호텔
○ 5일차(4월 16일, 수) : 세외도원, 계림국제공한, 무안공항
06:00 기상 & 인근 산책, 07:00 호텔 조식, 08:00 호텔 체크아웃, 08:40~10:00 세외도원, 11:10~12:00 차매장 쇼핑,
12:20~13:00 점심, 13:00 공항으로 이동, 13:40 공항 도착, 13:50 수하물 및 수속, 15:00 중국 남방항공 CZ6041 출발
(14:30 탑승시작), 18:50 무안 국제공항 도착, 19:30 승용차로 광주출발
□ 중국(中國)에 대한 이해
유구한 역사와 방대한 국토를 지닌 중국은 풍부한 문화유적과 빼어난 산수를 자랑으로 한다.
중국은 하나의 국가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도 큰 다양성을 지닌 나라이다.
중국인이라는 이름 하나로 56개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진 민족을 품고 있으며, 5천년이 넘는 장구한 역사속에는 수많은 나라들이 거쳐갔다.
러시아와 캐나다에 이어 세계 3위의 광대한 국토를 보유해 풍부한 자원을 자랑하며 다양한 기후와 자연의 모습들을 지니고 있다.
21세기로 들어 오면서 중국은 공산국가로 대표되는 구 시대적 이미지를 벗어버리고 도약기를 맞고 있다.
이제 그들은 세계 최대의 인적 자원과 광대한 국토,그 땅에서 나오는 물질적 자원들을 바탕으로 세계 최강의 국가를 꿈꾸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는 만리장성, 자금성, 진시황릉, 병마용 등을 비롯, 우리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 상해,
중경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 등 한국 사람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 유적과 관광지들이 많다.
동악(태산), 서악(화산), 중악(숭산), 북악(항산), 남악(형산) 등 5개 악을 중국 으뜸 山이라 한다.
또한 세계에서 유일하게 표의문자(뜻글자)를 쓰고 있는 나라이며, 세계 최대의 인구를 지닌 나라이다.
○ 국명 :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 / 수도 : 북경(北京, 베이징)
○ 면적 : 960만㎢ (한반도의 44배, 세계 3위,남한면적의 약100배)
○ 인구 : 약 13억 4,324만 명(2012년) - 세계 전체인구의 약 22%
○ 언어 : 표준어 - 普通話, 지역별로 8종류의 방언
○ 종교 : 도교, 불교, 그리스도교 3%, 이슬람교 1~2%
< 기후 >
넓은 국토에 열대, 온대, 냉대 등 다양한 기후가 분포되어 있다.
양쯔강과 황허 주변의 대부분 지역은 온대기후에 속해 사계절이 뚜렷하며 사람이 살기 적당하다.
남부의 하이난과 윈난 등은 일년 내내 봄 날씨가 이어지며 비가 자주 내린다. 북부의 둥베이 삼성(헤이룽장, 지린, 랴오닝)은 겨울이 길고
상당히 추우며 눈도 많이 내린다. 사막이 있는 서북 지역은 비가 거의 내리지 않아 늘 건조하다.
또한 여름은 덥고 겨울은 추우며 일교차가 큰 전형적인 사막기후를 보인다. 서남부의 고산지대에서는 전형적인 고산기후가 나타난다.
여름기온이 35℃를 넘는 장강연변이 있는가하면, 겨울기온이 -30℃까지 내려가는 동북지방도 있다.
실크로드 지방에서는 밤낮의 기온 차가 20~30℃까지 나기도 한다.
< 지리 >
육지 면적만 960만㎢에 달하는 세계 3위의 영토 대국으로 남한 땅의 100배가 넘는다.
남북으로는 북위 53도에서 북위 4도까지, 동서로는 동경 135도에서 동경 73도까지 걸쳐 있다.
한국, 러시아, 몽골,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 네팔, 부탄, 미얀마, 라오스, 베트남 등 많은 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산맥, 분지, 고원, 평원, 사막 등 다양한 지형이 공존하며, 전반적으로 서쪽의 지대가 높고 동쪽이 낮은 편이다.
황허와 양쯔강 사이의 남북 분계선을 기준으로 북부와 남부 지역이 기후, 기질 등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 인구와 민족 >
중국의 인구는 약 13억 4324만 명(2012년)으로 세계 인구의 약 22%를 차지한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지고 있으며, 중국정부는 인구의 급속한 증가를 막기 위해 한족(漢族)에 한해 1가구1자녀 정책을 펴왔다.
