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남북종주(실상사~삼신봉~쌍계사) 100리길 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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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구름의 산행이야기/산행2008

지리산 남북종주(실상사~삼신봉~쌍계사) 100리길 산행

by 정산 돌구름 2008. 11. 3.

 

지리산 남북종주(실상사~삼신봉~쌍계사) 100리길 산행


○ 산행일자 : 2008. 11. 2(일) - 02:15 출발

○ 기상상황 : 흐린 후 개임

○ 산행인원 : 41명(광주나사모산우회) - 회비 30,000원

○ 산행개요 : 삼정산, 형제봉, 칠선봉, 삼신봉(전북 남원, 경남 함양 하동)

  실상사(03:45) ~ 삼정산 ~ 삼각고지 ~ 벽소령 ~ 세석 ~ 삼신봉 ~ 상불재 ~ 쌍계사주차장(17:35)

○ 산행코스 : 43Km(산행시간 13시간 50분 소요 - 후미그룹)

  실상사(03:45) ~ 삼정산(05:55) ~ 상무주암 갈림길(06:07) ~ 영원령(06:16) ~ 영원봉(06:55) ~ 별바위등(08:12) ~ 음정갈림길

  (08:43) ~ 삼각고지(09:00) ~ 형제봉(09:28) ~ 벽소령(09:55) ~ 선비샘(10:39~50) ~ 1576봉(11:13) ~ 칠선봉(11:22) ~ 영신봉

  (11:54) ~ 세석대피소(12:04) ~ 거림갈림길(12:11) ~ 음양수(12:21) ~ 의신갈림길(12:35) ~ 1213봉(12:42) ~ 1278봉(13:21) ~

  1286봉(14:09) ~ 삼신봉(14:22) ~ 내삼신봉(14:48) ~ 쇠통바위(15:25) ~ 상불재(16:00) ~ 불일폭포 갈림길(16:53) ~ 쌍계사(17:21)

  ~ 쌍계사 주차장(17:35)

○ 봉우리 및 고개 : 삼정산(1,182m), 삼각고지(1,462m), 형제봉(1,433m), 벽소령(1,340m), 칠선봉(1,558m), 영신봉(1,651m),

  세석대피소(1,545m), 음양수(1,450m), 삼신봉(1,284m), 내삼신봉(1,354m)

○ 교통상황

  홈플러스(02:15) ~ 88 ~ 지리산휴게소(03:05~20) ~ 지리산IC(03:25) ~ 60번 ~ 실상사(03:35)

  쌍계사주차장(18:00) ~ 온천모텔사우나(18:02~19:30) ~ 1023번 ~ 19번 ~ 진월IC ~ 남해고속 ~ 홈플러스(20:45)

 

 

○ 산행후기

지리산 남북종주는 남원시 산내면 백일리 에서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에 이르는 50여km의 기나긴 길이다.

「실상사~삼정산~삼정산~영원령~삼각고지~형제봉~벽소령대피소~칠선봉~영신봉~세석대피소~음양수~의신갈림길~삼신봉~내삼신봉~상불재

~시루봉~형제봉~신선봉~평사리」에 이르는 구간이지만 상불재에서 쌍계사로 내려선다.

기다렸지만 막상 망설여지고 주말 계획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금요일 밤에야 신청하여 일요일 새벽에 나서기로 하고...

새벽 홈플러스 앞에서 차를 타고 달린다.

지리산휴게소에서 간단한 아침식사를 하고 지리산IC를 빠져나와 실상사 주차장에 이른다.

어둠속에 간단한 준비체조를 하고 불 꺼진 상가지대를 지나 출발..

 

03:45, 실상사

남원시 산내면 백일리 상가지대 앞에서 준비를 하고「지리산 천년고찰 九山禪門 실상사 200m」에 이른다.

실상사는 828년 신라 흥덕왕 때 개창한 최초의 선종 가람으로서 현재 대한불교 조계종 제17교구 소속의 전통 사찰이다.

중국 당나라에 유학하여 서당지장선사로부터 6조 혜능의 남종선을 배우고 돌아온 홍척국사가 흥덕왕과 선강태자의 귀의를 받아

현재의 지리산인 남악(南岳)에 실상사를 창건하게 되었다.

창건 당시 실상사는 지실사(知實寺)로 불리었으며, 이후 홍척국사의 법을 이어 받은 수철화상이 실상산문 제2대 조사가 되었다.

수철화상은 왕실 사람들의 귀의를 받아 실상사를 크게 확장하였다.

조계종 실상산파로 종명을 개칭한 고려시대는 실상사의 최대 융성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말 이후 잦은 병화로 쇠퇴해지기 시작한 실상사는 15세기 중반에 이르러 완전히 폐사되었다.

이후 200년간 절의 경역은 민간 경작지로 사용되어 왔고, 철불과 석탑만이 논바닥에 방치되어 오다가 1690년(숙종 16) 침허조사에

의해 대적광전을 비롯하여 36동의 건물을 중창하게 되었다.

1995년부터 실상사의 옛 모습을 복원하기 위해 절 주위의 경작지를 매입하여 56,198㎡의 옛 절터를 회복하였다.

1996년〜2005년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창건 당시 가람의 규모와 역사적 변천을 확인하기 위하여 발굴 조사를 시행하였다.

실상사는 법공양 이외에도 템플 스테이(Temple stay)를 실시하고 있다.

