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탐방일 : 2012년 11월 17일
○ 소재지 : 전남 해남군 삼산면 대흥사길 400
○ 대흥사 소개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로써 대둔사(大芚寺)’라고도 한다.
<대둔사지>에 의하면, 백제 구이신왕(久爾辛王) 7년(426년) 신라의 정관존자(淨觀尊者)가 창건하여 만일암이라 하였고, 508년 이름을
전하지 않은 선행비구(善行比丘)가 중건하였다는 <만일암고기>의 기록과 신라 법흥왕1년(514년) 아도(阿道)가 창건했다고 하는
<죽미기>의 기록이 있다. 또 신라 헌강왕11년(895년) 도선(道詵)이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500사찰을 짓는 것이 좋겠다고 상소하였는데,
대흥사도 그 중의 하나라는 설 등이 총망라되어 있다.
또, <대둔사지>에 의하면 대흥사의 옛모습은 남원(南院)과 북원(北院)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북원은 대웅보전·나한전·시왕전(十王殿) 등
24개소의 당우가 있었고, 남원은 극락전·대장전(大藏殿)·지장전 등 12개소의 당우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대흥사의 현재 사역(寺域)은
북원보다 남원이 훨씬 넓은데도 좁은 북원 쪽에 더 많은 당우가 집중적으로 건립되었다는 것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현재의 대흥사는 사지(寺址)의 북쪽에서 흘러내리는 금당천(金塘川)의 냇물을 중심으로 가람이 남북으로 나누어져 있다.
지금도 남원·북원이라고 하는데, 남원·북원의 법당들은 나름대로의 특색을 지닌 별원(別院)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북원의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일군(一群)과 남원의 중앙부에 있는 천불전과 서산의 유물이 있는 표충사를 중심으로 한 일곽,
다도로 유명한 초의(草衣)가 중건했던 대광명전(大光明殿)을 중심으로 한 일곽으로 분류할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이 절의 앞마당에 신암(信菴)·사은(思隱)·성유(性柔) 등 세 승려의 부도(浮屠)가 있었다고 했는데, 이들의 행적이
알려진 바는 없으나 고려 승려이므로 대흥사가 고려 이전에 창건된 것은 확실하므로, 혜장이 주장한 신라 말의 창건설을 따르고 있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아직 대규모 사찰의 면모를 갖추지 못하였는데, 이 절이 크게 중창된 것은 서산대사(西山大師)가 대흥사를
‘삼재가 들어오지 않는 곳이요, 만세토록 파괴됨이 없는 곳이며, 종통의 소귀처(三災不入之處 萬歲不毁之處 宗統所歸之處)’라고 보고
자신의 의발(衣鉢)을 대둔산에 전할 것을 부촉(咐囑)한 임진왜란 뒤의 일이다.
선조40년(1607년) 해남의 오지에 의발을 전한 서산대사의 배려에 의해서 이 절은 억불(抑佛)의 강압 속에서도 많은 인재를 배출하는
선교양종(禪敎兩宗)의 대도량으로 면모를 일신하게 되었다.
헌종6년(1665년) 심수(心粹)가 대웅전을 중창하였고, 1669년 표충사(表忠祠)를 건립하였으며, 순조11년(1811년)에 천불전(千佛殿)이
불타자 1813년 완호(玩虎)와 제성(濟醒)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흥사는 조선 억불의 그늘 속에서도 13대종사(大宗師)와 13대강사(大講師)를 배출하였다.
13대종사는 해동화엄종의 중흥조로 존경받았던 의심(義諶), 담론(談論)을 잘해서 많은 사람들을 교화했던 삼우(三遇),
화엄(華嚴)의 도리와 백가(百家)에 통달했던 도안(道安), 육신보살(肉身菩薩)로 칭송받았던 문신(文信), 계행(戒行)을 청정하게 가졌던
추붕(秋鵬), 전국을 순방하며 화엄대회를 열었던 지안(志安)이 있다.
그 학문이 유학자들 사이에서도 명망이 높았던 대우(大愚), 검소와 청빈의 생활로 평생을 살았던 회정(懷淨), 문자를 떠난 곳의 진리를
설파하여 마음의 근원을 찾도록 가르쳤던 새봉(璽封), 대흥사의 정진당(精進堂)에서 늘 화엄법회를 열었던 체정(體淨), 인욕행이 남달리
뛰어났던 해원(海源), 대승경전에 통달하여 많은 저술을 후세에 남겼던 유일(有一), 다선일미사상(茶禪一味思想)으로 이름난 초의선사
의순(意恂) 등이다.
13대강사들은 모두가 제10대 대종사였던 체정(體淨)의 문도로 원오(圓悟), 광열(廣悅), 영우(永愚), 승제(勝濟), 성규(聖奎), 정일(鼎馹),
태관(泰瓘), 행인(幸仁), 복혜(福慧), 윤우(尹佑), 시연(示演), 혜장(惠藏), 각안(覺岸) 등이다.
매표소를 지나 처음 만나는 산문(山門)...
일주문을 만나기 전에 산문을 통과하게 되는데, 대개의 국내 전통사찰들은 평지가람이 아닌 산지가람형이기 때문에 산문이 필요하다...
사찰이 시작됨을 알리는 하나의 표식으로 서로 다른 세계를 가르는 경계이며, 서로 다른 세계를 이어주는 통로가 산문이다...
산문을 다른 말로 법문(法門)이며 종문(宗門)이라하는데, 세속의 중생이 부처님이 있는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기 때문에 법문이다.
또는 단속문(斷俗門)이라고도 하는데 세속의 인연을 끊고 영원한 해탈의 세계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피안교(彼岸橋)...
속계(俗界)와 진계(塵界)를 나누는 영역구분으로 ‘마음의 미진(微塵)을 깨끗이 버리고 부처님 앞에 나아가라’는 수행의 상징이다.
반야교(般若橋), 해탈교(解脫橋), 연화교(蓮花橋), 칠보교(七寶橋), 열반교(涅槃橋) 등으로 불린다.
피안교란 온갖 번뇌에 휩싸여 생사윤회하는 곳에서 아무런 고통과 근심 없는 깨달음의 세계로 건너는 다리를 뜻한다.
그 다리를 ‘이 언덕[此岸]’에서 ‘저 언덕[彼岸]’으로 건너가는 다리라 하여 ‘피안교(彼岸橋)’라 한다
사찰 입구에는 개울을 건너며 삼독심을 모두 씻어내라는 의미로 물이 흐르고 있는데, 이 개울의 다리를 건너야 절에 갈 수 있다.
탐욕과 성냄 그리고 어리석음에 물든 3독(毒)의 때를 씻어야 불보살님을 비로소 친견할 수 있다...
대흥사 일주문(一株門)..
사역으로 들어가는 첫번째 문으로서 대흥사 성역(聖域)의 문지방에 해당된다. 어칸에는 ‘두륜산대흥사(頭輪山大興寺)’이라 편액하였다...
1975년에 건립되었으며, 지붕을 제외한 콘크리트식 건물로 겹처마 다포식 팔작지붕이다...
선림교해만화도량(禪林敎海滿華道場)..
'선(禪)은 부처의 마음이며, 교(敎)는 부처님의 말씀이다.'라고 한 선과 교가 하나임을 주장했던 서산대사의 선교사상이다..
선종은 숲을 이루고 교종은 바다를 이루었으니 함께 힘모아 화목하게 정진하는 도량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해탈문(解脫門)...
