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흥기행] 보물 제1307호 팔영산 능가사(楞伽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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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기행] 보물 제1307호 팔영산 능가사(楞伽寺)..

by 정산 돌구름 2012. 10. 28.
[고흥기행] 보물 제1307호 팔영산 능가사(楞伽寺)..

 

탐방일 : 2012년 10월 24일

소재지 : 전남 고흥군 점암면 성기리 369

능가사 소개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로 신라 눌지왕4년(420년) 아도(阿道)가 창건하여 보현사(普賢寺)라 했다고 하지만

  지리적으로 보아 신빙성은 없다.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탄 뒤 인조22년(1644년)에 벽천(碧川)이 중창하고 능가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벽천은 원래 90세의 나이로 지리산에서 수도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밤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서 절을 지어 중생을 제도하라는 계시를

  받고 이곳에 능가사를 신축하였다고 한다. 그 뒤 1768년(영조 44)과 1863년(철종 14)에 각각 중수하였으며, 1993년에 응진전을,

  1995년에 사천왕문을 각각 수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정면 5칸, 측면 3칸에 팔작지붕을 한 대웅전(보물 제1307호)과 천왕문(天王門), 산신각, 요사채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350여 년 전에 나무로 만든 뒤 개금한 불상 8위와 나무로 만든 뒤 도분한 불상 22위, 전남도 유형문화재 제69호로 지정된

  범종(梵鐘), 목조사천왕상(木造四天王像) 및 귀부(龜趺) 위에 세워진 능가사 사적비(전남유형문화재 제70호)가 있다.

  이중 사적비는 1726년(영조 2)에 건립한 것으로 불교의 유래와 절의 역사를 기록해놓은 귀중한 자료이다.

  전설에 의하면 이 비석은 원래 탑 앞에 있었는데, 덕목이 도술을 부려 절 뒤로 옮겨놓았다고 한다.

  능가사 범종은 1698년(숙종 24)에 주조된 것으로 이 종을 치면 인근 점암면 일대에 울려퍼질 정도였는데,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탐을 내 헌병대까지 끌고 가 종을 쳐봤으나 소리가 나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밖에도 절의 경내에는 광조(廣照), 사영당(泗影堂), 추계당(秋溪堂) 등의 부도(浮屠) 8기가 있다.

  영조 때 이중환의 기록에 의하면 옛날 일본 류큐(琉球, 오키나와)의 태자가 표류하다가 이곳에 이르렀는데, 이 절의 관세음보살에게

  기도하면서 고국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빌었더니 7일 만에 승려가 나타나서 태자를 끼고 파도를 넘어갔다고 하며, 절의 승려들이

  법당 벽에 그 모양을 그려놓았던 것이 영조 때까지 남아 있었다고 전한다.

  부속 암자로는 만경암(萬景庵)과 사불암(四佛庵)이 있었다고 하나 현존하지 않는다.
  신라 때 10대 사찰로 꼽혔다는 능가사는 현재 비구니들의 도량으로 이름이 높다...

 

 

팔영산 능가사 입구...

 

능가사 천왕문(天王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에 맞배지붕을 올린 문으로 어칸은 통로로 사용하고 양 협칸에는 사천왕상을 모시고 있다.

막돌초석위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그 위의 외부로 2출목(二出目)을 둔 익공식(翼工式)의 공포를 짜 올렸다.

능가사 사적비에 의하면, '천왕문 화주 시한 별좌 회익 왕상화주 천일 중인 삼보화주 지웅(天王門化主是閑別座懷益王像化主天日仲印

三輦化主智雄)'이라하여 천왕문을 지을 때 사천왕상도 함께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天王門'이라고 씌여진 현판이 걸려있고 아래에는 '팔영산 능가사(八影山楞伽寺)'라고 적혀있는 현판으로 사찰의 이름이 적혀 있다.