일반인들이 절에 숙박하여 사찰생활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하는 프로그램이다.

자연환경과 불교문화가 어우러진 사찰에서 마음의 휴식과 전통 문화를 체험할 수 있다.

실상사의 일상을 자유롭게 느낄 수 있는 상시 템플 스테이와 격주로 운영되는 불교의 문화 체험「산색」이 있다.

또한 지리산 산행과 더불어 불교를 느끼는「지리산의 아침」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7~8월과 12월에는「화림원 스님과 함께하는 단식 좌선」이라는 수행 프로그램도 열린다.

1990년 창립된 승가결사단체인 선우도량의 근본도량으로, 기존 사찰의 전통적 역할을 넘어서는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사부 대중 공동체였던 사찰의 오랜 전통을 되살리기 위해 1996년 3만여 평의 농지에 농장을 만들어 1999년부터 실상사 귀농학교

졸업생들이 주축이 되어 친환경 농업으로 쌀, 보리, 감자, 고추 등 11개 품목에 대하여 유기농산물 품질 인증을 받고 있다.

또, 1998년 9월 생태적 가치와 자립적 삶을 건학 이념으로 하는 실상사 귀농학교를 설립하였다.

매년 봄, 가을 두 차례 2개월간의 합숙 교육 과정을 개설하고 있다.

실상사 작은학교는 불교계 유일의 대안 학교로 2001년 3월 설립된 비인가 중등 교육 기관이다.

여기서 학생들은 불교의 연기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평화롭게 공존하는 삶의 방식을 배운다.

이 학교는 2007년 봄까지 4기의 졸업생을 배출하였으며 모범적인 대안 중등학교로 이미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조화로운 삶, 더불어 사는 지역 공동체, 생명을 살리는 농업」을 기치로 하여 2001년 사단법인 한생명을 설립되었다.

어린이집, 방과 후 학교, 여성 문화 교실, 건강 사랑방 등을 운영하면서 산내면의 마을 공동체 운동을 주도하고 있다.

 

 

「해탈교」를 지나면 보호림 옆으로 「남원 실상사 석장생」앞을 지난다.

 

 

계속되는 지리한 임도를 따라 오르면 우측으로 길목에「입산금지」표지판과 함께

목책과 로프로 가로 막아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04:14)

 

 

임도를 버리고 목책을 넘어 오르면 숲길로 들어서는데 소나무가 우거진 숲으로 들어선다.

싸늘한 새벽공기를 마시며 아무런 조망도 없이 계속하여 어두운 밤길을 오르기만 한다.

 

 

지리산 국립공원의 중북부능선인「삼정산능선」은 전북 남원 산내면과 경남 함양 마천면을 갈라놓은 도경계선상의 능선이며

능선상의 주봉은 삼정산이다.

지리산 남사면 조망터로 압권인 남부능선상의 삼신봉(1284.5m)과 더불어 지리산 북사면 조망터로는 당연 삼정산능선이다.

 

 

삼정산능선은 남북종주 코스보다 칠암자(실상사~약수암∼삼불사∼문수암∼상무주암∼영원사∼도솔암) 순례코스로

많이들 이용하고 있다.

실상사와 약수암을 제외한 영원사, 나머지 암자들은 삼정산 동사면으로 위치하고 있어 산객들은 삼정산을 많이들 찾고 있는 반면,

삼정산보다 높은 영원봉과 별바위등은 산객들 발길이 뜸한 편이다.

가파르게 올라 암봉을 지나면 다시 내리막과 오르막의 반복...

능선을 따라가다 널따란 공지에 묘지 몇 기가 있는 곳을 지난다.(04:58)

 

 

다시 가파른 오르막을 밧줄을 잡고 급경사를 올라서면 탁 트인 조망바위에 오르지만 멀리 불빛만 내려다보이고

어둠 속이라 조망은 전혀 없다.(05:24)

 

 

05:55, 삼정산

계속해서 올라서면 잡목에 둘러쌓여 조망이 없고  정상 표지석 「삼정산 1,182m 함양군」이 있는 삼정상 정상에 오른다.

 

 

정상을 지나면 바로 옆으로 널따란 헬기장이 있으며 스텐으로 제작된 표지판「삼정산(1,210m)/대우국민차(19997.12.11)」이 있고..

 

 

헬기장을 지나면 로프가 설치된 급경사의 내리막길이 이어진다.

 

 

한참을 내려서면 이정표 「삼정산정상/상무주암0.1km/영원사1.7km」가 있는 상무주암 갈림길이다.(06:07) 

상무주암(上無住庵)은 지리산과 상보관계를 이루며 오늘날까지 법등(法燈)이 이어진 명산 속의 명찰이자, 역사 속의 고찰이다.

고려 중기 보조국사 지눌스님은 상무주암에서「대혜어록」의 「선이란 고요한 곳에도 시끄러운 곳에도 있지 않고,

사량분별하는 그 어느 곳에도 있지 않다」는 구절을 보고 적극적인 보살행을 지향했다. 각운스님 역시 상무주암에서「선문염송설화」

30권을 저술했다고 한다.「진리의 등불」이 면면히 이어진 현장에 상무주암이 자리잡고 있는 셈이다.

「상무주」라는 편액이 붙은 주(主)불전, 왼편에 작은 산신각인 듯한 불전, 마당 한편에 있는 3층 석탑이 상무주암의 전부이다.