하지만 이런 정책의 역효과로 농촌지역에서는 호적에 오르지 못한 아이들이 증가하기 시작했는데, 이런 아이들은 흑해자(黑孩子, 헤이
하이즈)라고 불린다. 그리고 중국 정부의 강력한 인구 억제 정책에도 불구하고 2025년에는 중국인구가 15억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의 민족구성은 전 인구의 92%를 차지하는 최대민족인 한족(漢族)과 55개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족은 독자적 문화를 창조하며 한족 외의 민족을 동화(同化)시켜왔으나 소수민족은 지금까지도 민족 고유의 전통을 고수해오고 있다.
중국은 공산혁명 이후에도 소수민족의 전통에 대한 보호책으로 자치구나 자치주를 설정, 각 민족의 고유성을 인정하는 정책을 고수해왔다.
이러한 정책은 또 한편으로는 이들 민족을 일정한 지역에 한정시킴으로써 한족의 지배권을 공고히 한다는 양자의 성격을 가진다.
소수민족들은 지역적으로 일정한 분포 양상을 보이는데 대표적인 소수민족으로서는 좡족(莊族)·만족(滿族)·후이족(回族)·먀오족(苗族)·
위구르족(維吾爾族)·이족(彛族)·투자족(土家族)·몽골족(蒙古族) 등이 있다.
한민족인 조선족(朝鮮族)은 약192만 명으로 14번째로 많고 소수민족의 2.6%를 차지하며, 주로 둥베이(東北) 3성인 지린성·헤이룽장성·
랴오닝성 등에 분포한다.
< 중국인 >
장대한 대륙을 닮은 중국인의 성격을 가장 핵심적으로 표현한 말은 "만만디(慢慢地)"이다.
말 그대로 중국인의 성격은 느긋하고 나아가 대범하다.
또 중국인은 관계(關係, 꽌시)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 중에서도 신용을 첫째로 꼽는다.
이 때문에 중국인은 쉽게 자기 속을 드러내지 않고 깊이 친해졌다는 생각이 들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생각을 드러낸다.
따라서 중국인과 교류하기 위해서는 이 '꽌시'라는 말부터 이해해야하고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 언어 >
일반적으로 한어(漢語)로 불리는 중국어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사용하는 언어이며, 표준어를 보통화(普通話)라고 한다.
중국에는 지역에 따라 방언이 심해 중국인 사이에서도 의사소통이 안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최근에는 정부차원의 국어사용 운동으로
표준어 사용이 활발해지고 있다.
< 시차 >
한국표준시차(GMT+9)보다 1시간 늦은 GMT+8을 사용하고 있다.
< 통화 >
인민폐(RMB) 단위는 원(元, 위엔=塊), 각(角, 지아오=毛), 분(分, 펀)이다. 1元=10角=100分
1元 이하 단위는 동전과 지폐가 함께 사용되는데, 특히 남방지역으로 갈수록 동전이 많이 유통되고 있다.
그리고 갈수록 分 단위의 사용이 사라지고 있다. 그 외의 지폐는 5원, 10원, 50원, 100원짜리로 구분되며, 규모가 있는 상점에는
위조지폐 구별을 위한 기계가 있어서 100원짜리 지폐를 제시할 경우 기계에 대고 판별을 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1위안(CNY) = 166.66원 / 1달러(USD) =6.24위안(CNY) 2014년4월20일 기준
체험물가 : 생수1병(500ml)=1~2위엔 / 콜라1병(1.25L)=5위엔 / 맥도날드 햄버거셋트 = 20위엔
< 전압 >
일반적으로 220V이지만, 플러그의 모양이 틀리지만 우리 나라의 전기제품들과 맞도록 2구의 사용이 가능하다.
< 전화 >
중국의 국제전화는 한국에 비해 70%이상이 비싸다.
따라서 현지 직통전화보다는 한국 통신사를 통한 수신자부담 서비스(Collect Call)를 이용하는 것이 더 저렴하다.
*중국에서 한국으로 직통전화(IDD) : 00 + 82 + 0을 뺀 지역번호 + 개인번호
*한국 수신자 부담 전화 - 한국통신 : 10800-820-1611
<종교>
중국의 종교는 전통적인 것으로 불교·도교(道敎)·이슬람교가 있으며, 그리스도교가 16세기 이후 들어와 전파되었다.