안에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선신(善神)으로 악귀를 굴복시키는 위력이 있는 사천왕을 문 양쪽에 모시고 있어 이렇게 부른다...

 

능가사 목조 사천왕상(2000년6월12일 전남 유형문화재 제224호로 지정)..

1690년 세운 ‘능가사 사적비’를 통해 이 사천왕상은 1666년(현종 7) 천왕문이 건립되었을 때 함께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나무를 깍아 채색한 사천왕(四天王)은 몸에는 갑옷을 입고 손에는 각자의 지물을 들었으며, 눈을 부릅떠 사방을 수호하고 있다.

긴 칼을 잡고있는 증장천왕(增長天王)은 수미산의 남섬부주에 주석하면서 항상 사람을 관찰하고 더욱 이익을 넓게 중생의 이익을 많게

해주는 선신(善神)이다.

눈을 부릅뜨고 손에는 비파를 켜고있는 지국천왕(指國天王)은 수미산의 동쪽 동승신주에 주석하면서 백성을 편안하게 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천왕이다...

 

수미산의 서쪽 서구여니주에 주석하고 있는 광목천왕(廣目天王)은 손에 용과 여의주를 들고 있다.

나쁜 것을 물리쳐 넓은 눈으로 국토를 바라보며 지키고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선신(善神)이다.

그 옆에 보탑과 삼지창을 잡고있는 다문천왕(多聞天王)이 눈을 부릅뜨고 북쪽을 지키고 있다.

수미산의 북구로주에 주석하면서 재물과 복덕의 부귀를 맡고 항상 부처님의 도량을 지키고 설법을 들으며 불법을 옹호하는 천신이다...

 

우리나라의 사천왕상은 예외없이 무장형(武將形)으로 손에 들고 있는 지물도 다양하다.

통일신라말에서 고려초까지 지물을 보면 동방 지국천은 칼이나 창, 남방중장천은 칼이나 금강저 또는 보주, 서방광목천은 칼이나 금강저,

북방다문천은 보탑이나 창을 들고 있었으나 이러한 전통은 조선조 후기가 되면서 크게 달라진다.

즉 동방천은 칼, 남방천은 뱀이나 보주, 서방천은 보탑이나 창, 북방천은 비파를 잡고 있는데, 이는 라마교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라마교의 영향을 받은 티베트계 사천왕은 지국천이 비파, 중장천은 칼, 광목천이 새끼줄이나 뱀, 다문천은 족제비 또는 보탑을 들고 있다.

능가사의 사천왕상도 라마교의 영향으로 동방지국천이 비파, 남방증장천이 칼을 쥐고 있고, 서방광목천이 뱀을 쥐고 있다..

 

종각과 대웅전...

 

종각(鐘閣)..

정면과 측면에 각 3칸으로 기둥을 세워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을 짜올리고 겹처마에 모임지붕을 하였다.

천정은 서까래를 노출시킨 연등구조로 안에는 중생을 착한 길로 인도하여 해탈의 길로 승화시켜주는 의식구인 범종을 봉안하고 있다..

 

강희명동종(康熙銘銅鐘)..

종신에「康熙三十七年戊寅三月日 興陽八影山楞伽寺…」의 주종명이 있어 1698년( 숙종24)에 만들어진 범종임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의 동종(銅鐘)으로 높이가 157cm이며, 당시 주지는 도학(道學)이었다.

능가사사적비 음기에는「金鐘化主雙海 重鑄別座順侃 都監前僧統義軒」으로 적고 있어 비가 세워질 무렵(1690년) 이미 주종을 한 뒤

10여년 뒤(1698년)에 다시 주종기를 음각한 것으로 보인다..

 

용뉴는 쌍용으로 정상에 여의주를 물고 있으며 음관(音管)을 두지 않고 그 자리에 조그만한 구멍을 뚫어 음관을 대신하고 있다.

