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기행] 삼보사찰 중 법보사찰 가야산 해인사(海印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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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기행] 삼보사찰 중 법보사찰 가야산 해인사(海印寺)

by 정산 돌구름 2007. 7. 9.
법보사찰 가야산 해인사(海印寺)

 

탐방일자 : 2007년 7월 7일(토)

해인사 소개

  대한불교 조계종 제12교구의 본사로 75개의 말사와 14개의 부속암자를 관리하고 있다.

  통도사, 송광사와 함께 우리나라 삼보사찰 중 하나이며 고려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어 법보사찰이라고도 한다.

 〈신라가야산해인사선안주원벽기 新羅伽倻山海印寺善安住院壁記〉,〈가야산해인사고적〉에 의하면 신림(神林)의 제자인 순응(順應)이

  766년(혜공왕 2) 중국에 건너가서 법을 전수받고 귀국한 뒤 802년(애장왕 3) 가야산에 해인사를 창건하다가 갑자기 죽자 이정(利貞)이

  그의 뒤를 이어 절을 완성했다고 한다.

  그러나〈삼국유사〉에는 신라 문무왕 16년(676년) 의상(義湘)이 부석사를 창건하고 곧 해인사·화엄사·범어사 등 화엄10찰(華嚴十刹)을

  세웠다고 되어있어 창건연대가 분명치 않다. 절의 이름은〈화엄경〉에 나오는  해인삼매(海印三昧)에서 유래되었고, 그 개조(開祖)였던

  순응 역시 의상의 손제자였다는 사실 등에서 화엄사상(華嚴思想)을 근본으로 하여 이루어진 화엄의 대도량 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고려 태조를 도와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나라를 세운 희랑 법사가 태조가 헌납한 전지 500결을 가지고 절을 중건하고

  이곳에서 화엄사상을 크게 펼친 것으로 유명하다.

  1398년(태조 7) 강화 선원사(禪源寺)에 있던 고려대장경을 해인사로 옮겨옴으로써 호국사찰의 중심지가 되었다.

  1483년(성종 14)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貞憙王后)가 해인사를 중건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488년 덕종의 비인 인수왕비와 예종의 계비인 인혜왕비가 학조(學祖)에게 명해 대장경판전(大藏經板殿)을 중건했으며

  또 3년간에 걸쳐 대적광전을 비롯하여 법당, 요사 등 160여 칸을 새로 건립했다.

  1695년(숙종 21) 화재로 만월당(滿月堂), 원음루(圓音樓) 등 여러 요사채가 소실되었고, 그 이듬해 다시 불이 나서 무설전(無說殿) 등

  나머지 요사채가 불타버리자 뇌음(雷音)이 중건했다.

  그뒤에도 끊임없는 화재로 대부분의 건물들이 소실되었다가 다시 중건되는 과정을 겪었지만, 대장경판전(국보 제52호)만은 피해를

  입지 않고 오랫동안 보존되어왔다.

  이밖에도 대각국사 의천, 사명대사 등과 같은 고승이나 최치원, 이거인, 김정희, 정인홍 등 역대 명인들이 한때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로는 대적광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6호)을 비롯하여 명부전, 응진전, 삼성각, 조사전, 퇴설당(堆雪堂), 음향각,

  관음전, 궁현당(窮玄堂), 구광루(九光樓), 경학원(經學院) 등이 있으나 대부분 근래에 세워진 것이다.

  중요문화재로는 고려대장경판(국보 제32호), 석불입상(보물 제264호), 원당암다층석탑(보물 제518호), 고려각판(국보 제206호, 보물

  제734호), 반야사원경왕사비(보물 제128호) 등이 전해지고 있다.

  또한 해인사동종을 비롯해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수많은 유물들이 해인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한국의 대표적인 불교의 3대사찰을 통칭 불,법,승을 상징하는 삼보사찰(三寶寺刹)을 말하는데

경남 양산의 통도사, 경남 합천의 해인사, 전남 순천의 송광사를 칭한다..

 

해인사와 역사를 같이 한 고목.. 무려 1,200년 된 나무인데 안타깝게도 1945년에 죽었다고 한다...

 

해인사 구광루... 정면 7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건물...

1818년(순조 18) 감사 김이재의 주선으로 도내 40명 승려의 시금(施金)과 거창사람 김용술이 시주하여 건립되었다..

