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탐방일 : 2011년 1월 29일(토)
○ 소재지 : 전북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 금산사 소개
전북 최대의 사찰인 모악산 금산사(金山寺)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7교구 본사로 임진왜란 이전의 기록은 모두 소실되어「삼국유사」나
「삼국사기」등을 인용하여 사적기(事蹟記)가 만들어졌다.
금산사의 창건은 백제 법왕 1년(599년)에 왕의 자복(自福)사찰로 세워진 것이라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지금까지 전하는 바는 진표율사(眞表律師)가 신라 경덕왕 21년(762년)부터 혜공왕 2년(766년)까지 4년에 걸쳐 중건하였으며,
고려 문종 23년(1069년) 혜덕왕사(慧德王師)가 대가람으로 재청하고, 그 남쪽에 광교원(廣敎院)이라는 대사구(大寺區)를 증설하여
창건 이래 가장 큰 규모의 대도량이 되었다.
1598년 정유재란 때 왜병의 방화로 미륵전·대공전(大恭殿)·광교원(廣敎院) 등과 40여 개소에 달하는 산내 암자가 소실되자
선조 34년(1601년) 수문대사가 재건하여 1635년에 낙성을 보았다.
고종 때에 이르러 용명화상이 미륵전·대장전·대적광전 등을 보수하고, 1934년에 황성열 주지가 다시 대적광전·금강문·미륵전 등을
중수하였지만 지금의 금산사는 선조 이전의 모습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진표율사 이후 금산사의 대표적인 승려 중 첫째로는 고려 문종 때의 혜덕왕사이다.
혜덕의 속성은 이(李)씨이고, 이름은 소현(韶顯)이다. 11세 때 입산하여 해안사의 고승 해인국사의 제자가 되었다.
1061년(문종 15) 왕윤사에 실시된 오교대선(五敎大選)에 합격하여 대덕의 법계를 받았다.
그 후 1069년(문종 23)에 중대사, 1071년에 삼중대사가 되었으며 1083년에는 수좌(首座)와 승통(僧統)의 자리에 올랐다.
혜덕왕사는 여러 사찰의 주지도 역임했는데 1079년(문종 33)에는 금산사의 주지로 취임하였다.
주지로 있으면서 절 남쪽에 광교원을 창건하여 규기(窺基)가 선술(選述)한『법화현찬(法華玄贊)』,『유식술기(唯識述記)』 등
장소(章疏) 32부 353권을 교정 개간(開刊)하였다. 1095년(숙종 원년) 금산사의 봉천원에서 귀적하니 왕이 그에게 시호를 내려주었다.
혜덕왕사가 입적한 후 금산사의 주지가 된 사람은 도생승통(道生僧統)이었다.
도생승통은 문종의 여섯번째 아들이자, 대각국사 의천(義天)의 동생이다.
금산사에서 배출된 고려시대의 고승으로는 원명대사를 꼽을 수 있다. 속성은 조(趙)씨이고 이름은 해원인데, 12세에 출가하여
금산사 석광법사의 제자가 되었다. 원명대사의 승명이 널리 알려지자 원나라에서 그를 초청하여 숭은 복원사의 제1세 주지로 삼았다.
1328년 충숙왕은 그를 금산사의 주지로 임명하기 위하여 원나라 황제에게 원명대사를 본국으로 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귀국하게 된 원명대사는 한동안 금산사 주지로 머물면서 당우를 중창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긴 후 다시 원나라 숭은복원사에
돌아가 그곳에서 귀적하였다.
조선시대의 고승으로는 먼저 뇌묵대사를 들 수 있다.
그는 20여 세에 금산사에 입문하였고, 후에 서산대사에게 조계(曹溪)의 선지(禪旨)를 전수받았다.
임진왜란 때는 금산사에서 승병 1,000여 명을 모집하여 거의부전(擧義赴戰)하니 조정에서 총섭(總攝)으로 임명하였다.
후에 조정에서 공로를 보상하여 국일도대선사부종수교보광현랑뇌묵(國一都大禪師扶宗樹敎葆光玄郞雷默)이라는 법호를 내려주었다.
산사에는 국보 1점과 보물 10점 등 총 11점의 지정 문화재가 있다.