중국 헌법 제36조에는 정상적인 종교활동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지만 사회주의국가들이 대개 그러하듯 그 자유에는 한계가 있다.
특히, 문화혁명 과정에서 사원·교회 등이 홍위병(紅衛兵)에 의해 공격받아, 모든 종교활동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개혁 이후 종교도 과거에 비해 활발한 추세를 보이고 있고, 전도를 목적으로 하는 종교인들도 중국으로 다수 몰려들고 있다.
각종 종교 신도수는 약 2,000만 명으로, 대부분은 도교·불교 신자이며 나머지 이슬람교도가 1~2%, 그리스교도가 3% 정도를 차지한다.
< 중국의 음식문화 >
地大物博(지대물박) - 땅이 크고 자원이 많다. 이 말은 곧 중국을 가리킨다.
없는 것만 빼고는 다 있는 곳, 중국. 그래서 중국음식의 재료와 내용, 모양과 맛도 천차만별이다.
일반적으로 중국요리에 대해서 '동쪽은 시고, 서쪽은 맵고, 남쪽은 달고, 북쪽은 짜다'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중국을 대표하는 요리는 크게 산동요리, 사천요리, 절강요리, 광동요리의 4가지로 분리되며 '사대중국요리'로 불린다.
이 유명한 요리는 각지방의 오랜 역사와 독특한 조리특색이 자연지리, 기후조건, 특산물, 음식습관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형성되어 왔다.
이에 따라 각각의 요리는 독특한 특색을 지니고 있는데, 절강요리는 수려한 강남의 미녀와 같고, 산동요리는 요리는 소박하고 건강한
북방의 남자와 같으며, 광동요리는 풍류스럽고 우아한 도련님 같고, 또한 사천요리는 내실이 풍부하고 재주가 많은 명인과도 같다.
□ 중국의 역사
< 고대 >
중국의 전설에 의하면 상고의 3황(三皇)·5제(五帝)의 평화시대를 거쳐 하(夏)·상(商)·주(周)의 3대(三代)가 계속되었다고 한다.
은허에서 발견된 귀갑수골(龜甲獸骨)에 새겨진 한자의 최고형(最古形)인 복사(卜辭)에 의하여 상대의 사회를 알 수 있다.
상나라는 웨이수이에서 일어난 주나라에 의하여 멸망되었는데 주나라는 왕권확립과 사회안정에 따라 제자백가와 같은 문화가 발달하였다.
주나라는 BC 770년 수도를 낙읍(洛邑, 지금의 洛陽縣)으로 옮겼다. 주나라의 동천 후 춘추(春秋, BC 770∼BC 403)시대를 거쳐 전국
(戰國, BC 403∼BC 221)을 거쳤고 BC 221년, 진(秦)나라의 시황제(始皇帝)가 천하를 통일하였다.
진나라는 중앙집권적인 군현제도를 단행하고 행정·군사·감찰의 3권분립 체제를 세웠다.
또, 만리장성을 축조하고 국위를 사방에 떨쳐 진(Chin)의 이름이 서쪽에 전해져‘china’라는 명칭의 기원이 되었다.
그러나 BC 207년 진은 멸망하고, 서민 출신인 유방(劉邦)이 장안(長安)을 수도로 한왕조(漢王朝)를 창업하였다(BC 202).
한대에는 서방과의 교통이 활발하여 그 문화가 수입됨으로써 중국문화의 내용이 충실해졌다. 지방호족세력이 발전하게 되어 한때 왕망
(王莽)이 신(新)을 건국하였지만 15년 만에 무너지고 광무제 유수(劉秀)에 의하여 후한(後漢 25∼220) 시대가 된다.
그러나 전한부터의 타성이 그대로 남아 184년 황건적(黃巾賊)의 난을 계기로 몰락의 기로에 들었다.
< 중세 >
황건적의 난으로 군웅할거된 중국은 조조(曹操)의 아들 조비(曹丕)가 낙양에 세운 위(魏)와 유비(劉備)가 청두(成都)에 세운 촉한(蜀漢),
그리고 양쯔강 중·하류에 손권(孫權)이 세운 오(吳) 등의 3나라로 삼국시대가 되었다.