그러나 이면에 흐르는 면면한 역사와 암자 분위기는 측량할 수 없는 깊이를 가지고 있다.

 

 

상무주암에서 사면길로 진행하면 다시 이정표「삼정산정상0.7km/상무주암0.5km/영원사1.3km」를 지나 능선길로 이어진다.(06:16)

영원사(靈源寺)는 경남 함양군 마천면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사찰로써 조계종 제12교구 본사 해인사의 말사이다.

해발 920m의 고지대인 지리산 삼정산 줄기의 중턱 울창한 숲 속에 위치해 있으며 통일신라시대에 영원대사가 창건하여 영원사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영원이 지리산에 토굴을 파고 8년을 계속 참선수도를 하였으나 깨달음을 얻지 못해 산길을 내려오던 중, 물없는 산속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던 노인의 말을 듣고 다시 정진해 깨우침을 얻게 되어 그 자리에 영원사를 지었다는 전설이다.

서산대사와 사명대사를 비롯해 청매, 포광, 설파 등 선불교 고승들이 거쳐 간 수도 도량이다.

삼정산을 배경으로 앞쪽으로는 벽소령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경치가 수려하다.

한때는 선방이 100칸이 넘을 정도로 내지리에서 가장 큰 사찰이었다고 하나, 여순 14연대 반란사건 때 반란군의 아지트가 된 뒤

한국전쟁 때는 지리산이 유격대와 대한민국 국군 토벌대 간의 격전지가 되면서 완전히 소실되었다.

지금의 건물은1973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여러 고승들이 거쳐간 만큼 인근에 부도가 흩어져 있다.

모두 5기의 조선시대 부도가 횡렬로 늘어서 있는 사찰 동편 숲속의 부도군은 함양군 유형문화재 제445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부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설파의 부도는 18세기에 조성된 것이다.

지리산 등산 루트 중 영원사를 끼는 영원사 루트가 관광상품화를 위해 1998년부터 개발되기도 했다.

이 루트는 경남 산청군, 하동군, 함양군 등 3개 군이 공동 개발한 것이다.

 

 

이정표 「삼정산1.2km/상무주암1.0km/영원사」가 있는 영원사 갈림길을 지나 오르막으로 이어지는데

서서히 어둠이 걷히고 능선을 따라 올라선다.

 

                                 

 

능선을 따라 삼각점(306/1981재설)이 있는 영원봉에 도착한다.(06:55)

 

 

정상에서 바라본 가야할 능선...

 

 

뒤돌아본 지나온 능선.....

 

 

영원봉을 내려서면 산죽밭 사이로 십자안부가 나타난다.(07:09) 

십자안부에서 좌로는 영원사로 내려서고 우측으로는 와운마을, 종주 마루금은 직진이다.

 

 

약간의 경사를 따라 오르내리면 갈림길이 나타나는데 좌측길은 도솔암을 거쳐 벽소령 작전도로로 내려서고

우측길이 별바위등으로 가는 길이다.

 

 

오르막을 따라 오르면 바위지대를 우회하여 나뭇가지에 「출입금지」표지판이 걸려있는 1,396봉에 도착한다.(07:58)

 

 

능선을 따르다가 고도차없이 오르내리면 조망바위로 된 별바위등에 도착한다.(08:12)

사방이 확 트이지만 아침 안개 때문인지 능선들이 희미하게 조망된다. 

희미하게 영신봉~칠선봉~덕평봉 능선, 벽소령대피소, 그리고 가야할 1374m봉, 형제봉, 삼각고지정상의 능선들이 바라보인다.

또, 천왕봉과 동부능선, 좌측으로 왕산과 필봉산, 창암산과 주능으로 올라서는 창암능선, 그 앞에는 오공능선도 주능으로 올라선다.

 

 

암봉을 지나 내려서면 능선을 따라 삼각고지로 이어지는 능선이다.

 

 

암봉을 지나 내려섰다가 오르면 암봉을 지나 능선길로 이어지고 계속되는 산죽밭을 지나는데 길이 매우 희미하고 한참을 이어가니

「곰출현주의」플래카드가 곳곳에 붙여져 있다.

 

 

이어 「탐방로아님」표지판과 로프를 넘어서면 일반 등산로와 만나게 된다.(08:43)

좌측으로 내려서면 음정(양정)으로 내려서는 하산길이고 우측은 삼각고지로 가는 길이다.

 

 

오르막길은 계속되고 구조목「지리13-18」을 지나(08:48)

 


09:00, 삼각고지

잠시 오르면 삼거리 갈림길에 세워진 이정표「천왕봉 14.3km/벽소령대피소2.9km/음정6.6km」가 있는 삼각고지에 이른다.

예상시간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소요되어 잠시 물 한모금을 마시고 출발한다.

 

 

고도를 높이며 오르면 고사목 한그루가 환영의 인사를 하는 듯 비스듬히 고개를 숙인 삼각봉에 오르면 조망이 트인다.(09:08)

 

 

잠시 내려서면 이정표 「벽소령대피소2.4km/연하천대피소1.2km」를 지나고(09:09)

 

 

잠시 오르면 고사목 가지사이로 형제봉이 우뚝 솟아있다.(09:15)

 

 

가파르게 올라 내려서면

 

 

구조위치표시목이 있는 암봉을 넘어선다.(09:25)

 

 

이정표「노고단12.6km/벽소령대피소1.5km/세석대피소7.8km/장터목대피소11.2km」가 있는 형제봉을 넘어선다.(09:28)

 

 

다시 봉우리 하나를 넘어 조망이 트이는 곳에 서는데 뒤돌아보면 형제봉이 우뚝 솟아있다.(09:35)

 

 

봉우리 너머로 벽소령대피소가 희미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09:55, 벽소령대피소

금방 닿을 듯한 벽소령은 쉽게 나타나지 않고 한 굽이만 돌면 끝일 것 같은 등산로는 몇 굽이를 돌아도 계속 이어진다.

