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북경 4박5일, 제4일(1) 현존하는 중국 최대의 별궁이자 황실 정원 이화원(頤和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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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중국

중국 북경 4박5일, 제4일(1) 현존하는 중국 최대의 별궁이자 황실 정원 이화원(頤和園)..

by 정산 돌구름 2013. 4. 12.
중국 북경 4박5일, 제4일 - 1. 현존 중국 최대의 별궁 황실정원, 이화원(頤和園)..

 

 여행일정 : 4일차(4월 8일, 월) 이화원광장~798예술구~춘휘원온천호텔

  06:10 기상 후 짐꾸리기 / 07:20 호텔 조식 / 08:00 호텔 출발 / 09:10 라텍스매장 방문 / 10:50~12:00 이화원

  12:20~13:20 차박사가매장 13:35 점심식사(삼겹살) / 14:45~16:00 798예술구 / 16:20~17:20 발맛사지

  18:10~19:00 저녁식사와 공연(북한식)19:40 춘휘원온천 리조트

 

□ 여행개요

 1) 샹그리라호텔

   6시10분에 기상하여 호텔을 떠날 채비를 한다. 3일간 머물렀던 호텔을 Check-out 하고 떠난다.

   7시20분, 모든 짐을 꾸러 로비에 두고 호텔식으로 아침식사를 한 후 8시 호텔을 출발한다.

 2) 라텍스 매장 방문

   9시10분, 라텍스매장에 방문하여 10시35분까지 머무른다.

 3) 이화원 관광

   10시50분, 이화원에 도착하여 내부를 둘러본다. 곤명호 뱃놀이를 예정하였으나 강풍으로 취소되었다.

   이화원은 서태후의 여름별장이었고, 현존하는 중국 최대의 별궁이자 황실 정원이다.

   290㎡ 부지 위에 3개의 인공호수(곤명호, 서호, 남호)와 인공 산인 만수산으로 조성되어 있어 규모면에서도 놀랄만 하다.

 4) 차매장 방문

   12시20분, 이화원을 출발하여 차박사가라는 차판매장을 방문하여 1시간여 머무른다.

 5) 점심식사

   13시35분, 삼겹살로 늦은 점심식사를 한다.

 6) 798예술구 관람

   점심식사를 마치고 14시45분, 798예술구에 도착하여 16시까지 둘러본다.

   798예술구는 옛 중국의 군수품을 만들던 공장터를 개조하여 만든 중국의 해이리.

   중국 예술가들이 만든 다양한 작품들과 소품, 색다른 갤러리 및 까페 등이 들어서 있는 예술거리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7) 발맛사지

   16시20분, 첫날 갔던 곳에서 발맛사지를 받고 나선다.(17시20분)

 8) 저녁식사(북한식)

   18시10분, 평양관에서 북한식으로 저녁식사를 하며, 가수들의 노래공연(15분)을 감상한다.

 9) 춘휘원온천호텔(春暉園泉度假酒店, Vhun Hui Yuan Resort)

   춘휘원온천호텔에 짐을 풀고 방에 마련된 욕실에서 온천욕을 즐긴다.

   온천욕을 마치고 중국의 마지막 밤을 술한잔 하고 보낸다. 내일 아침이면 떠나야 한다..

 

 

현존하는 중국 최대의 별장이자 황실정원, 이화원(頤和園)..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서북쪽으로 10km 떨어진 교외에 위치한 중국 황실의 여름 별궁이자 최대 규모의 황실 정원이다.

총면적 2.9k㎡에 이르며 자연 풍경을 그대로 이용한 정원에 인공 건축물이 환상적인 조화를 이룬 중국 조경 예술의 걸작품으로

199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금나라 때인 12C초에 처음 조성되어, 1750년 청나라 건륭제(乾隆帝) 때 칭이위안(清漪園)을 지어 황실의 여름별궁으로 쓰게

하였으나 1860년과 1900년 외세의 침공을 받았지만 그때마다 복구되었다.

서태후(西太后, 1835~1908년)는 1889년부터 죽을 때까지 이곳에 거주했으며, 청나라 해군의 군자금을 빼서 이화원 복구와

확장에 썼다고 하는데, 서태후가 실권을 쥐었던 1886년 재건되면서 이허위안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1924년 이화원은 공원으로 바뀌었다.

주로 이곳에서 수렴청정을 했던 서태후는 일시적인 피서와 요양 목적으로 건설되었던 이허위안에 각종 전각과 사원을 추가해

본격적인 국사를 볼 수 있는 궁전 형태로 변모시켰다.

이허위안 재건비용 때문에 청나라가 1894년 청·일전쟁에서 패배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막대한 자금을 들였다고 한다.

이허위안에는 거대한 인공호수와 60m 높이의 인공산을 중심으로 각종 전각과 사원, 회랑 등 3000여칸의 전통건축물이

자리잡고 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총면적의 4분의 3을 차지하는 거대한 인공호수 쿤밍호(昆明湖)다.