원래는 기능상 재식시(齋式時) 법요(法要)를 집행하던 곳이었으나, 현재는 사찰의 유물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동쪽 1칸은 종고루(鐘鼓樓)로 쓰이고 있다. 누 안에는 4,000근의 대종(大鐘)과 지름 1.5m의 법고(法鼓)가 있고,

목어(木魚)·운판(雲板 : 절에서 식사시간 등을 알리기 위하여 치는 금속판) 등도 보존되어 있다.. 

 

1985년11월14일 경남도유형문화재 제256호로 지정된 해인사 대적광전(海印寺 大寂光殿)...

해인사를 창건하면서 순응, 이정이 건립하였으며 원래는 비로전(毘盧殿)이라는 2층 건물이었다.

조선 성종19년(1488년) 인수대비, 인혜대비의 지원으로 학조(學祖)가 중창하면서 대적광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후 여러 차례 화재로 소실되었고, 지금의 건물은 1817년(순조 17)에 제월이 경상관찰사 김노경의 후원으로 세웠으며,

1971년 주지 이지관이 대폭 중수하였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목조와가이며 공포는 외이출목(外二出目), 내삼출목(內三出目)의 다포식(多包式)이다.

주불인 비로자나불과 좌우의 화관을 쓴 문수·보현 비로자나불 삼존상은 1897년에 범운이 금당사에서 옮겼다고 전해진다.

존명을 알 수 없는 보살상 4구, 지장보살상 2구가 삼존상 좌우로 봉안되어 있고, 불전 안에 홍치4년명동종(보물 1253)이 봉안되어 있다.

 

1982년 5월 22일 국보 제206호로 지정되었된 해인사 고려각판(海印寺高麗刻板)...

고려시대의 불교경전, 고승의 저술, 시문집 등이 새겨진 목판으로 모두 54종 2,835판인데 이 중 28종 2,725판이고, 나머지 26종 110판이

보물 제734호지정되어 있다.

총28종 2,725장의 이들 불경각판은 이미 국보 제32호지정된 대장경판과는 달리 대장경판을 보관한 두 판고 사이에 있는 동재(東齋)와

서재(西齋)에서 뒤섞인 채로 해인사 잡판으로 불리어 왔다.

그러나 정리 과정에서 《팔만대장경보다 훨씬 전에 새겨진 것이 발견되는 등 문화재로서의 귀중한 가치가 뒤늦게 인정되어,

1982년 총 54종 가운데 28종이 국보로 지정되고 26종은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 경판 가운데에는 고려의 간경도감판·지방관판 등 관에서 판각한 것 이외에 해인사가 아닌 다른 사찰에서 판각한 것과 개인이 판각한

것 등이 있는데, 판각 연대는 고려 초에서 조선 후기에 걸쳐 있다.
후박나무를 짠물에 담가 지방기를 빼고 나무결을 삭혀 잘 말린 다음 판각하였으므로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이 목판에는 《묘법연화경》, 《금강경》, 《화엄경》 등의 불교경전과 신라와 고려를 비롯한 중국의 고승이나 개인의 시문집 및 저술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경전류에는 대부분 간행기록이 있어 고려시대 불교경전의 유통이나 불교신앙의 경향을 엿볼 수 있다.

고승이나 개인의 시문집 및 저술 등은 비록 간행기록이 없고 전권을 갖추지 못한 것이 많으나, 그 내용이 전하지 않거나 역사적으로 귀한

자료들이다... 대장경판과 함께 고려시대 판각기술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 불교사 및 문화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2007년 6월 '고려대장경판 및 제경판'으로 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록유산 지정되었다...

 

해탈문을 지나고...

 

1985년11월14일 경남도문화재자료 제154호로 지정된 해인사 봉황문(海印寺 鳳凰門)..

해인사일주문에서 800m 정도 떨어져 있는 문으로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봉안하고 있어 천왕문 또는 금강문이라고도 한다.

창건연대는 알 수 없지만 1717년(순조 17)에 중수하였고, 1761년에 재건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1817년 화재로 전소됨에 따라 1821년에 중건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계 단층 맞배지붕으로 건평은 21평이다.

1838년 탈색한 문수, 보현상과 함께 가야, 제파 등 사위(四位) 탱화를 새로 조성하여 봉안하였다.

1932년 산청에 있는 화백 지송파가 동서 양 벽면에 사천왕 탱화를 조성하여 이듬해 점안하였다.

 

1995년 해인사 고려대장경과 대장경판전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해인사 정견각... 귀로난야 뒤편의 육각모양의 산신각...