드디어 벽소령대피소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벽소령은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25km에 달하는 지리산 주능선 종주 등반코스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으며

고도가 가장 낮은 산령(해발 1,340m)으로써 옛부터 화개골과 마천골을 연결하는 산령으로 유명하거니와

지금은 화개에서 마천까지 38km의 지리산 중앙부 남쪽과 북쪽을 횡단하는 도로다.

벽소령은 광대한 지리산 중심부의 허리처럼 잘룩한 고개로서 그주위에 높고 푸른 산릉들이 겹겹이 쌓여 유적한 산령을 이룬다.

 

 

벽소명월(碧霄明月)....

벽소령에서 가장 뛰어난 볼거리라면 밤하늘의 달로써 달밤이면 푸른 숲 위로 떠오르는 달빛이 너무나 희고 맑아서 오히려

푸르게 보인다 하여 옛부터 이곳을 벽소령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벽소령의 달은 지리 10경 중의 하나다.

감 하나를 빼어 물고 발길을 재촉한다. 세석대피소까지는 6.3km....

 

 

목장길 같은 목책 사이로 나 있는 널따란 길을 따라 진행하면

이정표「해발 1,354m/벽소령대피소0.6km/천왕봉10.8km/세석대피소5.7km」를 지난다.

 

 

이어 절개지 공터에 이른다.(10:16)

좌측으로는 우거진 숲 사이로 군사도로가 나 있지만 지금은 통행이 금지되어 자취가 희미하다.

 

 

다시 숲속으로 들어 능선을 따라 오르면 평덕봉을 우회하고...

 

 

이정표 뒤로는 평덕봉에 오르는 희미한 길...

 

 

잠시 내려서면「선비샘」에 이른다.(10:39)

 

 

이곳 샘터가 지금은 서서 물을 받을 수 있게 되어있지만 예전에는 반드시 고개를 숙여야만 물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옛날 상덕평 마을에 평생 가난하고 천대받으며 살아온 한 노인이 있었다.

이 노인의 유언이 죽어서라도 사람대접 한번 받아보는 것이었는데 결국 아들들이 이 샘터 위에 무덤을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샘에서 물을 뜰 때 반드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므로 결과적으로 이 노인의 무덤에 절하는 격이 되게끔 하였다고 한다.

생전에 갖은 고생과 천대 속에서 화전민으로 살아온 한 노인의 애틋한 소망이 실제로 십여년전까지만 해도 실현되고 있었는데

지금은 무덤도 없어지고 샘도 파이프로 연결하여 서서 받도록 되어있기 때문에 이 씁쓸한 전설은 잊혀진 얘기로 되어가고 있다

5시까지 종주를 마치기 위하여 11시까지 세석대피소에 이르기로 하였지만 도저히 도착은 불가능하여 일단 이곳에서 점심을 먹고

출발하였다.(10:50)

 

 

발걸음을 빨리하여 길을 재촉하여 이정표「벽소령대피소3.6km/천왕봉7.8km/세석대피소2.7km」가 있는 곳을 지나면(11:06)

 

 

조망이 확 트이는 곳에는 「지리산 제일봉“천왕봉”을 찾아보세요!」안내판이 있다.(11:13)

멀리 천왕봉까지 이어지는 주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잠시 내려섰다가 오르면 조망이 트이는 곳에 이정표「칠선봉 해발1,558m/세석대피소2.1km/천왕봉7.2km」뒤로

칠선봉이 거만스럽게 비스듬히 서있다

 

 

 

다시 오르막길은 시작되고 통나무 울타리앞에 서있는 이정표「벽소령대피소4.9km/천왕봉6.5km/세석대피소1.4km」를 지나면(11:37)

 

 

긴 나무계단길이 이어진다.

 

 

능선에 올라서면 영신봉으로 이어지는 능선과 멀리 세석평전에서 촛대봉을 지나 천왕봉으로 이어지는 능선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뒤로는 반야봉 능선이 선명하다.

 

 

11:54, 영신봉

능선을 따라가면 고도차 없이 가면 널따란 들판과도 같은 영신봉에 이른다. 좌측의 영신봉 정상은 오를 수가 없고

로프와 목책 옆으로 이정표 「영신봉 해발 1,651m/연하천대피소9.3km/벽소령대피소5.7km」가 있다.

 

 

바로 아래로는 세석대피소와 세석평전, 그리고 한가로운 촛대봉 오름길이 바라보인다.

「잔돌평전」이라 하는 세석(細石)은 화개 땅의 영신봉과 산청땅의 촛대봉사이의 1,600m 고지대에 있는 평야지대이다.

이곳에 있는 수만그루의 철쭉이 되는 5월하순은 요염한 철쭉의 붉은 색과 등산객들의 오색 물결이 장관을 이루고 지리산은

온통 신열을 앓는다고 한다. 이곳 철쭉은 지리산 10경중 하나이기도 하다. 

