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기행] 용암사(龍巖寺)와 마애불, 그리고 쌍삼층석탑(雙三層石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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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기행] 용암사(龍巖寺)와 마애불, 그리고 쌍삼층석탑(雙三層石塔)

by 정산 돌구름 2006. 11. 30.
옥천 용암사(龍巖寺)와 마애불, 그리고 쌍삼층석탑(雙三層石塔)


탐방일 : 2006년 11월 19일

용암사 소개

충북 옥천의 용암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말사이다.

천축(天竺:인도)에 갔다가 귀국한 의신(義信)이 552년(진흥왕 13)에 창건하였다.

절 이름은 경내의 용처럼 생긴 바위에서 유래한다고 하나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에 의해 파괴되어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 있다.

신라의 마지막 왕자인 마의태자금강산으로 가던 도중 용바위에서 서라벌이 있는 남쪽 하늘을 보며 통곡하였다는 설이 있다.

창건 이후의 중수·중건에 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고려시대 양식의 석탑과 마애불상이 남아 있어 고려시대에도 법통이 이어져

왔을 것으로 짐작할 따름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불우(佛宇)조나 <여지도서>의 사찰조에 용암사가 없기 때문에 조선중기 용암사의

역사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고, 임진왜란 때 병화로 폐허화되었다는 설로 미루어 보아 한동안 복구되지 못한 채 지낸 것으로 추측된다.

1986년에 주지 무상(無相)이 대웅전산신각을 중창하였고, 뒤이어 주지 현관(玄觀)이 요사채를 중건하고 범종각을 신축하였으며,

최근에 천불전을 조성하였다. 건물로는 대웅전·산신각·용왕각·요사채·범종각이 있다.

대웅전 안에는 아미타여래를 주존으로 하여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의 삼존상이 봉안되어 있고 5종의 탱화가 있다.

이 가운데 화법이 정교한 후불탱화(後佛幀畵)와 1877년(고종 14)에 조성된 신중탱화(神衆幀畵)는 문화재적인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용암사 쌍삼층석탑(沃川龍岩寺雙三層石塔)  - 2002년 3월 12일 보물 제1338호로 지정되었다.

같은 모양의 석탑 2기가 자연 암반 위에 나란히 세워진 쌍탑으로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이 거의 체감 없이 비슷한 비율로

높게 서 있는 특이한 형태이다. 이 탑은 여러 개의 화강암으로 만들었는데 이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리고 상륜부를 갖추고 있다.

동탑의 높이는 4.3m, 서탑의 높이는 4.1m 정도로 두 탑의 규모면에서 약간 차이가 있다.

두 석탑 가운데 동탑은 대체로 완전하지만 서탑은 2층과 3층 탑신의 몸돌이 결실되어 다시 보수하였다.  

 

이 석탑은 각 부분의 양식과 석재의 결구 수법에서 간략화된 조성 수법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용암사 마애불(磨崖佛)

충북 유형문화재 제17호로 높이 3m. 화려한 연화대좌(蓮華臺座) 위에 서 있는 정면관(正面觀 : 앞에서 바라본 모습)의 여래입상이다.

전체적으로 균형 잡힌 비례와 유려한 옷주름 선 그리고 고부조(高浮彫 : 높은 돋을새김)에 의한 적절한 양감이 어우러진 수작이다.

불상의 얼굴은 갸름한 달걀형으로 정제된 상호(相好 : 부처의 몸에 갖추어진 훌륭한 용모와 형상)에서 정감이 넘치면서도 위엄 있는

불성(佛性)을 잘 반영하고 있다. 두부에는 둥근 육계(肉髻 : 부처의 정수리에 있는 뼈가 솟아 저절로 상투 모양이 된 것)가 큼직하다.

살이 많이 올라 풍만한 양뺨에서는 사실적인 양감이 느껴진다. 반타원형의 눈은 길게 반개하였다. 눈초리가 살짝 위로 치켜 올라가 있다.

길게 내려 뻗은 코는 우뚝하고 꼭 다문 입술에는 붉은 채색을 입혔다. 커다란 귀가 어깨까지 닿고 있으며 짧은 목에는 삼도가 선명하다.

불상의 신체는 비교적 늘씬하고 탄력 있는 자태를 보여 주고 있다.  

 

지면에서 다소 떨어져 암벽의 중간에 상을 새기고 있기 때문에 허공에 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목에서부터 곧바로 이어지는 어깨가 매우 굳세고 양발을 가볍게 벌려 발끝을 밖으로 향한 안정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착의 형태는 우견 편단(右肩偏袒 : 오른쪽 어깨가 드러남)이나 오른 어깨를 살짝 덮고 있다. 발끝의 군의(裙衣) 자락이 좌우로 날카롭게

뻗치고 있다. 왼 어깨를 감싸 흘러내린 옷자락이 오른 손목을 감아 유려하게 흘러내리고 있다.

복부 아래로도 완만한 U자형 옷주름이 몸 앞에서 겹겹으로 늘어지고 있다.

수인(手印)은 왼손을 내리뜨려 엄지를 제외한 나머지 네 손가락을 가볍게 구부린 모양을 하고 있다.

오른손은 가슴에서 들어 엄지와 중지 외 나머지 손가락을 살짝 쥐고 있는 시무외(施無畏)·여원인(與願印)을 결하고 있다.

대좌는 연판(蓮瓣)의 조각이 정교하고도 화려하다. 광배(光背)는 주형 거신광(舟形擧身光)이다. 마멸이 심하여 세부 판별이 쉽지 않다.

마애불상의 조성 연대는 조각 수법과 착의 형태 그리고 대좌의 형식 등으로 미루어 볼 때 통일신라 말기로 추정된다.

 

마의태자가 신라 멸망을 통탄하며 유랑하던 중에 이곳에 머물다가 떠나자 그를 추모하는 사람들이 그를 기리며 조성하였다고 하여

마의태자상이라고도 한다.

 

이 마애불은 영험이 있어 기도하면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없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