천판은 이중의 연화문을 표현하여 종신(鐘身)의 윗면에는 이중의 연화문을 장식하고 그 밑으로 범자대(梵字帶)를 둘렀다.

상단은 16엽 연화문이고 하단은 입상화문이며, 상대에 원형으로 자리를 마련해 12자의 범자문을 차례로 돌렸다.

종신 4면에는 두줄의 띠를 두른 장방형의 유곽(乳廓)을 배치하고 인동문을 장식한 유곽(27×34㎝) 안에 9개의 유두를 돌출시켰다.

4곳의 유곽사이에는 천의를 걸친 보살입상과 문호형을 각출하였는데 그 안에「主上展下壽萬歲」라는 양각 명문이 보인다...

 

종신 중앙부에 주역에서 나타나는 전양인 乾(≡)에서 전음인 坤(≡≡)의 팔괘가 있는데 이는 조선 범종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양식이다.

이러한 예는 같은 경내의 능가사 사적비 이수에서도 표현되고 있어 주목된다.

하대로 내려와서는 두 줄의 띠를 둘렀고 그 안에 각각 그 문양을 조금씩 다르게 표현한 화판과 당초문대를 돌려 정교함을 엿볼 수 있다.

중앙의 주종명은 음각인데 이에 따르면 시주자는 통정상운(通政尙云)등 68人이며 工匠․助役․緣化秩․別座․都監․三綱 등을 밝히고 있다..

 

대웅전(大雄殿)... 2001년2월23일 보물 제1307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5칸, 측면 3칸, 다포계의 팔작지붕으로 시멘트 기단위에 덤벙 주춧돌을 놓고 배흘림이 약간 거칠게 다듬은 원형기둥을 세웠다.

기둥에 비하여 조그마한 기둥머리가 창방과 용머리를 지지하고 있으며 그 위에 다시 용의 형상을 조각하여 장식한 용머리가 외 3출목,

내 4출목의 공포를 받쳐주고 있다.

살미첨차의 앙혀의 굽변은 완만한 곡면을 이루고 위로 올라갔으며 첨차의 곡면 역시 약간 경사를 두고 비스듬하게 깎았다.

중앙칸은 4분합문이며 기둥사이 포가 3조 있으며, 협문은 2분합문으로 기둥사이 포가 2조, 퇴간은 외여닫이문으로 주간포 1조가 설치..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겹쳐마이며 직경이 큰 서까래가 거의 간격을 두지 않고 설치되어 있다..

 

내부는 조그마한 닷집이 4개의 높은 기둥에 결구되어 있으며 넓은 공간을 4개의 대량과 4개의 높은 기둥이 지지하고 있다.

내부공포는 운공형으로 조식되어 있는 살미첨차가 커다랗게 결구되어 있으며 맨밑에는 용의 몸통 부분으로 받쳐지고 있다.

천장은 층단천장으로 되어 있는 우물천장이고, 바닥은 우물마루이며 창호의 무늬는 빗살무늬문을 하고 있다.

특이한 것은 건물 방향이 입구 때문에 북향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며, 후기의 건물이지만 규모나 양식면에서 귀중한 유산이다.

건물 전체가 기울어 1999년부터 완전 해체하여 2000년 12월 완전 복원하여 본래의 모습을 찾았다...

 

대웅(大雄)이란 큰 영웅인 석가모니를 이르는 말이다. 큰 힘으로 사마(四魔)를 항복시킨다는 뜻에서 붙여진 부처님의 덕호(德號)에서

유래한 것으로 법화경에서 따온 이름이다...

 

대웅전 내 세개의 후불탱과 신중탱은 1991년 금어(金魚) 서수산에 의해 그려져 함께 봉안된 듯 하다....

 

대웅전 본존불...

높직한 수미단을 마련하여 봉안된 불상으로 목조에 개금을 하였다.

