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기행] 두타산 삼화사(三和寺)와 철조노사나불좌상(鐵造盧舍那佛坐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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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기행] 두타산 삼화사(三和寺)와 철조노사나불좌상(鐵造盧舍那佛坐像)..

by 정산 돌구름 2006. 9. 10.
동해 두타산 삼화사(三和寺)와 철조노사나불좌상(鐵造盧舍那佛坐像)


탐방일 : 2006년 9월 9일

소재지 : 동해시 삼화동 두타산

삼화사 소개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月精寺)의 말사이다.

  신라 선덕여왕11년(642) 자장(慈藏)이 당(唐)나라에서 귀국하여 이 곳에 절을 짓고 흑련대(黑蓮臺)라 하였다.

  864년 범일(梵日)국사가 절을 다시 지어 삼공암(三公庵)이라 하였다가 고려 태조삼화사라고 개칭하였으며 많은 부속암자를 지었다.

  1369년 절을 크게 확장하였는데,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중건하였으며, 1905년 의병이 이곳을 근거지로 활약하다가 1907년 왜병의

  공격으로 또다시 소실된 것을 이듬해 중건하였다.

  1977년 이 일대가 시멘트 공장의 채광지로 들어가자 중대사(中臺寺) 옛터인 무릉계곡의 현위치로 이건하였다.

  경내에는 대웅전·약사전(藥師殿)을 비롯하여, 문화재로 신라시대의 철불(鐵佛), 3층석탑 및 대사들의 비(碑)와 부도(浮屠)가 있다.

 

 

  석식영암(釋息影庵)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 말에 세 사람의 신인(神人)이 있었는데, 그들은 각각 많은 무리들을 거느리고 지금의 삼화사

  자리에서 모의(謀議)를 하였다. 그들이 가버리자 그 지방 사람들은 그곳을 ‘삼공(三公)’이라 하였으며, 얼마 뒤 사굴산(闍堀山)의 품일

  (品日)이 이곳에다 절을 짓고 삼공사(三公寺)라 하였다는 것이다.

  오랜 세월이 지난 뒤 1393년 조선 태조가 칙령을 내려 이 절의 이름을 문안(文案)에 기록하고 후사(後嗣)에 전하게 하면서 신인(神人)이

  절터를 알려준 것이니 신기한 일이라고 하였다.

  그 옛날 삼국을 통일한 것은 부처님 영험의 덕택이었으므로 이 사실을 기리기 위하여 절이름을 삼화사(三和寺, 삼국이 화합하여 통일이

  되었다는 뜻)로 고쳤다고 한다.

  한편 읍지(邑誌)에 의하면, 옛 사적(史蹟)에 이르기를 자장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오대산을 돌면서 성적(聖蹟)을 두루 거쳐 돌아다니다가

  두타산에 와서 흑련대를 창건하였는데 이것이 지금의 삼화사라고 하였다. 신라 제27대 선덕여왕 11년(642)의 일로 적혀 있다.

  또, 고적(古蹟)에 의하면, 약사삼불(藥師三佛)인 백(伯)·중(仲)·계(季) 삼형제가 처음 서역에서 동해로 돌배를 타고 유력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와서 맏형은 흑련(黑蓮)을 가지고 흑련대(黑蓮臺)에, 둘째는 청련(靑蓮)을 가지고 청련대(靑蓮臺)에, 막내는 금련(金蓮)을

  가지고 금련대(金蓮臺)에 각각 머물렀다고 하며, 이곳이 지금의 삼화사·지상사·영은사라고 전한다.

  또, 약사삼불은 용을 타고 왔는데 그 용이 변하여 바위로 되었으며 바위 뒤쪽에는 약사삼불이 앉았던 자리가 완연한 형태로 남아있다고

  하며, 약사삼불의 손은 외적(外賊)이 잘라 땅 속에 묻었다고도 한다.

  이 절은 조선 후기에 여러 차례 중수되었다. 1747년(영조 23) 홍수와 사태로 인하여 무너지자 옛터에서 조금 위로 옮겨 지었고,

  1820년(순조 20) 화재가 나서 1824년에 중건하였으며, 1829년 다시 불타자 정원용(鄭元容)·이기연(李紀淵)·이광도(李廣度)·윤청(尹晴)

  등이 서로 협력하여 중건하였다. 1869년(고종 6) 화운(華雲) 덕추(德秋)가 단청을 하였고, 1873년(고종 10) 선당(禪堂)을 세웠으며,

  1896년 학송(鶴松)·창명(彰明) 등이 승당(僧堂)을 지었다.