불교의 우주관에 따르면 수미산 정상에는 제석천왕이 다스리는 도리천이 있고 그곳의 경계에 불이문(不二門)이 있다고 한다.
그 문을 들어서면서부터 속계를 벗어나 법계에 들어가게 되며 이는 곧 해탈의 경지를 상징한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평면에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낮은 기단 위에 자연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워서 어칸에 통로를 가설하였다.
어칸에는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이 쓴 ‘두륜산대흥사(頭輪山大興寺)’라는 편액과 ‘해탈문(解脫門)’이라는 두 기의 편액이 걸려 있다.
외부에는 협칸 3면에 도륜(道倫) 박태석(朴泰錫)이 그린 부모은중(父母恩重), 염화신중(拈花神衆), 점성가제도(占星家濟度) 등이 주제별로
장엄되어 있는데, 2002년 해탈문 건립 당시 단청과 함께 조성되었다고 한다..
내부에는 사자를 탄 문수보살을 장엄하였는데, 문수보살은 지혜의 완성을 상징하는 화신(化身)으로 지혜의 완성은 곧 마음에 아무런
분별심·차별의식·우열관념 등이 없는 한없는 고요 속의 밝음이다.
보현보살이 세상 속에서 실천적 구도자의 모습을 띠고 행동할 때 문수보살은 사람들의 지혜의 좌표가 되었다.
이 두 보살은 항상 서로의 지혜와 실천행을 주시하고 사랑하면서 스스로의 소임을 다한다.
문수보살은 일반적으로 연화대에 앉아 오른손에는 지혜의 칼을, 왼손에는 푸른 연꽃을 들고 있다.
그러나 때때로 위엄과 용맹을 상징하는 사자를 타고 있기도 하고, 경권(經卷)을 손에 든 모습으로 묘사되는 경우도 많다..
또, 한쪽에는 코끼리를 탄 보현보살과 인왕을 벽화로 장엄하였다.
보현보살은 문수보살과 함께 일체보살의 으뜸이 되어서 언제나 여래께서 중생을 제도하는 일을 돕고 널리 선양한다.
또 중생들의 목숨을 길게 하는 덕을 가졌으므로 보현연명보살 또는 연명보살(延命菩薩)이라고도 한다.
문수보살이 여래의 왼편에서 지덕과 체덕을 맡음에 대하여, 보현보살은 오른쪽에서 이덕(理德)과 정덕(定德)과 행덕(行德)을 맡는다.
형상은 여러 가지로 묘사되나 크게 나누면 흰 코끼리를 탄 모양과 연화대에 앉은 모양의 2종이 있다.
예로부터 이 보살은 코끼리에 탄 형상으로 많이 표현되었고, 연화대에 앉은 모습은 주로 진언밀교(眞言密敎) 계통에서 많이 만들어졌다..
대흥사와 두륜산...
정면과 측면 각2칸의 팔작지붕의 표충비
각(表忠碑閣)...
안에는 서산대사표충사사적비(1791년)와 표충사건사사적비(1792년)가 있는데,
2기 중 서산대사표충사사적비명은 홍문관 대제학을 지냈던 서유린(徐有隣)이 글을 지었다...
서산대사표충사기적비(西山大師表忠祠紀蹟碑)는 높이는 364m이다..
사각형 비좌에 비신과 사각형 지붕틀을 올렸으며, 숭정기원후삼신해월립의 명문으로 보아 1791년(정조15년)에 건립하였음을 알 수 있다.
표충사 건사적비(建事蹟碑)는 높이 316m로 사각형 비좌에 비신과 이수를 갖추었다.
성상십육년임진오월일 서산육세법손연담유일근찬 응운등오근서(聖上十六年壬子五月日 西山六法孫蓮潭有一謹撰 應雲登旿謹書)로 보아
건립연대는 1792년(정조16년), 찬자는 연담유일, 응운등오의 글씨임을 알 수 있다...
조사전(祖師殿)..
천불전 일곽의 돌담길을 따라 표충사 영역에 들어서면 표충사당 우측편에 조사전(祖師殿)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주심포계의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3단의 바른층쌓기한 장대한 기단 위에 단촐하게 세워져 있다.
건물 외부는 다듬어진 2단의 원형 초석 상부에 두리기둥을 세워 전면 1ㆍ2분합의 격자창호로 장엄하고 있다.
내부에는 창건주 아도조사(阿度祖師)를 비롯하여 대흥사 13대 종사와 강사의 진영을 모신 3폭의 조사진영을 봉안하고 있다..
조사전 16조사진영(祖師殿 十六祖師眞影)..
표충사 옆 조사전에는 각 폭에 6위ㆍ5위(位)씩 16조사를 그린 진영 3점이 봉안되어 있다.
중앙 폭에는 창건주 아도조사(阿度祖師)를 중심으로 편양(鞭羊), 소요(逍遙), 풍담(楓潭), 목암(牧菴), 원응(圓應) 스님을 그렸으며,
우측 한폭에는 사봉(獅峯), 현하(懸河), 봉악(鳳嶽), 서악(瑞嶽), 춘계(春溪) 스님을, 좌측 한 폭에는 설암(雪巖), 설봉(雪峯), 월저(月渚),
선은(仙隱), 만화(萬化) 스님을 그렸다.
3폭 모두 장삼을 걸친 조사들이 손에 염주를 쥐고 돗자리에 앉아 있는데, 간단한 구도와 단정한 자세가 정적감을 느끼게 한다.
잿빛 장삼과 하얀 동정, 붉은 가사가 대조를 이루며, 정면을 바라본 아도조사를 제외하고 각각 좌안과 우안(右眼) 8분면으로 표현하였다..
표충사(表忠詞)..
현종10년(1669년)에 건립된 서산대사의 영정을 봉안한 사액사우(賜額寺宇)로서, 1976년9월30일 전남도기념물 제19호로 지정되었다.
서산대사의 위국충정을 기리고 그의 선풍이 대흥사에 뿌리내리게 한 은덕을 추모하기 위해 표충사 일곽의 풍제문인 내삼문 정면에
위치하며, 정면 3칸, 측면 3칸의 주심포계 맞배건물로 장대석 기단 위에 자리한다.
건물 외부는 자연초석 위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그 전면에 2분합의 띠살문을 단장하였으며, 측면과 배면은 판벽으로 마감하였다.
어칸 상부에는 1789년(정조 13)에 정조대왕이 하사한 ‘표충사(表忠祠)’ 편액과 ‘어서각(御書閣)’이란 편액 두 기가 있으며,
단조로운 채색의 단청으로 사당의 위엄을 갖추고 있다.
표충사 사액(賜額)은 1788년 천묵(天默)ㆍ계홍(戒洪) 스님이 서산과 유정ㆍ처영의 영정을 모실 사우의 건립을 모색하면서, 당시 호조판서
서유린(徐有隣)이 서산대사의 사적과 사우건립의 정당성을 왕에게 주청하여 건립허가와 함께 ‘표충사’이라는 사액을 받게 된 것이다..
내부에는 임진왜란 때 승병으로 활동한 서산대사와 그의 제자 유정, 처영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다.
현재 이곳은 부처의 삼보도량 가운데 승보(僧寶)를 존중하고 받들어 불가의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구현한 도량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유가(儒家) 형식의 사당을 꾸며 매년 서산대사의 가르침을 받드는 제례와 추모행사를 거행하고 있다...