철쭉의 아름다움과 함께 영신봉은 화개에서 제일 높은 산이며, 화개동천의 선경을 연출하며 주민의 젖줄이 되는 화개천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이미 이륙선생은 1463년「지리산기」에서,「시내는 영신사의 작은 샘으로부터 근원이 되어 신흥사 앞에 이르러는 이미 큰 시내가

되어 섬진강으로 흘러들어 간다.」고 밝혔다. 또 영신봉은 낙남정맥(落南正脈)의 시작점이다. 벽소령이 시발점이라 알려졌으나

산이 수계를 가른다는「산자분수령(山者分水嶺)」의 이론에 의하면 그렇다.

천왕봉에서 흐르는 물은 어떤 경우라도 낙동강 수계로 흐르고, 벽소령에서 흐르는 물도 언제나 섬진강수계로만 흐르게 된다.

그러나 영신봉에서 흐르는 물은 방향에 따라 섬진강으로도, 낙동강으로도 흘러간다.

러하니 경상도 서남부 일대의 산지를 포함하는 낙남정맥의 시발점은 영신봉이 되는 것이다.

낙남정맥은 지리산 영신봉에서 낙동강남쪽을 가로지르며 김해 분성산(360m)까지 약 300km에 이르는 산줄기로써

「영신봉~삼신봉~외삼신봉~태봉산~실봉산~와룡산~무선봉~봉대산~양전산~백운산~천황산~대곡산~무랼산~백운산~덕산~필두봉~용암산~

깃대봉~여항산~서북산~봉화산~광려산~대산~대곡산~무학산~천주산~정병산~대암산~용지봉~신어산~동신어산」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영신봉은 지리산 불교문화의 중요한 요람이자 삼신동의 제일 끝자리에 내려다보는 맏형같은 산이다.

영신봉은 화개 제1봉으로 성산(聖山)이자 주산(主山)이라 할 수 있다.

 

 

12:04, 세석대피소

영신봉을 내려서면 해발 1,545m에 위치한 세석대피소에 도착한다. 

바로 앞으로 펼쳐지는 세석평전...

세석평전은 각종 희귀한 식물들과 나무들이 자라고 있어 식물원을 연상케 한다.

그 중에서도 구상나무가 가장 눈길을 끈다. 반야봉주변 구상나무 군락지가 아니라도 지리산 곳곳에 산재해 있어 지리산을 대표할 수

있는 나무가 구상나무다. 구상나무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우리나라의 지리산, 한라산, 덕유산 등 높은 지역에서만 자라는 나무다.

세석고원은 신라 때 화랑도의 수련장으로 이용됐으나 6.25를 전후해서는 공산 빨치산의 근거지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평화의 땅으로 말끔한 모습의 대피소가 서있다.

세석고원의 철쭉꽃이 유별나게 많고 아름다운 것은「여진」이란 여인의 슬픈 넋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라는 전설이 있다.

먼 옛날 지리산에 가장 먼저 들어온 호야(乎也)라는 남자와 여진여인은 대성계곡에 보금자리를 열었다.

그들은 씨족사회의 모든 간섭으로 벗어나 지리산의 대자연속에서 인간적인 자유를 찾은 것... 이 한쌍의 남녀는 산채와 산과를

따먹으며 원앙새처럼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나 둘 사이에 자녀가 없는 것이 언제나 아쉬움으로 남았다.

어느 날 남편이 없는 사이 검정곰이 나타나 여진에게「세석평원에는 소원대로 아들딸을 낳게 해주는 음양수라는 신비의 샘이 있다.」

했다. 그 말을 들은 여진은 너무 기뻐 남편과 상의할 틈도 없이 단숨에 음양수 샘터로 찾아가 샘물을 실컷 마셨다.

그러나 곰과 사이가 좋지 못했던 호랑이가 곰과 여진이 주고받는 말을 엿듣고 지리산 신령님께 고해 바쳤다.

지리산 신령은 음양수의 신비를 인간에게 발설한 것에 크게 노하여 곰을 토굴 속에 감금하였고,

호랑이에게 백수의 왕으로 군림하도록 특별 배려를 했다.

또 음양수 샘물을 훔쳐 마신 여진에게는 무거운 벌을 내려 평생 잔돌밭에서 혼자 외로이 철쭉을 가꾸게 하였다.

그날부터 여진은 뜻하지 않았던 스스로의 불행한 운명을 저주하며 세석평원에서 날이면 날마다 손발이 닳도록 꽃밭을 가꾸어 철쭉은

무럭무럭 자라서 아름다운 꽃이 피고 지게 되었다.

여진의 애처로운 모습을 닮아 유별나게 청초하게 아름답고, 또 여진의 슬픈 넋이 꽃잎마다 서려있어 애련하게 피고 진다는 것이다.

또, 여진여인은 밤마다 촛대봉 정상에서 촛불을 켜놓고 천왕봉의 산신령을 향하여 죄를 빌다가 그대로 돌이 되었는데,

촛대봉의 앉은 바위가 바로 가련한 여진의 굳어진 모습이란 전설이다. 

세석고원에선 지난 72년부터 매년 6월 첫째주 주말에 철쭉제를 열어왔다. 진주산악회가 주최해 왔던 이 산상축제는 전국 산악인들의

큰 잔치로 자리를 잡았으나 철쭉밭의 훼손 등을 염려하여 88년까지 5년 동안 중단을 했다.