호수라기보다는 바다처럼 광활해 인공으로 만들었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다.

항저우(杭州)에 있는 시호(西湖)을 모방하여 만든 것이라고 한다.

쿤밍호 북쪽에 있는 약 60m 높이의 완셔우산(萬壽山)은 쿤밍호를 조성할 때 파낸 흙을 쌓아 만든 인공산이다.

건축물들은 모두 산의 남쪽 기슭을 따라 배치되어 있다.

산 정상에 있는 불당 즈후웨이하이(智慧海)는 드넓은 쿤밍호를 비롯한 이허위안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바로 아래 21m 높이로 우뚝 솟아 있는 6각형의 불전 푸시앙가오는 이허위안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건물로 꼽힌다.

이외에도 서태후가 정사를 보았다는 런서우디엔, 홀로 휴식을 취했던 곳으로 중국 최대의 경극극장이 있는 더허위안(德和園),

관세음보살상이 모셔져 있는 파이윈디엔(排云殿) 등이 유명하다.

주요 건물로는 3층짜리 극장이 딸린 이락전(頤樂殿), 서태후의 침전이었던 낙수당(樂壽堂), 그리고 십칠공교(十七孔橋) 등이 있다. 이허위안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건축물은 창랑(長廊), 즉 긴 복도다.

길이가 778m, 273칸으로 중국에서 가장 크고 긴 복도이며, 벽에 중국 고전문학에 나오는 장면들을 묘사한 1만4천여 점의

회화로 정교하게 장식된 ‘중국 최대의 야외 미술관’으로 불린다.

이외에도 중국의 안녕을 기원하며 만들었다는 쿤밍호에 떠 있는 듯한 돌배(石舟), 여러 개의 돌 다리, 아름답게 조각된 수많은

석상들을 볼 수 있다.

석방(石舫)은 나무로 만든 호숫가의 누각으로, 대리석으로 만든 것처럼 보이도록 채색하였다.

양쪽에는 모조 바퀴가 달려 있어, 마치 미시시피 강의 외륜선과 흡사하다.

각각의 건물들이 모두 아름다운 장식을 자랑하지만, 가장 매력적인 것은 호수 너머로 바라보는 전통적인 중국 풍경이다.

바다와 인공호수의 자연풍광이 정자, 전각, 궁전, 사원, 교각 등의 인공요소들과 결합하여 매력적이고 조화로운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이화원은 또 국제적으로도 영향력이 큰 중국 문화양식의 깊은 미의식을 반영하는 중국 정원조경의 철학과 숙련을 한몸에 보여주고 있다.

 

호텔 Check-out 후 아침식사..

 

 

 

가는 길목에서 차창의 풍경..

 

 

중국공산당 중앙당교(中國共産黨中央黨校 Central Party School of the Communist Party of China)

중국공산당 중앙당교는 중국 공산당의 고급 간부를 양성하는 국립 교육기관이다.

마오쩌둥(毛澤東)을 비롯해 후진타오(胡锦涛) 등 중국의 쟁쟁한 실력자들이 교장을 맡았을 정도로 중국에서는 권위있는 교육

기관이다. 중국 공산당 고위 간부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교육기관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2011년 현재 이 학교의 교장은 국가 주석으로 내정된 최고 권력자 시진핑(習近平) 부주석이다.
1933년 장시(江西)성 루이진(瑞金)에서 중공중앙마극사공산주의학교(中共中央馬克思共產主義學校)라는 이름으로 처음 세워

졌다. 마극사(馬克思)는 중국에서 칼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를 표기할 때 쓰는 이름이다.

이 학교는 이름 그대로 마르크스의 정신을 이어받기 위해 마르크스의 사망 50주년을 기념해 설립됐다.

초대 교장은 국공 평화회담 때 중국 공산당측 대표를 맡은 리웨이한(李維漢, 1897~1984)이 임명됐다.
중공중앙마극사공산주의학교는 1935년 교명을 중국공산당 중앙당교(中國共産黨中央黨校)로 바꿨다.

1942년 공산당 지도자 마오쩌둥이 교장으로 취임했다.

1947년 국공내전(國共內戰)에서 공산당이 승기를 잡으면서 학교의 위상이 더 높아졌다.

마오쩌둥은 이 해에 교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듬해 당시 공산당 최고의 이론가로 꼽혔던 류사오치(劉少奇)가 교장 자리를 이어 받았다.
중국공산당 중앙당교는 정식 대학교가 아니고 4~6개월 정도 교육을 진행하는 단기 교육기관이다.
보통 4개월 단위로 교육이

많이 이뤄지고 철학, 경제학, 과학 사회주의, 법학, 중앙당역사, 당건설과정, 문학 등 7개 연구부서가 있다.

학생들은 당 간부와 경제계 엘리트, 석사·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 등으로 구성된다.