표충사 의중당(義重堂)..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건물로 표충사 일곽의 삼문인 호국문을 지나 맨 먼저 마주치는 누각이다..
서산대사의 위국충정을 기리기 위해 당시 6군의 군수가 봄, 가을로 표충사에 제사를 지낼 때 가지고 온 제물을 차리던 곳이다..
보련각(寶蓮閣)..
초의선사가 철종3년(1852년) 역대 조사들의 진영을 모시기 위해 이곳에 처음 건립하였다. 1920년 이후 서산대사의 제자인 소요태능
스님과 편양언기스님의 법손들이 두 문파의 선사 22위 진영을 보련각에 공동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그후 건물이 퇴락하여 1944년 중수하였다. 본래는 대광명전 뒤에 위치하였던 건물인데 2009년 현위치로 이정하였다.
정면 8칸, 측면 4칸의 주심포식 맞배건물의 누각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전면에는 누마루를 가설하여 선방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건물 외부는 측면 계단과 낮은 누마루를 길게 붙여 댄 모습으로 건물 전면에 2ㆍ3분합의 격자창호와 계자난간을 수장하고 있으며,
큰 건물이면서도 가벼운 율동미와 단아한 품새를 엿볼 수 있다.
건물 내부에는 선실의 기능답게 대흥사에서 배출된 수많은 고승들의 진영이 7폭에 그려져 봉안되어 있다.
각 폭에는 24명(5폭)ㆍ22명(1폭)ㆍ12명(1폭)의 진영을 3단으로 나누어 그렸는데, 대흥사 창건주인 아도화상을 비롯하여 13 대종사 및
13 대 강사 등 대흥사와 연관된 조사 154위(位)의 진영이 그려져 있다.
그 중 서산대사 청허당의 진영이 있는 22위 진영은 성보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현재 선원으로 사용되고 있는 보련각은 초의선사가 머물면서 다선일매(茶禪三昧)의 선(禪)을 수행하던 곳으로 퇴락하던 대흥사를
이곳에서 중흥하였으며, 보련각 선원은 초의선사의 선맥을 추종하는 많은 선승들이 여름, 겨울의 안거기간에 수행에 전념하고 있다..
동국선원(東國禪院)..
천불전 뒤쪽 축대 언덕에 자리한 동국선원은 현재 주지스님의 요사채로 막돌과 힌줄눈친 담장에 둘러싸여 있다.
낮은 기단 위에 ‘ㄷ자형’ 건물로서, 자연 초석 위에 두리기둥을 세워 정면 7칸, 측면 6칸의 맞배건물의 모습을 하고 있다.
스님들이 정진하는 곳으로 이곳은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는데, 전면 좌측에 조선 제일의 명필인 추사(秋史)의 편액 두 기가 걸려 있다.
‘동국선원(東國禪院)’이라는 편액은 강원(講院)에 걸맞는 편액으로 백지에 흑서로 반양각하여 추사의 꾸밈없는 필체를 엿볼 수 있으며,
‘일로향실(一爐香室)’이라는 편액은 초의선사와 인연이 있는 추사가 이곳에 들러 써준 글씨로, 예서(隸書)로 쓴 힘찬 필획과 자유로운
짜임새를 통해 추사체의 특징을 살필 수 있다. 특히 이곳의 ‘일로향실’이라는 편액은 양산 통도사를 비롯하여 구례 천은사 등
많은 대찰에 그 모각본이 전해지며, 추사의 글씨를 흠모하는 이들에게 대흥사는 그 진본을 관람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고 있다..
대흥사의 남원(南院) 쪽 사찰의 가장 위쪽에 자리한 문수전...
그러나 굳게 닫혀있다..
대흥사의 남원(南院) 쪽, 사찰의 가장 위쪽에 자리한 보현전(普賢殿)...
정면 7칸, 측면 4칸의 전각으로 최근에 조성하였으며, 신생불전인 문수전과 마주하고 있다. 안에는 석가모니 불상이 모셔져 있다.
보현전과 그 앞마당에서는 학술강연, 산중총회, 연수교육, 작은 음악회, 녹차관련 행사, 수련회 등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심검당(尋檢堂)..
최근에 조성한 신검당은 보현전 바로 옆에 위치한다...
현재는 주로 템플스테이 및 수련회 건물로 사용중이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부도 1기..
장군샘..
초의대선사(草衣大禪師)...
조선 후기의 대선사로서 우리나라 다도를 정립한 분으로 '다성(茶聖)'이라 부른다.
인동(仁同) 장씨(張氏), 자는 중부(中孚), 호는 초의(草衣), 당호는 일지암(一枝庵), 법명은 의순(意恂)이다..
1786년 전남 무안 출신으로 대흥사 제13대 종사이며 다도(茶道)의 정립자이다.
16세 때 전남 남평 운흥사(雲興寺)에서 민성(敏聖)을 은사로 삼아 출가하고, 대흥사(大興寺)에서 민호(玟虎)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22세 때부터 전국의 선지식(善知識)들을 찾아 삼장(三藏)을 배우고 유학·도교 등 여러 교학에 통달하였으며, 범서(梵書)에도 능통하였다.
정약용(丁若鏞), 홍현주(洪顯周), 김정희(金正喜) 등과 교유하였는데, 정약용에게서는 유서(儒書)를 받고 시부(詩賦)를 익히기도 하였다.
명성이 널리 알려지자 대흥사의 동쪽 계곡으로 들어가 일지암(一枝庵)을 짓고 40여년 동안 홀로 지관(止觀)에 전념하면서 불이선
(不二禪)의 오묘한 진리를 찾아 정진하였으며, 다선삼매(茶禪三昧)에 들기도 하였다.
또한, 모든 것을 구비한 인간이 될 것을 주장하면서「동다송(東茶頌)」을 지어 다생활의 멋을 설명하였고.우리 토산차를 예찬하였다.
범패와 원예 및 서예에도 능하였으며, 장 담그는 법, 화초 기르는 법, 단방약(單方藥) 등에도 능하였다.
평범한 일생을 통하여 선(禪)과 교(敎)를 겸하여 수도하고 중생을 제도하였으며, 이상적 불교인으로 존경한 인물은 진묵(震默)이었다.
1866년 나이 80세, 법랍 65세로 입적하였다. 그의 사상은 선(禪)사상과 다선일미(茶禪一味)사상으로 집약된다.
다산 정약용, 소치 허련, 그리고 평생의 친구되는 추사 김정희 등과 폭넓은 교유를 가졌는데,
초의의 사상은 선(禪)사상과 다선일미(茶禪一味)사상으로 집약되는데 특히, 그의 다선일미 사상은 차를 마시되 법희선열(法喜禪悅)을
맛본다는 것이다. 즉, 차(茶) 안에 부처님의 진리[法]와 명상[禪]의 기쁨이 다 녹아있다는 것이다..
대흥사 남원에 위치한 사리탑...
사리탑 옆 요사..
성보박물관(聖寶博物館)..
대흥사 성보박물관은 1978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서산대사 유물관’으로 건립되었다.
그 이후 1998년 좌우측에 각각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건물 2동을 지어 대흥사 성보박물관으로 확장하였다..
현재 성보박물관에는 금란가사(金?袈裟), 옥발(玉鉢), 신발, 수저(匙箸), 교지(敎旨) 등 서산대사의 유품류와
대둔사지, 대둔사사적, 만일암지 등의 사적류, 탑산사 동종(보물 제88호)과 진불암대종 등의 범종류,
준제관음도, 11면40비관음보살도, 대양문 범왕탱 등의 불화류가 전시되어 있다...