이 기간에는 공식행사는 중단한 채 진주산악회원들만이 세석고원에 올라 산신제를 모셔 왔다.

철쭉제가 중단된 5년동안 철쭉밭이 거의 원상복구가 되었다.

89년6월3일 18회 철쭉제는 5년만에 부활시키고, 축제도 자연보호경진대회로 성격을 바꾸어「지리산 제모습 찾기」운동을 벌였다.

 

 

세석에서 좌측으로 내려서면「한신폭포~가내소폭소~첫나들이폭포」로 이어지는 한신계곡을 거쳐 백무동으로 내려서고

우측으로는 거림이나 의신으로 내려서게 된다.

대피소에서 잠시 머물 틈도 없이 의신방향으로 발길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내려선다.

 

 

대피소에서 500m 정도를 내려서면 이정표 「세석대피소0.5km/거림5.5km/의신마을8.8km」가 있는 거림 갈림길을 지난다.(12:11)

거림길을 버리고 의신마을 방향으로 내려선다.

 

 

다시 내려서면 이정표「음양수1,450m/세석대피소1.2km/쌍계사15.3km/청학동8.8km/의신7.9km」가 있는 음양수에 이른다.(12:21)

 

 

음양수(陰陽水)..

남부능선으로 길목에서 갈증을 달래주는 음양수는 사랑하는 남녀의 애틋한 전설이 전해진다.

불교에서 인간으로 태어남은 윤회설에 의한 하늘의 뜻이며 하늘의 뜻을 어기고 인간 뜻대로 아기를 갖는 행위는 죄.

그리고 그 천기를 누설했기에 가혹한 천벌을 받는다는 내용의 전설이다.

이곳 샘물을 마시면,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전설의 샘으로 그 이유만으로도 은밀히 불임 여성들이 찾는 샘이 음양수이기도 하다.

손가락만한 두개의 구멍에서 따로 따로 샘솟아 큰 바위 아래 돌 웅덩이에서 하나로 합치는 샘물로써 두줄기 샘물이 하나로 합쳐져

음양수라고 부른다.

돌 웅덩이를 넘쳐흘러 작은 실개울을 이루고 그 실개울이 흘러 오랜 세월동안 깎아 빚은 지리산에서 가장 길고 깊은 계곡

대성골의 발원지인 바로 음양수이다.

세석평전 직전 고사목지대 양지바른 바위숲...

그리고 음양수 위쪽 너른 바위엔 곱게 쌓인 돌제단....

예전에 화전민들이 십여 가구 쯤 살았던 흔적인 돌절구가 화전민 마을이었음을 뒷밭침해 준다.

책상만한 바위에 원통형의 구멍을 파서 절구로 이용하였고 사람이 살았고 농사를 지었다는 구체적인 증거이다.

전설적인 여성 빨치산 김점분과 여성빨치산들이 생을 마감한 음양수 주변....

1953년 여름, 토벌대에 쫒긴 전설적인 여성 빨치산 김점분과 15명의 여성 빨치산들은 음양수에서 포위되어 더 피할 곳이 없자

모두 권총으로 자결하였다.

이어 1952.1.17 토벌대와 미군 합동군이 대성골 빨치산을 공격하자 대성리 마을 뒤에 수많은 시신들이 흩어지고

3일 동안 대성골 일대에는 피가 흘렀다. 음양수는 반란의 역사 격전지였던 곳 중 하나이다.

여성 빨치산들은 왜 자살을 택했을까?  6.25 당시 정절을 지키려 산속으로 피신한 처녀들은 정절을 유린당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선택한 당시의 유교관념이었을 것이다.

 

 

음양수를 지나 부드럽게 내려서면 이정표「세석2.2km/삼신봉5.3km/의신6.9km」가 있는 의신갈림길에서(12:35) 삼신봉으로 향한다.

 

 

능선을 따라 올라서면 능선분기봉인 1214봉을 지나는데 이정표「세석대피소2.7km/쌍계사13.8km/청학동7.3km」 옆으로 공터가 있고

몇몇 사람들이 앉아 식사를 하고 있다.(12:42)

 

 

잠시 내려서 석문을 지나고(12:44)

 

 

다시 조망이 확 트이는 능선을 지난다.

 

 

이정표「세석대피소3.9km/쌍계사12.6km/청학동6.1km」에서(13:16)

 

 

5분여 오르면 능선봉에 이정표「세석대피소4.4km/쌍계사12.1km/청학동5.6km」와 「긴급재난비상용 이동전화중계기」가 있는

1278봉에 오르게 된다.(13:21)

 

 

이후에는 조망이 트이는 능선길이 계속되고

 

 

산불이 발생하였는지 고사목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봉우리를 지나면

 

 

바로 앞에 산죽밭길 사이로 삼신봉이 바라보인다.

 

 

고사목 군락지의 산죽을 헤치고 나서면 암봉인 삼신봉 바로 밑에 검은 대리석의 추모비가 있다.(14:20)

「追慕碑/山이좋아 山을찾아 山이좋아 山에올라 山이좋아 山에누워 森羅萬象 벗을삼네 /

故 水産硏究官 魯雄님 靈前에/國立水産振興院山岳會」라 쓰여 있다.

산에 오르면서 가끔 추모비를 대하면 산이 좋아 산을 찾다가 먼저 가신 님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찡해져 오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14:22, 삼신봉

암봉을 오르면 바로 사방이 확 트이는 삼신봉 정상이다.