280년 위의 신하이던 사마씨(司馬氏)가 3국을 통일하여 서진(西晉)이 되었고, 4세기 초 흉노(匈奴)의 침입으로 난징(南京)으로 옮겨
동진(東晉)이라 하여 명맥을 유지하였다. 그 후 송(宋)·제(齊)·양(梁)·진(陳)의 4조(四朝)와 오(吳)·진(晉)을 더한 6조(六朝)가
교대되었는데 이 시대의 문화는 귀족과 호족들의 풍족한 생활에서 전개된 화려하고 우미한 것이었다.
한편, 화베이지방은 5호16국이 서로 싸우다가 선비족이 439년 북위로 통일하여 송나라와 대항하여 남북조 형세를 이루었다.
수나라 문제(文帝)는 군권을 강화하고 과거제도를 시작하였으며, 양제(煬帝)는 대운하를 만들었지만 고구려와 싸워 대패함으로써 내란이
일어나 618년 멸망하였다. 이연(李淵)이 장안을 점령하고 당(唐)나라의 제위에 올라, 이후 당나라는 넓은 대제국으로 영토를 확대하였다.
귀족의 취미와 외형미를 강조하는 당대문화는 국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이런 문화는 인접국에 파급되어 동아문화권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후기로 오면서 귀족계급이 몰락하고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나 907년 주전충(朱全忠)의 후량(後梁)에 멸망되었다.
이후 5대 10여개국이 흥망하였다.
979년 송은 중국을 다시 통일하였으나 문치주의(文治主義)정책을 펼치면서 군사력이 약화되어 북방 유목민족의 세력이 크게 확장되었다.
거란족(契丹族)의 요(遼), 탕구트족(Tangut, 黨項族)의 서하(西夏), 여진족(女眞族)의 금(金) 등이 송(宋)을 압박하였다.
이들 나라들은 훗날 몽고족이 세운 원이나 만주족이 세운 청(淸)나라처럼 독자적인 문화를 지니고 중국문화에 큰 영향을 끼쳐 ‘정복왕조
(征服王朝)’라고 불린다. 1127년에 송은 금나라의 압박으로 강남(江南)으로 옮겨갔지만, 1279년 칭기즈칸이 이끈 몽고군에 멸망했다.
몽고족이 세운 원(元)은 1368년 주원장(朱元璋)이 세운 명(明)에 도성인 대도(大都, 지금의 베이징)가 함락되며 실질적으로 멸망했다.
명(明)은 1644년 민란 지도자인 이자성에 의해 멸망했고, 그 해에 산하이관(山海關)을 넘어온 만주족의 후금(後金)이 베이징을 점령
하면서 다시 정복왕조인 청(淸)이 중국을 지배하였다.
< 근대 >
서양세력이 침투하기 시작해 전통왕조 체제에서 새로운 체제로 전환하는 시기로서 중국은 1840년 아편전쟁부터 1919년 5·4운동까지를
근대사로 이는 청나라 말기부터 중화민국 초기까지에 해당한다. 청나라는 무역개방을 요구하는 영국의 침략을 받았다.(아편전쟁)
이로써 동양의 전통적인 대제국은 서양 근대국가의 침략을 받게 되었고, 중국의 근대사는 피침사로 시작되었다.
이 전쟁에서 패한 청은 반식민지화의 길로 접어들었고, 서양 자본주의의 침투로 전통적 전제사회는 혼란에 빠졌다.
이에 불만을 갖고 홍수전은 태평천국을 건설한다는 이상으로 농민전쟁을 일으켜 세력을 형성하였다.(태평천국의 난, 1850~1864년)
그러나 청나라는 1856년 애로호사건으로 제2차 아편전쟁을 맞았고, 이로 인해 서양 열강의 반식민지화가 더욱 심화되었다.
청 황족이 거주하던 집단 거주지였던 원명원(圓明園)은 영·불 연합군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베이징(北京)이 점령되었다.
이후 청나라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와 북경조약으로 화해하였다.
러시아는 영국, 프랑스와의 북경조약을 주선한 대가로 중국으로부터 연해주를 할양받았다.
열강의 중국 침략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중국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양무운동(洋務運動, 1862)이 일어나 서양문물을 배우고
도입하자는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그러나 서양의 물질문명을 수용하되 전통의 정신과 철학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는 동도서기(東道西器)정신을 유지하였다.