대흥사 남원 영역의 세심당(洗心堂)... 현재 재가자들의 숙소로 쓰이고 있다...
가허루(駕虛樓)..
해탈문에서 침계루로 이어지는 주진입로 남쪽에 자리하며, 천불전으로 들어가는 남원의 출입문이다..
가람의 중심에 자리하여 남원 일곽을 수호하듯 일주문의 역할을 담당하며, 뒤로 두륜산 가련봉, 노송봉이 바라보인다..
가허루 내부에는 천불전을 비롯하여 용화당, 동국선원, 봉향각 등 몇 채의 승방이 자리한다...
큰 대문채와 같이 정면 5칸, 측면 2칸의 평범한 단층 주심포 맞배집으로 정면을 제외한 4칸은 창고로 사용하고 있다.
가허루 외부는 중앙을 제외한 좌우측벽이 돌담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배면은 판장문으로 단장하여 외부 단청으로 장엄하였다.
출입문 상부에는 호남의 명필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이 쓴 편액이 걸려 있으며, 내부 천장에는 청룡과 황룡을 단청하고 있다.
특히 타원형 문턱에 있는 가허루 편액은 투병 중에도 하루 천자씩 글을 쓰며 평생 벼루 3개를 구멍내겠다는 창암의 의지가 드러나며,
독특한 짜임새와 획법에서 그의 개성을 엿볼 수 있다. 편액은 세로 60㎝, 가로 140㎝이며, 흑지에 백서로 양각되어 있다..
전남유형문화재 제48호로 지정되어 있는 천불전(千佛殿)..
북원의 대웅보전을 나와 남원 중심곽에 자리잡은 유일한 법당이다.
천불전 내부의 천불상은 그 영험을 통해 대흥사를 찾는 세인들의 관심을 끄는 곳이기도 하다.
<대둔사지>의 기록에 의하면, 천불전에 자리한 남원은 19세기 초에 일어난 큰 화재로 극락전, 대장전, 약사전, 지장전 등 불보살전이
소실된 곳이며, 현재 천불전이 자리한 곳이 극락전 등의 중심건물이 자리했던 법당지로 추정된다.
1813년 초의대사의 전법스승인 완호(玩虎)스님에 의해 중건되었으며, 내부에는 풍계스님에 의해 조성된 천불의 옥불상이 봉안되어 있다.
건물은 높은 장대석 축대 위에 두툼한 두리기둥으로 정면과 측면을 각각 3칸씩 구획하고 내부는 기둥 없이 계단식 불단을 가설하였다. 지붕은 네귀 추녀가 가볍게 솟아 있는 팔작지붕으로 내·외부에 고색의 금단청이 장엄되어 있으며, 공포는 겹처마의 화려한 다포식이다.
기둥의 흘림은 상부로 올라가면서 적절히 체감된 균형미를 갖추고, 귀기둥과 대들보의 휘어 오름은 자연목 상태의 자연스러움이 있다.
전면에는 편액과 4기의 주련이 있는데, 편액은 대웅보전을 쓴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의 글씨로 흑지에 백서로 양각되어 있다.
건물 내부에는 계단식 불단 위에 경주 옥석으로 조성된 천불과 목조석가삼존상이 있다.
그 외 1906년(광무 6) 명문을 가진 금고(金鼓)를 비롯하여 1986년 금어 김성호(金成浩)가 그린 신중탱이 봉안되어 있다.
천불전 내부 장엄은 충량의 용두와 우물천장 반자·내벽의 조화도가 있으며, 특히 반자의 장엄은 대흥사가 해변의 사찰임을 보여주듯
연봉 사이로 게·물고기·거북이 등 수생생물들을 베풀고 있다...
천불전 석조천불상(千佛殿 石造千佛像)..
현재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5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중앙에 목조석가삼존상과 그 주위로 1,000구의 석조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계단식 불단에 봉안된 천불은 천불전 중창주인 완호(玩虎) 대사의 제자인 풍계(楓溪) 대사의 발원으로 경주지역 옥석으로 조성되었다.
천불에 전하는 전설은 1821년 풍계대사가 쓴 <일본표해록(日本漂海錄)>에 등장한다.
풍계대사의 지휘로 천불전에 봉안할 천불이 6년에 걸쳐 완성된 후, 몇 척의 배에다 싣고 바닷길을 통해 대흥사로 향하던 중 풍계대사가
탄 배가 울산진(蔚山津)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하게 되었다. 표류한 배는 일본 나가사키현(長崎縣)에 닿았는데, 배에 실린 천불을 본
일본인들이 이를 봉안하기 위해 급히 절을 지으려 하자 불상들이 그들의 꿈에 나타나 “우리는 조선국 해남 대둔사의 불상으로서 이곳에
봉안해서는 안된다”고 현몽하였다.
그들은 천불의 영험을 신비로이 여겨 대둔사로 천불을 돌려보냈으며, 그곳에 왔던 옥불상들 밑바닥에 ‘日’자를 새겨 보냈다고 전한다.
천불은 19세기 불상으로 모두 불신(佛身)에 회칠로 장엄되어 있으며, 일률적인 자세로 신체에 비해 상호가 큼직한 모습이다.
상호는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단아한 모습이며, 귀를 특히 크게 표현하였다.
나발에 중앙계주와 정상계주가 모두 표현된 소형불상과 중앙계주가 큼직히 솟은 중형불상으로 구분된다.
높이 25㎝ 안팎의 소형불상이며, 중앙 목조삼존상 뒤쪽으로 항마촉지인을 결한 석조 석가여래삼존상이 천불의 주불로 봉안되어 있다.
천불전에 봉안된 옥불상은 근래에도 그 영험을 보였는데, 경상도 불자들의 꿈속에 현몽하여 ‘가사를 입혀 달라’는 요구에 따라 4년마다
한번씩 가사를 입히고 있으며, 갈아입은 헌 가사를 지니고 있으면 근심과 걱정이 없어진다고 전해진다...
용화당(龍華堂)..
1813년(순조 13)에 중건된 용화당은 전남도 유형문화재 제93호러 지정되었으며, 대흥사의 강당 겸 선방으로 사용되고 있다.
남원일곽의 천불전 우측에 자리한 용화당은 불경을 배우는 학승들이 기거하는 곳이다.
건물은 'ㄱ'자 구조로 낮은 기단 위에 정면 9칸, 측면 4칸의 규모이며, 주심포계 팔작건물과 맞배건물이 접속되어 있다.
옛부터 강원으로 사용되어 북측에는 큰방과 수학승이 머무는 작은방·부엌 등이 툇마루와 이어지며, 남측에는 온돌방 3개와 부엌을 들여
뒷마당 가의 별담과 연결하고 있다. 이 건물의 특징은 기단부 자체를 자연지형 그대로 이용한 자연지반을 살려 우측면이 좌측면보다
낮게 축조되었으며, 4칸의 건물 천장에 두꺼운 널마루를 깔아 그 내부를 수장공간으로 이용한 ‘더그매집’으로 구성하였다.
공포는 주심포계의 2익공 양식으로 부엍 한쪽에는 투박한 통나무 계단을 가설하여 아래 판벽과 광창이 건물에 가벼운 생동감을 준다.