삼신봉(三神峯)은 지리산 주능선의 전망대로서 참다운 가치를 가질 뿐 아니라 악양으로 흘러내린 형제봉 능선과 멀리 남해 바다의

일망무제, 탁 트인 전경을 선사해준다.

특히, 인적드문 비경의 남부능선 한가운데에 우뚝 솟아 동으로는 묵계치를, 서쪽으로 상불재, 남으로는 청학동을,

북쪽으로는 수곡재와 세석을 이어주는 사통팔달 요충지로서의 역할을 한다.

 

 

삼신봉 특히 외삼신봉을 기점으로 다양한 등산로가 열려 있는데 우선 남부능선코스가 대표적이며

「청학동~삼신봉~상불재~청학동」의 순환코스,「삼신봉∼상불재∼불일폭포」,「삼신봉∼거림골」등이 그것이다.

 

 

지리산은 예로부터 三神山중의 하나로 불려왔다. 그 삼신산 중의 하나인 지리산에 삼신봉이 있음은 무엇을 의미함인가.

더욱이 그 지리산에 신을 상징하는 "神" 자가 붙여진 봉우리가 셋이 있는데 그것도 남북으로 삼각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은 무언가

의미심장한 그 무엇이 있을 것이라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게 한다.

내삼신봉, 외삼신봉, 그리고 세석고원 서쪽의 영신봉이 그것이다.

이들 세 개 봉우리 주변을 중심으로 예로부터 전해져오는 이상향, 즉 청학동의 유래를 우리는 눈여겨보아야 할 문제이다.

이는 현재 진정한 청학동임을 자처하며 촌락을 형성하고 있는 청암면 묵계리 청학동이 바로 삼신봉 3km 아래 위치해 있는 사실과

천년여전 이상향을 찾아 지리산으로 들어갔다는「고운 최치원」선생의 입산자취가 유난히 이 일대, 쌍계사와 화개동천 등지에서 많이

보이는 사실도 이러한 느낌을 갖게 하는 부분이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이상향을 찾아 헤매면서 유독 이 일대를 중심으로 입산, 은거했다는 점도

그와 무관치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청학동 마을에서 삼신봉을 바라보면 왼쪽부터 쇠통바위, 가운데는 내삼신봉,

오른쪽이 외삼신봉으로 세 개의 봉우리가 눈에 들어온다.

이중 내삼신봉이 해발 1354m로 가장 높지만 통칭 삼신봉은 이보다 해발이 낮은 1284m의 외삼신봉을 대표해서 부른다.

 

 

세석에서 10km 남쪽으로 뻗어내린 삼신봉을 기점으로 해 남부능선코스는「내삼신봉∼상불재」를 거쳐 멀리 형제봉까지 이어지는데

이는 남부능선 전체 구간으로 세석에서 1백리에 가까운 장대한 능선으로 주릉에 버금간다.

노고단에서부터 북쪽에 위치한 천왕봉에 이르기까지 들쭉날쭉하며 웅장하게 솟구친 지리산 연봉이 한눈에 들어오고,

북동쪽으로 가야산이 멀리 보이고 그 오른편 앞쪽으로는 황매산이 보인다. 남서쪽으로는 삼신봉에서 뻗어나간 지리산 남부능선이

가깝게 건너 보이고 그 뒤로 호남정맥의 맹주인 백운산이 우뚝하게 솟아 보인다.

 

 

14:48, 삼신산정(1,354.7m)

정상을 내려서면 이정표 「청학동 2.5km, 세석대피소 7.5km, 쌍계사 8.9km」에서 좌로는 삿갓재(갓거리재)를 지나

외삼신봉~묵계치로 이어지는 능선이고 쌍계사 방면으로 아기자기한 능선길을 따라가면 부드러운 오르막을 따르다가

파른 오르막 능선을 짧게 오르고 암릉을 우회하기 위해 왼쪽 사면을 서너 차례 오르내리며 암벽과 암벽사이로 길이 나있는

오르막 석문을 통과하면 조망이 확 트이는 암봉인 내삼신봉이다.

 

 

정상에는 1992.6.7 세웠다는 「三神山頂/1,354.7m」표지석과,

 

 

삼각점(운봉27/1991복구)이 있으며

 

 

멀리 천왕에 이르는 지리산 주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가야할 길....

 

 

 

삼신산정에서 암릉을 따르면

 

 

로프가 설치된 암벽사이를 지나 내려서야 한다.

 

 

멀리 쌍계사로 이어지는 계곡...

 

 

능선길로 접어들어 10분 정도를 지나 완만한 봉우리를 지나면 임진왜란 때 송정 하수일 선생이 이곳에서 피난을 했다고 하여

「송정굴」이라 불리며 동서로 관통되어 있고 길이 20여m, 폭 10여m, 높이 1.5~2m 정도의 널찍한 바위굴이 있다.

 

 

곧바로 암봉(1,338m)을 왼쪽으로 우회하여 다시 암봉을 오른쪽으로 우회하여 안부를 지나 잡목과 산죽에 가려서 전망이 없는

1,268m봉을 넘어선다.

 

 

이정표 「쌍계사6.5km/상불재2.5km/세석대피소10.0km/삼신봉2.5km」를 지나(15:23)

 

 

「쇠통바위」라고 불리는 암봉(1,271m)을 만난다.(15:25)

 

 

열쇠구멍처럼 바위굴이 관통되어 있는 이 거대한 바위의 모습이 쇠통(자물통)처럼 생겼다고 하여「쇠통바위」라고 한다.