삼체불 중 본존불로 나발의 머리에는 조그마한 원형 육계가 보이며, 눈은 정면을 응시하고 원만한 상호(相好)이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보이며, 법의(法衣)는 통견(通肩)으로 어깨선을 타고 내려온 옷주름이 두껍게 나타난다.

가슴은 양연형의 내의자락이 표현되어 있고 그 아래로 띠매듭을 둘렀으며, 수인(手印)은 항마촉지인을 맺고 있다.

무릎은 오른발이 올라가는 길상좌(吉相坐)이며, 하체 정면에서 흘러내린 옷주름이 유려하게 무릎 전체를 덮고 있다.

좌우에서 협시를 이루며 서있는 보살은 문수와 보현으로 추정되는데, 도난 당하여 다시 조성한 불상이다...

 

중앙의 본존불 좌우에 모셔져 있는 불좌상은 아미타의 중품하생인(中品下生印)을 결한 당당한 모습의 불상으로 목조에 개금을 하였다... 

 

단 위에 결가부좌하여 뒤에는 화려한 색채로 그려진 거대한 후불탱이 걸려 봉안되어 있다...

 

대웅전 칠성탱(大雄殿 七星幀).. 능가사 대웅전의 향우측 벽에 걸린 칠성탱화이다.

하늘의 별인 북두칠성은 하늘의 일월성진(日月星辰)을 다스리고 천재지변을 통솔하는 주제신(主帝神)으로 승격하게 된다.

신으로 숭배되어 온 민간신앙을 흡수하여 부처님으로 승격시키고 칠성의 주존을 치성광여래로 모시며 도상화한 것이 칠성탱이다.

화면의 중앙에는 치성광여래를 중심으로 앞에는 해와 달을 들고 있는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협시를 이루고 있다.

그 좌우로 도교적인 복장을 한 칠원성군과 머리가 높게 솟아 있는 필성(弼星)이 정연하게 배치되어 그려져 있다...

 

화기에 따르면 광무8년(1902년)에 순천 송광사 삼일암에서 조성하여 장경각에 봉안했던 것으로 그 뒤 현위치로 옮겨졌다..

양식을 보면 중앙의 수미단 위에 본존인 치성광여래를 배치하였고, 겹원으로 된 이중윤광(두신광)을 지니고 있다.

통견의 붉은 법의를 입고 결가부좌한 상으로, 본존의 좌우로는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묘사하였는데 각각 해와 달을 상징하는 적색의

원형지물을 한손에 받치고 있다. 3존의 좌우로는 조복을 입고 홀(笏)을 든 칠원성군을 배치하였는데 왼쪽이 4위, 오른쪽이 3위이다.

본존의 오른쪽에는 긴 이마를 가진 노인성(老人星)을 묘사하였고, 상부에는 구름을 사이사시에 묘사하였다.

좌우 보살 성군이 본존을 중심으로 비켜서 있는 상태로 묘사되어 시선이 본존으로 집중되고 있다.

화기는 양단말미에 있는데 향우측에는 조성기와 연화질, 향좌측에는 시주와 삼강이 기록되어 있다...

 

대웅전 종..

단용뉴를 갖추고 있으며, 음통이 있고, 상대는 당초문으로 장식되었으며, 천판에는 시주자들이 이름이 양각되어 있다.

상대 아래에는 4개소에 유곽이 표현되었고, 종복에는 시주자 들이 이름이 양각되었으며, 당좌를 갖추고 있다..

하대도 상대와 마찬가지로 당초문을 장식하고 있는데, 종복에는 ‘능가가 주지 남법선 화주주천진행’이란 글자가 양각되어 있다...

 

신중탱(神衆幀)..

대웅전 내 향좌측 벽에 신중탱이 봉안되어 있는데, 불법을 수호하는 여러 선신(善神)을 도상화한 것이다.

많은 신을 배치하므로 다양하고 복잡한 구도를 보이는데 일반적으로 제석과 위태천을 중심으로 주위에는 무장을 한 신중들을 배치한다.