전반적으로 강원의 단정한 멋이 느껴지며, 휘어진 대들보와 서까래 등 자연스런 목재의 마감이 흰색으로 단장된 벽채와 조화를 이룬다..
천불전 우측에 위치한 봉향각(奉香閣)..
일로향실(一爐香室)..
천불전 뒤쪽 축대 언덕에 자리한 일로향실(一爐香室)은 현재 주지스님의 요사채로 막돌과 힌줄눈친 담장에 둘러싸여 있다.
낮은 기단 위에 ‘ㄷ자형’ 건물로서, 자연 초석 위에 두리기둥을 세워 정면 7칸, 측면 6칸의 맞배건물의 모습을 하고 있다.
스님들이 정진하는 곳이기도 한 이 곳은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지 않는다.
전면 좌측에 조선 제일의 명필인 추사(秋史)의 ‘일로향실(一爐香室)’이라는 편액은 초의선사와 인연이 있는 추사가 이곳에 들러 써준
글씨로 예서(隸書)로 쓴 힘찬 필획과 자유로운 짜임새를 통해 추사체의 특징을 살필 수 있다.
특히 이곳의 ‘일로향실’이라는 편액은 양산 통도사를 비롯하여 구례 천은사 등 많은 대찰에 그 모각본이 전해지며,
추사의 글씨를 흠모하는 이들에게 대흥사는 그 진본을 관람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고 있다..
범종루(梵鐘樓)..
북원의 대웅보전과 응진당 사이에 있던 범종각을 근래에 들어 천불전 가허루앞으로 새로이 지어 이전 하였다.
낮은 기단 상부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교살로 벽체를 구성하였으며, 겹처마 팔모지붕이다.
범종각이 있던 자리에는 윤장대가 있다..
범종루 내부에는 1977년 조성된 ‘호국대범종(護國大梵鐘)’이 봉안되어 있다...
대흥사 종무실..
천년의 만남과 인연, 연리근...
지극한 마음으로 기도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침계루(枕溪樓)..
주심포식 겹처마 맞배건물로 낮은 기단 위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그 몸체를 구획지었다.
대흥사 북원의 출입문으로 남ㆍ북원을 가로지르는 계류 금당천(金塘川)에 면하여 자리한 2층 누각건물이다.
심진교를 지나 누 아래의 어칸 통로를 통해 중정으로 출입하며, 대웅전 맞은편에 자리한다.
중층 누각으로 하층은 돌담과 판장문으로 마감한 광으로 구성되며, 상층은 평면에 널마루를 깐 홀로 강당류의 평면을 구성한다...
건물 외부는 대웅전을 향한 내벽을 제외하고 삼면을 판벽과 판문으로 처리하였다. 어칸에는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가 쓴 골기있는
필법의 ‘침계루(枕溪樓)’ 편액과 그 배면에 ‘원종대가람(圓宗大伽藍)’이라 쓴 두 기의 편액이 걸려 있다.
공포는 이익공으로 내부기둥이 없는 오량가구를 구성하여 상부 서까래 사이로 회골이 드러나는 연등천장을 단장하고 있으며,
30평의 규모로 상하의 기둥을 서로 분리하여 상하층의 쓰임새를 구분짓고, 상층에는 법고와 1587년명 범종·목어·운판 등 사물이 있으며,
좌우 측벽으로 감실형 틀 속에 금어 현암(玄菴)이 조성한 사천왕탱이 걸려 있다.
또, 대흥사의 사적과 내력을 알 수 있는 ‘大雄殿重創上樑文’과 ‘重造成天佛記’ 등 24기의 현판과 시액이 침계루 사면에 걸려 있다..
대웅보전(大雄寶殿)..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다포계 양식의 팔작지붕으로 가람 북원에 자리한 대흥사의 중심법전이다.
심진교와 침계루, 대웅전이 남북 일직선을 이루며, 여기서 직교하여 좌측에 대향각과 우측에 백설당이 중정을 형성하며 배치되어 있다.
건물은 장대석으로 바른층쌓기 한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민흘림기둥을 세웠으며, 기둥머리는 창방으로 결구하여 평방을 얹었다.
공포는 다포로 내삼출목·외이출목을 주간마다 2구씩 공간포를 놓았으며, 건물 안팎으로 처마 아래 촘촘히 배열되어 있다.
포의 형상은 교두형으로 외부로 뻗은 쇠서 위에 연봉을 조각하였으며, 내부는 모양을 판형으로 만들어 운봉형으로 단장하였다.
건물 전면은 주간 모두 2분합의 두툼한 빗살문을 달고 하부 2단을 구획하여 화려하게 수장된 안상문양과 태극문을 궁방에 치장하였다.
측면과 배면에는 중인방까지 막돌을 쌓아, 상부에 팔상도와 법당을 수호하는 사천왕도를 벽화로 장엄하고 있다.
특히 이 건물의 외부장엄 중 눈길을 끄는 것은 어칸 상부에 자리한 2행 종서의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는 편액이다.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의 글씨로 추사와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현재 이 글은 백설당에 걸린 추사의 ‘무량수각’ 편액과
함께 대흥사 명필로 손꼽혀 장성 백양사 및 승주 송광사에서 그 글을 모각할 만큼 뛰어난 필적으로 알려져 있다...
건물 계단석 소맷돌에는 두 눈을 부릅뜬 사자머리 한쌍이 주목을 끄는데, 구한말 일본 석공이 조각한 것으로 귀신상의 모습을 하고 있다.
대웅전 축대 앞에는 괘불을 고정한 용두를 조각하여 불전을 수호하는 벽사의 뜻을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건물 내부는 우물마루 상부에 이단층의 우물천장을 가설하고 그 내부에 반자와 운궁형 닫집을 형성한 화려한 불전으로, 대들보 사이에
용두와 칠보문양을 단장하고 있다. 대들보는 자연목을 그대로 이용한 투박한 수법이지만, 대들보 위를 넘어서 뽑아낸 충량의 용두는
불전의 신성함을 더하며 다소 과장된 장엄의 극치를 보여준다.
후불벽 앞에 가설된 수미단 상부에는 목조 삼세불을 비롯하여 육봉선사(六峯禪師)가 화주한 삼불회도가 헌괘되어 있으며,
중앙 불단 좌우로 20세기 초 대흥사 불화 조성에 참여한 명응환감(明應幻鑑)·예운상규(禮芸尙奎)와 그의 권속들이 그린 삼장탱·신중탱·
칠성탱·감로탱 등이 봉안되어 있다. 이외 영단을 비롯하여 수미단 우측에 근래 조성된 목조관음보살좌상과 천수천안관음탱이 있으며,
천장 상부에 서수를 탄 동자들이 비천하는 목조각이 장엄되어 있다.
현재의 대웅전은 침계루에 걸린 ‘대웅전중창상량문’과 ‘대웅전중건기’를 통해 1667년 건립되었다고 전해지나, 화려한 치장과 치목수법,
조각기법 등으로 보아 1899년 북원 일곽의 화재 이후 육봉선사의 발원으로 중건된 것으로 보여진다...
목조삼존상(木造三尊像)...
석가를 중심으로 하여 좌우 협시로 약사·아미타의 목조삼세불이 모두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한 모습으로 봉안되어 있다..