청학동의 학동마을에 있는 열쇠모양의 바위로 이 「쇠통바위」를 열면 천지가 개벽하고 새로운 천국이 열린다고 한다.

쇠통바위에는 기암이 얹혀있고, 청학동 일대가 훤히 내려다보여 전망이 아주 좋다.

 

 

예전에 오른 기억이 있는 「쇠통바위」라서 그냥 지나쳐 이어지는 암릉을 오른쪽으로 우회하며 길을 계속 재촉한다.

헬기장(공터)인 1,300m봉에「삼신봉3.2km/쌍계사5.8km/세석대피소10.7km」이정표를 지난다.(15:41)

 

 

산죽군락을 이루고 있는 내리막 능선길을 지나 능선분기점(1,162m봉)의 갈림길에 도착하니 상불재로 내려가는 동남쪽 능선길에는

「등산로 아님」표지가 설치되어 있다.

 

 

쌍계사로 가는 서남쪽 방향의 내리막 지능선길로 들어서 조금 내려가면 「쌍계사4.9km/삼신봉 4.1km/삼성궁2.3km」이정표가 서있다.

이정표에 어렴풋이 누군가가 상불재라고 써 놓았다.(16:00)

 

 

상불재에서 불일폭포 방향으로 지루한 내리막길은 너덜길로써 속도를 내기도 힘들고 벌써 어둠이 내릴 듯이 컴컴해진다.

너덜길을 내려서면 좌측의 계곡으로는 단풍이 붉게 물들어 아름답다.

 

 

이정표「쌍계사4.1km/삼신봉 4.8km」을 지나 잠시 부드러운 내리막길이 이어진다.(16:21)

 

 

계속하여 내리막길은 계속되고 불일폭포 갈림길에 들어서면 나무로 만든 출입문이 설치되어 있다.(16:53)

 

 

바로 옆「불일폭포0.3km/삼신봉6.9km/쌍계사2.1km」이정표가 있다.

 

 

다시 내려서면 불일산장에 이르는데 문을 닫았는지 조용하기만 하고 초라한 흙집에「鳳鳴山房」이하고 쓰인 푯말이 있다.(16:55)

 

 

다 도착하였는가 싶었는데 아직도 끝이 없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고 내려서는 길목에

「환학대」가 표지와 이정표「쌍계사1.2km/세석대피소15.3km/불일폭포1.2km」가 있다.(17:07) 

「환학대」는 신라 말기의 학자인 고운(孤雲) 최치원선생이 속세를 떠나 이상향인 청학동을 찾아 다닐 때

이곳 환학대에서 청학동을 찾아 학을 불러 타고 다녔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바위이다. 

쌍계사에는 통일신라시대 당나라의 범패(불교음악의 일종)를 신라로 도입하여 대중화시킨 승려 진감선사를 기리는

진감선사대공탑비(국보제47호)가 있는데 환학대에서 그 비문을 지었다 한다. 

 

 

빠른 걸음으로 내려서 쌍계사 경내에 들어선다.(17:21)

신라 성덕왕 21년(722년)에 대비(大悲) 및 삼법(三法) 두 화상이 당나라에서 육조(六曹) 스님의 정상(頂相)을 모시고 와서

「지리산 곡설리 갈화처에 봉안하라」는 꿈의 계시를 받고 범의 인도를 받아 이곳에 절을 지어 옥천사(玉泉寺)라 하고 조사를

봉안하였다 한다. 

 

 

이후 문성왕 2년(840년) 진감선사가 중창하여 대가람을 이루었으며, 정강왕 때 쌍계사라는 이름을 얻었다.

중국 유학에서 돌아온 진감선사는 차의 종자를 가지고 와 이곳 지리산 주변에 심고 대가람으로 중창하니

뒤에 정강왕이 선사의 도풍을 앙모하여 「쌍계사」라는 사명을 내리었다. 

그 후 임진왜란 때 크게 소실되었으며, 인조 10년, 벽암스님이 중건한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경남 일원 사찰을 총람하는 조계종의 사찰로 25개 본사 중의 하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쌍계사로 들어서기 전 나무장승과 큰 바위 두개가 시선을 끄는데, 각각 쌍계(雙溪)와 석문(石門)이라 새겨져 있다.

이는 고운 최치원 선생이 지팡이 끝으로 썼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삼신산 쌍계사」라는 현액이 걸려 있는 화려한 다포집인 일주문을 지나면 곧바로 문수․보현을  모신 맞배집 금강문이 나온다.

일주문의 현판 「삼신산 쌍계사」,「선종 대가람」이라는 글씨는 해강 김규진의 것으로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대웅전 옆으로 한적히 자리잡고 있는 부도비가 하나 있는데, 이것이 바로 진감선사 부도비(국보 제47호)이다.

이 부도비는 고운 최치원 선생이 직접 글을 짓고 써, 문장을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로 인정되고 있다.

 

 

쌍계사를 지나 400여m를 내려오면 다리를 건너 공용주차장이 나온다.(17:35)

선착대는 이미 도착하였고 후미만 남아있다.

20여분 후에 모두 다 도착하였다.

 

 

바로 아래 온천모텔사우나에서 목욕과 뒤풀이를 하였다.