국보로는 제62호 금산사 미륵전(彌勒殿)이 있다. 보물로는 제22호 금산사 노주(露柱), 제23호 금산사 석련대(石蓮臺),
제24호 금산사 혜덕왕사진응탑비(慧德王師眞應塔碑), 제25호 금산사 오층석탑(五層石塔), 제26호 금산사 석종(石鐘), 제27호 금산사
육각다층석탑(六角多層石塔), 제28호 금산사 당간지주(幢竿支柱), 제29호 금산사 심원암 북강삼층석탑(深源庵 北崗三層石塔),
제828호 금산사 석등(石燈), 제827호 금산사 대장전(大藏殿) 등이다
뿐만 아니라 이 금산사는 일대가 사적 제496호로 지정되어 있다..
금산사 일주문...
‘모악산금산사(母岳山金山寺)’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편액은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의 글씨라고 한다.
1975년에 세운 맞배지붕 건물로 금산사에 오르는 산길에서 처음 만나게 되는 문...
일주문은 세속의 세계를 버리고 부처님의 세계를 들어서는 첫번째 관문으로 일심(一心)을 뜻한다...
금강문(金剛門)...
1994년에 건립된 이 금강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일주문을 지나 오르면 작은 개울 건너에 자리잡고 있다..
내부에는 금강역사상 2구와 함께 사자를 타고 있는 문수동자상과 코끼리를 타고 있는 보현동자상이 봉안되어 있다..
천왕문(天王門)... 금강문과 일직선상에 있으며, 1994년 가람을 중수하면서 새롭게 조성된 건물...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내부에는 좌우 각 2구씩 목조사천왕상이 봉안되어 있다.
보제루(普濟樓)...
천왕문을 지나 가람의 중심으로 들어서는 중문(中門) 역할의 건물로 1960년대에 건립되어 1998년에 증축된 바 있다.
조선 중기에 만세루(萬歲樓)라는 12칸 규모의 누각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어 지금의 보제루는 만세루를 계승한 건물로 추측된다.
정면 7칸, 측면 3칸의 2층 팔작지붕으로 아래층은 절로 오르는 계단 역할을 하며, 2층은 주로 법회나 대중집회의 공간으로 활용된다.
‘보제루’ 편액 외에 ‘개산천사백주년기념관’이라는 편액도 함께 걸렸으며, 최근에 조성된 금동석가여래좌상이 1구 봉안되어 있다...
국보 제62호인 미륵전(彌勒殿)..
보제루를 지나 가람의 중심에 이르면 오른쪽에 웅장한 규모로 자리잡고 있다.
건물은 팔작지붕의 3층 구조로 1층과 2층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규모이며, 3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줄어들었다.
장대석의 기단을 마련하여 그 위에 막돌초석을 올리고, 기둥을 세워 창방과 평방을 짜 올려 기둥과 기둥 사이에 공포를 얹은 다포식건물.
처마는 겹처마이며, 추녀에는 활주를 세워 건물의 무게를 분산시켰다
미륵전은 미래의 부처님인 미륵이 불국토인 용화세계에서 중생을 교화라는 것을 상징화한 법당이다.
즉, 미륵신앙의 근본도량을 사찰 속에 응축시킨 것이 미륵전이요,
먼 미래의 새로운 부처님 세계에서 함께 성불하자는 것을 다짐하는 참회와 발원의 장소이다...
미륵전은 신라 경덕왕 21년(762년)부터 혜공왕 2년(766년)에 진표율사가 가람을 중창하면서 미륵보살에게 계를 받았던 체험 그대로를
가람에 적용하였다. 안에는 미륵장륙상을 본존으로 모셨으며 남쪽 벽에 미륵과 지장보살에게서 계를 받는 광경을 벽화로 조성하였다.
그러나 이 건물은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 지금의 모습은 인조 13년(1635년)에 수문대사가 재건하였다.
미륵전은 용화전,산호전(山呼殿),장륙전 등의 여러 가지 이름을 지녔다. 지금도 특이하게 1층에는「대자보전(大慈寶殿)」,
2층에는「용화지회(龍華之會)」, 3층에는「미륵전(彌勒殿)」등의 각기 다른 편액이 걸려있다.