삼존은 신체가 세장한 건장한 불상이며, 상호는 갸름한 계란형으로 이목구비가 뚜렷한 원만한 모습에 단아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머리는 나발에 중앙계주와 정상계주가 적당히 솟아 있으며, 법의는 양어깨에 걸쳐 U자형으로 흘러내리는 편단우견으로 되어 있다.
상체에 비해 하체가 부실하지만 무릎 폭이 넓게 펼쳐져 안정감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대형 삼세불로 17세기 후반 불상에서 찾아볼
수 있는 근엄하고 단정한 모습과 함께 절제된 미감을 찾을 수 있다.
삼존의 수인은 항마촉지인을 결한 석가를 제외하고 좌우 대칭의 중품하생인을 맺고 있으며, 그 수인은 대칭적이다.
석가상은 앉은키 185㎝, 무릎너비 130㎝이며, 좌우 약사와 아미타는 앉은키 160㎝에 무릎너비 115㎝로 조선후기의 대형불상에 속한다..
삼세후불탱(三世後佛幀)..
목조삼존상의 후불탱으로 중앙 영산회상탱(靈山會上幀), 우측 약사회상탱(藥師會上幀), 좌측에 아미타회상탱(藥師會上幀)이 걸려 있다.
3폭에 각각 나누어져 있지만 3여래와 6보살, 10대 제자, 사천왕이 중앙의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대칭이 되도록 배열되어 있다.
중앙의 영산회상도는 키형 광배를 뒤로 한 석가모니불이 결가부좌한 채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있으며, 그 좌우에 문수·보현보살과 가섭·
아난존자가 협시하고 있다. 우측의 약사회상탱은 중앙에서 약간 좌측으로 벗어난 곳에 약합을 들고 있는 약사여래를 배치하고 그 아래에
일광·월광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그리고 사천왕 가운데 지국천왕과 증장천왕, 10대 제자 가운데 4위(位)가 배치되었다.
좌측의 아미타회상탱은 약사회상탱과 정반대 구도를 하고 있는데, 중앙에서 약간 우측으로 벗어난 곳에 아미타불을 배치하고 그 아래에
관음·대세지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그리고 사천왕 가운데 광목천왕과 다문천왕, 10대 제자 가운데 4위(位)가 배치되었다.
채색에 있어 여래와 보살의 신체는 황색, 제자와 사천왕의 신체는 백색이나 살색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법의(法衣)는 주홍색, 두광(頭光)·천의(天衣)·옷자락 등에는 호분이 섞인 청록과 밝은 남색을 사용하여 강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각 불화의 하단에는 화기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에 의하면 1901년 인덕군(仁德君) 윤씨(尹氏), 아지(衙知) 임씨(林氏), 육봉법한(六峯法翰)
스님 등이 화주가 되어 조성한 것이다. 이 3점의 후불탱은 각각 다른 화원이 조성하였으나 인물표현이나 색채법 등 표현양식이 거의
유사하며, 다만 중앙의 영산회상도만 좌우의 두 불화에 비해 인물 표현이 다소 세장(細長)하게 표현되었다.
영산회상탱은 석옹철유(石翁喆侑)와 허곡긍순(虛谷亘巡)의 출초(出草)로 관하종인·정윤·두협·문선(文善) 등이 그렸으며,
약사회상탱은 경선응석(慶船應釋)의 출초로 석담경연(石潭敬演)·동운영욱(東雲靈昱)·두흠(斗欽)·성규(聖奎)·명조(明照) 등이,
아미타회상탱은 예운상규(禮芸尙奎)와 명응환감(明應幻鑑)·범화윤익(梵華潤益)·종현(宗現)·민호(玟昊)·윤하(允夏)·상오(尙旿)가 그렸다..
삼장탱(三藏幀)..
삼장보살은 천장(天藏)·지지(持地)·지장(地藏)보살을 일컫는 것으로 우리나라 불교신앙에서만 보이는 예이다.
이에 대한 유래가 확실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지장보살신앙이 확대되어 형성되었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천장보살은 천계(天界)의 교주로서 천부중(天部衆)을 거느리고, 지지보살은 음계(陰界)의 교주로 지상의 신중(神衆)을 거느리며,
지장보살은 유명계(幽冥界)의 교주로서 명계의 신중을 거느린다. 삼장탱은 이러한 삼계(三界)의 보살과 그 권속을 그린 불화이다.
현재 대웅보전의 동쪽 벽에 봉안되어 있는 삼장탱은 세로 212cm, 가로 470cm(화고 194.5cm, 화폭 430.5cm) 크기의 대형불화로서
1901년 진불암(眞佛庵)에서 조성하여 대웅보전에 봉안한 것이다.
중앙에는 천장보살과 천부중이, 향우측에는 지지보살과 여러 신중이, 향좌측에는 지장보살과 시왕 등 명부중이 각각의 보살을 둥글게
에워싸고 있는 구도이다. 색조는 주홍과 청색, 호분이 섞인 청록을 사용하였고, 광배 등에 금니(金泥)를 사용하였다.
이 삼장탱은 대웅보전 삼세탱과 같이 인덕군(仁德君) 윤씨(尹氏), 아지(衙知) 임씨(林氏), 육봉법한(六峯法翰) 스님 등이 화주가 되어
명응환감(明應幻鑑)·범화윤익(梵華潤益)·예운상규(禮芸尙奎)·종현(宗現)·민호(玟昊)·윤하(允夏)·상오(尙旿) 등이 그렸다..
대웅보전과 응진각사이 예전에 범종각이 위치한 곳이며 범종각이 옮겨지면서 윤장대를 설치하였다..
응진당·산신각(應眞堂·山神閣)...
북원 일곽의 대웅보전 좌측에 자리한 이 건물은 왼쪽으로부터 응진당·산신각을 한 채에 연이어 수용한 점이 특이하다.
건립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사지에 의하면 북원 일대에 나한전이 있었고, 침계루 현판 중 ‘나한전급사리탑축장의록
(羅漢殿及舍利塔築墻義錄)’이라는 현판이 1917년 헌괘되어 있음을 살필 때 그렇게 오래전에 지어진 것은 아닌 듯하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주심포식 맞배건물로 2벌대의 장대석을 바른층쌓기 한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웠다.
공포는 2익공으로 건물 전면에 1ㆍ2분합의 빗살문을 단장하고 측·배면에 막돌과 흰줄눈친 담장과 단청으로 장엄하였다.
건물은 응진당이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구획되고 산신각이 정면 2칸, 측면 3칸으로 나누어지는데, 그 사이 판장으로 담을 쌓고 출입에
용이하도록 쪽문을 달아 놓았다. 그 어칸에는 흑지에 백서로 양각한 ‘응진당(應眞堂)’과 ‘산신각(山神閣)’ 두 기의 편액이 걸려 있으며,
그 중 응진당 편액은 명부전과 백설당의 편액을 쓴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내부는 우물마루 상부에 연등천장을 가설하고 불단을 설치한 모습으로 천장 상부에는 구름위를 비천하는 청룡과 황룡도가 장엄되었다.
응진당은 목조석가삼존과 16나한·판관·사자·인왕을 권속으로 모시고, 그 후면에 1901년 금어 석옹철유(石翁喆侑) 외 5인이 조성한
석가모니후불탱과 16나한탱·사자탱을 봉안하고 있으며, 불단 상부에는 관음과 세지의 보살패를 두고 있다.
산신각은 연등천장 상부에 황룡과 청룡도를 단청하고, 불단 위에 1901년 조성된 산신탱과 독성탱을 봉안하였다..