‘고급 공산당간부’를 양성한다는 목표를 가지고있어 교육과정도 고급당간부반, 청년간부반, 소수민족간부반 등으로 이뤄져있다.

마르크스의 사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毛澤東思想), 중국사회주의의 역사 등이 주요 교육 과목이다.

시험이 없는 대신 교육과정이 끝나면 보고서를 제출해야 한다. 기관지 <학습시보(學習時報)>를 정기적으로 발간한다.
공산당 선전부장을 지낸 선전 전문가 류윈산(劉雲山), 국무위원 등을 역임한 왕중위(王忠禹) 중국기업연합회장 등이

이 학교 출신이다.

 

라텍스 매장을 방문한다..

 

 

 

이화원 주차장에서 이화원 가는길..

 

 

문물진열관인 문창원(文昌院)..

 

이화원내의 지춘정 동쪽에 위치한 문창원은 중국 고대 황가원림중 규모가 가장 크고, 규격이 가장 높다고 한다.

안에는 종함,서재,자기,옥기,청동기,취진 등 6개 전문진열관이 있다.

청나라말까지의 중국문물 진품과 약간의 외국문물이 진열되어 있는데 모두 당시 황실에 진열되었던 예술품이나 생활용품들이다.

 

 

 

문창각(文昌閣)..

건륭15년(1750년) 창건하였으며, 이화원내의 6개 성관 건축물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1860년 영국 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불에 타 광서(光緖) 때 재건하였다.

주각은 2층이고 내부에는 동(銅)으로 제작된 문창제군(文昌帝君)과 선동(仙童), 동특(童特)을 모시고 있다.

문창각과 만수산 서쪽에 모신 무성(武聖)의 숙운첨(宿雲瞻)은 문무보필을 상징한다..

 

서태후의 정자...

 

곤명호와 불향각..

 

길게 늘어선 유람선..

 

청나라 황제 함풍제를 유혹하였다는 곳..

 

 

 

 

옥란문..

 

문을 들어서면 옥란당..

 

옥란당(玉澜堂 Yu lan tang)..

청 건륭15년(1750년) 창건되었으며, 원래는 사방에서 인접가능한 천당전(穿堂殿)이었다.

청 함풍10년(1860년) 영국 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불탄 것을 광서12년(1886년) 재건하여 광서황제의 침궁으로 이용되었다.

반스뎬(办事殿)이라고도 하였고, 건륭제(乾隆帝)가 이허위안(颐和园)의 이곳저곳을 즐기던 때, 이곳에서 긴급한 공무을 처리

하였다. 1898년에 발생한 변법자강운동 이후, 서태후는 이곳을 광서제(光緖帝)를 감금하는 장소로 사용하였다.

옥란당의 정 중앙에는 광서제의 자단보좌(紫檀宝座)가 놓여있다.

자단보좌와 그 뒤편에 있는 다섯 폭의 자단유리병풍 모두 청대(淸代) 궁정가구의 전형으로 꼽힌다..

 

옥란당 정전(正殿)..

광서제가 이화원에 거주할 때의 침실로 옥란당 안의 앞방에는 자단목감침향의 보좌와 어안을 설치하였다.

유리병풍의 산수화, 물총새의 부채모양 날개 등 황권상징물이 그려져 있다.

서제가 당시 상주문을 읽고 지시하거나 정무를 처리하던 곳이었다.

1898년9월16일에 광서제는 이곳에서 병권을 장악한 원세개를 만나 변법유신을 지지해 줄것을 기대하였다.

서북쪽 방은 광서제의 침실이다...

 

 

 

쿤밍호(昆明湖 , Kūnmínghú)..

이화원 경내에 있는 호수로, 원래는 베이징 서북부 교외의 많은 하천이 모여 형성된 천연호수로 일찍이 칠리락(七里泺), 대박호

(大泊湖) 등의 명칭이 있었고 명대에는 쿤밍호로 바뀌기 전에는 옹산박(瓮山泊)이었다.
원(元)이 베이징에 도읍을 정한 후 지원 29년(1292) 수리학가 곽수경(郭守敬)이 통혜하(通慧河)를 굴착하고 창핑(昌平)의

신산천수(神山泉水) 및 인근의 하천, 시산(西山) 일대의 하천을 호수로 끌어들여 원의 대도(大都) 성내 제조운(济漕运)의

저수지와 연결시켜 옹산박(瓮山泊)은 용수 공급을 위한 저수지가 되었다.

명대에는 호수에 연꽃을 많이 심었고 주위에 벼를 재배하며 호숫가에 사원을 건축하여 풍경이 아름다워지기 시작하였다.

명의 무종(武宗), 신종(神宗)은 모두 이곳에서 배를 띠우고 낚시를 즐겼다고 하며 당시의 시인들은 호수 주변의 자연풍광을

묘사한 그림을 많이 남겼다.