 

사명당 유정스님의 귀로난야...

 

아름답게 꾸며진 사찰 풍경..

 

홍제암으로 들어서는 정문 보승문...

 

경남도 유형문화재 제156호인 해인사의 산내암자인 홍제암.

창건연대 및 역사는 전래되지 않고 있으나 사명대사(四溟大師)가 입적한 곳으로 유명하다.

왕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여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라는 시호를 내리고 비를 세우게 하였다.

이 암자를 홍제암이라고 부르게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1614년에 혜구대사가 사명대사의 진영을 봉안하기 위하여 영당(影堂)을 건립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100여 평에 달하는 인법당(因法堂)을 비롯하여 영자각(影子閣)·요사채 등이 있다.

인법당에는「홍제암(弘濟庵)」편액이 걸려 있는데, 보물 제1300호로 지정되었다.

법당 내에는 지장보살 및 후불탱화를 봉안하고 있으며, 영자각에는 16명의 고승 영정을 봉안하고 있다. 이 영자각은 영조 때 사명대사의

영정을 모시고 표충사(表忠祠)라고 했으나 밀양의 표충사에도 사명대사를 모신 곳이 있다고 하여 이곳을 폐하였다고 한다.

 

현재 영자각에는 청허·사명·영규·하운·화곡·장섭·송파·평신·정월·부환·보응·돈암·모은·예봉·회은·해활 등의 영정이 있다.

또한 이 암자에는 1612년(광해군 4)에 허균이 비문을 쓴 사명대사의 비가 있다. 이 비는 1943년 일본인에 의해 파괴되었는데,

비문의 내용이 한국인의 민족혼을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네 조각을 내어 길가에 방치하였다.

광복 후 이 비문을 명월당에 보관했다가 1958년에 철봉으로 속을 연결하고 파손된 부분을 석회로 때워서 현재의 위치에 세웠으며,

사명대사 부도와 함께 보물 제1301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3.1m, 너비 1.2m이며, 사명대사의 전기에 관한 기록 중 가장 오래되고 정확한 것이다...

 

암자 뒷산의 높이 1.8m, 둘레 3.32m의 평범한 석종형(石鐘形) 부도가 있는데, 사명대사의 부도라고 전한다.(좌측 3번째) 

 

고암당 상언대종사의 사리탑과 탑비..

 

 

해인사를 지나 오르면 외나무다리 옆에 자리한 용탑선원...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에 한분이신 용성스님을 위하여 창건된 이 암자는 스님의 사리탑을 수호관리하기 위하여

1945년에 창건되었다고 하며, 용탑전(龍塔殿)이라 불리기도 한다...

 

용탑선원 내의 칠불보궁...

 

스님들이 도를 닦기 위해 수행을 했다는 미타굴....

 

예전에 성철스님도 이 곳에서 수행을 한 바 있다고 한다.. 

 

해인사에서 3km가량 숲속으로 오르면 보물 제264호인 해인사 석조여래입상...

목 부분이 잘렸고 발과 대좌도 없어져 원형을 잃었다. 현재의 크기는 210cm 정도이다..

 

팔을 몸에 붙이고 반듯이 선 자세로 얼굴은 둥글며 코와 입이 작게 표현되어있다. 머리는 소발(素髮)이며  육계(肉髻)는 낮다.

옷 주름은 상체는 V자형, 하체는 U자형이다. 얼굴, 신체의 양감 그리고 옷 주름에서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의 특징이 엿보이기는 하지만

균형을 잃은 경직된 자세, 평면적이고 소극적인 조각수법 등 형식화 경향이 현저한 여래상이다.

제작시기는 통일신라 말이나 고려시대 초기로 짐작된다... 

 

 

2002년7월5일 개관하였다는 해인사 성보박물관...

해인사 목조희랑조사상(보물 제999호)해인사 홍치 4년명 동종(보물 제1253호), 해인사 대적광전 영산회상도(보물 제1273호), 

율곡사 괘불(보물 제 1316호), 광해군 내외 및 상궁 옷(중요민속자료 제3호) 등 국가지정문화재 5종 8건과,

해인사소장 대적광전 중건 상량문(경남도 유형문화재 제399호), 해인사소장 동제 소종(경남도 유형문화재 제400호), 

해인사 존상도(전 세조대왕진영: 경남도 문화재자료 제330호), 벽송당지엄진영(경남도 유형문화재 제316호)  등이 소장되어 있다..

 

치인야영장 옆의 용문폭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