산신각 독성탱(獨聖幀)..
석가모니불의 수기를 받아 남인도의 천태산에서 수도하며 석존 열반 후의 모든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나반존자를 그린 불화이다.
화면의 중앙에는 나즈막한 산을 뒤로 한 채 나반존자가 오른손에 영지를 들고 앉아 있으며, 향좌측 하단에 동자가 두루마리 경권(經卷)을
안고 서있다. 사슴이 뛰어 놀고 꽃이 피고 영지가 자라는 평화로운 산천으로 묘사하였으며, 오른쪽 상단에는 건물의 일부가 드러나 있다.
1901년 육봉법한(六峰法翰) 스님의 화주로 석옹철유(石翁喆侑)·관하종인(觀河宗仁)·허곡긍순(虛谷亘巡) 등이 조성하였다.
산신각 산신탱(山神幀)..
깊은 산중 폭포를 배경으로 하여 호랑이를 깔고 앉아 있는 산신과 두명의 동자를 표현하고 있다.
배경은 응진당 나한탱과 같이 깊은 산에 영지가 자라고 폭포가 흘러내리며 오래된 소나무 등으로 묘사하였다.
호랑이를 타고 있는 산신은 검은 두건에 검은 구레나룻 수염을 휘날리며 왼손에 영지버섯을 들고 있다.
동자 한 명은 끝에 도끼와 부채가 걸린 당(幢)을 잡고 있고, 다른 동자는 과일이 담긴 쟁반을 들고 있다.
1901년 육봉법한(六峰法翰) 스님의 화주로 석옹철유(石翁喆侑)ㆍ관하종인(觀河宗仁)·허곡긍순(虛谷亘巡) 등이 조성하였다..
응진당 목조삼존상(應眞堂 木造三尊像)
석가삼존은 석가를 중심으로 좌우에 협시인 미륵보살과 제화갈라불상이 봉안되어 있다.
삼존 모두 정방형의 상호에 결가부좌한 모습으로, 양볼과 턱선에 살을 표현하는 등의 양감을 나타내고 있다.
입은 적당한 크기로 얌전하게 다물어 미소를 머금고, 어깨는 넓은 편이나 아래로 많이 처진 모습으로 우견편단의 법의를 입고 있다.
전반적으로 18세기 불상의 양식을 간직하고 있다.
석가모니후불탱(應眞堂 釋迦牟尼後佛幀)
중앙에 원형의 두광과 신광을 뒤로 한 석가모니불이 연화좌에 앉아 있고 하단에는 6대 보살과 10대 제자와 사천왕이 배치된 구도이다.
하단에 배치된 보살들 위쪽으로 서운(瑞雲)이 퍼져 있어 인물들을 자연스럽게 구분하고 있다.
색조는 적색과 녹색·황토색이 주조색으로 사용되었으며, 부분적으로 하늘 표현 등에 청색도 사용하였다.
하단에 기록된 화기에 의하면 이 후불탱은 1901년에 조성된 것으로 석옹철유, 허곡긍순의 출초(出草)로 관하종인, 정윤, 두협이 그렸다..
중앙 불단을 중심으로 목조석가삼존상과 좌우 십육나한상(十六羅漢像)·제석·범천·사자·금강역사·동자상들이 봉안되어 있다..
16나한은 삼존상과 같은 수법으로 원만한 얼굴과 자연스러운 자세, 밝고 단아한 채색 등 하부 대좌의 장엄과 함께 나한의 기운과 풍격을
느낄 수 있으며, 배면의 나한탱과 함께 응진당 내부의 성보로 자리잡고 있다..
응진당 앞 삼층석탑(3層石塔)..
보물 제320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석탑은 신라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조성연대는 신라말기 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중기단에 우주와 탱주가 각 면에 표현되어 있고, 탑신부는 탑신석(塔身石)과 옥개석(屋蓋石)으로 구성되어 각각 1석으로 되어 있다...
각 탑신석에는 4개의 귀기둥(隅柱)이 모각(模刻)되어 있다. 특히 2층탑신 이상은 체감률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옥개석은 추녀가 두터운 편이고 상면은 경쾌한 곡선을 이루었으며, 받침은 각층 4단이다. 탑의 상륜부는 노반(露盤)과 복발(覆鉢),
앙화(仰花), 보륜(寶輪) 등이 있는데, 특히 복발은 편구형(扁球形)이고 앙화(仰花)는 8각형으로서 화판(花瓣)을 세우고 있다.
탑의 일부에서 형식이 약화됨을 볼 수 있으나 신라석탑의 양식을 전형적으로 계승한 것임을 살필 수 있다.
1967년 1월 보수공사 때 기단 안에서 높이 12cm의 동조여래좌상(銅造如來坐像) 1구(軀)가 발견된 바 있다...
청운당(靑雲堂)..
응진당 좌측에 자리한 일반인들의 대중방인 시민수련원으로 정면 7칸, 측면 3칸의 민도리집 맞배건물로 전후에 툇마루를 가설하였다.
외부는 2·3분합의 띠살문을 단장하고 외부 단청으로 장엄하였으며, 어칸 상부에는 흑지에 백서로 양각된 ‘靑雲堂’이라는 편액이 있다.
건물 내부는 감실형의 불단 위에 목조석가여래좌상과 석가모니후불탱이 봉안되어 있으며, 시민선방으로서의 내부시설을 갖추고 있다.
청운당 일곽에는 대중들이 이용할 수 있는 세면실을 비롯하여 사무실과 휴게실이 갖추어 있으며, 매년 여름수련법회 등이 열리고 있다..
대향각(大香閣)은 북원의 침계루에 들어서면 우측편에 있는 전각..
백설당(白雪堂)..
침계루 우측에 자리잡은 승방으로 대흥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규모가 큰 요사채이다.
대웅전 중정의 서편을 가로막아 널찍하게 자리잡은 백설당은 ‘트인 ㅁ자’형 건물로 대흥사 사중의 대중방으로 이용된다.
대웅전을 향한 동편이 주건물로 3칸의 고량대실로 구성, 6칸의 큰방과 큰 부엌, 그 끝자락 서편에 작은 승방들이 헛간과 이어져 있다.
안마당 서변을 이룬 건물에는 작은 방들이 두줄 겹겹으로 배열되어 앞뒤 툇마루와 함께 연결되어 있고, 그 모서리에 공양간이 자리한다.
안마당에는 겹겹이 겹쳐진 사변지붕과 용마루의 겹침 등 그 꺾임이 맑고 아담한 벽체와 조화를 이루며 구성되어 있다...
원래 북원에는 여러채의 승방과 선당, 중료들이 있었음을 사지를 통해 알 수 있는데, 현재 백설당의 규모를 보아 여러 채의 승방들이
그 기능을 다하고 있다. 백설당 동편 처마 아래에는 제주도 유배 중에 추사가 쓴 ‘무량수각(無量壽閣)’이라는 편액과 구한말 명신으로
미불체를 구사한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이 쓴 ‘백설당(白雪堂)’이라는 두 기의 편액이 걸려 있다.
건물은 낮은 기단 위에 자연초석을 세우고 두리기둥으로 그 칸을 세분화한 맞배지붕 건물로 공포가 소략한 주심포집이다.
대웅보전보다 후대에 건립된 것으로 1899년(광무 3) 10월 서상실(西上室)의 화재로 2년 뒤인 1901년에 건립된 것으로 전해진다.