  이처럼 수차례의 화재와 중건을 거쳐오다가 1907년에는 의병(義兵)이 숙박하였다는 이유로 왜병(倭兵)들이 방화하여 대웅전·선당 등

  200여 칸이 소실되었다. 그 이듬해 이 중 일부를 건축하였으며, 1979년 8월에 무릉계반(武陵溪盤) 위쪽으로 절을 옮겨 중건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약사전(藥師殿)·요사채·삼성각·육화료(六和寮)·큰방·천왕문·일주문 등이 있으며, 문화재로는 삼층석탑 1기를

  비롯하여 운암당상준대사부도(雲巖堂尙俊大師浮屠)와 원곡당대선사부도(元谷堂大禪師浮屠) 및 비(碑)가 있다.

  이 가운데 대웅전 안에 안치된 철불은 창건설화와 관련된 약사삼불 가운데 맏형의 불상이라고 전해지며, 삼층석탑은 높이 4.95m로서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는 고려시대의 탑이다.

  한편 삼성각 안에는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철불(鐵佛) 한 구가 있었는데, 1997년 이 철불 뒷면에서 조성 당시에 새겨진 명문(銘文)

  150여 자가 발견되었다. 명문의 판독 결과 이 철불이 9세기 중엽에 조성된 노사나불(盧舍那佛)임이 밝혀졌다.

  명문 가운데는 이두(吏讀)가 포함되어 있으며, 불상 조성에 관계되었던 결언(決言) 등의 승려와 시주자들의 이름이 적혀져 있는 등,

  당시의 사회·문화를 연구하는 데 있어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불상은 1998년 12월 보물 제1277호로 지정되었으며, 절에서는 대적광전을 지어서 이 철불을 봉안하고 있다.

  특히, 고려 말의 이승휴(李承休)는 이 절 가까이에 객안당(客安堂)을 짓고 이곳에서 ≪제왕운기 帝王韻紀≫를 저술하였으며,

  10여 년 동안 불경을 독파하다가 객안당을 삼화사에 희사하고 간장암(看藏庵)이라 하였다고 한다.

 

적광전(寂光殿).. 

정면과 측면 각3칸의 다포계(多包系) 팔작지붕으로 삼화사의 중심 법당이다.

1907년 왜구의 방화로 불에 타 1908년에 다시 세운 건물로서 1977년의 이건 때 그대로 옮겨왔으며, 얼마 전까지 대웅전으로 사용되다가

보물 제1292호로 지정된 철조노사나불좌상(鐵造盧舍那佛坐像)을 봉안하면서 적광전으로 편액(扁額)을 내걸었다.

이 건물은 특히 화려한 단청이 눈길을 끄는데 어칸(御間)의 좌우에는 청룡과 황룡이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법당을 지키고 있고,

포와 포 사이에는 화불(化佛)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모서리 부분에는 외부로 돌출한 공포들이 한 송이의 연꽃을 연상시키게 해준다.

적광전 내부전경법당 내부 또한 화려하게 장엄되어 있는데 닫집 내부에는 구름 속을 노니는 청룡을 그려 놓았고,

내부 벽화로는 여러 자세를 취하고 있는 고승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현재 법당의 중심 불단에는 노사나불(盧舍那佛)이 봉안되어 있으며, 그 뒤로 후불탱화가 모셔져 있다.

법당의 오른쪽 문 옆에 위치한 신중단에는 신중탱화를 봉안하였고, 그 반대쪽 영단에는 감로탱화(甘露幀畵)가 봉안되어 있는데

이 세점의 불화들은 모두 근래에 조성된 것이다.

이들 불화와 함께 법당 내부에는 1995년에 조성된 청동반자(靑銅飯子)와 근래에 조성된 범종(梵鍾)이 같이 봉안되어 있다..

적광전과 약사전 사이에 서있는 지장보살상은 1992년에 조성되었다. 동으로 조성되었으며, 팔각으로 된 기단위에 연화대좌(蓮花臺座)를

올려놓고, 그 위에 석장(錫杖)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이다. 또한 아래의 팔각기단에는 신장상(神將像)이 부조되어 있다...

 

철조노사나불좌상(鐵造盧舍那佛坐像)...

삼화사 적광전에 모셔져 있는 이 불상은 현재 보물 제1292호로 지정되어 있다.