청 건륭제(乾隆帝)는 지금의 만수산인 옹산(瓮山) 일대에 청의원(清漪园)을 세우고 호수 주변을 개척하여 현재의 규모를

이루었으며, 한무제(汉武帝)가 장안(长安)에 쿤밍지(昆明池)를 파고 수군을 조련하였다는 고사(故事)를 모방하여 쿤밍호로

개칭하였고, 호수에서 배를 타고 시를 지어 쿤밍호의 아름다움을 칭송했다고 한다.

1860년 청의원(清漪园)이 영불연합군에 불타자 1888년 자희태후(慈禧太后) 이를 중건하며 이허위안(颐和园)으로 개칭하였다.

 

 

 

러서우탕(Le shou tang , 乐寿堂(낙수당))..

서태후가 평소에 기거하던 장소로 정전(正殿), 와실(臥室), 기거실(起居室) 3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내부에 아름다운

장식이 많다. 청 건륭15년(1750년) 창건한 2층 건물이었으나 함풍10년(1860년) 영구 프랑스 연합군에 소실되었다.

광서12년(1886년) 재건하여 서태후(慈禧太后)의 거처로 이용했다..

 

 

 

청지수(靑芝岫)..

패가석(敗家石)이라고도 불리는 이돌은 역사자료에 따르면 명나라 관료 미만종(米萬鐘)이 북경의 방산에서 영지모양과 비슷한

푸르고 빛이 나는 거대한 돌을 발견하고 그 돌을 미씨작원(米氏勺園)으로 운반하는 도중 비용문제로 할 수 없이 교외에 버렸다.

그 후에 건륭제가 거액의 비용을 들여 이곳으로 옮기고 청지수(靑芝岫)란 이름을 지었다. 이는 중국 최대의 원림치석이다..

 

 

 

 

요월문((邀月門 야오위에먼)..

 

 

장랑(長廊)..

 

청 건륭15년(1750년) 창건하였지만 영국 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불탔고 광서12년(1996년) 재건되었다.

동쪽 요월문(邀月門)에서 시작하여 서쪽 석장정(石丈亭)까지 모두 273칸이 있고 총길이가 728m이다...

 

대들보에는 인물, 산수, 화초, 조류 등 각종 채색화들이 그려져 있고, 중국 고전원림중 최고의 길이를 자랑하는 복도이다...

 

장랑 중간에는 유가(留佳), 기란(寄瀾), 추수(秋水), 청요(淸遙) 4개8각 처마로의 정자가 있고,

산을 등지고 강을 끼고있는 배운전(排雲殿)을 중심으로 동,서 양쪽으로 만수산을 따라 건물들이 들어서있다...

 

이곳에 있는 14,000여 폭의 창랑회화(长廊绘画)는 “소식채화(苏式绘画)”에 속하며, 중국 목조건축물에 꾸며진 장식예술이다..

 

그림의 주제는 자연과 동물, 인물 전기 등 중국고전문학의 내용에 등장하는 것이다...

 

건축형식이 독특한 창랑은 회화가 다채롭고 그 수 또한 많아서, 세계에서 가장 긴 화랑(画廊)으로 평가되고 있다..

 

 

 

 

 

 

파이윈먼(排云門)...

 

 

 

서태후(西太后, Empress Dowager Cíxī)..

청 함풍제(咸丰帝)의 황후로 효흠(孝钦), 서황후(西皇后), 자희황태후(慈禧皇太后)라고도 한다.

동치제의 어머니, 광시제의 양어머니로서 보수파 관료를 기반으로 한 철권통치로 청을 거의 반세기 동안 지배하였다.

서태후는 함풍제의 후궁으로 1856년 황제의 유일한 아들 재순(載淳)을 낳고, 황제가 죽자 당시 6세이던 재순이 동치제

(同治帝)로 즉위하자 국사(国事)는 8명의 원로로 구성된 섭정위원회가 주관하였다.

녀와 함풍제의 정실 자안황태후(慈安皇太后, 东太后)가 계략을 꾸며 섭정을 넘겨받고, 전 황제의 동생으로서 의정왕

(议政王)이 된 공친왕(恭親王)이 두 태후를 보좌하는 3인 집정(三人執政)을 이루어 태평천국(太平天国)운동(1850~64)과

북부지방에서 발생한 염군(捻军)의 난을 차례로 평정하였으며, 외국어교육을 위한 학교 설립, 근대적인 세관설치, 서양식의

군수공장 설립 및 외교 담당부서를 만들었다.
동치제가 성년이 된 이후인 1873년 섭정은 끝났지만 서태후는 계속 국사를 장악하였다.

동치제가 죽자 서태후는 3세의 조카를 양자로 삼아 제위를 넘겨주고 두 태후가 계속해서 섭정을 하였으나 1881년 자안황태후

가 사망하자 서태후가 권력을 독점하게 되었다.

3년 후 공친왕을 제거하고 개혁정책의 대부분을 폐기시켰다.