이름은 다르지만 모두가 미륵불의 세계를 나타낸다. 미륵전의 내벽과 외벽에는 사이사이에 수많은 벽화가 그려져 있다.
보살과 신장 그리고 수도하는 모습 등 다양한 벽화는 건물의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미륵불 본존은 높이가 11.82m이고, 삼존불 중의 협시는 8.79m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이다.
통일신라시대 진표율사가 미륵전을 조성할 당시에는 3년간에 걸쳐 완성한 미륵장륙상 한 분만이 모셔졌었다.
그 뒤 조선시대에 수문대사가 다시 복원 조성하면서 소조 삼존불로 봉안했는데, 1934년에 실화로 일부가 소실되었다.
4년만인 1938년 우리나라 근대조각의 개척자 김복진(金復鎭)이 석고에 도금한 불상을 다시 조성해 오늘날의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미륵본존은 거대한 입상이지만 전체적으로 균형과 조화를 이룬 모습이다...
본존불 양 옆의 협시보살은 왼쪽이 법화림(法花林) 보살이고, 오른쪽이 대묘상(大妙相) 보살이다.
협시보살 좌우에는 봉안 연대를 알 수 없는 2구가 있다.
본존의 협시보다 약간 작지만 역시 금을 입힌 소조상이다...
보물 제27호인 육각다층석탑(六角多層石塔)...
대적광전 오른쪽 앞마당에 위치하며 탑의 재질이 흑색의 점판암으로 된 특이한 경우인데, 완전한 모습은 아니지만 정교하면서도 우아한
공예적 석탑이다. 본래 자리는 봉천원구가 있던 대웅대광명전의 앞마당에 있었다.
봉천원구는 혜덕왕사가 1079년(문종 33)에 절의 주지로 있으면서 창건했으므로 탑도 이 무렵에 조성된 것이라 생각된다.
그 뒤 조선시대에 들어와 정유재란으로 봉천원구가 모두 소실되자 수문대사가 대사구, 곧 지금의 금산사를 중창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탑을 옮겨왔다. 이 탑은 신라시대의 일반적 석탑에서 고려시대의 화력하고 장식적 공예탑으로 넘어가는 초기의 작품이다...
적멸보궁(寂滅寶宮)...
방등계단 옆의 옛 나한전 자리에 세워진 예배각(禮拜閣)으로 유리벽을 통해 방등계단에 있는 사리탑에 경배하며 예불을 드리는 곳이다.
정면과 측면 각 3칸의 팔작지붕으로 불전 내부에는 따로 불단을 차려 불상을 봉안하지 않았다.
통도사 대웅전과 같은 경우로써 즉 불사리(佛舍利)를 봉안한 사리탑이 곧 부처님을 상징하기 때문에 별도의 불상이 없다..
보물 제25호인 오층석탑(五層石塔)...
송대에 자리하며, 정사각형 판재를 이용한 이 석탑은 높이가 7.2m로서 소박하고 단순한 구조를 지녔다.
본래 기록에 따르면 9층이라 하였는데 지금 남아있는 옥개석의 형태나 체감율 등에서 6층 이상이 손실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설에 따르면 후백제 견훤이 금산사를 창건하면서 이 석탑을 건립하였을 것이라 하나, 고려시대에 조성되었다는 확실한 기록이 전한다.
1971년11월에 석탑을 해체수리하는 과정에서「모악산금산사오층석탑중창기」가 발견되었는데, 내용 가운데 979년(경종 4)에 시작하여
981년에 완성했다는 사실이 보인다. 한편 탑 속에서는 중창기와 함께 금동관음상을 비롯한 여러 소불상이 발견되었는데,
이 탑의 복장품은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
보물 제26호인 석종형(石鐘形)부도...
송대의 방등계단(方等戒壇)의 중앙에 자리잡고 있다.
방등계단의 수계법회(受戒法會)를 거행할 때 수계단을 중앙에 마련하고, 그 주위에 삼사(三師)와 칠증(七證)이 둘러앉아서 계법을
전수하는데 사용했던 일종의 의식법회 장소이다.
이러한 예는 경남 양산 통도사와 개성의 불일사(佛日寺) 등지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한국 불교의 독특한 유산이다.