화기는 施主 고흥 점암 박봉진 석원부 佛紀二五三五年 證明 法興 主持 南法船 總務 南玄旭 金魚 서수산...

 

대웅전 후면..

 

대웅전 측면...

 

응진당(應眞堂)..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의 단층건물로 원통형 두리기둥의 위에 외부로 2출목(二出目)을 둔 삼익공식의 공포를 짰다.

종량 위로 우물천장을 가설하였고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창호는 띠살창으로 짜 어칸은 4분합, 협칸은 2분합의 문을 달아 놓았다..

 

안에는 수기삼존상과 나한상이 함께 모셔져 있다.

석가모니의 수기를 받아 열반에 들지않고 있는 나한상을 모시고 있는 전각으로 열 여섯분을 모신 전각을 '응진전'이라고 한다.

그리고, 500분의 나한을 모시고 있는 전각은 '나한전(羅漢殿)'으로 구분하여 부른다...

 

응진당 불단은 목조 삼존불로 재료는 나무이지만 개금을 하였다.

응진당은 바로 인접한「능가사 사적비(1690년)」에 따르면 17세기후반 중창할 때 동시에 지은 것으로 나타난다.

불상 역시 아마 법당을 중창할 때 함께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데 사적비의 음기에「應眞堂 佛像十六羅漢化主 尙機 別座 萬幸」이라 하여 불상 조성 당시의 화주와 별좌를 밝히고 있어 조성 연대를 비교적 정확히 알 수 있는 불상이다...

 

응진당 본존불...

석가여래의 수기를 받은 나한의 본존불은 수기불(授記佛)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얼굴은 방형에 가까워 온화한 느낌을 주는 원만한 상호(相好)이며, 이마에는 백호가 있고 목에는 삼도(三道)가 표현되었다.

법의는 통견(通肩)이며 내의는 연화형으로 법의와 구분하여 띠매듭을 돌렸다.

오른발이 왼쪽 무릎위로 올라가는 길상좌(吉相坐)로 결가부좌하였으며, 수인(手印)은 항마촉지인을 맺고 있다...

 

좌우에서 협시를 이루는 보살상은 아직 피지 않은 연꽃을 양손에 맞바꿔 잡고 있다.

화염무늬가 표현된 보관을 쓰고, 천의는 통견이며, 목에는 삼도가 보인다.

가슴의 띠매듭이나 연화형 내의자락 처리는 본존불과 유사하다.

이 삼존불좌상은 국가의 길흉대사가 있을 때마다 어깨와 흉부에서 땀을 흘린다고 한다...

 

응진당 나한상(應眞堂 羅漢像)..

사적비 음기에 따르면 '응진당불상 16나한 화주 상기 별좌 만신(應眞堂佛像十六羅漢化主尙機別座辛)'이라하여 불상과 16나한을 조성한 화주와 별좌를 밝히고 있어 조성년대를 확실히 알 수 있다.

이 나한상은 밝고 맑은 표정이며 호랑이 등 산짐승과 날짐승을 아우르는 활달하고 힘찬 조각솜씨가 돋보이는 걸작이다...

 

16나한은 재상의 아들이다.

바루를 들고있는 빈도라바라다바자, 선악을 구별 능력이 있는 가나가바차, 전생의 기억을 아는 가나가바라타자, 수빈타,

등을 긁고있는 나쿠라, 참선하는 바다라, 철바루를 들고 있는 카리카, 바자라푸트라, 중생교화에 힘쓴 지바카, 판타카, 라후라, 나가세나,

경전을 읽고 있는 안가다, 바나바시, 아지타, 수다판타카이다.

이 분들은 석가여래가 열반한 이후에 미륵불이 나타날 때까지 열반에 들지 않고 이 세상에 있으면서 불법을 수호하도록 위임받았다...

 

조선 후기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응진당 옆에 위치한 부도.. .