1889년 명목상 자신의 권력을 정부에 넘겨주고 은퇴하여, 베이징 북서쪽에 재건한 이화원(頤和园)에서 기거하였다.
중국이 청일전쟁(1894~95)에서 패배를 당한 지 3년이 지난 1898년 젊은 광시제(光緖帝)가 개혁주의자들의 영향으로 정부를

쇄신·근대화하고 부패를 제거하기 위한 급진적인 계획을 추진하자, 수구파 관료들이 서태후 주위에 집결하여 군사력을 동원한

일격을 가함으로써 개혁정책은 수포로 돌아갔으며, 황제는 궁전에 연금되었고 서태후가 다시 섭정을 시작하였다.
그 이듬해 서태후는 반외세적 성격의 의화단(义和团) 운동을 지원하였다.

1900년 의화단운동이 최고조에 달하여 수백 명의 외국인이 살해되고, 베이징에 주재하던 외국공사관들이 포위되었으나

외국 연합군이 곧 베이징을 장악함에 따라 서태후는 베이징을 떠나 시안(西安)으로 피신하고, 강화조건을 받아들였다.

1902년 베이징으로 돌아온 서태후는 1898년에 자신이 무산시켰던 개혁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서태후는 청의 권위 실추와 함께 혁명운동·입헌운동이 고조되는 가운데 광시제가 죽은 하루 뒤인 1908년에 사망하였다...

 

 

파이윈뎬(Pai yun dian , 排云殿)...

 

서태후의 생일 축하연을 열던 장소로 이곳은 당시의 모습 그대로 전시되어 있다.

이 중 진귀한 전시품들 대부분은 서태후의 70회 생일을 맞이하여 왕공대신(王公大臣)들이 바친 선물이다..

 

운휘옥우(雲輝玉宇)..

배운전 정문에 있는 패루로서 구름, 노을, 궁전이 서로 빛을 받아 함께 빛나다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고한다...

 

배운문 너머로 불향각이 바라보인다..

 

 

불향각(Fo xiang ge , 포샹거 佛香阁)..

높이 41m에 8면 3층의 건축물로 완서우산(万寿山) 앞산의 거대한 석조대(石造台) 위에 세워졌다.

전각 내 1층에는 천수천안보살(千手千眼菩萨)이, 2층에는 건륭제(乾隆帝)때의 삼세불상(三世佛像), 

3층은 포샹거[佛香阁]의 건축예술을 전시하고 있다...

 

 

 

 

 

 

더허위안(德和園)...

 

청조(淸朝)의 제후(帝后)들이 공연을 관람하던 건축군으로, 그 중 대희루(大戏楼)가 가장 유명하다.

생일이나 명절 때면 유명한 경극배우들이 이곳에서 공연을 하였다...

 

덕화원은 21m 높이에 상하 3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저층부에는 폭 17m의 무대가 있다.

이 무대 아래에는 사각 형으로 된 5개의 우물이 있어, 공연시 공명효과와 폭포와 같은 배경을 연출할 때 사용된다...

 

황제의 우물...

 

인수전(仁寿殿, 런서우뎬 Ren shou dian)..

 

둥궁(东宫)에 들어서서 첫번째로 보게 되는 건축물로 본래 친정뎬(勤政殿)으로 불렸다.

청 건륭15년(1750년)에 건축되었다가 함풍10년(1860년)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의 공격으로 파괴되었다.

 

광서12년(1886년)에 재건되면서 논어의 인자수(仁者壽)의 뜻을 빌어 런서우뎬(仁寿殿)으로 개칭하였다.

 

자희와 광서제가 이화원에 있을 때 국정을 다스리며 축하행사를 벌이며 외국사절을 접견하는 장소였다.

또한 서태후가 정무를 보던 장소이기도 하다..

 

오색찬란하고 화려한 신수(神獸) 기린(麒麟)..

 

기린은 오색 찬란 화려한 빛깔의 털을 가지고 이마에는 기다란 뿔이 하나 있는 외뿔잡이 동물이다.

사슴의 몸에 소의 꼬리, 말과 비슷한 발굽과 갈기를 갖고 있다고 알려진 상상 속의 동물이다...

 

예로부터 용, 거북, 봉황과 함께 사영수(四靈獸)를 이루어 신성한 동물로 인식되었다. 악을 누르고 사악한 것을 없애는 역할을 한다..

 

옛날 중국 전한의 무제가 누각을 세워 ‘기린각(麒麟閣)’이라 이름하고, 공신 11명의 상을 각상에 걸었다고 한다.

그 후로 남아(男兒)는 국가에 공훈을 세워 자기의 화상이 기린각에 걸리는 것을 이상으로 여기게 되었다..

 

재주와 능력이 뛰어난 아이를 가리켜 ‘기린아(麒麟兒)’라고 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기린은 훌륭함을 상징한다..