열강들의 중국내 세력 강화와 청일전쟁의 패배 등에 자극받아 캉유웨이(康有爲), 량치차오(梁啓超) 등 일부 선각자들은 국내 제도의
혁신을 통해 중국을 근대화시켜 난국을 타개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변법자강(變法自强)운동을 일으켰다.
그 결과 광서제(光緖帝)는 이들을 중용하고, 과거제 개혁, 근대 학교의 설립, 관보 발행, 입헌정치 계획 등 개혁정치를 단행하였다.
그러나 어린 광서제와 서태후(西太后) 사이에 갈등이 생기고 개혁정치를 반대하는 서태후와 조정 보수파 관료들이 정변을 일으켜
개혁파를 축출하고 실권을 잡았다(무술정변, 1898). 그리고는 개혁정치를 중단하고 과거체제로 회귀하였다.
이는 중국이 보수화의 길을 택하여 근대화가 지연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열강의 침투로 중국은 일본을 비롯하여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열강이 전국을 분할 관리하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
특히 중국이 청불전쟁(1884~1985)에서 프랑스에게 패하고 청일전쟁(1894)에서 일본에게 패함으로서, 베트남, 조선 등에서의
종주권을 상실하였고, 타이완마저 일본에게 내주어야 했다.
그 결과 청조는 그 동안 동양의 강자로 군림하던 패권을 일본에게 내주게 되었고, 동양의 국제질서가 일본 중심으로 전환되었다.
열강들의 약취에 대항하여 1900년 의화단(義和團)이 봉기하여 외국 공관에 방화하는 등 저항하였으나 연합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청 정부의 위약과 열강세력의 침탈 속에서 한족 중심으로 멸만흥한(滅滿興漢) 운동이 일어났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쑨원(孫文)이
주동이 되어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이 일어났다. 이로써 1912년 전통왕조인 청조가 망하고 중화민국(中華民國)이 탄생하였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독일이 중국 경영에 소홀한 틈을 타 일본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대전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리고 곧 독일이 경영하던 지역인 산동반도 일대에 일본군이 상륙하고 항구도시인 청도(淸島)를 점령하였다.
일본은 중국 정부에 이권을 요구하는 내용의 21개조 요구를 하였고, 이에 대한 중국의 반일 감정이 일어났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료되고 세계는 평화를 추구하게 되었다. 이때 한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나 독립을 쟁취하려 하였고,
중국에서는 이러한 추세를 타고 1919년 일본의 21개조 요구에 반대하는 5·4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일본 군국주의의 적극적 공세로 중국은 일본의 침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 현대 >
산업혁명을 치른 서구문화가 명나라 말기, 청나라 초기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영국은 아편전쟁을 일으켜 청왕조에 큰 타격을 주었다.
서구 세력들의 물밀듯한 침점으로, 홍콩(香港)을 영국에게, 만주 북방을 러시아에게 할양하고, 안남(安南) 등 조공국에 대한 종주권을
잃었으며, 국내 요소에 외국 조계(租界)가 많이 설치되어 청왕조의 주권이 미치지 못하게 되었다.
이러한 동요 속에서도 근대화를 도모하고자 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동치중흥(同治中興)을 통해 근대공업이 일기 시작하였으나 청일전쟁이 일어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청일전쟁 직후에는 캉유웨이(康有爲)의 점진개혁론이 활발하였으나 무술정변(戊戌政變)에 의하여 실패하고 의화단(義和團)의
북청사변(北淸事變)은 청왕조를 더욱 궁지로 몰아넣었다.
러일전쟁 후 쑨원이 신해혁명(辛亥革命)에 의하여 임시 대통령에 취임하여(1912) 2,000년 이래의 전제군주제가 무너지고 공화제의
중화민국이 탄생되었다. 그러나 그후 약20년간 군벌의 압제에 시달려야 했다.
쑨원의 사후에 후계자가 된 장제스(蔣介石)는 북벌(北伐)의 성공으로 양쯔강 유역에 진출하였다.
난징사건이 일어나 소련과 단교한 장제스는 군벌 장쭤린(張作霖)을 몰아내어 국민정부를 정통정부로 만들었다.(1928)
장제스는 소련과 단교하였을 때 중국공산당도 탄압하였는데, 이때 공산당은 지하로 숨어 소련의 원조를 받았다.