주건물인 대중방은 절 안의 스님들이 모여 공양과 정진수행을 하는 대중법요의 장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내부에는 근래 널마루 다락을
없애고 사찰의 소임을 맡은 분들의 방명이 적힌 용상방(龍象榜)이 붙어 있다..
명부전(冥府殿)..
정면 3칸, 측면 2칸을 구획하고 상부 맞배지붕을 얹혔으며, 장대석으로 바른층쌓기 한 낮은 기단 위에 초석 없이 두리기둥을 세웠다.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하는 지장보살을 봉안하고 있는 명부전은 대웅보전의 북서쪽에 남향하고 있다.
1899년 북원 일곽의 화재 뒤 20세기 다시 건립된 것으로, 1901년 지장탱의 봉안과 함께 시왕과 명부권속들이 함께 조성하였다.
외부는 1·2분합의 빗살문으로 단장하고 단청으로 장엄하였으며, 공포는 주심포의 2익공 양식이다...
특히 어칸 상부에 걸려 있는 ‘冥府殿’ 편액은 구한말 미불체의 대가인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의 글씨이다.
건물 내부는 5량가로 우물마루 상부에 연등천장을 수장하고, 지장보살과 무독귀왕ㆍ도명존자의 삼존을 중앙 불단에 봉안하고 있다.
그 외 좌우로 ‘ㄷ’자형의 불단을 만들어 저승의 심판관인 시왕(十王)과 판관·녹사·사자 등 여러 명부의 권속들을 정렬하게 배치하고 있다.
지장보살 뒷면에는 1901년 금어 경선응석(慶船應釋)이 그린 지장탱이 봉안되어 있다.
이 건물은 건축 양식상 주심포식 맞배집으로 특별한 특징은 없으나 20세기 초의 명부전 양식의 한 예로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
소조지장보살좌상(塑造地藏菩薩坐像)..
명부전 'ㄷ'자형 불단 상부에는 소조 지장보살좌상과 그 협시인 무독귀왕과 도명존자가 중앙에 자리한다.
중앙의 지장보살은 앉은 키 175㎝에 무릎 너비 116㎝의 대형 불상으로 소조로 조성되었다.
은은한 미소에 단정한 모습은 19세기 후반의 불상 조각양식으로, 자세는 불단 상부에 결가부좌한 모습으로 중품상생인의 수인을 결하고 있으며, 양어깨에 걸쳐 흘러내리는 U자형 법의는 통견의 착의법으로 신부 중앙에 주름 접힌 꽃잎 모양의 군의를 조식하고 있다.
지장탱(地藏幀)
명부전 지장보살좌상 뒤에 봉안되어 있는 불화로, 화면 중앙의 지장보살은 꽃무늬 단에 무늬가 있는 붉은 가사를 걸치고 보주를 든 모습으로 앉아 있다. 하단 좌우에는 도명존자와 무독귀왕,그 옆과 위에 시왕(十王) 중 6대왕과 6대보살 사천왕이 좌우대칭으로 묘사되어 있다. 하단에 기록된 화기를 통해 이 지장탱은 1901년 대웅보전과 응진당의 불화 조성 시에 함께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화주도 역시 인덕군(仁德君) 윤씨(尹氏), 아지(衙知) 임씨(林氏), 육봉법한(六峯法翰) 스님 등이며, 경선응석(慶船應釋)의 출초로 석담경연(石潭敬演)ㆍ동운영욱(東雲靈昱)ㆍ두흠(斗欽)ㆍ성규(聖奎)ㆍ명조(明照) 등이 그렸다..
목조시왕상(木造十王像)..
목조시왕 10구를 비롯하여 판관 11구, 동자 13구, 녹사 2구, 사자 2구, 인왕 2구가 봉안되어 있다..
목조시왕상은 지옥의 명부를 관장하는 위엄있는 모습으로 금과조복(金冠朝服)을 착용하고 의자에 앉아 있는 의자상의 모습이다. 시왕의 자세는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홀(笏)을 쥔 시왕의 모습과 명부를 살피는 모습 등 자유로운 자세로 조복 전면에 운룡문과 화문이 다양하게 시문되어 있으며, 가슴에서 시작된 띠를 조복 아래로 길게 늘어뜨리고 있다. 주로 정면 위주의 상으로 옆면이나 뒷면은 거친 소지(素地)를 그대로 남겨두고 있으며, 지장보살상과 함께 19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부도군(浮屠群)
일주문을 막 지나 진화문 담장 안에 자리하고 있다.
나지막한 담장 안에 다양한 모습을 갖춘 부도(浮屠)와 탑비(塔碑)가 모두 80여기(부도 54기와 탑비 27기 )에 이르고 있다..
부도의 배치는 일정한 간격을 두지 않고 3~4열을 이루고 있어 무질서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무질서 속에서 조화로움을 느낄 수 있다.
이곳의 부도는 대부분 조선시대 후기에 건립된 것이다...
부도와 탑비의 주인공들은 모두 임진왜란 이후 대흥사를 중흥시키고 크게 빛낸 스님들로서, 서산대사를 비롯하여 풍담(楓潭), 취여(醉如),
월저(月渚), 설암(雪巖), 환성(喚惺), 호암(虎巖), 설봉(雪峯), 연담(蓮潭), 초의(草衣) 등의 대종사와,
만화(萬化), 연해(燕海), 영파(影波), 운담(雲潭), 벽담(碧潭), 완호(琓虎) 등의 대강사, 그밖에 고승대덕들의 부도이다...
부도와 비의 주인공들이 조선 중기 이후의 인물들인 만큼 부도와 비의 양식 또한 통일신라나 고려시대의 작품들처럼 세련되고
섬세함을 느낄 수는 없지만 정성을 들여 기품 있게 만들어져 있다...
특히 팔각원당형의 서산대사부도(西山大師浮屠)는 기단부와 상륜부의 독특한 장식과 옥개의 낙수면, 처마의 목조건물 모각은
이 시대의 작품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수법으로 고려시대의 양식을 보여주는 듯하다.
보물 제1347호로 지정된 서산대사 부도가 위치하고 있어 더욱 유명하다....
담장 밖으로 우뚝 솟아 있는 사적비는 그 크기와 규모만큼이나 당시 대흥사의 위상을 나타내주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조선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17세기 말에서 19세기 사이에 제작된 것이다...
백화암 입구의 부도..
현대 한국의 정신적 지주였던 조계종 초대 교정 석전영호(石顚映湖)스님,
당대의 고승이었던 지암종욱(智庵鐘郁)스님,
고불총림 방장과 조계종 종정을 역임한 서옹상순(西翁尙純)스님의 부도가 있다...
'길따라 트레킹 > 역사, 문화, 그리고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해남기행] 국보 제308호,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磨崖如來坐像) (0) | 2012.11.20 |
---|---|
[해남기행] 두륜산 만일암터 5층석탑(挽日庵址 五層石塔)과 천년수(千年樹), 그리고 진불암.. (0) | 2012.11.20 |
[광주기행] 충효동 정려비각(忠孝洞 旌閭碑閣)과 천연기념물 왕버들.. (0) | 2012.11.12 |
[고흥기행] 보물 제1307호 팔영산 능가사(楞伽寺).. (0) | 2012.10.28 |
[고흥기행] 충무공의 혼이 서린 발포 만호성(鉢浦萬戶城)과 충무사(忠武祠) (0) | 2012.10.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