 

반면 자질이 좋지 못하여 기대할 것이 없을 때에는 ‘우마(牛馬)가 기린되랴’ 라고 하였으며, 쓸데없고 보람 없이 된 처지를 가리켜

‘성인 못 된 기린아’라는 속담을 사용하여 상황을 묘사하곤 한다.

이 외에도 기린은 장수의 대명사로서 자손 번창을 의미하거나 죽음을 예고하기도 한다...

 

 

수성석(壽星石 셔우싱스)..

청 광서12년(1886년) 이화원을 재건할 때에 묵이근원(북경대학교 안)에서 옮겨 왔으며,

색상이 푸르고 윤기가 나고 조형이 기이하여 마치 수성같아 수성석으로 부르고 있다..

 

 

 

 

 

청나라말 최고의 통치자 서태후(西太后)..

19세기 말, 서태후는 황제는 아니었지만,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들며, 나라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였다.

20세기도 아니고 19세기에, 거기다 남성중심의 유교국가 중국에서 여성이 47년간 통치자였다는 사실은 서태후가 좋은 의미sk

나쁜 의미에서든 매우 탁월한 인물이었음을 말해준다.

서태후가 집권할 당시 청나라는 대내외적으로 복잡한 상황에 처해있었다.

외적으로는 서구열강이 호시탐탐 중국 땅을 노렸고 내적으로는 250여 년 간 만주족의 지배를 받던 한족들이 여기저기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면서 일어나고 있었다. 어쩌면 중국역사상 가장 위태롭고 혼란스러운 시기였을지도 모를 19세기 말,

최고 권력을 가졌던 서태후의 행보가 이후 중국의 운명을 일부 결정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효흠현황후, 자희태후라고도 불리는 서태후는 1835년 안휘성의 몰락한 관리의 딸로 태어났다.

만주족이었고 성은 예흐나라, 어렸을 때 이름은 행정 혹은 행아였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서태후의 어린 시절은 매우 빈곤해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애인 영록을 버리면서 까지 궁녀가 되고 싶어 했다.

1851년 16세에 궁녀가 되어 자금성에 들어간 서태후는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다.

욕심 많고 진취적이었던 서태후는 궁녀 이상의 그 무엇을 원했다.

젊음과 미모가 있었고 거기에 더해 묘하게 사람을 설득할 수 있는 말솜씨가 있었던 서태후는 함풍제 주변 환관들의 환심을

샀고 곧이어 황제의 눈에 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황제의 유일한 혈육을 낳았다. 아들이었다. 이것은 하늘이 그녀에게 준 일생일대의 기회였다.

일개 궁녀에서 일약 귀비로 뛰어 오른 서태후는 이 지점에서 더 큰 야망을 꿈꾸기 시작했다.

귀비가 되어 황제의 옆에 있다 보니 나라의 정사가 하나하나 눈에 들어온 것이다.

그저 황제의 후궁으로, 황태자의 모후로 얌전히 사는 것에 만족하지 못했던 서태후는 때때로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함풍제는 그녀의 마음에 담긴 야망을 알아차리고 이를 무척 경계하였다.

유일한 혈육의 어머니인 서태후가 훗날 폭주할 것을 두려워한 함풍제는 그녀를 죽일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860년 서구 열강의 북경 침범과 피난 과정에서 함풍제는 31세에 요절하고 만다.

유일한 후계자인 황태자의 어머니 서태후...

그녀의 6살 난 아들이 동치제로 황제가 되자 서태후는 수렴청정을 시작하였고, 마침내 그녀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수렴청정은 함풍제의 정비인 동태후와 같이 했지만, 그다지 정치에 관심이 없고 문맹이었던 동태후는 서태후에게 정치전반을

맡겼다. 이때 서태후는 비로소 ‘서태후’ 라는 명칭을 얻게 된다.

황제의 궁을 가운데 두고 동태후와 서태후의 거처가 동쪽과 서쪽에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수렴청정 초기 서태후는 황족인 공친왕과 연대하여 청나라의 자강운동에 힘을 기울였다.

제도와 인사개혁을 통해 한족들에게도 기회를 주었고 태평천국의 난도 완전히 진압하는 등 부국자강운동은 어느 정도 성과를

이루었다. 후세에서는 이시기를 동치중흥이라고 하기도 한다.

동치제를 허수아비로 두고 발 뒤에서 실제로 중국을 다스렸던 서태후였지만 그녀의 권력에는 치명적인 한계가 있었다.

그녀가 중국을 다스릴 수 있도록 만들어준 존재, 바로 아들 동치제가 언젠가는 반드시 권력을 빼앗아갈 정적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권력은 황제가 성장하여 친정을 하게 되면 내주어야만 하였기에 아들의 성장은 서태후에게 다른 마음이 사로잡았다.

권력욕 앞에서는 아들이든 아니든 다 자란 황제는 무조건 눈의 가시였던 것이다.

게다가 동치제는 생모인 자신보다 후덕한 동태후를 더 따랐고 황후도 동태후의 가문에서 골랐다.