일본의 침공이 격화되자 장제스는 다시 공산당과 화해하여 일본에 대항하였고 그동안에 공산당의 세력이 증대해갔다.
공동의 적인 일본이 패하자 국민정부와 공산당은 다시 적대관계로 돌아가 국공내전이 계속되다가 국민정부가 패하여 타이완으로
물러가고 공산당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웠다.
1949년10월1일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베이징에 세우고 마오져뚱(毛澤東)이 국가주석 및 혁명군사위원회 주석으로 뽑혔다.
1949년12월 소련을 방문하여 1950년2월 중소우호동맹호조조약과 기타 협정을 맺었다. 건국 후 1949~1955년까지는 초기변혁기에
해당, 자본주의를 적대시 하였으나 류사오치를 중심으로 정부의 능률적 경영이 중시되면서 중앙집권적 관료조직이 팽창하였다.
1955~1959년의 시기는 새로운 변혁기에 해당한다. 마오쩌둥은 실용주의 노선에 반대하면서 대중노선을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마오쩌둥은 시중심의 공업화 계속에 반대하고 중국의 공업화 이전에 농업집단화를 추진할 것을 주장하여 대약진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관료주의화된 당을 비판하고 당은 인민에 의해 끊임없는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에 따라 중국 농촌의 99% 이상이 집단적인 인민공사로 재편되었다.
그러나 농업생산력은 하락하였고 자연재해로 중국 경제는 매우 어려운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회주의 이데올로기를 우선시하였던 마오쩌둥의 농업집단화정책은 실패로 끝나고, 공산당내 노선갈등이 다시 나타났다.
1959년부터 문화혁명 이전인 1966년 초까지는 이념보다 효율성과 전문성이 강조되는 시기가 되었으며, 마오쩌둥은 2선으로 물러났다.
1959년 중공 당정치국회의에서 펑더화이(彭德懷)는 마오쩌둥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덩샤오핑(鄧小平), 류샤오치와 연합하여 인민공사를
축소하고 자작경영을 늘였으며 급진적인 정책을 완화시켰다. 그러나 이는 잠시동안의 실용주의 노선이 강화되는 시기이며, 이후는 다시 또
사회주의 이념 및 사상의로의 무장을 강조하는 이른바 문화혁명기가 도래하면서 중국은 혹독한 이데올로기적 실험을 경험한다.
새로운 변혁기인 문화혁명기는 1969년까지 지속된다. 마오쩌둥은 류샤오치와의 정책논쟁을 통해서 류샤오치의 실용주의 노선이 불평등과
관료주의를 심화시키고 있다고 비판하고 군부의 린뱌오(林彪)와 연대하여 반격을 시도하였다.
즉, 마오쩌둥은 이들 노선에는 사회주의체제를 부정하고 자본주의적 사상이 잔존하고 있다는 점을 비판하면서 사회주의혁명 완수를 위해
경제구조는 물론이고 사상의 개조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마오쩌둥은 11전중회에서 <무산계급문화대혁명에 대한 결정>이라는 문안을 통과시키고 청년 대학생을 중심으로 결성된 홍위병을 앞세워
문화혁명을 추진하였다. 홍위병들은 공산당내 부르조아적 요소를 몰아내기 위한 하방운동과 구시대적 문화유산 제거운동을 주도하였다.
문화혁명에는 마오쩌둥의 아내 장칭(江靑) 등 4인방도 합세하였다.
문화혁명 기간중 마오쩌둥의 노선에 반대하는 지도자들은 모두 유배되거나 숙청되었으며 당과 국가기구 등 마오쩌둥과 군중 사이에 놓인
공식기구들은 모두 불신과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류샤오치는 자본주의 추종자로 몰려 사망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 초에는 마오쩌둥과 린뱌오 간의 연대가 무너지고 군부의 힘이 약해지면서 문화혁명초기 급진파들이 득세하는 양상이
약화되고 저우언라이와 같은 중도파가 권력을 쥐게 되었다.
문화혁명의 폐해가 너무 컸기 때문에 이 시기에는 정책의 전환보다는 문화혁명의 폐해를 수습하는 데 주력한 시기였다.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자 덩샤오핑이 복권되었고 중국의 실권은 덩샤오핑에게로 넘어갔다.