8각원당형으로 일부 도괴 우려 부분이 있어 한쪽에 시멘트 기둥을 받쳐 놓았으며, 각 부분의 화문이나 각종 동물문양이 새겨져 있다.

방형의 대좌를 마련하였는데 그 네 귀퉁이에 동물형상을 양각하였으나 마모가 심하여 그 동물이 어떤 형상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대좌위로 8각의 받침을 놓았고, 4면에는 꽃이 피어나는 과정을 묘사한 화문이 표현되었다.

동쪽면은 이제 막 피어나려고 하는 꽃잎을 머금은 모습인데, 이러한 순서는 북서남쪽으로 돌아가면서 점차 꽃잎이 만개해 가고 있다.

그 사이의 각 면에는 동물 형상을 조각하였는데 남쪽의 두면은 용두, 북쪽은 코끼리와 사자상으로 보인다.

서쪽에는 대좌와 옥개석 사이에 사각의 시멘트 기둥을 받쳐 놓았다.

앙련은 8엽 중판이며 상면에 받침을 마련하여 탑신을 받고 있고, 8각 탑신은 별다른 조식이 없다.

옥개석은 귀꽃에 동물형상을 표현하였고 우동과 그 사이로 완만한 경사를 이룬 기왓골이 보이며, 하면은 2중 부연으로 표현되었다.

그 위로는 노반 없이 연화형의 상륜부가 놓여 있는데 옥개석이나 탑신, 기단부와 동일부재인지는 분간키 어렵다.

이 부도는 각종 동물문양이 표현되고 있어 주목되나 부식이 심하여 곳곳에 시멘트로 후보한 흔적이 보인다...

 

전남도 유형문화재 제70호로 지정된 능가사 사적비(事蹟碑)..

응진당 뒷편 남쪽에 조성된 자연석 좌대 위에 귀부(龜趺)를 올리고 그 위로 비신과 이수를 갖추고있는 완전한 형태로 높이 5.1m이다.

귀부의 거북돌 머리는 목이 짧고 웅크린 모습이며, 몸통에는 주역에 8괘를 새겨 놓은 것이 특이하다.

이수에는 두 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고 네 귀퉁이에는 사자의 모습을 새겨 놓아 매우 화려한 느낌을 준다...

 

비신의 전면 상단에는 횡서체로 '興陽入影山楞伽謝蹟碑'라고 씌여진 비명(碑銘)은 '조선국전라도 흥양현 팔영능가사사적비명병서' 이다.

전면은 모두 19행으로 1행 63자인데, 행서체로 홍문관 부제학 오수채(해주인)가 짓고 사헌부 대사헌 조명교가 전서와 함께 비문고 썼다.

말미의 '승전기원후재경오 월일입'이라는 명문으로 보아 숙종 16년(1690)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사적비는 300여년 전에 건립한 것으로 불교의 유래와 절의 역사를 기록해 놓은 우수한 작품이다.

전설에 의하면, 이 비석은 원래 탑 앞에 있었는데 덕목이 도술을 부려 절 뒤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만경암중수기념비(萬景庵重修紀念碑)...

능가사 경내에 사적비 옆에 호패형의 석비이다.

장방향 좌대에 비신을 놓았는데 전면 상단에 횡서로 만경암중수기념비(萬景庵重修紀念碑)라 음각되었고 비문은 9행이다.

음기도 있는 이 비는 1918년(대정 7)에 세워 비교적 연대가 떨어지지만 고흥에서 유일한 암자의 중수비라는 점에서 원문을 전재한다...

 

뒤편의 요사..

 

맞은편에도..

 

 

관음전..

 

경내 대웅전 앞의 범종...

 

범종각의 범종을 본 떠 만들었다..

 

오래된 나무..

 

즉심시불...

 

내마음이 곧 부처인 것을..

 

대웅전과 팔영산..

 

천왕문을 나서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