지방의 몰락한 관리의 딸인 서태후가 쉽게 다룰 수 없는 명문가 출신의 며느리인 황후는 눈엣가시였다.

언젠가 황제가 성인이 되어 친정을 시작할 때쯤 황후의 가문은 득세하고 자신은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될 것은 훤한 일이었다.

서태후는 며느리인 황후와 황제 사이를 갈라놓고 끊임없이 황후를 구박하였고, 황제의 관심을 정치에서 돌려 환락에 빠져들게

하였다. 동치제는 서태후의 사주를 받은 환관의 손에 이끌려 궁궐 밖 홍등가에 드나들었다.

열락의 세계에 빠져 허우적대던 황제는 마침내 몹쓸 병에 걸리지만 그 소식은 서태후에게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이미 동치제는 아들 이전에 권력을 뺏으려는 라이벌이었다.

서태후는 동치제가 치료받지 못하고 고통 속에서 죽어 가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리고 황제가 죽고 나자 아이를 가진 황후를 구박하여 자살하게 만든다.

서태후의 눈에는 황후 뱃속에 든 아이마저도 손자라는 애틋한 마음보다는 미래 경쟁자이기에 없애버려야 할 존재였던 것이다.

권력 앞에 모성애마저 버린 비정한 어머니, 서태후는 동치제를 이을 다음 황제로 함풍제의 동생과 자신의 여동생 사이에서 난

광서제를 골랐다. 서태후는 광서제의 큰어머니이자 이모였으며, 즉위 당시 광서제의 나이는 불과 네 살이었다. 성인 황족들을

물리치고 구태여 네 살의 광서제를 황제로 고른 것은 서태후가 수렴청정을 계속 하겠다는 의지 표명에 다름 아니었다.

광서제는 친아들마저 희생시킬 수 있는 비정한 서태후에게 주눅 들어 기 한번 펴지 못하고 자랐다.

황후의 간택에도 마음에 둔 여인이 따로 있었지만 결국 서태후가 골라준 서태후 가문의 여인을 황후로 맞아야만 했다. 

1889년 서태후는 동치제와 광서제에 이은 오랜 수렴청정 끝에 광서제를 결혼시키면서 뜻밖에 황제의 친정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자금성 북쪽에 새로 지은 이화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외형상으로는 광서제에게 권력을 이양하고 뒤로 물러 난 것처럼 보였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외형상’ 일 뿐이었다.

이미 궁궐과 조정에는 서태후의 사람들뿐이었고 광서제는 자주 이화원으로 문안인사를 가서 서태후에게 국정을 보고하고

지시를 받았다. 서태후가 수렴청정을 끝낸 것은 이미 수렴청정이라는 형식이 그녀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발을 드리우건 걷어버리건 중국을 통치 하는 것은 광서제가 아니라 서태후였고 그녀는 황제 위의 최고 권력이었다.

그러나 명목상이든 허수아비든 간에 황제는 광서제였다. 성인이 된 광서제는 자신의 나라를 자기가 직접 통치하고 싶었다.

서태후의 전횡으로 기울어가는 청조도 광서제에게는 큰 걱정이었고, 광서제는 청일전쟁을 통해 황제의 좁은 입지를 벗어나

보려 했다. 그는 서태후를 졸라 청일전쟁을 일으켰고 승리를 확신했으나 일본군은 예상 외로 강했다.

거기에다가 청일전쟁에서의 승리가 광서제의 입지를 넓혀주는 계기가 될 것을 두려워한 서태후의 방해 공작도 있었다.

서태후는 전쟁 중에 군비의 일부를 빼돌려 이화원을 치장하는 데 썼다.

청일전쟁은 청나라의 어이없는 패배로 끝이 나고 청나라는 세계 만방에 자신들의 국력이 형편없음을 알리는 꼴이 되고 말았다.

열강의 압박은 심해졌고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된다는 분위기가 청나라 지식인 사회에서 형성되었다.

광서제는 이 지식인층의 새로운 분위기에 적극 동조했다.

그들의 의견을 수용함으로써 나라도 부강케 하고 서태후로부터 벗어나보자는 것이 광서제의 속셈이었다.

캉유웨이, 링치차오(양계초)를 비롯한 많은 지식인 학자군이 시대에 맞지 않는 법과 제도를 고쳐 나라를 부강하게 하자는

취지로 변법자강운동에 나섰다. 그러나 이들의 개혁운동은 서태후와 그녀를 둘러싼 보수파들에 의해 번번이 방해를 받았다.

서태후 세력을 몰아내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한 개혁파와 광서제는 당시 군부세력이있던 위안스카이를 끌어

들였다. 그러나 위안스카이는 겉으로는 개혁파에 동조하는 척 할 뿐 뿌리 깊게 이해타산을 따지는 인물이었다.

그는 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쪽이 어디일까 주판알을 튕겼고 서태후를 선택했다.