장칭 등 4인방은 문화혁명기간 중의 죄목으로 처형당하였으며 실용주의적 지도자들이 대거 복귀하였다.
1978년 3중전회에서 덩샤오핑은 개혁, 개방노선을 채택하면서 중국식 사회주의로의 급격한 변화를 추구하였다.
이후부터 현재까지 중국은 안정적인 실사구시형의 정책을 중심으로 발전을 추구하게 되었다.
새로운 집권세력은 농업·공업·국방 및 과학기술에서의 ‘4개 현대화’ 추진을 정책목표로 세우고 미·일과의 국교정상화를 통해 서방과의
관계개선과 경제원조를 얻어냈으며 개혁·개방정책을 실시하여 눈부신 성장을 이룩하고 있다.
중국은 계획경제에 시장경제의 요소를 가미하여 점차 상품가격이 시장원리에 의해 결성되게 하고 있으며 기업의 독립채산제 확대,
농촌에서의 잉여생산물의 판매허용 등 자본주의적 요소를 도입하여 경제발전과 생산력 증대를 최고의 정책목표로 설정하고 있다.
1980년대에도 지속적인 실용주의적 경제노선은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잘 잡는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다.)으로 상징되는 덩샤오핑의 사상에 의해 진행되었다.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정치이념보다는 경제에 더 중점을 둠으로써 중국정치의 실세가 된 상하이방에 의해 추진되었다.
그런데 개혁, 개방이 가속화되면서 개혁과 개방의 속도에 대한 논쟁이 촉발되었고, 부정부패에 반대하고 정치적 자유주의를 주장하는
학생, 지식인의 반대운동은 1989년 6월의 천안문사태로 나타났다.
이 사태는 결국 보수파에 의해 무력진압으로 끝났지만, 당시의 총서기인 자오쯔양은 실각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상하이방을 대표하는 장쩌민이 총서기에 임명되면서 개혁개방파는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이들은 중국의 개혁개방과 중국 외교의 실무를 담당하였으며, 장쩌민이 1990년 덩샤오핑의 마지막 공직이었던 국가중앙군사위원회의
주석을 맡음으로써 경제관료에 의해 당과 정부의 전권을 장악하였다.
장쩌민은 2002년 당 총서기, 2003년 국가주석, 2004년 당 중앙군사위 주석, 2005년5월 국가 중앙군사위 주석 자리를 후진타오에게
물려주면서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등장한 후진타오 총서기와 윈자바오 총리 체제는 ‘성장우선론자’ 특히 상하이를 중심으로 한 동부연안지역 중심의 성장을
우선시하는 정책을 선호하는 ‘선부론자(先富論者)' 세력들을 몰락시키고, 중국 전역에 걸친 성장을 중시하는 분배를 강조하는 개혁파가
득세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 한국과 중국의 교류관계
개혁·개방 이후 1980년대 후반까지 한국과 중국간의 교역은 20억$ 미만이었다. 1991년 중국의 경기회복으로 교역액은 44억$까지
이르렀고, 양국 무역대표사무소 설치와 무역협정 체결 등으로 경제교류가 본격화되면서 급격한 증가 현상을 보였다.
1993년에는 90억 8,000만$로 늘었다.
무역수지를 보면 한국은 계속 적자를 기록하다가 1993년도에 들어서 대중국 수출이 51억5,000만$로 전년도에 비해 94%의 증가율을
기록하고, 수입이 39억 3,000만$로 증가율 5%에 그쳐 12억 2000만$의 흑자를 기록하였다.
그러나 1994년도 들어 수출 증가세가 둔화되고 중국의 수입억제로 상반기 무역수지는 3억 3,000만$의 적자를 기록하였다.
총 무역액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도 1989년의 1.7%에서 1993년도에는 5.5%를 차지하여 중국이 미국·일본에 이은 한국의
제3대 교역 상대국으로 부상하였다. 교역 품목의 구조는 전형적인 산업간 분업형태를 보인다.
즉, 대중국 수출은 중화학 공업제품이 중심이 되어 있어 철강·금속제품, 기계류 및 운반용 기계, 섬유, 화공제품 순으로 이루어져 있고,
수입은 농수산물, 섬유류, 광산물 등의 품목이 대종을 이룬다.
정식수교와 한국의 산업구조 조정 등으로 인해 중국에 대한 투자가 급증하여 중국이 한국의 2대 투자대상국의 하나로 부상하였다.