처음에 시멘트로 만든 대좌 위에 머리ㆍ가슴ㆍ배부분과 등판을 붙여 안치한 조각철불로, 1997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머리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은 듯하며, 나발과 육계는 뚜렷하지 않은 편이다.

통통한 얼굴에 가늘고 긴 눈, 오뚝한 코, 두툼한 입술 등 전체적으로 단정한 모습을 갖추어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양식이 엿보인다.

좁고 긴 귀는 귓불이 훼손되어 최근 고리형으로 복원하였다.

법의는 통견이며, 양쪽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도식적인 주름을 표현하였고, 복부까지 속이 드러나 허리띠와 드리워진 매듭이 보인다.

철조노사나불상 상단부허리는 길고 늘씬하며, 수인은 오른손을 들어 손바닥을 밖을 향하게 하고 왼손은 아래로 내려 손바닥을 밖으로 향한 통인(通印)을 취하도록 복원하였다. 복원과정 중 오른쪽 등판 면에서 해서체로 양주(陽鑄)된 24×34cm의 명문이 발견되었는데,

약 10행 161자로 된 글 중에서 140여 자만 판독이 가능한 상태이다...

 

명문의 내용 중에서 ‘노사나불(盧舍那佛)’이라는 명칭이 2번 나옴으로써 이 불상의 존명을 알 수 있으며, 880년대에 활약한 결언스님이

시주자의 부모를 위해 화엄경에 따라 불상을 조성했다는 기록이 있어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조성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명문에 10세기 이후까지 내려오는 이두가 사용되었고 한자를 한글 어순에 맞추어 배열한 점 등은 당시의 국어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삼층석탑... 

보물 제1277호로 지정된 이 삼층석탑은 이중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높이 4.8m의 일반형 석탑이다.

전체적으로 균형감 있는 단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기단부의 구성, 별석의 탑신괴임, 옥개석의 조성양식과 수법 등으로 볼 때

탑의 조성시기는 신라 말기인 9세기 후반경으로 추정된다.

사찰의 이전과 함께 1979년에 대웅전 오른쪽 하단으로 옮겼으나 계속 균열이 생기고 가람배치와 맞지 않아 1997년에 현재의 위치로

다시 이전하기 위해 석탑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상층기단 중심부에서 목함(木函)이 발견되었다.  이 안에서 납석제 소형탑 25기, 청동제

불상대좌편(佛像臺座片) 2점, 철편 6점 등이 발견되었고, 문종이에 묵서(墨書)한 기록 1매가 함께 들어 있었다.

소형탑은 완형이 거의 없이 대부분 파손된 것이었으며, 묵서 내용은 1979년 이전의 것이었다.

탑의 구성은 아래로부터 지대석(地臺石)ㆍ기단부(基壇部)ㆍ탑신부(塔身部)ㆍ상륜부(相輪部)의 순서로 이루어져 있으며,

4매의 장대석으로 짠 지대석 위에 비교적 높은 하층기단을 올렸다..

 

약사전(藥師殿)....

정면과 측면 각3칸의 규모의 맞배지붕의 약사전은 1997년에 건립되어 적광전 우측에 위치하여 서향해 있다..

 

법당의 내부는 중앙에 약사삼존불을 봉안하고, 좌우에는 소형의 원불(願佛)들을 배치하였다.

중앙의 약사삼존불상과 후불탱화는 모두 최근에 조성하여 봉안한 것으로, 금동약사삼존불상본존(本尊)인 약사여래는

왼손에 약함(藥函)을 들고 있으며, 본존불 좌우로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이 협시하고 있다.

또한 후불탱화 역시 삼존불상과 같은 도상으로 약사여래를 비롯하여 일광ㆍ월광 보살을 중심에 배치하고 있다.

이 밖에 법당 왼편으로는 1989년에 조성된 신중탱 한 점이 걸려 있다..

 

법종각(梵鐘閣)..

정면 2칸, 측면 1칸 규모의 팔작지붕으로서 삼화사를 이건하면서 새롭게 건립하였으며, 특이하게 건물 측면에 편액과 주련을 걸고 있다.

홍살로 둘러쳐진 범종각의 내부에는 범종을 봉안하였고, 종에 새겨진 명문에 의하면 1980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천왕문(天王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1980년에 건립되었다가 2000년에 중수되었다.

편액은 탄허(呑虛) 스님의 글씨이며, 내부에는 사천왕상을 불화로 모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