불교 정신을 대표하는 계(戒), 정(定), 혜(慧) 삼학(三學) 가운데 계는 으뜸으로서 계를 지킴은 불교의 기본 토대가 된다.
이 계의 정신이 일체에 평등하게 미친다는 의미에서 방등계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한편 방등계단의 성격을 도솔천(兜率天)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즉 미륵신앙의 근본도량인 금산사에는 미륵의 하생처로서 미륵전을 조성하고, 그 위에 도솔천을 구현하여 미륵상생신앙을 나타냈다.
결국 금산사는 미륵상생신앙과 하생신앙을 조화롭게 겸비하였다는 신앙적 성격을 지녔다는 뜻이 된다.
조선 생육신의 한사람이었던 김시습(金時習)이 절을 찾아 이곳 방등계단에서 남긴 시가 한 수 전한다...
나한전(羅漢殿)...
1995년에 새로 건립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대적광전 뒤쪽에 위치하고 있다.
방등계단의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이곳에서 계단을 참배하였기 때문에 계단예배전(戒壇禮拜殿)이라고도 불렀다.
내부에는 소조 석가삼존상 및 가섭, 아난존자상을 봉안하고 그 좌우에 16나한상을 배치하였으며, 삼존상 뒤로는 계단식의 단을 마련하여
소형의 5백 나한상을 봉안하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조선시대에 7칸 규모의 나한전이 있었다고 하나 그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대적광전(大寂光殿)...
정면 7칸, 측면 4칸의 다포식 팔작지붕으로 조선시대 건물이었으나 1986년에 화재로 전소된 후 1994년에 본래대로 복원되었다.
대적광전이 지금의 웅장한 규모를 갖게 된 것은 정유재란 때 절이 전소된 후 1635년 수문대사의 중창에 의해서이다.
이때 별도로 모셨던 비로자나불, 노사나불,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약사여래불과 여섯 보살을 함께 모심으로써 여러 전각들을 대적광전
하나로 통합하여 창건하였다. 이후 1776년(영조 52)에 중수된 바 있고, 1926년과 1938년 미륵전 보수 때 함께 수리되었다.
대명광전, 극락전, 약사전 등의 당우를 통합시켜 놓은 통합법당으로 법요를 집행하는 곳이다...
‘대적광전’ 편액은 1991년에 석전(石田) 황욱(黃旭)이 쓴 글씨라고 하며, 내부에는 1994년 전각을 복원하면서 불보살상과 닫집 등을
모두 새로 봉안하였는데, 비로자나불을 비롯한 5여래와 그 협시로서 6보살을 모셨다.
5여래는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왼쪽에서부터 아미타불, 석가모니불, 노사나불, 약사불이며,
6보살은 왼쪽에서부터 대세지보살, 관음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 일광보살, 월광보살의 순으로 봉안하였다.
불화로는 1986년의 화재 때 노사나후불탱을 제외한 나머지 후불탱들은 모두 무사하여 그대로 봉안되어 있는데,
노사나후불탱은 1992년 석정스님에 의해 조성된 작품이며, 왼쪽 벽에는 1991년에 조성한 신중탱 1점이 봉안되어 있다...
그밖에 여러 보물이 있다.
보물 제22호인 노주(露柱)...
노반지주(露盤之柱)의 줄임말로서 처음에는 전각의 정면 귀퉁이에 세우는 두개의 장대였다가 나중에 탑의 상륜부를 구성하는 부재로
사용되었다. 사중기록에 보면 노주는 잘못 된 명칭이고, 광명대로서 미륵전 앞에서 미륵불에게 광명을 공양하던 석등이었다고 한다.
고려시대의 조성기법을 간직하고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보물 제23호 석련대(石蓮臺)...
대적광전에서 동남쪽 10여m에 위치한 불상의 대좌로서 정확한 이름은 석조연화대인데 높이 1.67m, 둘레가 10.3m가 넘는 거대한 작품..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형의 연화대좌인 데다가 더욱이 하나의 화강석으로 각 면에 조각한 수법이 정교하고 아름답다...
보물 제24호 혜덕왕사진응탑비(慧德王師眞應塔碑)...
부도군의 3번 부도비로 고려 예종 6년(1111년)에 세웠다. 현재 탑비는 귀부와 비신만이 남아 있고 비의 머리부분은 결실되었다.