1985년 홍콩을 통한 우회적인 투자가 시작된 후 1989년 9건, 1990년 35건에서 1991년 107건으로 급속히 늘었고, 1993년에는
630건 5억 7,030만$의 투자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1993년까지의 직접투자 누계는 1,043건 10억 430만$에 달하였다.
1998년에는 191건 1억 1,100만$로 줄었으나 2000년에는 415건 2억 300만$를 기록하였다.
수교 후 초기에는 투자 대상지역이 보하이만(渤海灣) 주변과 둥베이3성(東北三省)에 편중되었으나 최근에는 상하이·장쑤성(江蘇省)
등으로 다변화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교역 확대를 위해 중국의 공업화에 소요되는 자본재의 확대와 소비변화에 부응하는 시장개척을 중시하고 있으며,
경쟁력이 약화된 업종의 투자를 조장하고 중국의 전략육성산업이면서 협력 가능성이 높은 항공기, 자동차, 전자교환기(TDX),
원자력발전 등을 우선 협력분야로 선정하여 산업협력을 추진하고 있다. 북한과는 1970년대까지 줄곧 밀접한 관계와 지원을 해왔다.
그러나 1978년 이후 개혁·개방으로 한국에 대한 인식 변화로 북한과도 일정거리를 유지하는 선으로 후퇴하였다.
그러나 한중 수교가 이루어진 1992년까지도 북한과의 돈독한 관계는 지속되었다.
1989년 김일성(金日成) 주석이 중국을 방문하고 장쩌민 총서기가 1990년 3월 평양을 방문해 한국과의 경제적 교류로 소원해진
관계를 재차 긴밀한 관계로 바꾸려고 하였다.
그러나 1992년 한국과 중국이 정식 수교하면서 급속도로 관계가 소원해져 1993년 3월 예정되어 있던 김정일의 중국 방문이 취소되었다.
1992년 12월 중국이 북한에 대해 경화결제(硬貨決濟) 요구에 따라 더욱 그 관계가 냉각되었지만 북한 핵문제와 경제난이 가중되어
북한이 중국에 협조를 구하는 과정에서 관계개선을 꾀하였다.
그리하여 1993년 7월 북한의 ‘승전 40주년’ 행사에 중국 대표단이 방북하였고 중국의 경제인들도 활발한 활동을 벌여, 중국이 북한의
최대 교역국으로 올라서게 되는 등 여전히 북한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은 크다.
1996년 8월 북경에서 한중 어업협정 체결을 위한 실무회담을 개최하였다.
2000년 한국은 일본·미국·홍콩에 이어 중국의 4번째 교역국으로, 대한(對韓) 수입은 186억 1천만$, 수출은 128억$였다.
2012년 현재 대한(對韓) 수입은 1,384억$, 수출은 687억 7천만$이다. 주요 수입품은 화학공업제품, 섬유, 전자 및 기기, 철강,
금속제품 등 공업용 원부자재 등이고 주요 수출품은 철강, 금속, 섬유, 전자 및 기기, 농림수산품 등이다.
2003년 이후 중국은 우리나라의 수출상대국 1위를 유지하고 있으며, 2004년 이후 수입상대국 2위이며, 2005년 대중국 무역량은
1,006억$를 기록하였다. 중국은 2003년 이후로 무역흑자 상대국 1위로 2005년 대중국 무역의 흑자액은 235억$였다.
그러나 최근 중국의 급속한 경제성장과 함께 철강, 석유화학등에 투자가 집중되면서 대 중국 수출흑자는 점점 줄고 있다.
2010년 중국의 허가를 받은 한국 대중국 투자 프로젝트는 1,695건으로 전년 동기 대비 1.6% 증가했고, 중국의 한국투자 이용액은
26억 9천만$로 0.3% 감소했다. 2010년 말까지 한국의 대중국 투자 프로젝트는 모두 52,172건, 실제 투자액은 473억$이며,
현재 한국은 중국의 제3대 외국인 직접 투자 대상국이다.
2010년 새로 체결한 노무협력 및 공사청부 계약총액은 3억5천만$, 계약수행영업액은 2억6천만$, 새로 파견된 중국인력은 5,978명이다.
2010년 말까지 영업완성액은 누계 55억 6천만$, 한국에 체류중인 중국인력은 3만 8천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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