그는 서태후의 애인 영록을 찾아가 광서제의 모든 계획을 낱낱이 고발했다.

그렇지 않아도 광서제와 개혁파의 행보가 마음에 들지 않던 서태후는 이때를 기회로 삼았다.

그녀는 광서제를 자금성 영대에 유폐시켜 버리고 그를 도와 변법자강에 나섰던 지식인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처형했다.

캉유웨이를 비롯한 일부는 해외로 망명하여 목숨만은 건졌지만, 변법자강운동은 이렇게 허무하게 끝을 맺고 말았다.

무술정변 후에 모든 견제 세력이 사라진 조정에 서태후의 독무대가 차려졌다.

비록 명분상으로는 수렴청정이 다시 시작된 것이었지만, 서태후에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을 것이다.

정치에서 최고 권력을 가졌던 서태후였던 만큼 그녀는 어린 시절의 가난에 복수라도 하듯 사치를 즐겼다고 한다.

서태후의 사치와 향락은 중국 역사상에도 그 유래를 찾을 수 없을 정도였으며, 그녀가 먹는 음식은 한 끼에 128가지나 되었다.

돈으로 환산하면 백은 100만 냥으로 이것은 당시 중국 농민의 약 1년 치의 끼니에 해당하는 정도의 금액이었다.

옷은 3000여 상자나 되어 하루에도 몇 번씩 옷을 갈아입고 다녔고 특히 보석에 대한 애착이 대단하였다.

언제나 비취와 진주로 머리장식을 했으며 비취구슬과 진주를 매단 옷에 비취 팔찌와 반지뿐 아니라 손톱에까지 비취보호판을

달았다. 식탁도 비취로 만든 식기들로 차리게 했으며, 비취로 악기를 만들어 연주하게 하였다.

서태후가 부린 사치의 가장 극단적인 예는 바로 현재까지도 중국의 대단한 문화유산으로 남아 있는 이화원이다.

서태후는 청일전쟁 중에 함대를 만들 돈을 빼돌려 자신의 처소인 이화원을 치장하였다.

나라의 존망이 달린 전쟁 중에도 오로지 처소 꾸미기에 급급했던 서태후의 배짱은 크다면 크고 달리 보면 황당하기까지 하다.

이화원은 현재까지도 그 화려함에 혀를 내두르게 되는데, 특히 인공으로 파낸 호수는 마치 바다와도 같다. 

국가 최고 권력에 오른 서태후에게 황제의 후궁으로서 지켜야 할 정절 같은 건 콧방귀꺼리도 되지 않았다.

함풍제가 죽고 27세에 젊은 과부가 된 서태후는 권력을 잡자마자 고향에 버리고 온 애인, 영록을 불러들였다.

영록은 평생의 그늘 속 애인으로 머물면서 그녀의 사치와 향락을 뒷받침하였다.

서태후는 영록 외에도 마음이 내키면 언제든지 남자를 취했고, 수시로 갈아치웠다고도 한다.

그 어떤 정적도 두렵지 않고 외세의 압박에도 눈하나 까딱하지 않던 철의 여인 서태후도 이겨내지 못한 것은 세월이었다.

그녀도 나이 들어 노쇠해졌고 극심한 사치와 향락은 노인에게 오히려 독이 되었다.

그래서였을까? 몇날 며칠 동안 계속된 자신의 생일잔치에서 너무 많은 음식을 먹은 서태후는 이질에 걸린다.

그보다 며칠 앞서 10년간 유폐되어있던 광서제는 위안스카이가 보낸 보약을 먹고 38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위안스카이가 보낸 약은 보약이 아니라 독약이었으니 광서제의 죽음을 전해들은 서태후는 매우 담담해했다고 한다.

그리고 역시 독단으로 광서제의 동생인 순친왕의 불과 세 살 밖에 안 된 아들을 다음 황제로 지목했다.

그가 바로 청나라 마지막 황제 선통제 부의였다.

세 살짜리 부의를 선택했을 때 서태후는 곧 병을 털고 일어나 수렴청정을 이어갈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노령은 이질을 이기지 못했고, 서태후는 광서제가 죽고 얼마되지 않아 살아생전 그토록 핍박했던 조카를 따라 유명을

달리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마지막 유언은 다시는 여자가 정치를 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서태후의 죽음과 함께 청조도 곧이어 망하고 말았다.

1911년 일어난 신해혁명으로 쑨원(孫文)을 대총통으로 하는 중화민국이 탄생하고 중국은 새로운 역사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서태후가 만든 보수적인 정치 풍토는 새롭게 다가오는 서구 세력에 순발력 있게 대응하지 못했고, 황실과 주변 귀족의 사치와

향락은 백성을 몰락으로 이끌었다.

서태후 사후 몇 년 지나지 않아 중국은 서구열강의 손아귀에서 농락 당하는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된다..

 

이화원을 나와 당인가(唐人街)가 있는 곳의 차 판매장에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