대리석의 비신은 높이 2.78m, 너비 1.5m로서 심하게 손상되어 비문은 판독하기 어렵지만 다행히『해동금석원』등에 그 내용이 전한다.
비문의 글씨는 약 2cm의 크기로 구양순의 해서체인데 활달하고 쾌적한 멋을 지녔다.
비의 앞면에 43행 77자씩으로 스님의 출생과 교화활동, 입적 등을 적었으며 그 둘레는 당초문으로 장엄했다.
보물 제28호로 지정된 당간지주(幢竿支柱)...
금강문에서 동북쪽으로 50m쯤 떨어진 곳에 있으며 절에 중요한 행사나 법회가 있을 때 깃발을 걸어서 이를 알리는 일종의 안내판이
당간이고, 이를 지탱하는 것이 지주이다. 그래서 당간지주는 반드시 절의 입구에 놓이게 마련이다.
장방형의 계단식 3층 기단과 그 위에 당간을 받치고 있던 간대(竿臺), 지주를 놓던 기단석 등이 잘 남아 있다.
정연한 기단부와 지주의 다양한 조각 등이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당간지주 가운데서 가장 완성된 격식을 갖춘 작품이다.
지주에 세곳의 홈을 마련한 예는 익산의 미륵사지와 경주 보문리 당간지주에서도 볼 수 있어 같은 8세기의 조성으로 추정된다.
보물 제29호인 북강삼층석탑...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높이 4.65m이며, 전체적으로 신라탑의 전형을 따르고 있으나 옥개석(屋蓋石)이 넓으며 낙수면(落水面)의 경사가
급한 면에서 고려시대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석탑은 화강암으로 만들어 졌으며 정방형이다. 지대석은 거의 땅에 묻혀 정확한 형태를 알 수 없다.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우고 처마의 양끝에서의 들림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다. 상륜부는 노반 1석만 남아 있을 뿐,
다른 부재는 모두 결실되었다. 전체의 형태가 각 부의 체감률이 적은 탓으로 안정감을 잃고 있다. 석재의 결구가 규칙성이 없고 각부의
조각이 섬약하다. 심산에 위치하여 부재가 거의 완전하게 남아있고 시대적 특징을 잘 보여주는 좋은 작품이다.
보물 제827호인 대장전(大藏殿)..
미륵전의 정면 서쪽에 앞면과 옆면 각 3칸씩의 다포식 팔작지붕이다.
본래 진표율사가 절을 중창하면서 세워졌다. 미륵전을 짓고 이를 장엄하는 정중목탑으로서 가운데에서 우측부분에 위치하였으며
정팔각원당형으로 조성했던 건물이다. 당시 양식은 탑과 같이 산개형(傘蓋形)의 층옥(層屋)으로서 맨 꼭대기 옥개에는 솥뚜껑 모양의
철개를 덮고, 다시 그 위에 불꽃 모양의 석조 보주를 올렸다.
그 뒤 조선시대에 들어와 1635년에 가람을 중창하면서 본래 목탑이었던 것을 지금과 같은 전각의 형태로 변형하면서 대장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지금의 위치로 이전된 것은 1922의 일이다. 삼면의 벽은 모두 10폭의 벽화로 장엄하였는데 흔히 볼 수 있는 십우도나
극락세계의 장엄 등이 아니라 구체적 인물과 사건이 등장하는 모습이다. 또한 외벽에도 좌우로 벽화가 그려져 있다. 한편 대장전의
내부 출입문 위에는 1974년 건물을 중수할 때 참여한 사람들의 인명과 불상의 개금불사에 시주한 사람들 이름을 적은 현판이 걸려 있다.
대장전 앞에 보물 제828호인 고려시대의 팔각석등이 있다.
지대석에서 보주까지 거의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고 전체 높이는 3.9m이다.
사각형의 지대석위에 하대석을 얹고 그 위에 간주석, 연화석, 화사석, 옥개석, 보개, 보주의 순서로 조성되었다.
이 석등은 화창에 시설했던 창문만을 제외하면 현재 거의 완벽한 모습을 남기고 있다.
더욱이 오랜 가람의 변천에도 불구하고 제자리를 잃지 않고 은은한 법등을 밝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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